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태: 꽃
모처럼 시간을 낸 모악산. 아내와 함께 올랐다. 전주 근교 모악산은 내가 종종 오르는 산. 부지불식간 봄은 이미 성큼 다가와 있었다. 화사한 봄꽃 너머에서 속속 피어오른 푸르른 이파리가 더없이 고왔다.
어디선가 코끝에 느껴지는 연한 초록 풀꽃 내음, 산야를 울리는 뻐꾸기 꾀꼬리 산꿩 장끼의 울음소리. 며칠 전 내린 비로 거쿨지게 흐르는 계곡물. 내겐 모두 진한 감동이었다.
아내가 내 손을 이끌어 오솔길 풀섶에 피어 있는 꽃에 대어 준다. 꽃이 조금 크고 동그라니 예쁘다. 코를 대 보니 향기가 은은하다. 아내가 엉겅퀴라고 일러준다. 꽃에서 손을 내려 잎을 만지니 무척 따갑다. 잎끝에 가시가 달려 있음이다. 이쁜 꽃은 늘 이렇게 가시를 품는 법이라던가?
조금 더 오르니 진한 향이 감돈다. 자생 인동초. 넝쿨이 나무를 감아오르며 하얀 꽃을 달고 있다. 아담한 꽃은 아주 진한 향을 가지고 있다.
사실 전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작은 종이 달린 모양의 하얀 은방울꽃, 상추 같은 잎에 자그마한 자줏빛 꽃을 달고 있는 앵초, 난초 모양 이파리에 보라색 꽃을 피운 붓꽃 등 많은 꽃이 퍽 아름다웠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꽃을 매우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까지 넓은 마당이 있는 고향집에 살며 많은 꽃을 가까이한 탓일 게다.
소박한 정원에는 채송화, 분꽃, 봉숭아, 창포, 꽈리, 매화, 장미, 해당화 등이 가득했다. 키 작은 채송화에 벌들이 가득 붙어 있는 고향 정원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짙은 노랑과 갈색이 섞여 있는 벌들은 신기했다.
그후로도 꽃을 생각하면 항상 어렸을 적 고향 마당의 평화로운 정원이 떠올랐다. 대학 재학 시절 학위논문에 정신 없던 그 때에도 나의 책상 위에는 여러 색깔의 앙증맞은 선인장 화분이 놓여 있었다.
군복무 중 갑작스런 사고로 실명한 후 전역하여 2차 치료 중일 때였다. 낮에는 혼자 걸을 수 있을 만큼의 시력. 투병하던 어느 날 병원에 다녀오던 길. 버스를 타기 위해 지나는 오거리에는 길가에 꽃집들이 늘비했다. 꽃집 앞에 놓인 많은 화분들.
나도 모르게 화분 가까이 다가갔다. 분홍빛의 큰 꽃잎이 흐린 시야에 들어 왔다. 연산홍이었다. 자세히 보고픈 충동에 눈을 꽃잎 가까이 들이대었다. 마치 꽃잎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분홍빛 꽃에 빠지니 절로 눈물이 일었다. 언제일 지는 모르지만 얼마 후면 이 아름다운 꽃잎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리라. 절실하고 처절한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저씨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몰래 못된 짓 하다가 부모께 들킨 소년처럼 소리쳤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후 완전 실명은 고통과 충격이었는데 꽃에 관한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명 후 첫해 봉사자와 함께 전주 덕진공원을 갔을 때였다. 공원입구에 들어서자 온갖 꽃향기가 가득하였다.
입구에 있는 진달래 꽃 앞으로 봉사자가 안내해 주었다. 그녀는 내 손을 꽃잎에 대주었다. 꽃잎에 손이 닿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던 노란 진달래꽃이 아니었다. 그간 눈으로 보았던 꽃은 그저 차가운 물체일 뿐이었다. 다시 한번 만져 보아도 매한가지었다.
크나큰 실망과 좌절감, 그리고 충격으로 비석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꽃들도 마찬가지였다. 눈으로 보았던 아름다움과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은 아주 달랐다.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6월의 정원. 한창 피어 있는 장미꽃을 만지며 부드러운 꽃잎과 그 자태를 느껴 보았다. 그리고 그 향을 깊이 마셔 보았다. 꽃잎도 하나하나 만져 보고 모양도 감지해 보았다. 장미의 아름다움이 거의 그대로 다가왔다. 바라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감격.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그후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생들과 봉사자들 앞에서 강의할 적마다 난 이렇게 묻곤 했다.
"시각장애인과 함께 가다 꽃을 보면 어떻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꽃을 설명하고 손을 꽃잎에 대어 주십시오. 그리고 향을 맡게 하면 그 아름다움을 똑같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부드러운 꽃잎의 촉감까지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보지 않고도 느끼는 아름다움. 그 고귀한 아름다움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진정한 아름다운 아름다움이여! 내게 오래도록 더불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