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 불화살을 계속 쏘아 보내는 땡볕 들길을 따라 더위 먹은 그림자를 끌고 걷는다. 산 숲이 아는 체 이마의 땀을 닦아주려고 긴 팔을 뻗는 오지랖 넓은 건 여전하다 어린 날 매일 다니던 이 길이 오늘은 낯설고 멀기만 하다 쉴 새 없이 땀을 훔치는 길바닥 처진 바짓가랑이에 매달린다. 발자국마다 폴폴 먼지가 인다. 헉헉 더운 입김을 내 뿜으며 물기 마른 바람이 나무늘보 같이 꿈 뜬 내 등덜미를 밀다가 제 풀에 주저앉는다. 저수지의 물방 게도 붕어도 메기도 낮잠에 들었는지 기척이 없다 벌판이 끝나면 도랑물 흐르는 마을 입구다 부모 가신지 오래 아는 사람도 없는 그리워 지나다가 들린 고향은 그동안 왜 아니 왔냐고 그렇게 먼 길 돌아 이제 왔냐고 귀에 익은 투박한 사투리로 거친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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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나를 선택해 준 그분을 만난 것이
내 생에 가장 큰 행운입니다
그렇게 당신과 내가 만나서
견고한 울타리로 살게 되다니
크기가 다르고 모습이 달라도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리는 사이로
산다는 것이 놀라운 일 아닌가요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것 또한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자갈밭이나 산비탈에 버려진 채
세월이나 죽이며 잊혀 갈 것을
허다한 돌중에 택함 받아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되어
숨결과 심장의 고동을 듣습니다
떼어놓을 수 없도록 하나 된
동행이 아름답지 않나요?
행여 눈 먼 바람이 헤매지 않고
지나가도록 빈 틈 너머로 보는
세상을 그립게 읽는 재미
거듭난 새이름으로
사랑이 깊어가는 나날입니다
이반의 그림자*
모두가 너무 잘나서 끼어들지 못하고 언제 어디서나 밀려나고 잊혀 져도 늘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기웃거리면서 한번이라도 정말 손잡는 누군가 손 내밀고 다가오는 정이 그리운 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버팀목 하나 없고 등 굽어 비틀어진 나무 같은 그림자도 여위면 가벼운가. 그냥, 툭 던져진 무능(無能)같이 뿌리 없는 그가 있습니다
못난 사과라면 먹기나 하지, 과거에도 금송아지 한 마리 없고 눈물을 딛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살아 있어 너무 고맙고 그것이 기적이라고 자랑을 꽃 피우면서 신이 수시로 내려와 거니는 더는 내려설 수 없는 바닥에 그가 있습니다.
* 톨스토이의 동화 바보이반
3억 년의 사랑
늘 그랬다
주눅 들고
내 세울 것 없어
부끄러웠다
밤마다 창가에서
혼자라고 외로울 때
별을 쳐다보는 버릇이 늘고
그 많은 별 중에
유독 반짝이는 별 하나
쉴 새 없이 손짓하는
3억 년 전부터
나의 별이라고
귀띔해 주는 것이다
나도 이제 자랑이 생겼다
이런 사랑
해 보았느냐고!
당신
깊이 사랑할 때
나를 눈멀게 한다
나는 사라져
당신 속으로 들어가고
당신만 남는다
아름다움도
그리움도
기다림도
밤낮 없이
당신으로 울고 웃고
천지간 가득
당신을 읽는다
강과 나
일 없이 답답한 날은
가까운 강으로 가서
한 시간이고 한나절이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강이 말을 걸어올 때까지
귀를 씻으며 기다리고
계속해서 수많은 나를 띄운다
기대어야 안심하는 나와
어디에도 매달리지 않는 강
흘러서 사는 목숨은
저와 내가 다르지 않는데
강은 수심을 키워 하늘을 품고
나는 근심에 매달려 바닥을 친다.
쑥쑥 자라는 갈대와 바람이
눈부신 춤사위로 어울리면
아름다운 풍경 하나 되어
마음의 방에 액자로 걸리는
이에 뒤질세라 나도 몸 바꾸어
산 그림자에 선뜻 가슴을 내어준다
칡넝쿨
외로워서
내 발바닥을 딛고
속내를 감춘 팔로
내 몸을 둥글게 친친 감으며
기어오르는 너를
어여삐 곁에 두고
무성한 그늘을 펼치느라
너만 지켜 볼 수 없었는데
어느새 내 키를 따라
쑥쑥 자란 너의 줄기
나를 꽁꽁 옭아매었구나
너는 죽자 사자 내게
전신으로 매달렸는데
나는 다만
외로움 때문에
한 몸이 되어 공생하려고
숨이 막히도록 껴안는
너를
전혀 몰랐구나.
기대
기대하지 말자
격언처럼 다짐해도
돌아서면 기대하게 된다.
기대했다가 어긋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믿는 마음
언젠가 기대한 만큼 되리라는
그래서 또 기대하게 된다.
번번이 실망으로 돌아와도
기대하는 동안은 즐겁고
행복하기도 해서
기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살만한 세상인 것을
이제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기대하지 말자 그냥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조금도 서운하지 않으리라
기대는 넘칠 때보다
조금 모자랄 때가
더 아름다운 것을
겨울밤
-누이의 뜨개질
외로움을 뜨개질 한다
창을 때리는 바람소리 벗하여
어느 땐가 스쳐 지난 인연을 그리며
가슴 깊이 꺼낸 그리움의 실로
누군가 입을 때 행복한
두툼하게 내복을 짠다.
몸통이 생겨나고 팔다리가 자라고
대바늘을 놀릴 때마다
스며든 마음이 더 따뜻하다
비로소 완성된 내복
입을 주인은 멀기만 하다
아직 쓸 만한 몸매
가슴을 탐해도 좋은 나이
설렘도 잠시
짠 내복을 풀어 바구니에 담는다.
그렇게 짜서는 풀고
풀어서 다시 짜도
겨울밤은 길었다.
흔들의자
햇살의 그림자가 발 밑을 적시는 창가
누군가 품어야 살아나는 흔들의자
가끔 지친 바람도 앉았다 가고
꽃잎 물고 날아온 새소리 스쳐가고
할 일 없는 구름도 기웃거리다 간다
침묵을 깨뜨리는 헛기침도
남 몰래 뒤척이며 기다리는 모습
쫓기는 시간을 가볍게 내려놓고
비둘기 몇 마리 불러와 잠시간
아득한 그리움에 설레도록
아픔을 받아주고 평안을 내어주면서
무거운 몸과 마음 날개를 달도록
한사코 앞뒤로 흔들리면서
바닥을 타는 작은 그네
제 자리서 떠가는 조각 배 한 척
꿈 많던 시절이의 발자국소리
젊은 날의 노트를 펼쳐 읽는
그림 같은 풍경도 아름다웠다
여기까지 와서
아무리 탐이 나도 내 것이 아니고
아무리 부러워도 가질 수 없다
너무 멀리 와서 뒤돌아 설 수 없고
너의 표정, 너의 몸짓, 너의 웃음과 말투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흉내 내어서는 안 된다
너의 그림자를 따라가다가
이건 아니지, 하다가도 어느새 또
아무리 못나도 내 얼굴로 살고
물건마다 주인이 있듯
스타일이 있고 냄새가 있고
내게 맞는 제스처가 있지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다가
덤핑이 되거나 버려지거나
언제까지 그럴 건데
집에 가자
납치를 당하고
가출을 일삼아도
네 잘못이 아니다
아픈 세월 탓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무엇을
따지고 나무라겠는가
못난 부모가
용서를 받아야 마땅하다
얼마나 두렵고 막막했는가
소중한 아들 딸들아
그러니까 이제
집에 가자
멈출 수 없다
얼마나 다행인가
서두르지 않고 일정한 걸음으로
너는 그렇게 오고 있고
나는 또 너에게로 가고 있는 것을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둘 사이가 좁혀지는 것 같아도
그러나 그 순간까지
서로가 동행하는 것을
단지 모를 뿐이다
내가 이 자리에 멈춘다 해도
조금도 변할 수 없는
둘이 가는 하나의 길
어느 날 갑자기 닥쳐도 놀라지 않게
질병이나 고난, 사고로
미리 귀띔해주기도 한다
조금도 변하지 않고 바꿀 수 없지만
우리 만남의 시간은 정확하다
오늘도
현관을 나서면서 바쁘다 무심히 그냥 지나치지 못 한다 나는 백내장 수술을 해서 눈이 밝고 잘 듣는다 여기저기 궁금한 것이 많다 어제 본 것을 오늘 보면서도 새롭고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없어도 조금씩 변하는 것을 느낀다 길에서 만난 이웃에게 눈인사를 하고 좀 가까우면 말도 건넨다 신호등 앞에서 차들은 기다리고 행인들은 건너간다 길 건너 청년주택 공사장의 키가 한 층 높아졌다 모두 다 부지런히 살고 건강해 보인다 나보다 앞서 식품을 사러 간 아내에게 짐 가지러 오라는 전화가 온다 나는 가던 길을 바꾸어 아내에게로 간다 재래시장에선 물건을 배달하지 않는다 그래서 들고 와야 한다 양손에 들고 올 만큼 산 아내에게서 짐을 건네받는다 막내딸이 다음 주 화요일에 만나고 싶다는 카톡 문자가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