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inka - Nocturne, for harp(piano) In E flat major, G. vi62 글린카 / 하프를 위한 녹턴(Nocturne) 내림 마장조, G. vi62
Mikhail Ivanovich Glin´ka (1804 ~ 1857)
performed byInge van Grinsven
글린카 [ Mikhail Ivanovich Glin´ka ] 1804 ~ 1857 러시아
러시아의 작곡가. 국민 음악의 시조. 스몰렌스크 현(縣)의 귀족 지주의 아들로 출생. 1817년 페테르스부르크에 옮긴 후, 사범학교에서 6년간 수학, 그동안 영국인으로서 유명한 작곡가 및 피아니스트인 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822년부터 작곡했다. 1830년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순례하고 이탈리아 성악 작곡법을 연구, 1834년 베를린에서 덴(1799~1858)에게 사사한 후, 특히 가극 작곡가가 될 사명을 깨달아, 러시아 국민 가극 《황제에게 드린 목숨(1836)》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상연, 다시 푸시킨에 의한 제2의 가극 《루슬란과 류드밀라(1842)》에 성공했다. 1844년 파리, 1845~47년 에스파냐의 마드리드와 세빌랴에 체재, 색채적인 관현악곡 외에 피아노곡ㆍ실내악곡ㆍ성악곡 등을 작곡했다.
러시아 근대 음악의 원조라고 일컬어지는 글린카(러시아)는 스몰렌스크(Smolensk)의 귀족이자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1세 무렵부터 음악 교육을 받고 작곡을 시도하게 되었다. 1824년(20세) 페테르스부르크의 철도성에 근무하나 퇴직하여 이후는 음악에 몰두한다. 1830년 이래 건강을 위해 국외 여행을 떠나, 유럽 각지에서 음악을 배우면서 서구적 작곡 기법을 통해 러시아 국민음악에의 자각을 높였다.
1833년(29세) 아버지의 급서로 귀국, 얼마 후 페테르스부르크로 옮겨 오페라 「이반 수사닌 Ivan Sussanin」에 착수해 1836년 초연되어 당국의 간섭을 받았으나, 러시아 최초의 국민 작곡가의 지위를 확립했다. 이후 잠시 동안은 민요 연구에 바탕을 둔 가곡을 쓰는 한편, 걸작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 Rouslan and Ludmila」도 계속 써내려 갔다. 그러나 1842년(38세)의 「루슬란과 루드밀라」 초연은 청중의 몰이해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만다. 1844년 파리에 간 글린카(러시아)는 베를리오즈(프랑스)에게 격찬을 받고 러시아 국민음악을 처음으로 서유럽에 소개하고 대성공을 거둔다 . 1845년부터는 에스파냐 민요 연구에 착수하여 그 성과는 스페인 서곡 제1번 「호타 아라고네사 jota aragonesa」 (1846), 제2번 「마드리드의 여름밤의 추억 Souvenir d'une nuit d'été à Madrid」(1848) 등 2개의 관현악곡에 살려졌으며, 또 유명한 「카마린스카야 Kamarinskaya」(1848)도 러시아 민요의 연구를 살린 것이었다. 그러나 파리의 2월 혁명의 파급을 두려워한 당국은 극단적인 문화 탄압 정책을 펴고 있어서, 국민적인 글린카(러시아)의 작품도 고국에서는 거의 상연되지 못했다. 그 위에 건강 상태도 나빠져 창작은 뜻대로 진척되지 않고 1855년(51세) 『회상록』을 써 낸 뒤로는 고대 교회 선법의 연구에 열중했는데, 1857년에 베를린에 갔다가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러시아 음악사상 글린카(러시아)의 역할은 종종 문학사상의 푸쉬킨과 비교 된다. 그가 수립한 세계 최초의 국민 음악의 전통은 '5인조'나 차이코프스키(러시아)에게 계승되어, 러시아 음악을 세계적인 지위로 올림과 동시에 체코와 헝가리 그 밖의 나라들의 국민 음악에의 실마리도 되었다.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진 최초의 러시아 음악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Glinka - Nocturne, for harp(piano) In E flat major, G. vi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