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의 넋두리
부모님 잔소리에 집 나온 지 어언 십 년
세 평 남짓 고시촌은 천국인가 지옥인가 오늘도 책상 위에 무거운 질문만 쌓여 수없이 읽어 뫘을 문제들과 지문들 다섯 개의 보기 중에 정답이 있다던가 그 속에 틀어 박힌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 변씨 집 찾아가는 어둡고 긴 골목길에 갈피를 잡지 못한 별들만 총총하다
마흔의 고갯길에서 정답 찾아 떠도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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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세요
어둠이 길을 덮자 그가 기어 나온다
천 년 묵은 너구리 털 이 바닥에 흥건하거늘 몇 개의 얼굴을 가진 놈의 정체를 모를 리 없다 지식창고 몰래 뒤져 남의 지식 훔쳐다가 네 것인 양 둔갑하여 밥상 술상 받아놓고 가식적인 수상 소감 가타부타 늘어놓네 너구리굴 들락거리며 빼 먹은 내공들로 오동통 살만 찌운 너구리 여기 있네
늘어진 웃음 뒤편에 숨겨놓은 네 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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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의 간
간밤에 벼룩에게도 간 빼 먹힌 사내가
굶주린 밤 움켜쥐고 벽을 향해 기어가서 앓아누운 용왕의 전화번호를 찾는다 간 팝니다 물기 젖은 간, 수궁가를 부르는 간, 전화기 속 별주부가 그의 간을 자르고 연체 된 이자와 한숨까지 자를 때 콩알만 해진 간으로 전화기를 놓는 사내, 두 살 아이 분유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몇 달 밀린 방세를 생각하며 다시 또 전화 걸고...
햇살에 널어 말리던 간,
온몸을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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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사들
그들과 저들 사이 내 자리는 따로 없다
부여의 사출도四出道인가, 개돼지로 불리면서 때 되면 밥 먹여주니 웅크리고 입 다물라 떠도는 유언비어 속 현행범이 되었다가 천하디천한 우리는 말 한 마리 값도 안 되고 그녀가 읽어가는 수첩 속 문장에선 우리는 또 저것들과 이것들로 흥정되고
이름을 잃은 우리는 대명사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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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孔方의 갑질
오늘도 인사 비리로 도마 위에 오른 공방
대대로 물려받은 곳간 열쇠 움켜쥐고 형제자매 등진 곳에 돈방석 깔고 앉아, 돈다발 끌어안고 양반다리 하고 앉아, 너는 뉘 집 자식이냐 어서 이리 오너라 수청을 거절하면 숙청을 하겠노라, 공방의 갑질에 몸 사리던 직원들 곳곳에 눈먼 돈들 쓸어 담는 순간에도 구멍 난 심장 속에선 찬 바람만 쌩쌩 부네
당신의 가슴 속에도 공방이 걸어 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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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부보쌈
강남의 땅덩어리 한 입에 보쌈하지
여기가 내 땅인가 저기가 내 땅인가 재개발 주택가가 절임배추로 누워 있지 비닐 쌓인 배추에서 소문들을 꺼내면서 돈 많은 아비에게 물려받은 버릇은, 배추에 넣을 속을 돈으로 밀어 넣기 배추 속 넣어면서 노란 배추 뜯어먹고 김치통 가득가득 돈다발을 채운다 아파트 값 올리고 양도소득세 내려라 재테크와 세稅테크를 알맞게 버무려야지 대한민국 1퍼센트 놀부보쌈 아느냐 온갖 채소 양념들은 보쌈을 위한 시녀일뿐, 눈멀고 귀멀어서 원시遠視만 깊어지나
먹어도 허기진 하루가 고봉처럼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