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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의 등불』(2001)에 나타난 천의무봉의 경지
김우연
1.
백수(白水) 정완영 선생님은 1919년 경상북도 김천시(당시 금릉군) 봉산면 예지동 65번지에서 태어나시어 약 80년 동안 시조를 써 오시다가(36세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서만 60여 년) 2016년 8월 27일 오후 3시에 98세로 돌아가셨다. 영남시조문학회 창립 회원이시며, 3대 회장(1970~1975)을 역임하셨으며, 영남시조문학회에서 제정한 1회 낙강문학상을 2014년 12월에 수상하셨다. 고문님의 타계에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삼가 애도를 표하며 아픔 마음을 안고서 선생님의 작품 세계의 한 단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선생님이 80년을 두고 쓰신 시집 중에서 특별히『이승의 등불』(2001)을 중심으로 선생님의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어느 시집, 어느 작품이든 선생님의 작품의 격조 높은 숨결이 없겠는가마는 특히 죽음을 관조하시면서 쓰신 작품들은 생사의 경지를 합일 내지 초월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여 노년의 선생님의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시 작품 전체를 살펴본 것으로는 박영교 시인이『낙강 41집』(2008)에「정완영(鄭椀永) 론- 완숙미(完熟美)와 발전」에서 살핀 바가 있다.
2001년 영남시조문학회 총회 때 백수(白水) 정완영 선생님께서 시집『이승의 등불』을 가지고 오시어 회원들에게 서명을 하시면서 나눠주셨다.
그리고 “이 시집은 나의 마지막 시집이라는 마음으로 펴낸 것이다. 왜냐하면 5년에 한 번씩 시집을 낸다고 하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몰라”라고 하시어 회원들이 한동한 숙연하였다. 그러고도 15년을 더 사시고 시집도 더 내시었으니 당신의 호 백수(白水)처럼 백수(白壽)를 한 셈이다. 선생님은 현대시조사에서 전설이요, 자랑이요, 큰 스승님이셨다. 특히 2,000여 수의 작품을 다 암송하시며(보통 한 번 강의에 30편 정도) 밤새도록 강의를 하시어도 끝없이 암송하시는 모습에 가히 인간으로서 닿을 수 없는 경지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시인은 원고 청탁 오기 전에 미리 몇 편 정도는 준비해 두어야 하신다면서 봉투에 써 둔 작품을 꺼내어 보여주시기도 하셨다.
영남시조문학회에서 백수 선생님을 모시고 방담(放談)을 한 것으로 2001년 총회와 2008년 총회 때에 하신 말씀을 기록할 수 있는 데까지 기록한 바 있다. 선생님 스스로 방담(放談)이라 하셨지만 사실은 후배 시인들에게 채찍을 가하는 명강의였다. 선생님은 시 이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정주 시인, 김남조, 유치환, 이영도 시인 등 이밖에도 많은 시인들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아니한 이야기를 말씀해 주셨다. 또 한 번은 “이 세상에 제일 좋은 향기를 풍기는 꽃이 무슨 꽃인지 아시나요?”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대추꽃이지요. 대추나무꽃은 향기가 없는 듯이 사방으로 퍼지기 때문이지요”라고 하셨다. 시를 쓴다는 것도 거창하게 목소리를 높일 일이 아니라 독자들의 가슴에 젖어들어 감동을 주는 작품을 써야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였다.
1999년에 나래 문학회원들과 방담하신 것을『나래61집』(1999, 상반기)에 수록하였는데『이승의 등불』(2001) 발간을 앞둔 시점으로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도 그 당시에 언급하셨다.『나래 61집』(1999, 상반기)의 글도 많이 참고가 되었다. 아울러 2008년 총회 때도 『이승의 등불』에 실린 작품을 언급하신 것으로 보아 이 시집의 중요성을 더욱 느낀 바가 있다.
서산대사는 입적하시기 직전에 불전에 분향한 다음 스스로 붓을 들고 조실에 들어가 자화상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팔십년전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러니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후에는 내가 너로다.
‘나’란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의 실체를 드러낸 말이며, 후일 다른 이들이 대사의 자화상을 보면서 육신을 실체라고 여기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누군가 달을 가리키면 그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라 달을 바라보는 지혜를 가져라는 말이다. 결국 참나(眞我)의 밝은 성품을 바로 보라는 말이다.
백수 정완영 선생님의『이승의 등불』(2001)에는 머리말 대신에 시조「이승의 등불」을 실었다.
내가 죽어 저승엘 가면 이승이 고향 아닐까
너랑 나눈 한잔 차 이야기 오소소 추운 낙엽
가을밤 잘 익은 등불이 모두 꿈길에 밟히겠네
현재 발표되고 있는 시조들의 배행법은 너무나 다양하여 일반 독자들은 시조인지 자유시인지 구별을 못할 정도로 다양하다. 그러나『이승의 등불』에서는 모두 장별배행이다. 이호우 선생님의 시조가 3장 6구의 구별배행이 특징이라면 백수 선생님은 장별배행이 특징이다.
저승이란 이쪽에서 바라본 것이요 이승이란 저승에서 바라보면 또한 저승이 되는 것이니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 본향은 고향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시에는 ‘고향’, ‘어머니’가 중요한 시어로 나타난다.
물론 저 고승 서산대사님의 경지와 백수 정완영 선생님의 시와 죽음의 경지가 수도승과 같을 수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80 고개에 올라서면 죽음에 대해서는 범인들도 나름대로의 경지에 드는 나이라 볼 수 있다. 현대시조사에서 보더라도 박재삼님은 “가람과 노산(鷺山)을 초창기, 초정(草汀)고 호우(鎬雨)를 계승기, 백수(白水)를 완성기”라고 보았다. 또한『이승의 등불』은 백수(白水) 선생님의 시집 중에서도 완숙미(完熟美)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죽음과 삶을 직시하여 시적 형상화를 통하여 깨달음과 감동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2.
이정환 시인님은 대구시조시인협회 카페에 올린 글에서 ‘현대시조 100년간 좋은 작품 1편’으로 ‘시암의 봄’을 들고 있다. 이 작품은『이승의 등불』중에서 제일 앞에 놓인 작품이다.
내가 사는 초초시암(艸艸詩庵)은 감나무가 일곱 그루
글썽 글썽 여린 속잎이 청이 속눈물이라면
햇살은 공양미 삼백 석 지천으로 쏟아진다.
옷고름 풀어 논 강물 열두 대문 열고 선 산
세월은 뺑덕어미라 날 속이고 달아나고
심봉사 지팡이 더듬듯 더듬더듬 봄이 또 온다.
-「시암(詩庵)의 봄」전문
이정환님은 “심청전이라는 설화의 서사구조를 작품에 도입한 보기 드문 경우가「시암의 봄」라는 작품이다. 주변 정황의 동원을 통하여 삶이 가져다주는 깊은 뜻을 시종 긴장감 있는 율조로 그리고 있다.(중략)
「시암의 봄」은 이처럼 삶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시조문학사에서 특별하게 기록될 작품이라고 본다.” 라고 하였다.
“초초시암에 감나무가 일곱 그루”가 있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쓴 건데, 딸 아이 집에 집 하나 지어 살고 있을 때, 그 집에 감나무가 일곱 그루 있었어요. 나대로는 거기서 명편이 몇 나왔는데”라고 하셨다.
백수(白水) 선생님께서는 “시는 쉬우면서 감동적인 거”라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것은 그냥 쉽게 쓴 시가 아니라 “시도 오뇌의 용광로를 거쳐 나와야 돼요. 기교를 넘어선 ‘고졸(古拙)’ 경지로 들어가야 좋은 시가 나와요.”라고 하셨다. 「시암의 봄」은 누구나 읽어도 쉽게 이해가 가며, 그 해석의 깊이는 독자의 보는 눈에 따라 그 깊이가 한없는 것이다. 흔히 시비를 새우거나 대표작을 뽑을 때 그 시인의 등단작을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백수(白水) 선생의 대표시를 뽑을 때는 익을 대로 익어서 나온『이승의 등불』에 있는 시들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시조라면서 백수(白水) 선생 개인적으로 50년 전 초기 작품을 든다면 우리 시인들은 개인적으로 시적 발전을 무시하는 오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시는 평생 시인으로만 살아오신 백수(白水) 선생님께서 어릴 때부터 감성이 예민하여 눈물이 많으셨는데 첫째 수에서는 감나무 잎이 피어나는 모습을 심청의 눈물이라고 본 것은 대단히 독창적이다. 시만 쓰는 시인이 배부를 리 있으랴. 심지어 조카들의 결혼식에도 돈이 없어 참석은 못했지만 형님은 내 자녀 결혼 시킬 때 와 주시더라고 2001년 방담 시에 말씀하셨다. “햇살은 공양미 삼백 석 지천으로 쏟아진다”는 것은 심청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평생 시만 써 오시는 선생님의무한한 행복감과 자부심을 드러낸 것이다. 전업 작가들이 드물지만 시만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는 해방 후에 몇 명이나 있을까. 시만 써오시다가 ‘우희(又稀)’라는 80 세가 되니 세월이 흘렀음을 둘째 수에서는 노래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인답게 “심봉사 지팡이 더듬듯 더듬더듬 봄이 또 온다”라며 새봄을 맞이하는 설레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변함없이 젊음을 유지하시기에 98세로 돌아가시기까지 샘물이 솟듯이 시를 쓰셨다. 이 작품은 시인이나 일반인이나 마음이 늙지 않으면 감성이 영원히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또한 어렵게 쓰거나 기교만 부린다고 좋은 시가 될 수 없으며 그런 것을 넘어선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를 보인 작품이다. 이 시집에는 이런 주옥같은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늙어도 샘솟듯 솟아나는 시심은 백수(白水)라고 호를 스스로 지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아버님이 호를 지어주셨는데, 마당치 못해서, 내가 자호한 것이 백수(白水)야. 백수는 왜 백수냐 하면, 합하면 샘천(泉)자가 되고, 해자(白+水)한 것이 백수야. ‘나는 김천인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지.
또 다른 뜻으로는 샘의 이미지. 샘은 아무리 좋아도 삼 년을 길어먹지 않으면 폐정을 해야 돼. 못 써요. 물이 별 탈이 없어도 안 먹고 메워요. 육이오 동란으로 피난 갖다 오래 집을 비운 사람은 돌아와서는 반드시 샘을 메웠지요. 그러니까 샘은 길어내야지 샘물이 자꾸 솟아요. 그래야 샘이 되는 거지. 명색이 글이라고 쓰면서 조금 쓰고 안 나오면 낭패지. 죽는 날까지 요샛말로 이미지가 떠올라라 해서 샘으로 했던 거야.
세번째 뜻은 노자 도덕경에 보면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어.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것이 물과 같도다. 그 풀이를 보면 열여덟 가지 풀이가 있는데, 대충 이래요. 물이라는 것은 첫째 부드러운 것이다. 그리고 남의 때를 씻어줄지언정 때를 묻혀주지는 않는다. 덕이지. 모난데 두면 모나고 둥근데 두면 둥글어진다. 인내, 참는 것. 그리고 높은 데로 안 흐르고 꼭 낮은 데로 흐른다. 그 마지막에 보면 ‘큰 바다는 맨 밑자락에 가 앉았기 때문에 일 백 강의 왕이 됐다’고 했어. 즉 더운 물, 찬물 받아들이고, 탁한 물도 받고, 맑은 물도 받고, 그렇게 해서 그것에 물드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용해해서 자기 것으로 만든다. 남의 단점을 보고 자기를 개신하는 것으로 쓰고, 좋은 것은 본받고 뭐 이런 뜻이지. 그래서 백수로 자호한 거예요.
봄이 오는 것은 차츰 차츰 오는 것이 아니다. “더듬더듬 봄이 또 온다”는 행간에는 우리 인생에서도 봄을 맞이하기까지 많은 꽃샘추위도 이겨내야 하는 것을 의인화시켜서 표현한 것 등 시 전체가 온통 쉬우면서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동안 백수(白水) 선생님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백수 선생님께서 영남시조문학회 2001년 총회에 오시어 “하루는 비가 오고/ 또 하루는 눈이 오고/ 하루는 맑았다가 또 하루는 흐렸다가/ 진실로 이 한 봄 오기가 이대도록 더디나.”라고 읊으셨는데 인생의 봄, 영원히 시심(詩心)의 샘물이 솟아오르는 시인이였기에 ‘백수(白水)’라고 스스로 지은 호에 담긴 시에 대한 자부심과 애끓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김천(金泉)의 천(泉)자는 김천인임을 나타내는 약자로서 ‘백(白)’과 ‘수(水)’를 파자하여 호를 삼은 것은 김천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담겨 있다. 2005년 ‘白水 정완영 선생님 서각전 김천시 초대전’를 가졌다. 그때 자서(自敍)에서
우리가 더듬어 보면 이효석의 평창이 ‘메밀꽃 필 무렵’으로 기지개를 켰고, 춘천 ‘실례마을’이 ‘김유정’으로 각광을 받았는데, 청도가 일어서고, 경주가 꿈틀거리는데, 어쩌자고 우리 고장 김천(金泉)만이 모른 체 하고 있는가? 문화(文化)라는 이름으로 좀 숨막힐 때가 있다. 이제 내 세월이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시여만리장성독수사위(詩如萬里長城獨守四圍), 만리장성을 홀로 지키는 장수보다 어려운 것이 시인의 길 가리란다.
고향 김천에 대한 사랑은 문화인으로서의 자부심도 있지만 2008년 12월 20일 대구시 중구 종로2가 78번지 ‘대청마루식당’에서 영남시조문학회 총회 때 방담에서 “이제는 문화의 시대가 열린다. 지금까지는 경제시대이지만 앞으로 잘 살게 될수록 문화를 알아주는 시대가 열린다고 하시면서 뛰어난 한 사람이 그 지역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총회 며칠 전엔 2008년에 직지사 입구 오른 쪽에 ‘백수 문학관’을 개관하였는데 우리 시조시인들의 자랑이자 영남시조시인들의 자랑이다. 아울러 김천시민의 자랑이다. 국사 일연 스님이 개경을 떠나 군위 인각사로 오시니 전국의 승려들이 모여들었듯이 백수 문학관은 시조시인들의 성지라 할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강(江)과 하(河)의 차이점에 대해서 “강(江)은 그 발원을 알 수 있지만 하(河)는 한 종지만한 물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중국에는 하(河)가 있지만 우리는 강(江)밖에 없다.”고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시조를 암송하시는 모습이며 끝없이 새로운 작품이 샘솟는 분이었으니 가히 선생님이야말로 ‘시조의 하(河)’로서 유유히 흘러가는 모습을 아득히 바라만 볼 뿐이다.
3.
한 팔십 산 후에야 제주도에 건너가서
차 한잔 받아놓고 한 세월을 지켜봐라
찻잔 속 파도에 밀리는 섬 하나가 떠있을라.
물결로 둘렸으니 육대주(六大洲)도 다 섬이고
별 아래 혼자 서면 절도(絶島)아닌 사람 없네
수평선 멀다고 해도 속눈썹에 다 실려.
잘못된 세상살이 엎지른 물 견주지만
쏟아도 못 본다면 우리 꿈을 어쩔거나
저것봐 하늘이 쏟뜨린 저 바닷물, 저 유채꽃.
-「한 팔십 산 후에야」전문
백수 선생님께서는 대구, 대조, 비유 등을 자유자재로 하셨다. “우주도 한 알 모래에 다 들어갈 수 있고, 모래도 우주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다.
“백수 선생의 시조 작품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쉽게 읽히면서 다른 사람이 흉내는 낼 수 있을지언정 함부로 범접 못하는 그런 것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작품에 있어서 백수의 아류는 있어도 그의 작품성을 딛고 넘어설 수 있는 시인은 없다고 감히 말하는 저의(底意)가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한다.
이 작품은 첫째 수에서 제주도에 건너가서 마시는 찻잔 속에 ‘밀리는 섬’하나가 있음을 바라보라고 한다. 그것도 ‘한 팔십’ 산 후에야 보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떠있을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삶을 석가는 고해(苦海)라고 하셨듯이 선생님 역시 세상살이는 세파를 헤쳐나가는 과정임을 나타내신 것으로 사람의 한 평생의 삶의 걸음을 첫째 수 종장에 다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수 초장에서는 제주도에서 육대주(六大洲)로 점층이 되었으며 우리 지구도 하나의 섬에 지나지 않으며 우주에서 보면 한 점 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장에서는 비약이 일어나며 “별 아래 혼자 서면 절도(絶島)아닌 사람 없네”라고 우리는 모두 하나의 섬이라고 말하고 있다. 종장에서 “수평선 멀다고 해도 속눈썹에 다 실려.”라며 거대한 지구나 우주도 우리 인간의 마음에 비한다면 별 것 아니라는 것이다. 웅혼한 시상을 아주 쉬운 말로 표현하는 것이 누구나 흉내를 낼 수 없는 경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셋째 수에서는 물질위주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지혜를 밝혀주고 있다. 초장에서는 “잘못된 세상살이 엎지른 물 견주지만”이라며 세상이 잘못되었으며, 우리 사회가 잘못되었고, 이 나라가 잘못되었다고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이 국가나 사회를 위해서 한 일은 돌아보지 않고 사회가 잘못되어서 자기 인생을 망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특히 좋은 일자리가 부족하여 대학을 졸업하고도 고통을 받고 있는 젊은이들을 돌아보면 울분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이 사회를 묵묵히 희생하고 봉사하고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들이 있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불평을 하는 자는 끝없이 불평만 할 뿐이다. 중장에서는 “쏟아도 못 본다면 우리 꿈을 어쩔거나”라며 쏟아진 물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평등을 외치는 자는 남의 것을 빼앗아 더 가지겠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현실과 삶을 직시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본 것이다. ‘우리 꿈’이란 밝고 건강한 마음이며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고운 시심(詩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종장에서 “저것봐 하늘이 쏟뜨린 저 바닷물, 저 유채꽃.”이라며 유채꽃이 바다에 비치어 바다와 유채꽃밭이 하나가 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도 또한 알고 보면 하나임을 관조한 것이다. 선생님은 ‘한 팔십 산 후에야’야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며 누구나 가능하다고 보신 것이다.
섬과 관련한 작품으로는「섬-어차피 우리 목숨은 섬이다」,「떠내려가지 않는 섬」등이 있다. 고독한 시인으로 살아가는 선생님의 모습과 함께 고독이 진주알을 낳은 원천임을 알 수 있다.
2008년 12월 20일 영남시조문학회 총회에 참석하시어 방담(放談) 중에 선생님은 오래 사셔야 합니다. 백수까지 사셔야 해요라고 누군가가 말씀드렸다.
“시 때문에 여명을 살고 있어.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살아가. 저녁에는 떡만 약간 기운이 점점 없어지지”
라고 하실 때에 모두 숙연하였다.
이제 ‘구질(九秩)’이라는 아흔을 맞이한 노 시인의 유언이라도 듣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그래야 시가 나와.”
라고 하실 때 모두 웃음이 나왔으나 억지로 참는 분위기가 되었다. 역시 백수(白水) 선생님께서는 시로써 양식을 삼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유채꽃이 바다에 들면 한 바다가 꽃밭되고
바닷물이 꽃밭에 오르면 유채밭도 바다일세
이 저승 따로 없어라 꽃과 물이 한 세상.
-「꽃과 바다
-제주의 봄」전문
초장과 중장에서 ‘유채꽃이’와 ‘바닷물이’, ‘바다에 들면’과 ‘꽃밭에 오르면’, ‘한 바다가 꽃밭되고’와 ‘유채밭도 바다일세’가 대구를 이루고 있다. 그것도 ‘들면’과 ‘오르면’에서 동일 언어를 회피하고, ‘꽃밭되고’와 ‘바다일세’에서 ‘~되고’와 ‘~일세’에 변화를 주고 있다. 한 글자라도 갈고 다듬어 세심히 쓰신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선생님께서 매우 강조하시는 시 작법이다. 그래야 “시조는 가락이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시조가 정형시임을 망각하고 일부러 음악성을 파괴하여 구의 구분도 무시하는 시인들도 있다. 읽기 위한 시조라는 이념이 정형시라는 대명제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시조를 쓰려면 형식을 먼저 알아야 한다. 자유시와 시조를 비교하시면서 선생님께서는 “자유시는 나무를 그린다면 잎과 가지를 세세하게 그리는 것이라면 시조는 잎이나 작은 가지는 다 버리고 굵직한 것만 살려야 한다. 할 말을 다하면 시가 죽는다. 행간에 의미를 실어야 시가 된다. 여백의 미를 알아야 한다.”라고 강조하셨다. 종장에서는 “이 저승 따로 없어라 꽃과 물이 한 세상.”이라며 ‘꽃과 물이 한 세상’이 된 것처럼 이승과 저승이 따로 없다는 것을 쉽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만 80 고개에 오르기 전까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4.
저토록 푸른 하늘이 어디에다 가마(窯) 걸고
이토록 붉은 열매를 주저리로 구워 내렸나
여든 해 이 땅에 살아도 가마터는 나는 몰라.
-「감을 따 내리며」전문
2001년 이 시집을 전해주시면서 회원들 앞에서 실감나게 암송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개인적으로 백수 선생님의 단시조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는다. 시조를 배우는 이들에게 전범(典範)이 될 작품이라고 본다. “글자는 놓여질 자리에 놓여져야 해.”라고 평소에 말씀하셨다. 초장과 중장에서 ‘저토록’과 ‘이토록’, ‘푸른 하늘’과 ‘붉은 열매’ 가 대구와 대조를 이루면서 선명한 이미지와 함께 자연스럽게 운율을 살리고 있다. 종장에서 ‘가마터’란 생명의 근원을 말한다. 그런데 “여든 해 이 땅에 살아도 가마터는 나는 몰라.”라며 우주의 근원적인 고향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감이라는 제재를 통하여 우주적 질문을 이 간결한 단시조를 통하여 형상화한 것으로 매우 웅혼한 작품이다.
“나뭇잎 물들기 전에 바람 먼저 물이 들고// 낙엽이 지기 전에 하늘이 먼저 떨어진다// 가을은 천하추(天下秋)라거니, 다 거두어 어딜가나”(「일귀하처」전문)도 우주적 근원을 밝히고 싶은 앞의「감을 따 내리며」와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이다. 초장에서 “나뭇잎 물들기 전에 바람 먼저 물이 들고”에서 ‘바람 먼저 물이 들고’라며 우리는 가을에 나뭇잎 물든 것을 보지만 백수(白水) 선생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물든 것을 보니 이것이 범부들의 눈과 다른 것이다. “큰 것은 작게, 작은 것은 크게,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게” 표현을 자유자재로 한 것이다.
생의 근원에 대한 질문, 우주적 근원에 대한 질문을 인류들이 질문을 던져왔지만 그에 대한 성현들의 대답들마저 모든 사람들에게 시원한 답변은 되지 못한다. 나이가 들고, 병이 들면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일 것이다. 그럴 때 선생님께서도 낙엽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봄에는 실눈 뜨고 여름에는 파도 타고
가을은 곱다 못해 단물까지 실렸던 나
이제는 흙으로 돌아가 묻힐 낙엽 너였구나
-「낙엽을 보며」전문
나뭇잎의 일생이 봄에는 잎이 돋고 여름엔 무성한 잎이었다가 가을에는 아름답게 단풍이 든다. 이런 것은 평범한 사람들도 다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눈 뜨고’, 무성한 잎을 ‘파도 타고’라고 표현한 것은 대단히 독창적인 표현이다. 나뭇잎이 낙엽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노래하고 있으니 전체가 상징으로 처리된 것이다. 특히 “여름에는 파도 타고”라는 표현을 통해 볼 때 우리들의 삶 역시 젊은 시절에는 고난을 헤쳐 나가야 하는 시절임을 표현한 것이다. 낙엽을 보더라도 아름다움을 찬탄하거나 허무에 빠지지 않고 인간의 일생을 노래하는 것은 선생님께서 “시조는 자유시와 달라서 잎이나 잔가지는 다 쳐내야 한다.”라는 창작법을 작품마다 보이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고향을 떠올리게 된다. 생명의 본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장아장 걷는 것이 동불(童佛)인줄 알던 내가
휘청휘청 걷는 것이 노불(老佛)인줄 알던 내가
이제는 지팡이 하나로 무불(無佛)의 길 찾아 갑니다.
-「무불행(無佛行)」전문
2008년 12월 영남시조문학회 총회 때 선생님과의 방담(放談) 시간에 “시란 모든 것이 시가 되지요.”, “시 안 될 것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어. 누구 손에 달린 거지. 오브제가 누가 요리하는 가에 달렸어.”, “보세요”라고 하시면서 지팡이를 들어 보이셨다. 그 지팡이는 런던에서 사신 것이라고 하셨다. 각국 여행을 하시 때마다 지팡이를 꼭꼭 사시는데 지팡이를 잃어버린 것도 있지만 아직도 여러 개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무불행(無佛行)」을 암송하셨다. 암송하실 때 ‘아장아장’하실 때는 어린아이처럼 두 손을 흔드시면서 실감나게 암송하셨다. ‘휘청휘청’하실 때는 노인의 모습처럼 힘이 빠진 노인의 모습처럼 암송하셨다. 종장의 “무불(無佛)의 길 찾아 갑니다.”는 “이제 내가 부처가 되겠다는 자존심을 나타낸 말이지요.”라고 하셨다. ‘무불(無佛)’이란 ‘나 말고 따로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쓰신 것이니 저 선사들의 화두에 해당하는 말이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이 별개가 아니라고 앞의 시들에서 살펴보았듯이 80대 노 시인은 그런 경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만심은 금물이다. 도로 지옥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오기를 나타낸 것이지요.”라고 혼잣말로 겸손함을 나타내시었다. 정말 선생님의 정신의 경지를 높고 깊기만 할 뿐이다. 선생님께 누군가가 ‘천부적인 시인’이라고 칭찬을 하자 선생님께서는 “갱유분서하고 싶어요. 시인은 작품에 만족하면 안 돼요. 자기 작품에 대해서 끝없이 불만을 가져야 되고.”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저는 글 쓰는 재주밖에 없어요. 다른 것은 할 줄 모르는 백치에요.”라고 하셨다.
5.
우리 인간은 아무리 높은 정신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배우자의 죽음 앞에는 그 슬픔이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있을 때는 빈 항아리 같던 사람
가고 나니 삼월 하늘 제기(祭器)처럼 적막하다
봄은 왜 오지도 않고, 겨울 가지도 않네.
- 「당신은 가고」두 수의 연작시 중 둘째 수,「적막(寂寞) 하늘」전문
아내의 죽음으로 홀로 남은 자의 적막감을 노래하고 있다. 8년 넘게 병석에 계시던 아내를 생각하면서 쓰신 작품이 ‘민처기’라 한다. 『이승의 등불』에는 싣지 않은 작품이다. 읽어보면 왜 ‘민처기’라 한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다음 한 편은 할마이한데 쓴 건데, ‘민처기’라. 민망할 민(憫)자. 진실로 민망하거든, 불쌍하다 이 생각도 이젠 넘어섰고, 가엾다는 생각도 넘어섰고, 왜 사람의 목숨이 저렇게 죽어가야 되는가, 하는데 대한 민망함. 그래서 내가 늘 의식 있을 때 본인한테 그런 말을 했어. 뭘 못 잊어서 아직 못 죽는가. 볼 거 다 봤잖어? 지금 더 살아봤자, 볼 거 아무 것도 없어. 애닳아서 하는 소리가 그게 민망한 소리지. 이렇게 써 봤어요, 타불이지 만은.
금강산 멀다해도 풀코스 4박5일
수미산 어디 길래 80년도 모자랐나
높아라 오 척 단구여, 실낱같은 명줄이여
안 끊어 질려면 안 끊어져. (부인이) 8년째 저러고 있어. 그게 ‘민처기’라. “금강산 멀다해도 풀코스 4박5일 수미산 어디 길래” 이게 시조의 묘미지. 초장에서 중장으로 이어질 때 자꾸 토를 달면 시조가 안돼요. 끊을 때는 사정없이 끊어야 돼요. 시조의 맛은 응축과 단절, 비약, 정제, 절제 이런 것이 없으면 시조가 안돼요. “∼모자랐나”의 끊는 묘미와 또 종장의 감았다 푸는 것. 여기에 시조의 시적 묘미가 있는 거예요.
선생님께서는 또한 아내의 죽음뿐만 아니라 며느리의 죽음도 보게 되셨다.
쇠북처럼 무거운 몸 깃털처럼 잠든 아내
배꽃처럼 여리던 꿈 접고 누운 며늘아기
뻐꾸기 목 부러지겠네 저 산 무너지겠네.
-「봉분 앞에서」전문
아내와 며늘아기의 죽음 앞에 “뻐꾸기 목 부러지겠네 저 산 무너지겠네.”라며 시적 형상화를 통하여 산이 무너지는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뻐꾸기 목 부러지겠네”라는 표현은 백수(白水) 선생님만이 표현할 수 있는 표현이다.
셋째 아이가 올해 마흔 아홉 살인데, 작년 9월 22일날 며느리가 암으로 세상을 떴어요. 1년 8개월 동안,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돈만 탕진하고 결국 사람은 못 구했어요. 그런데 그 집에 가보면 정경이 참으로 가긍(可矜)해. 에미 없는 자식이 중3과 초등학교 5학년인데, 애비가 밥 끓여 먹이고…, 참 안됐지.
그래서 그 집은 비워놓고, 방 두 칸 놀리며 나는 지금 큰아이 집에 와 있어. 연립주택 23평인데, 방이 4칸 있어야 하는데, 방이 모자라. 저희 내외에다 아이들이 다 크니 별방 써야하고. 그래서 아들은 마루에, 손주는 대학 2년인데 저들 아랫집에 보내고, 그렇게 궁색한 삶을 보내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기특한 것은, 죽어가면서도 아침마다 점호하듯이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거야. 그래서 그걸 좀 더 광의로 해석해서 어머니의 목소리는 천지의 목소리고, 모든 사물에서 나오는 모음이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을 엮어 본 겁니다.
이런 슬픔의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끝이 없다.
6.
세상이 넓다해도 성지(聖地)는 한 곳 뿐이란가
눈물로 단청(丹靑) 올린 어머님의 적멸보궁(寂滅寶宮)
적막은 꽃으로 피고 바람 피리 부옵니다.
-「어머님 성지(聖地)」전문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불교의 성지이다. 어머님이 잠들어 계신 무덤이 가장 성스러운 장소라는 것이다. 시인에게 어머님은 바로 부처 자체라는 경지에서 바라본 것이다. “눈물로 단청(丹靑) 올린”이란 자식을 위해 흘리신 어머님의 눈물을 성스럽게 승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승과 저승의 길이 달라서 그 고독감이 극도에 달한 상태가 ‘적막’이다. 그래서 가슴 속으로 크게 울면서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것이 “바람 피리 부옵니다.”라는 것이다. ‘적막은 꽃으로 피고’란 말 속에는 어머님에 대한 사랑을 떠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님 생가 마을에 가면 생가 길목 도랑 건너편 밭에 ‘사모곡’ 작은 시비가 서 있다.
7.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 지구도 하늘일거야
우리마을 징검다리는 하늘나라 오작교이고
냇물에 엎드린 돌팍은 까막까치 머리일거야.
나는 강건너 마을 소를 치는 견우이고
순이는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직녀일거야
밤이면 은하수 이야기 사랑 이야기 흐를거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전문
동시조이다. 선생님은 동시조집『꽃가지를 흔들 듯이』(1979)와『엄마 목소리』(1998)를 펴내셨다.
“저는 동시조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초등학교학생 머리부터 고쳐야 하기 때문입다. 그래서 시조를 씁니다. 시는 쉬우면서도 철학이 있고 이데아가 있고 교훈이 있고 그림이 있어야 합니다.”
『이승의 등불』에는 7부, 총 115편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그중 6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에는 모두 동시조로 16편이다. 6부 이외에도「원추리꽃」,「패랭이꽃」등 곳곳에 동시조가 보인다.
8.
일찍이 섬이였기에 여의도(汝矣島)라 불리던 너
문명은 방황의 끝인가 실려오는 하중(荷重)인가
철새도 날 줄을 잊었고 물머리도 길 잃었다.
-「여의도」전문
선생님의 작품에 현실비판이나 문명 비판이 겉으로 드러난 작품은 드물다. 그런데 이 작품은 “문명은 방황의 끝인가”라고 직서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여의도는 섬이었지만 지금은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장에서 “철새도 날 줄을 잊었고 물머리도 길 잃었다.”며 비약하는 것이 백수 선생답다. 여의도는 단순한 종장을 끌어들이기 위한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여의도는 물론이고 “철새도 날 줄 잊었고”라며 생태계의 변화 또는 생태계 이상을 고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강물도 가다가 막혀서 “물머리도 길 잃었다”고 하였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자연을 훼손하여 왔던가. 개발이야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개인 또는 특정 세력의 목적을 위해서 개발되어서는 안 될 것이란 것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여든을 넘긴 노 시인의 안목에서도 현실의 모순이 보이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시인으로서 시적으로 형상화하여 제시할 때 감동이 더 커지는 것이다. 현실비판적인 것은 직서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면 시가 되지 못하고 구호가 되는 것이다. 한때 카프가 그랬다.
9.
반백 년 시업(詩業)이야 왕업(王業)일 수 없다지만
혼자서 이런 밤에 만리장성 지키는 것
외롭다 풀잎에 맺히는 이슬이여! 이 장야(長夜)여!
-「충청도 귀뚜리」4수 중 넷째 수
백수(白水) 선생님은 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신 분이다. 시만 쓰시며 평생을 살아오셨기 때문이다. 이 시는 “만리장성을 홀로 지키는 장수보다 어려운 것이 시인(詩人)의 길 가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종장에서 잠들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시인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시란 그저 쉽게 지어지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선생님은 2008년 방담에서 “시인은 이불을 덮고 자나? 하늘을 덮고 누워야지.”라고 하시며 그것은 “시인은 옹졸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말씀이라고 하셨다.
일찍이 바람 타고 나래 끝에 불붙은 새
대낮의 별빛을 물고 산을 넘고 강 건넜더니
이제는 옛 숲에 돌아와 하늘 한 장 덮고 잡니다.
-「숙조(宿鳥)」전문
초장에서는 젊었을 때 세속의 삶을 위해서 ‘불붙은 새’처럼 정신없이 날았다면, 중장에서는 ‘별빛을 물고’란 시(詩)을 위한 삶, 영원 추구의 삶을 뜻한다. 그래서 ‘산을 넘고 강 건넜더니’라며 순수를 향한 치열한 삶의 추구가 나타난다. 결국 종장에서는 “하늘 한 장 덮고 잡니다”라며 시인은 물욕을 떠나서 옹졸해서는 안 되며 시상은 웅혼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시인의 길은 자부심이 있어야 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어려운 길이기도 함을 말한 것이다. 시인은 시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백수(白水) 선생을 흠모는 할 수 있어도 그 삶을 흉내를 낼 수 없기에 선생님을 더욱 우러러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백수문학관’ 개관(2008.12.10) 이틀 전에 서귀포에 갔어요. 서귀포시에서 넓은 언덕에 시비 공원을 만들고 시비 14개를 세웠어요. 그 중에 살아 있는 시인으로는 섬을 기행하여 쓴 이생진(1929년생)과 저 두 사람입니다.
이날 박목월 아들 박동규교수도 왔는데 중학시절에 서귀포에 조금 산 적이 있나 봐요. 2년 후 정년 퇴직하는데 서귀포시장은 이곳에서 살 수 있도록 집을 지어줄 테니 여기서 살 것을 서면으로 약속을 받았어요. 이외수는 화천에서 모셔갔고요. 저도 몇 곳에서 살 게 해준다고 해요. 이제는 문화의 시대가 되었구나 생각해요. 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에요.
백수문학관 개관식에는 평일(수요일)이라 사람들이 많이 안 올 줄 아셨는데 300명이나 오셨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진정으로 시인이셨다.
10.
고향길 가는 날은 완행 열차를 타고 가자
중간역 간이역들 잘 있었나 인사하며
늘어진 강물도 데불고 세월 저편 찾아가자.
고향역 내려서도 알은 체를 하지 말자
재 넘는 흰 구름이 설사 낯이 익더라도
구름은 말 없는 거라고 내가 나를 타이르자.
해 지면 빈 하늘 뿐 다 묻힐 줄 알았는데
불타는 노을 속에 저도 타는 갈가마귀
밤새 내 한 잠도 못이룬 뒷골 못물 찾아가자.
-「고향 가는 길」전문
고향에 대한 작품들이 몇 편 보인다. ‘~가자’라며 가정을 자신에게 청유의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첫째 수에서는 “늘어진 강물도 데불고 세월 저편 찾아가자.”라며 모든 이들에게 고향은 그리움을 간직한 곳이어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곳이다. ‘완행 열차를 타고 가자’라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추억의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에서 추풍령을 넘어 김천으로 오시는 장면을 상상하신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고향땅에 막상 내려서면 세월 속에 모든 것은 변하고 안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오히려 서먹하기도 한 곳이 고향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구름은 말 없는 거라고 내가 나를 타이르자.”며 스스로를 달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셋째 수에 이르면 그래도 고향에 돌아오니 온갖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좋은 것도 있지만 아픈 추억도 있는 곳이 고향이다. “밤새 내 한 잠도 못이룬 뒷골 못물 찾아가자.”라며 ‘뒷골 못물이 잠못 이룬다’는 것은 잠못 이루는 자신을 감정이입한 것이다. 인간 세상은 변하여도 자연은 변함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뒤에 살펴볼「강 건너 마을」에서도 ‘강 건너 마을 고향 같네’라고 노래하는 것과 통한다. 여든이 넘어 고향을 찾으면 그것도 일 년에 한 두 번 가는 고향이란 기쁨보다 쓸쓸함이 묻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부모랑 또 동기랑 내 행고(行苦)의 아내까지
묻어둔 한 산자락 문신(文身)처럼 번져나는
구름도 우거진 쑥대밭, 내 고향은 거기란다.
-「가을 고향」전문
부모님을 모신 선산에 또 아내와 며느리까지 앞세우신 선생님께서 찾아오신 고향은 “구름도 우거진 쑥대밭”이라고 하시고 있다. ‘잡초가 우거진 쑥대밭’이라고 하면 시가 안 되어요. ‘구름이 우거진 쑥대밭’이라고 해야 시가 사는 것이라고 하실 것 같다. 이처럼 시의 곳곳에 선생님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옷자락을 휘날리고 계시는 것이다.
고향이란 노 시인에게 슬픔과 외로움을 주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고향이란 영원한 안식처이듯이 선생님도 고향이란 무한한 추억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높지도 않은 그산, 깊지도 않은 그물,
그래도 그 산 그 물 무엇인가 비칠듯 해
닦으면 닦아낼수록 청동거울 같은 고향
하늘엔 빗살무늬 기러기떼 날아가고
사계의 비바람이 어루만진 무문토기(無文土器)
세월이 흐리지 못하고 거기 숨어사옵디다.
애당초 고향이야 깊이 잠든 선사시대(先史時代)
파 보면 파 볼수록 출토되는 햇살이여
한결로 별빛에 가 닿은 제기(祭器) 아니오리까.
-「선사(先史)고향」전문
고향이란 태어나서부터 어릴 때의 추억을 특히 많이 간직한 곳이다. 그래서 “파 보면 파 볼수록 출토되는 햇살이여”라고 잊고 살았던 추억들을 떠올리고 있다. 그런 추억이 셋째 수 종장에서 “한결로 별빛에 가 닿은 제기(祭器) 아니오리까.”라고 표현한 것은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는 표현으로 백수(白水) 선생님만의 특징적 표현이다. 고향에 대한 추억이 성스러움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조상 대대로 이어온 땅이라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 이어지면 결국 별빛에 가 닿을 것이다. 단순한 회상을 넘어선 생명의 근원을 노래한 것이다. 그것은 ‘제기(祭器)’란 조상님들과 만나는 엄숙한 장소에 놓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제기(祭器)’를 통하여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세속의 이해 관계를 떠난 순수함을 간직했던 어린 시절), 즉 역사 이전의 선사(先史) 시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거리마다 밀리는 사람들 얼굴마다 이역(異域)같고
암암(暗暗)히 묻히는 청산(靑山), 강 건너 마을 고향같네
정 주고 눈물 준 이들 다 건너가 사는 마을.
-「강 건너 마을」전문
서울, 그리고 어느 대도시인들 이웃들과 대화가 단절되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농업 위주 시대의 마을 사람들처럼 안면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초장에서는 사람들은 모두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 중장에서는 말없는 자연이 오히려 정답게 느껴지니 고향 같다고 하였다. 시인의 외로움이 나타난 작품이다.
이양하님은 수필「신록예찬」에서 “사람이란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고 하였지만 대도시의 아파트 문화가 위주가 되면서 가족은 물론 이웃과 단절이 심해져 가고 있다. 선생님은 대화를 아주 좋아하셨다. 소탈하셨다. ‘정’이 있는 사회, 시가 있는 사회를 원하셨다. 신인들의 작품이라도 좋은 작품은 암송하시는 것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모습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1980년 10월에 영남시조문학회 총회를 마치고 조주환 선생님께서 백수 선생님을 안강으로 모셔와 조주환 선생님 댁에서 밤새도록 시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다. 맥(비화)시조 문학회의 백수 선생님 초청 강연회였다. 심장이 좋지 않으시다면서 약을 드셨는데 60대 초반의 연세인지라 건강이 염려되었으나 백수하셨으니 시조시단의 복된 일이다. 이날 밤에 화선지에 글을 주셨는데 ‘茶半香初’라는 글을 받았다.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으셨다. 졸작 「왕피천에서」를 1988년『시조문학』에 초회 추천을 해주시니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비화문학회 2집 제호(題號) 비화(飛火)는 백수 선생님의 제자(題字)이다.
11.
세월이 빚이라는 걸 내가 어찌 몰랐을까
꽃과 잎 불을 끄고 어디론지 떠난 날은
노래도 문빗장 걸고 숨으려고 했었는데……
어쩌랴 눈물밖에 가진 것이 나는 없고
하늘땅 열두 대문 활짝 열린 봄빛 앞에
상인지 벌인지 난 몰라 목련꽃이 또 벙근다.
-「다시 봄에」전문
어릴 때부터 심성이 곱고 여려서 감수성이 예민하여 눈물이 많으셨던 선생님은 평생 시심(詩心)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원천이 되었다. 첫째 수에서 꽃과 잎 다 지고 나면 노래도 숨는가 했는데, 둘째 수에는 봄이 또 오니 “상인지 벌인지 난 몰라 목련꽃이 또 벙근다.”며 기쁨과 함께 슬픔도 떠오르니 상인지 벌인지 모르겠다고 하신 것이다. ‘목련꽃이 또 벙근다’는 것은 자연의 목련꽃이 피는 것을 표현한 동시에 선생님의 가슴에서 또 시가 벙글어 나온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야마오카 소하치의『대망(大望)』에서 “삶과 죽음은 만인에게 똑같이 부과된 엄숙한 환희이며 가혹한 형벌임을 과연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라고 하였지만, 한 해만 보더라도 봄은 분명 새로운 삶이 탄생되는 시기임은 틀림이 없다. 기생 두향은 이황 선생님과 이별할 때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제/ 어느덧 술 다하고 님마저 가는 구나/ 꽃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라고 하였듯이 봄은 기쁨도 있지만 눈물도 주는 것이기도 하다. 봄날은 짧기 때문이다.
상과 벌이란 말이 “세월이 지워준 짐 풀잎에도 갚지 못해/ 돌아온 등불 아래 턱을 괴니 나는 탕아(蕩兒)네/ 벌 주고 상도 주는가 가을이여, 또 물들면서”(「가을이여」세 수 중 셋째 수)에서도 보이고 있다. 봄뿐만 아니라 가을에도 시인에게는 잠못 이루니 상이면서도 동시에 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이 눈물밖에 없는 시인에게는 상도 상이도 벌도 상인 것이니 일 년 내내 기쁨과 슬픔의 감정의 샘물로 시를 쓰시면서 시인으로 살아가신 선생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진정한 시인임을 알 수 있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12.
저것은 하늘의 눈동자, 아니면 땅의 함성
애당초 둘러선 산이야 하늘아래 제기(祭器)라면
천지(天池)는 한 그릇 정화수 억천년의 비원(悲願)이네.
-「백두산 기행시초 연작 시 10수 중 다섯 째 수, 천지(天池) 앞에서 전문」
『이승의 등불』에는「백두산 기행시초」12 수가 있으며, 백두산 기행시초 연작시 10 수를 싣고 있다. 기행시는 자칫 새로운 것에 대한 찬탄으로 끝나서는 시적 형상화에 성공할 수 없다. 남북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염원하는 시 중에서 개인적으로 이「천지(天池) 앞에서」와 리강룡의「가을․펀치볼1」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는다.
13. 백수(白水) 선생님 어록
2008년 12월 20일 영남시조문학회 총회 때 ‘낙강(洛江)’41집 배부 후 방담 중에 백수 선생님께서 작품 해설을 하시면서 하신 말씀들을 두서없이 정리한 것이다.(구귀분, 김우연 기록) 이 어록은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채찍이 될 것이라 본다. 그런데 이 방담 자료를 김전 시인의 카페 ‘김전 문학사랑’(
1. 시는 미쳐야 미친다.
2. 시는 경(經)이 되어야 한다. 불경 성경 할 때의 경을 말한다. 경에는 기도가 통해야 된다. 그리고 보통 말 가지고는 시가 안 된다.
3. 요즘은 동시를 많이 쓴다. 초등학교학생 머리부터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4. 시인은 이불 덮고 자나 하늘 덮고 누워야지. (시인은 옹졸해서는 안 된다.)
5. 시조는 격이 떨어지면 안 된다. 천격이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산문이 된다.
6. 시어는 절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실하지 못한 말은 퇴고에 퇴고를 거듭할 것.(예) ‘한평생 고향집 지키며→살아생전 고향집 지키며) 그렇지 않으 면 산문이 된다.
7. 시어는 적중해야 한다. 적중이란 지팡이를 꽂으면 지구 자전도 못 돌게 만 드는 것이다.
8. 시 안 되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누구 손에 달린 거지. 오브제가 누 가 요리하느냐에 달렸다.
9. 천부적인 시인이라는 말에 저는 글 쓰는 재주 밖에 없는 백치이다.
10. 시조형식의 파격에 대해서는 한 가지를 버려서 열 가지를 얻을 수 있을 때 만 파격해야 한다. 파격을 잘못하면 인대가 늘어나듯이 쓸모없이 된다.
11. 세계화 시대에 한국시로서의 시조의 앞날은 밝다.
12. 앞으로는 문화의 시대가 온다.
14.
백수 선생님의 강의를 듣거나 방담 시간이면 그 많은 시조를 어떻게 다 암기하고 계시는가에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한 편 한 편 암송하시면서 시를 얻게 된 계기와 시어 하나라도 바르게 놓여야 시가 된다면서 작품을 설명하실 때는 우주의 숨결도 멎는 듯 했다.
박경용 시인은 백수 정완영을 「당대(當代) 시조의 순교자적 면모」라는 발문(跋文)에서 “그에게 있어서 시조는 신앙이다. 언제 어디서나 시조와의 인연이 닿은 사람과 마주하기만 하면, 마치 노련한 전도사(포교사)가 경서(經書)의 구절을 줄줄이 퀘어 외우듯 거침없이 자작시를 읊조리어, 상대야 무슨 속셈을 하고 있건 아랑곳하지 않고 시조의 진리가 갖는 ‘구원의 도리’를 일깨우기에 여념이 없다.”라고 쓰고 있다. 사실 백수 정환영의 시조 강의를 들어본 사람이면 그렇게 공감할 것이다.
2,000여 수의 시조를 줄줄 암송하시고 해설을 하시는 선생님의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다음 글을 살펴보면 기억력이 어려서부터 초능력적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나는 타고날 때부터 기억력이 초능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돌 전에 서지 못하고 기어다니던 기억이 소상하게 납니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님은 당신 아드님에게 늘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저건 너 속이려 온 자식이니까 믿지 말아라. 저건 자라지 못하고 너에게 낭패 보이려고 온 자식이니 곧 죽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돌 전의 기억을 저리 소상히 알겠느냐? 하셨다 그래요. 이만큼 오래 살라고 그랬는지….
그래서 그땐 신동이라고 구경 온 사람도 많았어요. 그런데 대대문반의 집에서 나왔으니 글밖에 할 줄 몰랐는데, 조선조가 기울고 일정(日政)이 들어오고 하니, 문사집안은 자연 쇠락해 들어갔어요. 어느 마을 어느 집안 없이 그땐 다 그래 됐지요.
9살에 할어버지 몰래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할아버지 앞에서는 못 읽으니까, 서당에 가서 누마루에 책 펴놓고 읽는데, 할아버지가 보이면 ‘당음’을 읽고, 할아버지 가시면 일본책 교과서를 거내 읽고, 그러다 들키면 ‘이게 글이냐 이게 말이냐’며 지팡이로 책을 휙 감아 집어던지면 담 넘어 연못에 풍덩 들어가고, 그러면 수영을 해 건져오고 그랬어요.
이렇게 한문을 할아버지한테 배웠는데, 동몽선습(童蒙先習),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 대학, 중용까지 9살에 다 뗐어요. 그때 할아버지 서당에서 동문수학한 동년 학생이 대개 13세에서 18세까지였는데, 나만 5∼7세였지요. 다른 동문들은 기껏 5섯 줄을 외웠지만, 나는 할머니 젖을 빨며 2백 줄 씩 외웠어요. 그래서 신동이라 소문이 나고 그랬지.
초능력적인 능력자가 아니라도 자작시을 암송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누구나 본받아야 할 것이다. 시낭송가 출신들이 등단을 많이 하는 것으로 보아 등단을 목표를 하는 습작기 신인들은 좋은 작품들을 많이 암송하는 것이 창작의 지름길이 됨을 알 수 있다.
15.
선생님이 살아오신 내력을 간단하게 밝힌 바 있다.
내가 살아온 세월을 대별(大別)해보면 유소시(幼少時) 25년은 거의 방랑의 세월이었고, 광복과 더불어 고향에 돌아와 묵삭인 25년은 고뇌의 세월이었다. 오직 붓대 하나를 앞세워 서울이란 땅에 표착하여 이래 35년, 가당찮은 세월을 오로지 우리 가락인 시조(時調) 하나에 매달려 이 하늘 이 땅을 일구어가며 오늘에 이르러 왔다. 그러니까 내 나이 장년(壯年)인 무렵, 고향 땅을 갈[耕]고 가꾸어 이 마을을 <시조(時調) 마을로 꽃 피우고, 우리 가락의 중흥지지(中興之地)로 일으켜 세워보고 싶은 때가 있었다.
선생님의 고향 마을에 대해서는 나래시조에서 밝힌 바 있다.
대충 내 살아온 생장과정이라든가 살아온 이야기를 껑충껑충 이야기하겠습니다. 내 죽고 난 다음에도 문학적 하나의 사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니까. 아직 자식들에게도 이런 얘긴 다 안했거든요.
음력으로 십일월 열 하룻날 새벽에 내가 태어났어요. 3.1운동의 여진이 아직 가라앉지 앉은 상태에서 온 마을이 술렁거리고. 내가 살던 마을(경북 금릉군 봉산면 예지동 65번지)은 반촌으로 4백 여 호됐어요. 백여 호의 가구가 다들 풀풀 날라 가는 와가 청기와 집으로 자긍심도 컸고, 남대문 밖에서 저자가 서지 않는 자연촌락으로 제일 크다는 마을이었어요. 행정구역으로는 마을이 너무 커서 골목으로 따져서 인의예지신(인의, 예지, 신) 3개 부락으로 나뉘었어요. 한마을이 세 동리로 구획됐던 거지. 창녕 조씨 일문 50∼60여호와 우리 연일(延日)정문 1백 61가구가 살았어요. 다른 성씨는 그에 종속되는 성받이었어요.
16.
백수 선생님은 제1회 낙강문학상 (2014년)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를 낙강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지난 20세기 초엽에 시작된 현대시조의 흐름은 육당, 가람, 노산으로 이어지고, 그 주맥은 다시 초정(艸汀)과 호우, 초운(樵雲), 백수로 흘러왔으며, 특히 백수 선생은 1960년대 이래 반세기 넘게 한국 현대시조 문학 창달에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해 왔음은 이설의 여지가 없다 할 것이다.
백수 선생은 독창적인 시각으로 섬세하면서도 토속적인 맛을 진하게 풍기는 유연한 가락으로, 한국적 정서와 풍류의 멋을 간결한 3장 6구 속에 피워낸 고차원의 언어 마술사임은 자타가 공인하는 정평인 것이다.
아마도 후세의 문학사가들은 백수 선생을 16세기 정송강이나 17세기 윤고산과 버금가는 반열로 평가하리라는 것은 비단 오늘의 우리만이 가지는 예상만도 아닐 것이다.
수상작으로는「안경」,「고향은 없고」,「이승의 풍경화」,「부자 상」,「감을 따 내리며」등 5편이다.
17. 영남시조문학회와 白水 선생님
白水 선생님은 영남시조문학회에 초대 회장에 이우출(1965-1966) 선생님, 2대 이호우 선생님(1967-1969)를 이어 3대 회장(1970-1975)을 역임하셨다. 창간 회원들과 함께 그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한다.
1960년대의 특기 사항 중의 하나는 동인지가 발간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잡지가 동인들이 내는 경우가 있었지만 순수 동인지로서는 영남시조문학회의『낙강』이 1967년 창간된다.
사실 <낙강> 이전에 <黃土> 동인이라는 등단하지 않은 20대들의 작은 시조 모임이 있긴 했다. 박택종, 김종목, 김정자, 오대순, 류상덕, 김종윤 등이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이들로서 거의 자유시의 테두리 속에서 시조 발전에 한계를 느꼈고, 또 출간 사정이 어려웠던 ≪時調文學≫원고가 내려와 이우출 님과 김종윤이 동분서주하며 한 집을 경북 특집으로 만들어낸 허탈함 속에서 <黃土>를 해체하고 발기인으로는 이우출, 김상훈, 정재익, 류상덕, 그리고 김종윤이 산파역을 맡아 1965년 대구역 부근 상공장려관 옆 경(京) 다실에서 창립총회를 갖게 되었다. (중략)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호우 님도 시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쏟았던 것이 ≪낙강≫을 만들게 된 동기가 아닌가 싶다. 그때 나온 분들로는 이호우, 배병창, 이우출, 정완영, 김상훈, 정재호, 김정자, 정표년, 정재익, 류상덕, 김종윤 등이었고, 회명을 <경북시조문학동호회>로 정하고 고문에 이호우, 회장에 이우출을 뽑아 초창기 회무를 주로 이끌어 갔으며, 모일 적마다 작품 품평회를 했다.
1965년 4월 12일 이우출, 김상훈, 정재익, 류상덕, 김종윤이 발의를 했고, 동년 4월 25일 일요일 경(京 )다실에서 이우출이 주동이 되고, 김상훈, 정재익, 김종윤, 류상덕, 정재호 등이 첫 모임을 가졌다. 회의 명칭을 경북시조문학동호회라 하였고, 고문에 이호우, 회장에 이우출을 뽑았다. (중략) 필자(김시백)가 경북시조문학동호회에 참여한 것은 1967년 6월 25일이었다. 일요일인 그날 모임 장소인 성좌 다방으로 우산을 쓰고 찾아가니 부산에서 임종찬도 와서 글을 보이고 있었다.
동호인이 늘어난 데에 고무되어 이우출 회장의 제의에 따라 회의 명칭도 바꾸기로 하였다. 곧 지금까지의 경북시조문학동호회보다는 경남․북을 망라한 모임이라는 점에서 영남시조문학회(嶺南時調文學會)로 하자는 데 모두 동감이었다.(중략)
당일 선출된 임원은 회장 이호우, 부회장 이우출, 정완영, 총무 김장수, 경리 정재익, 사업 김상훈, 감사 정재호, 지준모였다. 일반회원으로는 이영도, 여영택, 배병창, 이태룡, 장정문, 류상덕, 김정자, 오태순, 김종윤, 김세환, 유병천, 이상룡, 김병시, 박택종, 임종찬, 김시백 등이었다. (중략)
이리하여 1965년 4월 25일 발족하여 2년 남짓 활동해 오던 경북시조문학동호회는 1967년 6월 25일 영남시조문학회(嶺南時調文學會)로 개칭되어 동년 7월 1일부터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영남시조문학회가 이호우 회장 체제로 새 출발하면서, 1년에 한 권씩 동인회지를 내기로 하고, 5개월의 준비 끝에 1967년 12월 동인지 창간호를 내게 되었다. 4․6판 80면으로 된 창간호에 수록한 회원으로는 김상훈, 김세환, 김시백, 김장수, 김정자, 김종윤, 배병창, 오태순, 여영택, 유병천, 류상덕, 이상룡, 이우출, 이태룡, 이호우, 장정문, 정완영, 정재익, 정재호, 지준모, 최재열 등으로 총 40여 편의 작품을 실었다. 제자는 지준모, 표지화는 이홍창 화백이 맡아 주었고, 제호는 이우출의 제의에 따라 낙동강의 ‘東’자를 뺀《낙강》으로 하였다.
영남시조문학회 동인지 제호는 이우출 선생님의 제의에 따라 낙동강(洛東江)의 ‘동(東)’자를 뺀 ‘낙강(洛江)’으로 하였다. 창간호 제자(題字)는 지준모 선생, 표지화 이홍창 화백 맡아주었다. 2호부터는 “제자(題字)는 문기석, 표지화는 강신철 화백의 ‘에밀레’ 무늬의 그림으로 하여 심벌마크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50년의 역사를 가진 영남시조문학회의 회장을 역임한 분은 다음과 같다.
초대 이우출(1965), 2대 이호우(1967), 3대 정완영(1970), 4대 이우출(1975·12), 5대 정재익(1979), 6대 정재익(1979), 7대 이우출(1981), 8대 정재익(1983), 9대 김종윤(1985), 10대 류상덕(1987), 11대 하영필(1989), 12대 김상형(1992), 13대 정재호(1994), 14대 조주환(1996), 15대 박영교(1998), 16대 김전(2000), 17대 박두익(2002), 18대 노종래(2004), 19대 김시백(2005·12), 20대 김양수(2007·12), 21대 김양수(2010), 22대 이용우(2012), 23대 곽영희(2015), 24대 김전(2016) 회장으로 이어졌다.
회원들은 가장 오래된 동인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곳곳에 많은 시조단체들이 있지만 50년을 넘길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낙강』』은 이호우, 이우출, 정완영 초대 회장님들의 뜻을 받들어 유유히 계속 흘러갈 것이다. 『낙강』은 단순히 우리 회원들만의 것은 아니다. 현대시조사에서 볼 때 전국에 있는 시조시인들의 고향일 것이다.
18.
2008년 영남시조문학회 김양수 회장님께서 아흔의 선생님께 원고 청탁을 하여 7편을 작품을『낙강』41집에 실었는데 회원들에게 기쁨을 주었으며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낙강』41집은 더욱 빛이 났다.
작품 끝 시작 노트에
“ ‘洛江’의 원고청탁을 받고 보니, 기울어진 家勢의 친정 집을 찾아온 듯, 감회가 무량하다. 流長洛東江. ‘洛江’이 더 길고 푸르기를 기원하며, 拙作 몇 편으로 눈물의 정을 갚는다.”고 하셨다.
이제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뵐 수 없지만 영남시조문학회를 위한 선생님의 애정과 발자취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한다. 백수 선생님의 시에 담겨 있는 선생님의 혼과 가락은 영원히 은은하게 그 향기를 풍기며 널리 퍼져나갈 것이다.
이 글은 백수(白水) 선생님의『이승의 등불』(2001)에 나타난 시의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높고, 넓고 깊은 선생님의 시 세계를 조그마한 창구멍을 통하여 바라보았음에도 그 하늘이 넓어서 두 눈으로는 다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일 뿐이다.
백수 선생님은 영남시조문학회는 물론이고 현대시조사에 큰 별로 영원히 빛날 것이다. 영남시조문학회는 전국에서도 시조동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회이다. 우리 회원들의 자랑이다. 창간호 이래 한 번도 빠짐없이 연간집을 발간해 왔으며 2015년 48집을 내었다. 회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48집에는 특집으로 김종윤의 20년사와 김시백의 40년사를 참고하여 쓴 김우연의「영남시조문학회 50년사」를 실었다.
밤새도록 자작시를 암송하시며 해설을 하시던 강의를 이젠 영영 들을 수 없음에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 선생님께서 낭송하시던 작품 한 수 한 수가 별이 된 것 같다. 80년 동안 쓰신 시 한 편 한 편이 모두 우리 시인들의 가슴에 별로 떠 있다.
“내가 죽어 저승엘 가면 이승이 고향이 아닐까”(「이승의 하늘」초장)라고 하신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 지구도 하늘일거야”(「하늘에서 내려다보면」)라고 하셨는데, 우리 시조시인들을 굽어 살펴주옵시고, 영남시조문학회를 영원히 사랑해 주시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流長洛東江.
“『洛江』은 더 길고 더 푸르게 흘러갈 것이다.”라는 백수(白水) 정완영 선생님의 축원과 ‘눈물의 정’을 가슴에 새깁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옷자락을 휘날리시며 휘영청 달빛 타고 늘 우리들께로 오시리라 믿습니다. 합장.
첫댓글 주석이 보이지 않아서 첨부파일을 올렸습니다.
그리 시조로 나고 ,시조를 먹고, 시조로 자라고, 시조로 죽어야 참 시조시인이거늘 오늘 백수 선생님 같은
시성을 어데서 찾으리오
명성만 찾고 돈맛에 시인임을 망각한
저질의 중견시인들을 보면서 정와영선생님의 고고한 인품이
새삼 존경을 표합니다
제발 시인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같은
속물근성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백수 선생님의 영전에 멀리서 명복을 빌어 봅니다
정말..백수 정완영 선생님의 고고한 인품에 고개 숙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백수 정완영 선생님에 대하여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