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산 부장리 고분군
가야산에서 시작하여 서산시 동쪽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낮은 구릉 끄트머리에, 음암면 부장리 219-2번지에 위치한 대 아파트 건립 예정지에, 효창건설에서 신축공사를 실시하기전 행해진 발굴조사를 통하여 백제시대 분구묘 13기 등이 발굴 조사되었습니다. 1차 발굴은 2004. 03.22~12.20, 2차 발굴은 2005. 09.05~12.09, 3차 발굴은 2006. 01.03~01.13에 걸쳐 충청남도역사문화원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분구묘가 조사된 일부 구역을 제외하고, 유구상태가 많이 삭토되고 분포정도가 소밀한 것으로 조사된 구역은 공사가 허가되어 임대아파트가 지어져 있습니다.
참고로 분구묘란, 먼저 시신을 안치한 그 위에 흙을 쌓아올리거나 쌓아올린 봉분을 수직으로 파서 그 안에 목관을 안치하는 등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되는 무덤입니다.
서산 부장리유적에서 조사된 유구는 총 260기이며, 이 가운데 청동기시대 유구는 주거지가 수혈유구로 총 37기, 백제시대유구는 주거지 44기, 수혈유구 15기, 분구묘 13기, 석곽묘 3기 등 모두 75기가 확인되었으며, 조선시대 등의 유구로는 주거지와 토광묘 및 수혈유구가 확인되었으며 모두 104기가 조사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물이 출토되지 않거나 그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시대미상의 수혈유구 등이 45기 조사되었습니다.
먼저,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중기로 추정되는 취락으로는, 일명 흔암리유형의 전기취락과 송국리유형 중기 주거지가 조사되었고, 인근 서산 기지리유적을 비롯하여 기존의 휴암리유적 등과 비교하여, 서산지역 청동기시대 전기 및 중기의 문화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청동기 시대 유구는 주거지 34기, 수혈유구 8기로 총 42기가 확인되었으며, 출토유물로는 이중구연단사선문토기, 구순각목문토기, 공열문토기, 이중구연단사선공열문토기 등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장방형 주거지의 다수가 불에 타 폐기된 것들로 주거지 내부에 불에 탄 기둥과 함께 당시의 유물들이 양호하게 보존돼 있어 청동기 시대 전기의 건축과 마을, 그리고 토기 등의 유물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두번째, 백제시대 분묘군은 모두 토광묘로 유적의 서쪽 능선부와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고, 주거지는 모두 중앙 남사면에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 분구묘 13기는 지름이 20-40 m 정도인 사각형 봉분이 확인되었고, 현재 남은 봉토의 높이는 아예 없거나 2 m 정도 남아 있는 것도 있는데, 이 높이가 자연적으로 유실되어온 결과인지, 처음부터 낮게 조성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하구요, 전체 13기중 가장 상태가 좋은 1호분을 제외하고 모두 발굴조사가 끝났고, 각 분구묘 둘레에 U자형 주구, 도랑을 팠는데, 일부 분구묘의 주구가 중복된 부분(6호, 8호, 9호 분구묘의 주구가 일부 중복)이 있으나 대체로 서로 묘역을 침범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매장시설은 모두 토광묘로 목곽을 사용한 것과 사용하지 않은 형태 등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서산 부장리 고분군은 현재까지 밝혀진 분구묘 분포에서 가장 북방에서 발견되었으며, 특히 충청지역에서 이처럼 성토한 부위가 잘 남아있는 것은 아주 드물고, 이전 다른 지역 분구묘 조사에서 제시하지 못했던 분구묘의 축조과정과 확장과정 그리고 분묘군의 형성과정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서산 일대 재지세력의 위상과 문화적 성격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출토유물로는 직구단경원저호, 광구원저호, 원저호, 소형토기 등의 토기류와 환두대도, 철제초두, 철부, 철겸, 철모, 철도자 등의 철기류와, 금동관모, 금동식리, 금동이식, 곡옥, 가종 구슬류 등이 발굴됐습니다. 총 9개 분묘에서 모두 금동이식이 나왔고, 5호분에서 금동관모, 6/8호분에서는 금동식리가 출토되었고, 그 외에도 환두대도․철제 초두를 비롯하여 대량의 철체품, 각종 토기, 옥류들이 출토되었습니다. 모두 합해서, 4호분에서 환두대도, 5호분에서 금동관모ㆍ철제초두ㆍ환두대도 등이 출토되었으며, 6호분에서는 금동신발과 환두대도, 7호분에서 은상감환두대도, 8호분에서는 금동신발과 은상감환두대도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5호분의 경우 다른 분구묘와 달리 매장시설이 1기만 있는 단독장 형태로, 유규내용도 차별적인데다가 출토유물 역시 금동관모, 철제초두, 금제이식, 환두대도, 곡옥 등 화려하고, 6호분 역시 금동신발과 각종 구슬류 등이 발견돼 피장자의 생전 신분이 매우 높았음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백제시대 유적에서 7개 밖에 나오지 않은 귀중한 유물(이 외에 고흥 길두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공주 수촌리(2점), 천안 용원리에서 출토)로 높이 15cm, 너비 17.5cm의 육각형 틀로 귀갑문 안에 봉황과 용을 투조(透彫)장식한 특징이 있는데, 이 점을 볼 때 서기 4세기 말~5세기 초 백제가 이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며 토착세력에게 하사한 위세품(prestige goods)으로 보고 있습니다. 철제초두 역시 제사 때 사용하는 도구로 그 희소성이 매우 크며, 이외에도 고리큰칼, 금동괴고리, 철제무기류와 대외교류를 보여주는 중국 동진제 청자 등이 출토되는 등, 한성백제 시대 연구자료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서산지역 일대에서 해미면 기지리 유적에 역시 60기, 동서간선도로 예정부지인 예천동에 103기가 확인되는 등 다수의 분구묘가 발견되고 있어 백제시대 지방세력에 대한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함은 물론, 백제시대 분구묘의 보고라는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 정순왕후 생가
충남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한다리마을은 경주김씨 집성촌으로, 서산 유계리 일대에는 내포의 양반가문을 대표하는 경주김씨와 관련된 많은 문화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이 서흥부사로 재직할 때 임꺽정을 토벌하고 얻은 사패지를 근거로 약 500여 년 전 들어와 집성촌을 이룬 곳입니다. 이곳은 경주김씨 집성촌으로 충신과 지사와 효자를 여럿 배출한 마을로, 안주목사 김연(1494~?)이 입향 시조로 손자 적은 안기찰방을 하다 귀향했으며, 장남 홍익은 병자호란 시 왕위병을 이끌고 전투하다 광주 험천에서 전사했고, 말자 홍욱은 충청 황해감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증손자 홍경이 영의정, 말자 한신이 영조의 화순옹주와 국혼을 했으며, 그의 조카 되는 한구의 딸 정순왕후가 영조의 비가 되면서 다시 국혼을 맺으면서 역사에 등장합니다.
정승만 해도 서른일곱명이 배출되는 등 많은 인재가 나왔고, 학자로는 추사 김정희가 한다리 출신이며 독립애국지사도 3명이나 배출되었구요, 300년 전에는 여류시인 오청취당이 이곳 한다리마을에서 182수의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많은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로 손꼽힙니다. 김연의 7대손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될 때까지 살았던 한다리마을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부촌으로 기와집이 모여 있던 곳입니다. 현재 고택은 거의 다 없어지고, 계암고택(김기현가옥)과 정순왕후 생가 고택만이 16대 후손으로 독립운동가인 백림 김용환 의사의 아들로 민선 재선 서산시장을 지낸 김기흥 씨가 지키고 있습니다.
마을의 경관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두 채의 전통 고택이 있는데 정식 문화재명은 '정순왕후 생가'와 '김기현 가옥(계암고택)'입니다. 이 두 집은 담장을 이웃하며 오랜 세월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서산의 지곡면과 대산면에는 경주김씨가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이 일대에 한다리 김씨 후손들이 넓게 거주했던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대표적인 유적인 '단구대(丹丘臺)'는 김적이 머물렀던 곳이라 전해지는데, 대교천과 덕지천의 합수 지점에서 북으로 150m를 올라가면 '용유대(龍遊臺)'라고 불리는 바위 군락이 있으며 용유대의 서쪽 천변에 있는 큰 바위의 평평한 면에는 '단구김선생유상고허(丹丘金先生遊賞古墟)'라는 아홉 글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상단부는 김적이 벼루로 이용했다고 하는 네모난 구멍 자국이 남아 있다.
'정순왕후(貞純王后) 생가'는 조선 효종 때 승지와 충청감사(忠淸監査)와 예조참의(禮曹參議),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낸 학주(鶴州)김홍욱(金弘郁,1602~1654)이 효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적(金積)에게 하사한 가옥으로, 효종 시절인 1649∼1659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영조 21년(1745)에 여기에서 태어나 김홍욱의 4대손인 김한구(金漢耉)의 맏딸이자,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영조 35년(1759)에 계비가 된 정순왕후(1745∼1805)의 생가이기도 합니다. 임금이 하사한 주택답게 일반 살림집보다 양식이 화려하고, 고택의 입구는 집을 지키는 듯 우람한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인근에 위치한 '김기현 가옥'은 1800년대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가옥의 형태는 일반 양반가에 비해 간소한 편입니다.
유계산의 낮은 야산 아래에 동향하여 'ㅁ'자형으로 된 안채는 중앙에 3칸 통칸의 넓은 대청을 두고 그 우측으로는 1칸의 고방과 2칸의 안방, 그리고 1칸씩의 제실과 건넌방,부엌,광 등이 있는데 그 옆으로 행랑채 사이에 안채를 통행하는 중문이 나 있습니다.
또한 가옥의 남측으로는 1칸씩의 광과 부엌, 그리고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고방이 배치되었습니다. 구조는 깍은 장대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대청 앞의 기둥은 높이가 3.66m나 되어 고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높은 기둥을 세웠습니다.
지붕틀은 1고주 5량집이며, 종보 위에는 제형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고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순왕후의 생가로 기념성이 클 뿐만 아니라 효종이 하사한 가옥으로 품격을 갖추고 있는 가옥입니다. 특히 지붕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또 뒤에서부터 앞쪽으로 높이를 3단 낮춰 처리한 점이 특이합니다.
유계리 앞의 길가에는 충신 김홍익 정려와 효자 김유경 정려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김홍익은 1632년 연산현감으로 재직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을 모집해 싸우다 경기도 광주에서 전사했고, 이때 통인(通引) 장사정(張士貞)이 그의 시신을 안고 나오다 적군의 칼에 맞아 죽었고, 후에 장사정의 처도 목을 매어 자결하였고, 영조는 훗날(1741년) 세 사람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를 내렸습니다. 한편, 김유경(金有慶·1669-1748)은 김두징(金斗徵)의 아들로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평소 '의(義)'에 목숨을 걸었던 선비였는데, 영조로부터 평안감사를 제수 받았지만 부친의 시묘를 위해 거부할 만큼 지극한 효를 실천했다 하여 내려졌습니다.
특히 정순왕후 생가는 정약용이 제일 먼저 유배 왔던 해미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정순왕후가 1745년생이고 정약용이 1762년생이니 나이 차이는 정순왕후가 열일곱 살이 더 많았고, 정순왕후가 왕비로 간택된 1759년에는 정약용이 태어나기 3년 전의 일이며,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는 1777년 왕후나이 33세 왕비가 된 후 18년째 실권 없는 대비로 물러나고, 그로부터 13년 후인 1790년 정약용이 29세(정순왕후 46세) 나이로 이곳 해미로 유배를 오게 되니 두 사람의 악연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이로부터 11년 후인 1801년 정조가 죽고(1800) 다시 실권을 잡게 된 정순왕후의 천주교 박해로 정약용은 다시는 벼슬길에 돌아 올수 없는 유배의 길로 떠나게 됩니다. 1805년 실권을 집은 지 6년째 되던 해 정순왕후가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니 정약용과의 화해를 생전에 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의 관계는 끝이 납니다. 이후 풀어 줄 사람이 없어진 유배살이는 18년이 계속되었으며 정약용은 돌아와서도 벼슬길은 영영 막히고 말았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그 옆에 위치하고 있는 김기현 가옥(계암고택, 국가 민속문화재 199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안채와 건물에 좌우로 각각 3칸씩의 건물을 달아내어 ‘ㄷ자’형의 평면을 이룬 안채 중앙 3칸은 넓은 대청을 두고 우측에 고방(庫房)과 안방부엌이 이어져 있고, 대청 좌측에 제실과 건넌방, 광 등이 있으며 광 옆으로 통하는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중문 칸이 나있습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 사랑채를 둘러 싼 담장은 자연석 외담장이며 대문은 평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화강석 1벌대 기단 위에 덤벙 초석을 놓고 그 위에 각기둥을 세웠으며 가구는 일고주오량 집으로 조량상부에 제형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와 함께 지붕의 하중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지붕은 홑처마입니다.
솟을대문 옆으로 길게 돌담이 뻗었고, 솟을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넉넉한 마당이 나오고, ‘一자’형 행랑채와 사랑채가 나타나며, 그 사이엔 행랑채와 사랑채 앞마당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행랑채에는 집을 수리할 때 나온 기와로 꾸민 고려와당박물관이 있고, 사랑채는 차양을 두었고, 사랑채 한 칸 앞에 팔모기둥을 세우고,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을 얹었는데, 앞면에는 겹처마를, 뒷면에는 홑처마를 달아 앞쪽을 길게 처리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 고택은 정순왕후 생가와 연결되어 있으며 뒤에 얕은 산과 앞에 넓은 천(川)이 흐르고 있는 고택의 대문은 개수할 때 장소를 옮겨 낮게 한 것이 특징으로, 안채의 ‘ㅁ자’에 연결된 사랑채가 있으며 초당과 작은 사랑채 각각 3칸, 그리고 사랑채 앞에 행랑채 7칸이 있고, 사랑채와 행랑채방 앞에 작은 정원이 있습니다. 또한 차양채를 호화스럽게 건축하여 여름에는 시원하도록 건축한 것이 특징이며, 작은 사랑방과 큰 사랑방은 구들로 난방해서 황토 찜질을 할 수 있도록 했고, 안채는 안방, 대청과 건넌방이 있으며 안방 부엌은 6칸으로 한옥식 부엌에 근대식 탁자를 배치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후원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내포지역은 가야산을 중심으로 산들이 낮게 드리워져 있고, 한양과도 가까워 한양 양반들이 이 지역에 땅을 사 농토를 마련하곤 했다고 전해지며, 평야마을에 자리 잡아 북동향을 하고 있는 기와집인 고택은, 지은 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一자’형의 행랑채 안쪽으로 ‘ㅁ자’형의 안채가 있고 안채의 동쪽 옆에 사랑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행랑채는 7칸 규모로 왼쪽 끝에 바깥대문이 설치되어 있고, 부엌과 광, 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동향한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서 안마당의 오른쪽에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중·상류주택이 몸채를 안마당 건너편에 두는 것과는 달리, 일조를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채의 뒷뜰에는 3칸의 초가집이 있는데, 일종의 공부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택의 안방과 대청 앞면에는 개방된 툇마루를 달았습니다. 건넌방 아래쪽으로는 아궁이가 있는 부엌과 아랫방을 들였는데, 옆에 있는 안대문간과 연결되어 있고, 안대문 오른쪽에는 사랑채의 사랑부엌을 배치하였습니다. 몸채를 안마당 건너편에 두는 대부분의 중·상류 주택과는 달리 해가 비추는 정도를 고려하여 안마당 오른쪽에 몸채를 둔 평면구성이 특이합니다. 이 고택은 19세기 중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개축과 증축을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르고 있습니다. 일반 주택과는 달리 안채보다 간소한 구조로 꾸민 반면, 햇빛을 막아주는 지붕 시설을 돋보이게 한 점이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고택으로, 공간의 짜임새가 빈틈없이 구성되었으며, 호두나무나 감나무 등이 어우러져 소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현재 계암고택을 지키는 사람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충민공 김홍익의 12대손으로 김연의 후손인 김기현 씨 내외입니다. 고택 체험이 가능합니다.
정순왕후는 1745년(영조 21) 충남 서산의 한다리 김씨(경주김씨) 김한구(金漢耈)의 맏딸로 태어
났다. 생가라 알려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고택은 조부인 鶴州 金弘郁이 老父 金積를 모시고 있
음을 알고 효종으로부터 하사받은 가옥이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왕후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여주였다고 알려져 있다.
김홍욱 이하 경주김씨 계보를 보면, 김홍욱의 장남 世珍과 차남 季珍계열로 나누어진다. 같은
집안이지만, 이 두 계열의 후손들은 서로 다른 행보를 걷게 된다. 세진계가 시파, 낙론계열이라면
계진계는 벽파, 호론계라 할 수 있다. 정순왕후가 태어나기 전까지 세진계는 지속적으로 관직에
진출하지만, 계진계는 그렇지 못했다. 부친 김한구 역시 딸의 중전간택 이후에 敦寧府都正을 제
수 받으면서 비로소 정계에 진출했던 것이다.
따라서 왕후가 출생하던 무렵 집안형편이 그리 넉넉하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설에
는 김한구의 부인이 산달이 다가오자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는 도중 엄동설한에 인가도 없는
당진 벌판길에서 첫 딸을 낳게 되었는데 이때 훗날 정승을 지내는 이사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
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목숨을 연명하게 된 아기가 바로 정순왕후였다.
김한구는 딸을 낳고, 수년이 지나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서울에서 당시 사도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의 집을 자주 오가게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홍봉안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홍봉한은 김
한구의 글 솜씨와 사람됨을 인정하여, 그 가족들을 서울로 이사와 살도록 하였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왕후는 이미 13세 때에 <춘추좌씨전>을 외우고 쓰고 할 정도로 총
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5세의 어린 나이였던 1759년 정성왕후 서씨가 승하함에 영조의 계비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경주김씨가 서산지역에 처음 입향하게 된 것은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金堧, 1494-?)이 명종조에 만년 은거지로 서산을 택하였고, 그의 큰 아들인 김호윤(金好尹, 1525-1575)이 서산에 터를 잡아 세거하면서부터였습니다. 원래 경주김씨는 안동에 세거하고 있었다고 하고, 김호윤(金好尹)의 아들 김적(金積)은 자를 선여(善餘), 호를 단구자(丹丘子)라 하였으며, 월사 이정구와 동갑으로 함께 자랐는데, 1609년(광해군 1)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관로에 들어섰으나 조정의 혼란함에 탄식하고 가족을 이끌고 서산의 향리로 낙향하였다고 합니다. 자손에게는 학문을 노복에게는 농사에 근면하기를 일깨우고 단구정을 지어 이곳에서 지역의 사림들과도 교류하였습니다. 인조반정후에 평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관로에 나갈 뜻이 없음을 전한 월사 이정구와의 편지가 전합니다.
김적의 아들 김홍욱(金弘郁)은 자는 문숙(文叔), 호는 학주(鶴洲)입니다.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호종, 청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하였고, 당진현감으로 나가서는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었습니다. 1646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권신 김자점과의 불화로 사직하였습니다. 그 뒤 1648년 응교가 되어 관기(官紀)․전제(田制)․공물(貢物)․방납(防納) 등 시폐(時弊) 15개조를 상소하였습니다. 효종 즉위(1650년) 이후 집의, 승지를 거쳐 홍충도관찰사(洪忠道觀察使)가 되어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하기도 하였습니다. 1654년에는 황해도관찰사가 전임하였는데 이 해에 효종이 구언교(求言敎)를 내리자 8년 전 사사된 회빈 강씨(소현세자의 빈)의 억울함을 말하고 그 원을 풀어줄 것을 상소하였습니다. 이른바 ‘강옥(姜獄)’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종통(宗統)에 관한 문제로 효종의 왕위보전과도 관련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말하지 않았는데, 그가 이 말을 꺼내자 격노한 효종에 의해 하옥되어 친국을 받던 중 장살되었습니다. 김홍욱이 비록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으나, 김적과 김홍욱 부자 때에 경주김씨의 위상은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김적이 서산 송곡사에, 김적의 아들인 金弘郁이 서산 성암서원에 배향되고, 정려나 신도비 등의 유적 건립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져 17세기에 이르러 경주김씨가 크게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17세기 이후에 서산의 경주김씨는 ‘한다리 김씨’라 통하며 크게 세거하였습니다.
1757년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 서씨가 승하하고, 새로운 국모를 찾게 되었는데, 이때 왕비를 다
시 맞아들이는 일을 홍봉한이 맡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혼인후보자를 뽑는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등 3차에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보통 초간택에서 30여명의 후보자 중 5~7명을 선발하고, 재간택에서 3명을, 삼간택에서 1명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선발의 기준은 우선 명문의 후예로서, 부친의 지위가 높지 않은 집의 딸이었습니다. 이런 집은 혈통과 가문은 좋되, 권력도 재산도 없는 집이 많았다. 이것은 사치와 교만을 경계하는 뜻도 있었겠으나, 외척의 발호를 꺼리는 의도가 더 짙었습니다. 또 본인의 됨됨이와 용모에 있어서도 장래 국모로서의 덕과 복과 어진 인상을 우위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건은 윈칙론에 불과했으며 실제는 외적 요인 즉 정치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정순왕후의 간택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왕비간택이 있던 날 후보로 오른 처
녀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였습니다. 이들은 선을 보기 위해 관원이 안내하는 큰 방에서 아버지 이름이 쓰여 있는 방석 위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두가 방석에 가서 앉는데 김한구의 딸만은 방석 옆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관원에 왜 그러는가 이유를 묻자 “어떻게 감히 아버님의 존함이 쓰여 있는 방석을 깔고 앉을 수가 있습니까?.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을 깔고 앉는 다는 것은 크나 큰 불효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라 하여 주위 사람이 감탄을 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면접이 시작되어, 관원이 몇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넘기 힘든 고개가 무슨 고개요?”
저마다 백두산, 한라산, 계룡산 등 높은 산의 이름을 말했지만, 김한구의 딸은
“제일 넘기 힘든 고개는 보릿고개입니다. 봄에 곡식이 떨어져서 보리가 나올 때까지 배고픔을 참고 넘어야 하는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입니다. ”
다음에는 꽃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는데,
“그럼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꽃은 무슨 꽃이요?”
역시 동백이니 목련이니 하며 대답이 나왔지만, 그녀는 목화꽃이 아름답다 하였는데, 이유를 물으니 목화꽃은 솜을 만들어 사람들의 의복이 되고 또 따뜻한 이불을 만드는데 쓰이니 이보다 아름다운 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있는 이 집의 기와 골이 몇이나 되는지 말하라 하였는데, 다른 이들은 집밖으로 나가 지붕을 쳐다보며 개수를 맞추었지만, 오직 김한구의 딸만은 방안에 앉아 바닥만 보다가 정확한 개수를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방안에서 그것을 알았느냐 물으니,
“비가 오고 난 다음이라 개와 골의 수가 땅에 패여 있어 그 수와 같기 때문에 방에 앉아 추녀 밑의 빗방울 떨어진 자국을 보고 알았습니다”라고 하여 관원이 그 총명함에 놀랐다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정순왕후의 실제 행적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린나이에 국모로 간택될 만한 자격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설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영조 35년 6월에 김한구의 딸이 왕후가 되었습니다.
이후 정조가 재위 14년 만에 갑자기 죽은 후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왕실의 가장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이란 방식으로 정사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수렴청정은 왕이 어릴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전까지 정형화된 형식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도상으로 완비되고 이후의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수렴하는 동안 대비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외척이 등장하며 정치세력이 재편될 수 있었습니다. 즉 정조대에 정국에서 소외되었던 경주김씨 벽파세력들이 정계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반정조 세력인 노론 벽파는 정순왕대비와 연결되어 환국의 형식으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경주김씨와 벽파세력은 순조원년 정조의 측근신하였던 윤행임(尹行恁,1762-1801), 풍산 홍씨 가문의 홍낙임(洪樂任), 은언군(恩彦君) 인(裀)을 제거하고 정조 년간 탕평정국에서 세력을 확장하였던 남인세력을 제거하면서 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순조 초반에 정계에 대표적인 경주김씨는 김관주(金觀柱)로 그는 우의정이 되면서 경주김씨 벽파의리를 이끌어가는 중심역할을 하였으며 김일주(金日柱)는 경연관으로서 국왕을 보호하였고, 김노충(金魯忠)은 외척가문의 인물들이 담당하는 직임을 주로 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김관주는 철렴후에도 꾸준히 경계에 등용되어 이들의 의리를 이어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주 김씨들은 정조 년간 탕평으로 그 의미가 많이 쇠퇴하였던 벽파의리를 정립하여 일당전제를 지향했던듯 하지만 이것은 큰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정순왕후가 철렴을 하게 되자 정치적으로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순조 4년 김조순 가문과의 국혼 방해의 혐의로 권유(權裕) 옥사(獄事)가 일어나 경주 김씨들이 궁지로 몰리게 되자 정순왕후는 재수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녀가 승하한 후 경주김씨 세력은 더욱 약화되어 金達淳 獄事가 빚어졌고 심환지와 김관주도 정치적으로 제거되었습니다. 이어 안동김씨의 세력이 학대되면서 일어난 김한록의 8자흉언 사건으로 경주 김씨들은 모두 제거되고 이후 정국은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정순왕후의 수렴첨정의 결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정순왕후가 과단성 있는 정치수행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다시 찾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하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정순왕후의 정치참여 결과 정조시기에 이루어 졌던 많은 진보적 업적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옴으로서 역사의 발전을 한걸음 후퇴시켰다고 보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
그녀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는 경우는 정순왕후가 임금을 도와 어진 정치를 행하였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특히 서적의 편찬사업에 노력을 기울여 백성들을 깨우치는데 기여를 하였다고 봅니다.
즉 『임진일기』를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30세에는 효도가 사람의 가장 중요한 도리라는 내용의
『효제』편을 저술하도록 하였고, 순조 즉위 후 대왕대비로써 수렴첨정을 하던 시기에는 왕실 기구를 대폭 줄이고, 혜민서와 활인서의 비용을 증액 시키는 등 백성들을 위한 청치를 펼쳤던 사실도 강조합니다. 이재민에게는 패물까지 하사하며 구제토록 하고 부정 관리를 엄벌토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정치참여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정순왕후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서고 정조 재위기간에 칩거하다가 순조 즉위 후 자신에게 주어진 정치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친정가문과 당파의 이익만을 위하였다고 지적합니다. 그 근거로 수렴첨정 기간 동안 남인을 몰아냈던 신유박해를 일으킨 점을 들고 있고, 그 결과 조정에 남은 노론 벽파가 진보적으로 발전하던 조선 정치의 경향을 모두 보수화시켰다고 보는 것입니다.
3. 홍주의사총
홍주 의사총은 홍성읍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말 홍성군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활동 가운데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수백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입니다.
역사적으로 홍주지역의 의병은 홍주일대를 무대로 1895-1896년과 1906년의 2차에 걸쳐 전개된 바 있는데, 제1차 의병은 정부의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 행위에 반대해 1895년 4월부터의 모병단계를 거쳐 단발령공포 직후 선구적으로 봉기하여, 척왜분위기를 전국적으로 고조시켜 을미의병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바 있었고, 제2차 의병이 바로 1906년의 홍주성전투를 말합니다. 이 전투 역시 수백 명이 산화해 의병전쟁사상 단일 전투로는 최대의 희생자를 내었고,그 뒤 전국적인 의병항쟁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두고 다투던 조선 말기인 1904년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이 체결되고, 이어 1905년에는 통감부설치와 한국의 외교권박탈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일감정은 전국적으로 고조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조직되었습니다. 을사조약으로 우리나라가 독립국가로서의 자주권을 상실하게 되자, 1905~6년 국권회복을 위해 민중과 양반유생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일무장투쟁이 본격화 되었던 것입니다.
먼저 1904년 7월 서울 교외의 조선군인들이 일본의 만행에 격분하여 반일의병부대로 전환한 이후, 원주·단양·제천·죽산 등 중부일대에서 의병이 속속 출현하기 시작했다. 을미의병(乙未義兵) 당시에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에서 중군으로 활약했던 원용석(元容錫)·박정수(朴貞洙) 등은 1905년 9월 원주 동쪽인 주천(酒泉)에서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사방에 격문을 보내어 제천·청풍·횡성·홍천 등지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했다. 그러나 활동도 개시하기 전에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와 일진회(一進會) 회원의 습격을 받아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후 이 부대의 의병들은 소규모의 부대로 분산하여 죽령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면서 유격전을 추진했다.
을사의병 중 가장 치열한 항쟁을 벌인 것은 홍주(洪州)의병이었습니다. 1906년 3월 안병찬(安炳瓚)·박창로(朴昌魯)·채광묵(蔡光默) 등이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홍주성(洪州城)을 점거하려 했으나, 도중에 합천(合川)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실패했습니다. 한편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도 1906년 3월경부터 충남지역과 전라도의 유생들을 규합하고 의병을 모아 봉기를 추진하다가, 그해 5월 11일 이용규(李容珪)·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정재호(鄭在鎬) 등과 함께 홍산(鴻山)에 모여 봉기를 최종 결정하고 의군을 출동시켰습니다. 서천(舒川)·남포(藍浦)·보령(保寧)·결성(結城)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였으며, 당시 홍성군수 이교석과 이주승도 처음에는 의병군에 호응할 기미였다가 일본군 다수가 입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성문을 닫고 입성을 막아 부득이 물러난 후 5월 19일에 홍주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다나카(田中) 소좌가 인솔한 일본군이 5월 25일부터 홍주성의 의병군을 공격하여, 30일 이후 일본군의 대포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5월 31일 폭격으로 조양문이 무너지고 중과부적으로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군은 민간인과 의병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의병 수백명이 전사하여 시체가 대교리 일대, 홍주천변과 남산 일대에 흩어져 방치되었습니다. 그 이후 홍주의병은 충청·전라 각지에 흩어져 수천 명 혹은 100여 명의 부대로 꾸준히 항쟁을 계속했습니다.
을사의병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1895년의 을미의병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평민출신 의병장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을사의병의 지도부는 여전히 양반 유생이 중심이었고, 지도이념도 위정척사사상에 기반 한 반외세의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양반 유생중심의 의병은 민중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이 가진 계급적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대중의 반침략적·반봉건적 요구를 수렴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전투력에서도 무기와 편제가 조잡하고 민병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전력을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07년 이후 일제의 침략이 더욱 심화되고 군대해산과 함께 군인들이 의병에 참가하면서 반침략·반봉건 지향이 전면에 등장하고 민중세력이 의병의 지도부로 진출하는 등 의병의 성격은 변화하게 되고, 전투력의 질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광복 이후 의병들의 유해를 현위치인 남산 묘역 뒤편 구릉지에 안치하고 ‘병오항일기념비’를 세우며 추모제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1949년 4월 5일 홍성군수 박주철(朴柱喆)과 홍성경찰서장 박헌교(朴憲敎)등이 공무원 300여명과 같이 현재 의사총이 있는 부근에서 식목행사로 식수하다가 의외로 많은 유골을 발견하여 지역 노인에게 자문하니 설명을 듣고 병오(丙午) 항일의병시 전사한 의병군의 유골이 임시 매장된 것으로 판명되어 충청남도에 그 사실을 보고하여 도비를 지원 받아 유골을 모아 이곳에 합장하여 분묘를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이 있게 하였습니다.
이장 당시 묘역에서 동곳(상투머리에 꽂는 뼈로 된 것)이 약 3되 반 쯤 발견되어 이를 군청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한국전쟁 당시 타버렸다는 당시 경찰서장 박헌교의 증언을 볼 때, 주로 선비들의 시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 볼 때 홍주의 의병(을미 병오)전은 주로 내포지방의 유림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행이 의병대장 민종식(閔宗植)은 성을 넘어 도피하여 죽음을 면했으나 뒤날 공주에서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풀려나 왔으므로 사형을 면했다고 합니다.
사당인 창의사에 900 의사(義士)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구백의총(九百義塚)이라 했던 것을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홍주의병의 핵심적 연구자료인 <홍양일기>. <홍양기사>, <조선최근사> 등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 전사자는 최소한 98인, 많게는 수백이라는 기록이 확인되었습니다.
묘는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고, 묘의 오른쪽에는 정인보(鄭寅普)가 짓고 심상직(沈相直)이 쓴 묘비,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丙午徇難義兵將士公墓碑)가 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습니다. 사당인 창의사(彰義祠)에 900의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구백의총이라 했던 것을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매년 5월 30일 순국의사 추모제를 올리고 있으며, 을미의병으로부터 연면히 계승되어 온 한말 홍주의병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4. 김좌진장군묘
1930년 1월 만주에서 북로군정서에 있던 김좌진이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된 후 본래 만주에 안장되었다가 부인인 오숙근 여사가 1940년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장군의 유해를 밀감상자로 위장해 국내로 운구한 후 장군의 고향인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했다가 1958년 주먹왕으로 알려진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아들 김두한이 그 해 어머니 오숙근 여사가 별세하면서 홍성에 있던 부친의 유골을 보령으로 이장하여 어머니와 합장하게 된 묘소입니다. 현재 묘역에는 뒤편으로 담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봉분은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옆에는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마(馬)석상 한 쌍이 세워져 있습니다.
무덤 뒤에 부인인 오숙근 여사의 묘가 있으며 1989년 김좌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충청남도기념물 73호로 지정하였고 보령시청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보령시에서는 매년 10월 22일 김좌진 장군의 호국정신과 업적을 기리기위해 김좌진 장군 묘소에서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김좌진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로, 충청남도 홍성 출신이며, 아버지는 김형규(金衡奎)이고,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에서 명문 양반가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나,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는데, 넉넉한 재산으로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고, 모친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첫째 김경진이 서울에 양자로 가면서 차남인 김좌진이 장남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고,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줬다고 합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지만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열고 가산을 정리해 학교 운영에 충당하고 90여 칸 집을 교사로 제공하였습니다.
그리고 홍성에 대한협회와 기호흥학회의 지부를 조직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고, 1909년『한성신보』 이사를 역임,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해 교감을 역임하였고,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습니다.
1911년에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조달 차 돈의동(敦義洞)에 사는 족질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갔다가 변절한 친척의 뒤통수로 미리 잠입한 일본경찰에 잡혀, 2년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1916년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해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에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고, 대한 광복회 부사령을 맡았습니다.
대한 광복회의 와해 이후 북간도로 건너가,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담해 군사 책임을 맡고, 정의단을 군정부(軍政府)로 개편한 다음 사령관으로 추천되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습니다.
우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 산곡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스스로 소장이 되어 엄격한 훈련을 시키면서 무기 입수에 전력하였으며, 1920년 9월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배출시켰습니다.
그러던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백두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같은 달 26일 고동하전투를 끝으로 청산리전투가 전개되었으며,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 휘하 부대가 서로 합동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3,000여 명을 살상하는 대전과를 올렸고, 특히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군은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등에서 큰 전승을 거두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전술전략이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어 독립전투상 금자탑을 세운 것입니다.
그 뒤 북진을 강행하며 그 해 말에 러시아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하여, 집결한 10여 개의 독립군단체가 통합,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자 부총재로 취임하였습니다. 약소민족의 독립을 원조한다는 레닌정부의 선전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많은 사람이 북쪽 러시아로 넘어갈 때, 김좌진도 우수리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생각한 바 있어 만주로 되돌아와 흩어진 동지들을 재결합해 대기하다가,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이 때 북으로 간 군대들은 자유시 참변(1921년)에 휘말려 무척 큰 피해를 입어 천만다행이기도 합니다. 한편 자유시 참변으로 반공노선으로 전향한 김좌진은 참변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만주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방앗간 등으로 동포들에게 인심을 얻으면서 한족총연합회 주석 등에 만주의 독립운동에 지도자로 활약했습니다.
또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 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습니다.
1925년 신민부(초기엔 한족연합회)를 창설하였는데,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해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하였고,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항렬이 같은 아우뻘인 아나키스트 김종진 등 아나키스트들을 받아들이자,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앞 자택에서 200 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습니다. 유언으로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네요.
당시 장군의 돌연한 비보가 전해지자 당시 국내외 혁명동지들의 놀라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국인까지도 아연실색하였는데, 특히 국내에서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양대 신문사에서 사원을 급파하고 정중한 조의와 거액의 부의금을 전달하였고, 재만혁명동지들은 중동선 산시역에서 사회장(社會葬)으로 장의(葬儀)를 마쳤으며, 그 후 동지들에 의해 유해는 비밀리에 고국으로 운구(運柩)되어 서부면 이호리(梨湖里)에 안장되었다가 1957년 정월에 지금의 묘지인 보령시 청소면에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김좌진의 암살관련하여 꽤 복잡한 배경이 추정되고 있는데, 김좌진이 운영하던 방앗간에서 일하던 일꾼으로 김좌진을 암살한 뒤에 도망쳤다고 하는 박상실은. 밝혀진 바로는 고려공산청년회의 회원이자 재중 한인청년동맹원으로 알려졌고, 김좌진의 측근들은 박상실의 배후로 김봉환을 지목하였는데, 그는 한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던 탓에 북한의 김일성이 김좌진 암살의 배후라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나중에 연구를 통해 김봉환과 김일성은 다른 인물인것이 밝혀졌습니다. 일단 북한의 김일성은 김좌진이 사망할 당시 겨우 18세(1912년생)여서 암살 배후일 가능성은 그닥..
공개된 중국 자료에서 드러난 박상실의 실명은 공도진, 혹은 이복림이라고 하네요.. 여튼, 공산주의자들이 김좌진을 암살한데 대해서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아나키스트들을 받아들이면서 만주내 한인들에게 영향력을 높여가자 공산주의 전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를 제거했다는 것이 일반적 설명이었는데, 공산주의계 생존자 일각에서, 김좌진이 일본과 내통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일본에 팔아넘겼고 이 때문에 김좌진을 암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ML파의 일원이었던 지희겸은 "김좌진이 하얼빈 총영사관 경찰국장 마츠시다와 밀담을 나눈후 공산당원들을 많이 잡아 가둬죽였기 때문에 암살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 근거가 바로, 나중에 일본이 조작한 것으로 밝혀진 '김좌진 귀순설'인데, 실제로 1923~1924년에 걸쳐 김좌진 장군이 '귀순'했다는 '귀순설'을 조작하여 선전하였고 김좌진은 한 때 억울하게 친일반역자로 모욕을 당한 적이 있기도 합니다. 이런 선전과 달리 실제 1924년 4월 9일 일본내부문서 따르면 김좌진은 죽어도 일본에 귀순할 마음이 없고, 의지가 확고하며 일본이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하면 일본과 맞서 싸우기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김봉환이 일본과 밀통했다라고 보고 있기도 한데, 즉슨, 지희겸이 주장한 김좌진과 마츠시다의 밀담 운운은 실제로는 김좌진이 아니라 김봉환이 그랬고,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을 일본에 팔아넘긴걸 김좌진에게 떠넘겼는데, 김봉환의 주장을 그대로 믿은 조선공산당은 박상실(공도진)을 보내 김좌진의 방앗간에서 일하게 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그를 암살했다는 추정인데, 명백한 증거는 없는 단순추정의 한계가 있기는 합니다..
한편 동료 독립운동가들의 공을 상습적으로 가로채어 원한을 샀다는 설도 있는데, 실제로 현재까지도 연변 조선족 자치구 거주 조선족들은 김좌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일본 내무보고서와 공산당 측 주장에 일치하는 주장이 있는데, 김좌진 측 테러에 대한 보복이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 신용하 교수는 적기단의 배후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당시 북만주에 사는 한인들은 가난했고 하루하루 먹기살기도 힘들고 괴로웠다. 그런 상황에서 지주에게 돈을 내는 것도 힘겨웠는데, 김좌진 세력은 북만주 한인들에게 강제로 돈을 뜯어냈고, 돈을 내는데 제대로 협조하지 않으면 협박과 테러를 하며 위협을 했는데, 그랬는데도 끝내 따르지않고 거부하면 죽여버렸다고 하고, 이런 테러활동에 대표적인 사람 중에는 이백호가 있다고 하네요. 그는 신민부 군인세력의 중심인물인데 김좌진 장군에게 총애를 받았던 인물로, 농민들을 갈취하고 살해하는 테러범을 김좌진 장군은 총애했던 겁니다. 김좌진 장군의 그런 낌새는 1924년부터 드러나는데,김좌진은 1922년 북만주 일대에서 대한독립군단(본부는 중소 국경지대인 동녕현)을 조직해 총사령관을 하였는데, 김좌진은 1924년 3월 발표한 부령 11호에서, 자신들이 군자금을 요구하면 돈을 줘야하며 주지않으면 "중형"에 처하게 할 것이며 본 군단을 외국 관헌에게 고소하면, 그 외국관헌이 적국이 아니면서 신고자가 친일반역자가 아니라해도 죽여버리겠다며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 뒤 1925년 3월 10일. 북만주엔 신민부라는 새로운 조직이 생겨났는데, 북만주에 있는 여러 단체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였고, 신민부는 제도만 보면 창립 때부터 삼권분립을 하긴 했지만, 신민부에서는 원로들로 참의원을 구성해놓았고, 행정기관을 견제하는 검사원을 두었고 중앙행정위원회에 민사부 군사부 참모부 외교부 법무부 경리부 교육부 선전부 실업부 등을 두었는데, 실제 조직 운영은 김좌진과 군정 세력이 주도했다고 합니다. 1920년대 후반부터 김좌진은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아나키스트와 연합했고, 신민부를 해체하고 혁신의회를 조직했다가 다시 해체한 뒤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했습니다. 즉슨, 이 과정에서 김좌진 세력이 벌인 테러는 당시 북만주 한인들에게 악명이 높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김좌진 측의 테러활동은 여러 자료가 증언하고 있는데, 동아일보에도 실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신민부원체포. 중국 연길도윤은 훈춘 방면에서 활동하는 신민부원들이 군자금을 구하다가 응하지 않는다고 조선인 다섯명을 살해한 일이 있음으로 각현에 체포령을 내렸다가 며칠전에 잡히였다더라." 등등
총을 잘 쏘고 모험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중용하는 인사경향 때문에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북만주에서의 이른바 빈주사건이며, 집안 동생되는 김종진 학살사건도 이백호 박래춘 등 잔인한 사람들에게 모험을 잘한다고 무기를 주고 자유롭게 풀어 놓은 결과, 최고 책임자인 김좌진 장군에게 갖은 악평이 퍼부어졌고 크게는 신민부 해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북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은 점점 존경심을 잃어갔고, 사람들에게 김좌진 세력과 테러는 무서운 존재가 되었으며, 북만주 한인들은 김좌진 장군을 마왕. 폭군이라고 부르며 무서워하고 멸시했다고 하고, 김좌진 장군은 북만주 재만한인사회에서 마왕처럼 군림했고, 재만한인들은 그런 김좌진 장군을 점점 멀리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1927년 2월 일제는 석두하자의 신민부 본부를 습격하여 김혁과 유정근(兪正根)등을 체포했고, 이에 신민부는 수습책을 논의했으나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자는 군정파와 민중본위의 자치를 실시하자고 주장하는 민정파로 분열되어, 군정파는 1927년 5월 김좌진을 위원장으로 하는 지도부를 독자적으로 편성하고 영안현 밀강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군정파는 1927년 8월 북만한인교육대회를 개최하는 등 한인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인 반면, 민정파는 1927년에 고려국민당을 조직하고 주하현 신개평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이 일어나자 신민부는 군정파와 민정파가 서로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대립하여 3부 통일회의를 결렬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그 이후로도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특히 이후 벌어진 ‘빈주사건賓州事件’을 계기로 민정파와 군정파는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3부 통일회의 결렬 통고가 있기도 전인 1928년 10월 20일에 신민부가 돈을 걷어가는, 관할하는 지역인 빈주(賓州)에서 한인 40여 명이 회합하여 군정파 보안대의 무력적인 행동에 대해 자위책을 협의하고 있었는데, 김좌진이 이끄는 군정파 군인들이 이를 두고 자신들을 반대하는 민정파가 운동을 주도한다고 판단하고 무장대 25명을 파견하여 류연동, 김봉진, 황혁(黃赫) 등 여러 명을 사살하고 윤필한, 김유문, 장문숙 등 다수의 사람들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이로 인해 1928년 11월 하순 영안현에서는 민정파 지지자 중심의 6개현 16개 지역 대표들이 모여 북만주민대회(北滿住民大會)를 열고 군정파의 영수인 김좌진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사태까지 빚어졌고, 그러고는 1930년 1월 24일에 박상실에게 총탄을 맞고 살해되었습니다. 실제로 일본내부기밀 문서에서, "김좌진 일파에 대한 지방의 반감으로 특히 빈주사건의 피해자 가족들 그리고 재중청년동맹의 일파는 계속 김좌진의 살해를 계획해 왔다. 지난 달 25일 그는 중동로 산시참에서 암살당했다."라 하여, 실제 정황과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5. 보령관아문(保寧官衙門)
조선시대 보령현 관아 앞에 1431년 현감 박효성이 남문(南門)으로 세운 것으로 전하는 문루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누문입니다. 1층은 주형장초석(柱形長礎石) 위에 세운 양편의 원형기둥을 성벽 위에 걸쳐 세워 성곽의 일반 문루처럼 가운데 1칸만 통행하도록 되어 있고, 기둥과 같이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웠으며, 2층은 누각을 설치하고 난간동자 위에 돌란대를 댄 간단한 난간을 사방에 둘렀습니다. 기둥 상부의 공포(栱包)도 간단한 무출목(無出目) 초익공(初翼工)계통이며, 그 하면에 연봉(蓮峰)을 장식하였고, 창방(昌枋)위에는 소로를 중앙칸 5개, 양협칸 3개씩을 배치하여 주심도리(柱心道里)를 받치고, 그 위에 중앙칸 2개, 양협칸 1개를 올리고, 거기에 부수하여 운공형(雲工形)의 장식판을 중앙칸에 2개, 다른 포간(包間)에 1개씩 첨가하였습니다. 지붕가구는 앞뒤 평주(平柱)에 대들보를 걸고 그 양편에 주두(柱頭)를 얹어 내목도리와 종보[宗樑]를 받치도록 한 2중량(重樑) 5가연(架椽) 구조이며, 종보 위에는 제형대공(梯形臺工)을 두었고, 마루도리를 비롯한 모든 도리들은 8각으로 깎았습니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비교적 건립 당시의 관아문 양식이 잘 남아 있습니다. 정면에는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이 걸렸는데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령성곽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여 쌓았던 봉당성(혹은 고남산성) 터에서 동쪽으로 약 400 m 떨어진 위치에 1430년에 기존의 성을 보강하여 쌓아 만든 것입니다. 남문 터의 왼쪽과 오른쪽 성벽은 안팎 양면을 돌로 쌓아 올렸고, 나머지 성벽은 바깥쪽만 돌로 쌓아 올린 구조이며, 성의 규모는 둘레 630여 m, 높이 3.5 m 가량이고, 성에는 적대 (성벽에 달라붙은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던 곳) 8개소, 남ㆍ북ㆍ동문 3개소, 우물 3개소 등이 있었다고 하고, 1432년에 제민당ㆍ공아 ㆍ병기고 등 140 여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전쟁 등을 거치면서 파손되고, 남문인 해산루 옆 성벽 약 70 m와 북쪽 성벽 약 360 m만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인, 시인이며 성리학자, 교육자, 화가입니다. 본관은 한산, 자(字)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죽피옹(竹皮翁)·시촌거사(枾村居士)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李塏)의 종고손이 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산해는 6세 때 이미 초서(草書)·예서(隷書)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15세가 되기도 전에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장원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이 이산해를 우러러 봤으며, 그 사람됨이 순후(醇厚)하고 숙성하여 얻기 어려운 선비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문장이 매우 뛰어나 선조대 8문장가의 한 명으로 칭송되며 나라에 그 문명(文名)을 날렸으며, 서화에도 능하여 대자와 산수묵도에 뛰어났고, 소년기에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여 대과 응시 자격을 얻기도 했지만, 바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작은아버지이자 서경덕의 문인인 이지함에게서 글과 학문을 계속 수학하다가, 뒤에 남명 조식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고, 그 뒤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조식의 문하에서 만난 김우옹, 정구, 곽재우, 정인홍 등은 그와 같은 북인을 형성하기도 하였고, 또한 정구와 김효원도 그처럼 조식의 문하와 이황의 문하를 동시에 수학하기도 했습니다. 이황의 문하에서 만난 류성룡은 후일 그와 같은 동인의 창당에 참여하지만 사사건건 대립하게 됩니다. 이후 향시(鄕試)에 장원하였고, 이어 생원시에 응시하게 됩니다.
한편 그의 총명함을 알고 윤원형이 자기의 딸과 결혼시키려 하자, 아버지 이지번은 즉시 벼슬을 버리고 숙부 이지함(李之菡)과 함께 단양(丹陽)의 구담(龜潭)으로 피신해서 숨어살았다고 합니다.
1564년 명나라 사신들이 계속 방문하여 조정에서는 문학(文學)을 두루 갖춘 사람을 가려서 원접사(遠接使)를 수행하게 하였는데 그가 선발되어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기도 했고, 그해 10월 정언, 1565년 1월 홍문관부수찬이 되고 이후 사간원정언이 되었다가, 5월 이조좌랑이 되었습니다.
1565년 2월 왕이 직접 선보인 제술 시험에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상을 받았고, 그 해 왕의 외숙이자 척신인 윤원형 세력과 심통원 일파 등이 몰락한 뒤 신진 사림들이 정계에 진출하자, 그는 동문인 김효원을 지지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남명 조식과 이퇴계의 문하생이며 서경덕계열이기도 한 그는 이이가 스승들 중 한사람인 이황의 학설인 이기이원론을 정면 반박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였는데, 류성룡, 정온, 박승임, 정인홍 등과 함께 동인(東人) 당을 형성했습니다.
1589년 정여립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황해감사 한준의 비밀장게가 올라온 날 밤 열린 중진회의에서 선조는 그에게 정여립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물었는데, 미리 고변 내용을 몰랐던 영의정 유전과 좌의정 이산해는 알지 못한다고 했고, 우의정 정언신은 그가 "독서인임을 알 뿐"이라고 말했고, 하필 당시 세 사람의 정승 모두가 동인이었습니다. 정언신이 정여립의 옥사를 고변한 자를 죽여야 된다고 하자 이산해는 있을수 없는 일이라며 반박하였습니다. 한편, 정언신이 했던 "정여립을 고발한 자들 10여 명만 죽이면 뜬 말이 스스로 가라앉을 것이다"라는 말에 대하여, 19일 대사헌 홍성민이 선조에게 "정언신의 그 말은 신과 유홍과 더불어 혀를 찼고, 이산해도 그 불가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언신이 재삼 말하자 이산해도 조금 굽혀서 '다시 생각해보니 솔직하게 말하면 우상의 말도 옳다'하였습니다"라고 말하여 이산해를 모략하였습니다.
정여립의 옥사 심문 때 그는 정승의 한 사람으로 형장에 참여하였는데, 선조는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언신 등에게 위관(委官)이 되어 죄인들을 심문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서인의 모사가인 송익필(宋翼弼)의 권유로 입궐한 정철이 차자를 올려,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선조는 정언신 대신 정철을 우의정으로 제수하고 위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결국, 정철과 서인 세력은 정여립의 난을 동인 세력을 타도할 절호의 기회로 삼아 기축옥사를 일으켰고, 이때 정언신, 정개청(鄭介淸), 백유양(白惟讓), 이발(李潑), 이길 등 많은 동인이 죽거나 귀양을 갔으며, 이때 정철은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사주해 이산해를 얽어 넣으려고 했으나 이산해에 대한 선조의 신임이 두터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즉슨, 1589년 12월 14일 호남 유생 정암수를 비롯한 50여 명이 '이산해, 류성룡, 나사침, 나덕준, 정인홍, 정개청이 정여립과 한몸과 같은 사이였다고 하면서, 그들을 진퇴시킬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를 받은 선조는 크게 노하여 오히려 이산해, 류성룡을 면접해 위로하고, 정암수 이하 10여 명에게 죄를 줄 것을 명하여, 이에 양사가 계사를 올려 죄주지 말 것을 청했으나 선조는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산해는 위관인 정철이 동인을 몰살시키려 했다고 판단했고, 그 배후로 성혼을 지목했습니다. 한편 서인들이 당시 형장의 책임자는 정철이 아니라 동인 류성룡이라고 주장하자 그는 서인들에 대한 반감과 원한, 불신을 한층 더했습니다.
1588년 의정부 우의정, 1589년 좌의정을 거쳐 1590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임진왜란 직후 조정의 천도를 주장했다가 이를 기회삼은 서인 계열 언관들의 맹비난을 받고 파직되었습니다.
한편, 선조의 병환이 잦고 나이가 40을 넘은 이유를 대고 후사를 빨리 정해야 된다는 공론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산해는 좌의정 정철과 류성룡, 대사헌 이해수, 이성중 등을 의정부로 불러 광해군을 후사로 정해야 된다고 결정해놓고는, 따로 비밀리에 인빈 김씨의 친정 오빠인 김공량에게 사람을 보내 정철 일파가 인빈 김씨와 신성군을 모해하려 한다고 고하였고, 김공량은 다시 인빈 김씨에게 이사실을 고하여, 이에 인빈 김씨는 선조에게 찾아가 정철이 자신의 모자를 제거하려 한다면서 울면서 궐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청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건저의 사건이 터집니다...
전모를 보자면, 1591년 우의정으로 승진하면서 이조판서를 겸하게 된 류성룡이 정철을 찾아갔는데,
“우리가 국가의 중한 책임을 맡게 되었으니 마땅히 큰 일을 해야 할 것이오. 정비에게는 왕자가 없고 후궁에게는 왕자가 많이 있지만 아직 국가의 근본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세자 세울 계책을 정부에서 세워야 할 것이고, 우리들이 이 일에 힘써야 할 것이오.”
이에 정철이,
“옳은 말이오. 그러나 영상이 잘 들을까?”
하자, 류성룡은
“우리 두 사람이 하자고 하면 영상이 어찌 듣지 않을수 있겠소.”
하니 정철도 그리 하기로 승낙하여, 이 두 사람의 요청에 이산해는 좌의정 정철과 류성룡, 대사헌 이해수, 부제학 이성중 등을 의정부로 불러 광해군을 후사로 정해야 된다고 결정한 것인데, 두 사람이 영의정이던 이산해에게 의논하여 경연 석상에서 선조에게 건저를 주청하기로 기약했던 거지만, 정작 이산해는 기약한 첫 날에 나오지 않았고, 두 번째 약속한 날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보통 역사적으로는, 사실 이산해는 겉으로만 조정의 의논에 따르는 척 하고 내심으로는 다른 뜻을 갖고 있었고, 과거 정여립 사건 때 정철과 적이 되지 않기 위해 정언신의 후임으로 정철을 추천하기도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인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절치부심, 기회를 노리던 중이었다는 것이고, 또한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가 신성군을 낳자 신성군을 세자로 밀고자 하였는데, 선조 또한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에게 마음이 기울고 있었던 것을 이미 인빈의 오빠인 김공량과의 친분을 통해 알고 있었던 이산해는, (오죽하면, 권필은 두 사람의 관계를 "한나라 승상의 칠향거(七香車)가 둘둘둘 굴러가서, 김씨, 장씨 집으로 밤마다 흘러가네"라는 시로 남길 정도였다고 하네요..) 그렇게 세 사람이 함께 모여 건저를 주청하기로 약속한 날, 병을 핑계로 정청에 나가지 않았고, 건저의를 같이 주청하기로 한 바로 전날 아들 이경전을 시켜 인빈 김씨의 오빠인 김공량을 찾아가 이야기를 모두 전한 다음 "정철은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고 난 다음 인빈과 그 소생인 신성군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던 것입니다.
한편, 이산해는 만조백관들을 이끌고 선조에게 가서 모른 척하고 후사를 세울 것을 주청했고, 이에 선조는 누가 후사로 적합한가를 물어보매, 좌의정 정철은 바로 광해군이 영명하니 세자로서 적합하다고 추천하고, 이에 대사헌 이해수, 부제학 이성중 등만 정철의 주청에 동의했고, 동인인 류성룡과 이산해는 약속과 달리 침묵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에 진노한 선조는 그 자리에서 정철을 파직하고, 정철의 주청에 가세했던 서인인 이해수, 이성중 등의 관직을 강등하고 외지로 쫓아내버렸습니다...
이후, 정철의 처분을 놓고 동인 내 의견이 갈리는데, 파직, 유배된 정철의 처벌을 놓고, 정승을 역임한 고관이라 차마 죽일수는 없다며 류성룡과 우성전은 선처를 호소했고, 이산해는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잊었느냐며 분개했고, 정인홍 등은 류성룡과 우성전을 공박했습니다.
그 중, 강경파였던 이산해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동인들에게 양사가 합계하여 탄핵할 것을 지시했고, 반대로 김수와 우성전은 유배로 끝내야 한다는 온건론을 주장하여, 이렇게 바로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이산해, 정인홍의 주장과 사형은 지나치다는 류성룡, 우성전 간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류성룡과 우성전을 공격하면서 우성전이 축첩을 한 것과 부모의 상중에도 기생 첩이 수시로 우성전의 집에 출입한 점까지 들먹이면서, 이산해는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난으로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을 어떻게 풀수 있느냐며 온건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정철의 처벌수위 문제를 놓고 동인은 심한 내분에 휩싸입니다.
이렇게 당시는 임진왜란 발발 직전이었음에도, 정철의 치죄 문제와 전랑 천거 문제 등을 놓고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동인 간에 대립하여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는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와 죽이지는 말자, 유배를 보내자는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 된 것으로, 이때 이산해는 정철을 죽여야 된다고 강력하게 역설했고, 정철을 살려두면 다시 음모를 꾸며 동인을 일망타진하려 들 것이니, 이번 기회에 정철을 죽여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우성전(禹性傳)과 이산해가 대립하게 되면서 류성룡은 우성전의 편을 들어 남인이 되고, 이산해와 정인홍, 이발(李潑) 등은 북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때부터 우성전의 집이 남산(南山)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남인이라 불렀고, 이산해의 집이 서울의 북악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북인이라 불렀으며, 후에 북인은 선조 뒤를 이을 임금 자리를 놓고 다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지는데 이산해는 이 때 대북의 편에 섭니다.
사실 남인과 북인의 분당은 이산해가 정철을 죽이자고 하거나 정철의 처벌이나 전랑 천거 이전에 이미 이황학파와 조식학파 간 사물관, 이론의 차이로 인해 사이가 이미 벌어져 있었는데, 기를 부정적으로 보고 이로써 기를 다스려야 된다는 이황 학파와, 이와 기를 논하는 것은 공리공담이라고 본 조식 학파의 이념갈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1591년 아들 이경전(李慶全)을 시켜 정철(鄭澈)을 탄핵하게 하여 실각에 성공 강계로 유배시키고, 그밖의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시키거나 귀양 보냄으로써 동인의 집권을 확고히 했는데, 그는 명백히 서인당의 영수 정철 외에도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난 이전부터 동인을 공격해왔던 서인 모두를 문책해야 한다는 강경파적인 입장을 줄곧 견지했고, 그의 서인당에 대한 처벌에 동인은 다시 강경파와 온건파로 의견이 나뉘어 갈등하게 됩니다. 결국, 서인 처벌에 대한 싸움에서 강경파인 북인이 승리하여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이산해는 정철이 옥사를 빙자해 자신의 세력을 제거하려 한다고 의심하여 뜬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임금이 간단한 명령을 적은 문서를 승지에게 내려 의금부에서 옥사를 다스리고 있던 정철을 쫓아냈으며, 사헌부와 사간원도 함께 정철의 죄상을 논하는 글을 올려 정철은 결국 멀리 강계로 귀양을 갔습니다. 정철이 귀양가자 이산해는 동인 가운데 정철에게 쫓겨났던 자들을 불러 조정의 관직을 메웠고, 정철을 따르던 사람들을 내쫓았습니다. 이후 이산해는 기축옥사의 원인을 제공한 송익필을 유배시킵니다. 1592년 이산해는 유배된 정철의 사형을 선조에게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정철의 사형 건의가 무산되자 그는 북인계 언관들을 시켜 정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재차 상소하였으나 무산되었지만, 정철은 1593년 배소에서 병사하고 맙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급박해진 형국에,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조정의 파천을 반대하는 중에 이산해는 과거에도 파천한 사례가 있다고 말하여, 도리어 파천의 책임을 이산해에게로 돌리는 말이 나와, 양사가 합계하여 이산해의 파면을 청했다가 선조가 윤허하지 않았는데, 이미 한양이 텅빈 상황이라 파천 말고는 방법이 없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후 조정은 평양을 거쳐서 의주로 파천하였고, 1592년 5월 2일 이산해는 임진왜란이 터진 뒤 국정을 잘못 이끌었고 조정을 파천할 것을 청했다는 이유로 서인계 언관과 성균관 유생들의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당합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5월 3일 양사에서 그를 유배보내야 된다고 탄핵하였고, 선조는 삭탈관직에서 마무리지으려 하였으나 양사는 5월 4일부터 5월 17일까지 계속 합계하여 그를 공격하였고, 5월 17일 중도부처의 명이 떨어졌습니다.
류성룡은 사헌부와 사간원에 알려 이산해가 음모를 꾸미는것 같다는 의혹을 암시하면서, 이후 류성룡에 대한 감정과 함께 정철에 대한 증오와 원한은 더 커졌고, 이때 일부 백성들이 정철의 서용을 주장했는데, 이산해는 정철이 자신을 낙마시키기 위해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라 의심했고, 이산해의 문하생과 제자들은 서인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더 커졌습니다. 사직하고 백의(白衣)로 왕을 수행하던 중 평양에서 다시 서인계 언관들의 집중 탄핵을 받아 강원도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가 1595년 다시 해곡(海曲)으로 이배되었습니다. 유배지에서 그는 시와 서예, 그림 등을 그리며 우울함을 달랬는데, 워낙 전서와 해서, 초서에 두루 능하여 전란 중인데도 그의 작품을 구하러 유배지를 찾아오는 사대부와 유지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임진왜란 개전 후 초기부터 장군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내분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순신이 류성룡, 권율 등과 친분이 있자, 그는 상대적으로 원균을 지지, 옹호하였습니다. 한편 유배지에서도 북인의 당수로서 실력을 행사하였고, 남인들의 타협론에 의혹을 제기하며 남인들이 서인들과 내통했다는 여론을 조성하였습니다.
1595년 1월 11일 선조의 특명으로 다시 석방되고 관작을 돌려받았는데, 서인들은 그가 임진왜란 초 파천을 주장했음을 지적한 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산해는 결국 석방되었습니다. 1595년 1월 24일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고, 3월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상소를 읽고 다시 출사하게 하여 파천한 조정이 있는 곳으로 갔다가, 9월 다시 사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595년 10월 천도한 조정에서 열린 비변사 회의에서 비변사의 특별 추천으로 홍문관 및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사직 상소인 걸퇴소(乞退疏)를 올리고 며칠의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선조가 다시 부르자 장문의 사직 상소인 걸면본직병사대제학소(乞免本職竝辭大提學疏)를 올려 거듭 사양하였지만, 윤허되지 않았고, 다시 서인계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지만, 서인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직을 겸직합니다. 이후 북인의 당수이자 정신적 지주로 있다가, 북인 내에서도 다시 기성 북인들에 불만을 가진 소북과 기성 세력인 대북으로 갈라졌을 때, 이산해는 홍여순과 함께 대북세력을 지지하였으나 소극적으로 관망하였다고 합니다.
이조에 천거된 그의 아들 이경전을 막고자 당시 이조전랑 정경세가,
“이경전은 유생 때부터 남에게 비방을 많이 들었으므로 이조에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라 말하여, 이 말을 듣고 이산해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모두 크게 노했고, 이 발언의 진원지로 이산해는 류성룡을 의심하여, 이후 남인 중 류성룡계파에 대한 그의 분노와 불만은 한층 더해갔다고 합니다.
그때 남인이었던 이덕형이 재상이었는데,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이준에게,
“자네가 경암(정경세의 자)에게 말하게. 만약 이경전이 전랑에 천거되는 것을 막으면 반드시 큰 풍파가 일어날 터이니, 이는 조정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가 아닐세. 이는 내가 사사로이(그의 처남이기도 하다.) 하는 말이 아닐세.”
이준은 정경세와 고향이 같고, 이경전은 이덕형의 처남인 까닭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지만, 정경세는 듣지 않았고, 결국, 얼마뒤 대간 남이공이 정승 류성룡을 참혹하게 탄핵했는데, 이를 두고 훗날 이중환은, '정경세는 본래 류성룡의 제자였으므로, 이산해는 류성룡이 정경세를 사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그러므로 남이공을 시켜 류성룡을 탄핵하도록 한 것이지, 류성룡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고 보았습니다.
1599년 겨울에 다시 의정부영의정에 임명되었는데, 1599년 3월 북인 홍여순(洪汝諄)의 대사헌 임명 문제로 다시 갈등이 생깁니다. 홍여순이 대사헌에 임명되자 석 달 후 바로 그 사헌부에서
“‘홍여순은 평생 경영한 일이 모두 재산을 불리고 사치를 일삼는 것’이고 북도순찰사(北道巡察使) 시절에는 사람을 풀처럼 여겨 함부로 죽였으므로 온 도(道)의 사람들이 그 살점을 먹으려 했다.”
고 탄핵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훗날 백호(白湖) 윤휴가 좌참찬 윤승길(尹承吉)의 ‘영의정 추증 시장(諡狀)’에서 ‘윤승길이 병조참판일 때 병조판서 홍여순이 뇌물을 멋대로 받아 챙기자 병조의 인사가 있는 날(政日)이면 그와 한자리에 앉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고 기록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이 과정에서 이산해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 친구 집을 전전하고 있던 송익필은 불우하게 죽고 말았고, 그렇게 동인들은 정철의 처벌 과정에서 남북으로 갈라졌습니다. 강경파였던 이산해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동인들에게 양사가 합계하여 탄핵할 것을 지시했고, 김수와 우성전은 유배로 끝내야 한다는 온건론을 주장했습니다.
그 와중에 당론을 외면하면서까지 홍여순을 지지하는 이산해·이이첨 등의 대북과 홍여순을 비판하는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의 소북으로 분당되었고, 거기에 대북은 1600년 홍여순과 이산해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면서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육북(肉北), 홍여순을 중심으로 한 골북(骨北)으로 잠시 나뉘었다가, 세자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하는 소북의 유영경과 경쟁하면서 골북과 육북은 다시 대북으로 합쳐집니다.
사직과 복직을 반복하던 이산해는 1602년 영의정에서 물러나, 그 뒤 영중추부사로 전임한 뒤 아성부원군을 겸하였으며 그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습니다. 이후로도 영중추부사와 기로소대신이라는 직함으로 계속 조정에 출사하였다. 1605년 이후 다시 선조의 뒤를 이을 임금 자리를 놓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지자 그는 갈등을 봉합하기 어렵다고 판단, 대세를 따라 대북의 편에 섰는데, 당시 이산해는 선조가 자신이 서손(庶孫)인데다가 방계 승통이라는 열등감을 안고 있다는 것과, 유일한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영창대군을 앉히고 인목대비가 섭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한 듯합니다. 그러다가,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사망하자, 원상으로서 정무를 주관했고 옥새를 탈취하려는 소북계열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한 뒤 광해군에게 옥쇄를 넘겨주었습니다.
1609년 봄 둘째 손자인 한림(翰林) 이구(李久)가 불행히도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상심하여 이후 관직에서 은퇴해 있다가 1609년 음력 8월 병석에 누워 병세가 악화되자 왕이 친히 어의를 내려보내 진맥하게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고, 그해 음력 8월 23일에 죽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항년 70세였습니다.
아신해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가 있는데, '도량이 심후한 데다 청렴하고 근신하기로 이름이 났는데 오랫동안 전형(銓衡)의 자리에 있으면서 사류(士類)들을 진출시켜 한때 인망이 높았다. 그러다가 만년에 이르러 세상에 영합하여 지위를 잃을까 걱정하는 비루한 인물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불초한 아들 경전(慶全)이 사람답지 못한 자들과 서로 결탁하여 말을 만들어내고 사건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것이었다.'는 평가도 있는 반면, 선조는 이산해에 대하여,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고 몸은 옷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뭉치의 참된 기운이 속에 차고 쌓여서 바라보면 존경심이 생긴다"라고 하였고, 대사헌으로 있을 당시의 이이가 경연에서 "이산해가 평시에 벼슬을 지낼 때는 다른 사람 보다 나을 것이 없었는데, 이조판서가 됨에 이르러서는 모든 공론을 따르고 청탁을 받지 않아, 뜰 안이 쓸쓸하기가 한 겨울의 선비집 같고, 다만 착한 선비를 듣고 모아 벼슬길을 맑게 하는 것만 마음에 두고 있으니, 이 같은 일이 수년만 지속된다면 세상 풍속이 거의 변화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기자헌(奇自獻)은 그의 지혜에 감탄하면서도 그를 어려워하며 꺼려했는데, 이를 두고, “이산해는 아마 용과 같은 사람이다. 붕당이 있은 뒤로 이와 같은 사람을 처음 보았다.”고 했으니, 대개 그 지혜와 술수에 깊이 감복하여 상당히 껄끄러워했다고 합니다.
문장에 능하여 일찌기 선조대 문장 8대가의 한 사람으로 불렸고, 관료생활과 유배생활 중에도 저녁이면 서당을 열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의 문하에서는 이홍로(李弘老), 조정(趙挺), 조존세(趙存世), 김선여(金善餘), 임취정(任就正), 박정현(朴鼎賢) 등이 그의 문인으로 배출되었으며, 이들 중 김선여 등은 글재주를 인정받아 당대에 사관(史官)으로 발탁되기도 하였으며, 그의 종질인 이기(李墍) 역시 그의 문인이었습니다. 그는 서예와 그림에 능하여, 특히 초서(草書) 대자(大字)를 잘 썼으며, 산수묵도(山水墨圖)에도 뛰어났고, 붓글씨와 그림을 배우러 젊은이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으며, 미수 허목 또한 한때 그의 문하에 출입하며 그림과 글씨를 배웠다고 하구요, 그림도 잘 그렸고, 목각 공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후에는 선조의 지문(誌文)을 짓기도 했고, 안강의 이언적신도비명(李彦迪神道碑銘)과 경기도 용인의 조광조묘비(趙光祖墓碑) 등이 그의 글씨라고 합니다.
6. 보령 성주사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聖住面) 성주리 성주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이 곳에는 신라 말기 구산선문 중 하나로 이름 높았던 사찰로, 전승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 법왕이 왕자일 때 삼국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위령하는 뜻으로 오합사(烏合寺)를 지었다고도 하며, 법왕이 왕자일 때 삼국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위령하는 뜻으로 세웠다고 하는데, 실제로 성주사로 명명된 것은 통일신라 말입니다. 이 때 성인은 신라 말기의 명승 무염국사를 가리키며, 무염국사가 성주사의 주지로 있을 당시 성주사는 불전 80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 등 천여 칸에 이르는 큰 규모로 번성했고, 성주사에서 정진하는 수도승만 2,000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백제 시대에서부터 조선 초기까지 망라하고 있으며, 현재 국보 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보물19호 오층석탑, 보물20호 중앙삼층석탑, 보물47호 서삼층석탑, 지방문화재인 동삼층석탑과 석계단과 석등이 산재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발굴 조사를 통해 금당지, 삼천불전지, 회랑지, 중문지 등의 건물터가 드러났습니다. 절터 서북쪽에 있는 높은 격식의 전각 안에 바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있습니다.
무염국사 입적 두해 뒤에 세운 부도비로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글을 짓고 그의 조카 최인연이 글씨를 썼는데, '낭혜'는 무염국사의 시호이며, 신라 태종 무열왕의 8대손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21세에는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나 그곳에서 선종을 익혔다고 합니다. 귀국하여서는 성주사의 주지가 되어 신라의 선종을 크게 융성시켰고, 88세의 나이로 입적하여, 진성여왕이 낭혜를 기리기 위해 시호와 함께 부도비를 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부도비는 전해오는 신라의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높이 4.5미터, 폭 1.5미터, 두께 42센티미터로 드물게도 거의 원형 그대로이고,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 역시 조각이 화려하고 뚜렷하여 신라 부도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재질이 강하고 아름다워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는 인근 남포 오석으로 만든 비신에 5천여자에 달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편, 심연동 계곡을 등지고 성주사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오층석탑이 눈에 띄고, 오층석탑 뒤편에 자그마치 세 기의 석탑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습니다. 모두 삼층석탑으로 신라 하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주사지 서삼층석탑(보물 제47호. 높이 4 m, 지대석 너비 2.8m. )은 성주사지에 있는 3개 석탑 중 하나로, 2중기단 위에 신라석탑의 기본형을 가장 잘 계승하고 있다는 평입니다. 지대석은 여러 개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성되고 하대석(下臺石)은 4개의 장판석(長板石)으로 되었는데,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이 모두 중석(中石)과 갑석(甲石)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위에 1매석이 별석(別石)으로 끼워져 있습니다. 탑신부는 옥신(屋身) ·옥개(屋蓋)가 각각 1석으로 되어 있고 각층의 체감비율은 건실한 편이며,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1개만 남아 있고, 사지(寺址)에 있는 다른 두 탑에 비하여 각부의 너비가 넓어 매우 장중한 느낌을 주며 비례도 정제되어 있는 느낌을 줍니다.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9호. 높이 6.6m, 지대석 너비 2.7m. )은 금당지(金堂址) 전면에 있는데, 위치상 불탑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층급의 수에 차이를 보일 뿐 각 부분의 양식이나 조형수법이 모두 사지(寺址)에 있는 다른 두 개 탑과 동일합니다. 2중기단(基壇) 위의 5층 석탑으로 넓은 지대석 위에 하대석(下臺石)이 놓였고 그 위에 중대석(中臺石)을 얹었는데, 기단부는 갑석(甲石)과 상층 중석(中石)이 모두 각기 4개의 판석(板石)으로 되었고,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석이며, 이 탑 역시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1개만 남아있습니다. 하층 기단의 약간의 손상을 제외하면 그 형태가 거의 완전하며, 석재(石材) 구성에 규율성(規律性)을 보였고 각층 체감의 비율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보물 제20호. 높이 3.7 m)으로 성주사지 금당(金堂) 전면에 일직선으로 건립되어 있는 3층석탑 2개와 5층석탑 1개 중 중앙에 있는 3층석탑인데, 그 서쪽에 서있는 3층석탑과 거의 동일한 양식이고 규모도 대등합니다. 2층 기단(基壇) 위의 3층석탑으로 여러 개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지대석(地臺石)을 삼고 그 위에 1개로 된 중대석(中臺石)을 얹었고, 갑석(甲石)은 4개의 판석(板石)으로 덮었으며 상층기단 역시 4개의 판석으로 세웠습니다. 갑석 상면 중앙에는 탑신을 받기 위하여 별석(別石)이 놓였고,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석으로 되어 있는데, 1층 옥신은 약간 장대한 편이고 2층 이상의 옥신은 적당한 체감을 보입니다. 옥개석은 옥신에 비하여 넓은 편이고 옥개 상면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며, 각층 꼭대기에는 각형(角形) 2단의 받침이 있어 탑신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탑의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위에 복발형(覆鉢形) 석재가 더 얹혀져 있습니다. 이 탑은 장중한 느낌의 서탑(西塔)에 비하여 경쾌하며 조각수법도 매우 우수하고 상하 비례나 결구수법(結構手法)도 잘 정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