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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시마 섬(대마도) 旅路 및 山行
일시: 2017년2월28일 화요일~3월2일 목요일
미우다해수욕장 바위섬
倡義詩-최익현
백발로 밭이랑에서 분발하는 것은
초야의 충심을 바랐음이라.
난적은 누구나 쳐야 하니,
고금을 물어서 무엇하리.
皓首奮畎畝 草野願忠心 亂賊人皆討 何須問古今
1무 1박 3일의 여정으로 대마도로 떠나기 위하여 화요일 밤(2월28일) 열시
삼십분 출가하여 양재역에 도착하니 11시30분이다 우리 버스는 24시에 부
산으로 출발하기로 되었다 동행 할 유 대감도 서둘러 왔고 낯익은 얼굴도
몇 명 있다 대마도는 대한민국에서 49.5km 떨어진 가장 가까운 외국으로
우리나라와는 역사적 인연이 많은 섬으로 대마도를 다녀오는 사람이 1998년도에는 450명이던 것이 지금은 45000명으로 100배 늘어나서 여행객의 95%
가 한국 사람들이다
• 대마도 여행
산행. 관광. 낚시. 자전거 하이킹. 야영. 드리이브및 유적답사로 다녀온 다
일본어: 對馬 (つしま) 문화어: 쯔시마 섬은 한반도와 규슈 사이의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일본의 섬이다. 일본 땅이지만 일본보다는 한국에 더 가까운 섬, 한국과 일본의 교류의 장이었던 섬, 태고의 아름다움을 가진 섬으로 두 마리의 말이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라서 對馬라 부르지만 지도를 살펴보면 말이 아닌 두 마리의 토끼나 강아지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한반도를 일본 사람들이 호랑이 형상을 토끼로 비유한 것처럼 말이다
05시
24시에 양재를 출발한 버스는 어둠이 밀려가는 새벽-부산 자갈치 시장에 도
착하여 아침 식사로는 돼지국밥과 고등어구이 백반이 있다하니 유 대감과
고등어구기 백반을 선택했고 식사 후 여객터미널로 이동하여 승선표를 받으
니 좌석 2F N-13으로 07시50분 출항하면 이즈하라항 까지는 2시간이 걸린 다
이즈하라항(孍原)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받는데 시간이 나무나 많이 걸린
다 한시간삼십분을 지루하게 기다려야 한 다 대마도를 찾는 관광객의 대부
분이 한국 사람인데 좀 더 신속하게 처리 해줄 수 있는 방법도 있으련만...
초장부터 기분이 잡쳐서 욕설이 부글부글 끓었다 “제기럴” “젠장” “빌어먹
을 X 들...“ ”대마도 사람 3만 명을 한국 사람들이 먹여 살리고 있는데...
“요렇게 푸대접을 하면 쓰나...“등 등.
하여 입국이 늦었으니 점심부터 먹는다고 식당을 찾아갔다 마을은 조용하니
행인을 볼 수 없고 주택들은 침울한 것 같다 식사 후 등산 팀과 관광 팀으
로 나누어 졌고 나는 유명산 등산 팀을 따르니- 정상까지는 2850m로 등산
기점의 표고는 55m- 등로는 쭉쭉 뻗고 빽빽한 삼나무 숲이다
• 삼나무
일본말로 히노끼라 불리는 이 나무는 건강에 좋은 피톤치드가 많이 생성된다하여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일본은 대마도에 편백나무를 많이 심어놓아 대마도의 편백나무만으로도 1억3천에 가까운 인구가 4년간 일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다하니 정말 놀랍다.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는 대마도는 산길국도 옆으로 편백나무가 빽빽히 꽉 차있는 2차선 길을 따라 달리다보면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또다시 편백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숲을 볼 수 있으며 바다와 어우러진 산이 많은 대마도는 습기가 많아 나무가 잘 자란다.
• 動線
우체국-교류센터-통신사비-민속자료관-전망대-성터淸水山(206m)-成相山
(416m)갈림길-정상(558m)를 스치고 원점으로 회기귀하는 산행이지만 체력
이 좋으면 아리아케(유명산)에서 시라다케(백악산 519m)로 종주 산행도 할
수 있고 대마도에는 105개의 산이 있다
• 아리아케 등산로
육산으로 부드럽고 삼나무가 빽빽한 지역이 많고 정상은 밋밋하며 넓고
억새풀이 많다 시라타케로 진행할 수도 있고 조망도 되는데 가파른 오르 막이 있어 체력 소모가 많다
登山路- 윤대룡
山路言心感: 산길에 대한 저의 마음 느낌을 말하자면
森林錦上往: 빽빽한 숲속 길은 비단 위를 걷는 것에
添花空氣好: 좋은 공기까지 마시며 걸으니 꽃을 더함인데
步愛萬年佳: 만년을 사랑할 이와 함께 걸으니 좋구나!
谷水戀妻接: 골짜기 물을 만져보니 사랑하는 처의 손길 같아
洗面觸感安: 얼굴을 씻으니 촉감이 편안하오!
近難登頂上: 정상에 가까이오니 오르는데 어려움이 있어
所杖棄心生: 지팡이를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곳도 있더라!
대마도에서는 통신사의 비문을 볼 수 있다
• 朝鮮國通信使之碑
“朝鮮後期의 通信使는 宣祖 四十年(一六0七)부터 純祖 十一年(一八一一) 사이에 派遣되었다 이들은 朝鮮과 日本 사이의 善隣友好를 위한 國家 外交 의 使節이며 아울러 一大 文化使節이기도 했다 때로 正使를 비롯한 오백명 에 이르는 使行은 그 行列이 莊嚴하기 이를 데 없었고 이들은 先通 學問에 세련된 藝術 그리고 純爛한 새 文化의 香薰을 전해주었다 이 通信使의 有 形.無形의 行蹟은 지금도 日本 각지에 역력히 많이 있어 近世 日本이 鎖國 時代에도 言語와 慣習을 달리하면서도 정성과 믿음으로 교류한 이웃나라와 그들에게 한층 尊崇의 情을 더해가고 있다 오늘날 새로운 東아시아 國際社 會 形成에 즈음하여 조선통신사의 영원한 역사적 意義를 더욱 깊이 생각하 게 된 다”
안내문을 살피는 사람도 드믄데 뒷면을 보는 사삼은 더욱 없지만 거기에는
율곡 선생의 십만양별설로 옥신각신하던 선조 조정에서 일본을 정탐하기 위
하여 1590년3월에 파견하여 1591년3월에 돌아온 통신사의 수행원 김성일의
시가 있는데...
一堂簪蓋兩邦臣: 한 집에 의관을 갖춘 두 나라 신하
區域雖殊義則均: 지역은 달라도 의리와 법도는 같도다
尊俎雍容歡意足: 극진한 접대화 환대에 만족하니
傍人莫問主兼賓: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묻지 마시오
그리고 통신사들의 보고서 내용을 보면...
김성일은 풍신수길은 원숭이 같이 생겨 사람 됨됨이가 보잘 것 없으며 왜군은 결코 조선을 침략 못할 것이라고 보고했고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이 쳐들어올 것 같으니 전쟁을 대비하여 방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했으나 선조는 김성일의 손을 들어주었기에 치욕스러운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주로 도망치게 되었다
대마도의 슈젠지(修善寺 공동묘지)에는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가 있는데 최익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면 창의시를 남겼다(표지의 시)
유명산 정상을 올랐다가 원점으로 돌아와서 “덕헤옹주 결혼 기념비”를 본다
안내문은 이끼에 가려 몇 글자는 읽을 수 없지만 안내문을 읽는 사람들은
볼 수 없었는데 일본어와 한국어로 되어 있다
“朝鮮國第二十六代 高宗의 王女 德惠翁主는 一九三一年 五月 宗武志公과 結
婚하여 同年十一月에는 對馬島를 訪問했다 옛對馬島主 宗武當主가 朝鮮의
王女를 夫人으로 맞이하여 來島하였으므로 熱烈한 歡迎을 받았다 이 碑는
두분의 成婚을 祝賀하여 對馬居住韓國人들이 建立했다 한편 淸水山城에는
對馬島民들이 慶祝하여 세우고 심었던 記念碑와 철쭉이 지금도 잘 남아 있
다 結婚生活은 많은 苦難이 있었으나 딸 正惠를 낳아 서로 信賴와 愛情이
깊었다 그러나 兩國의 關係는 葛藤이 심하여 두 분은 一九五五年에 離婚하
였으며 武志公은 一九八五年에 德惠翁主는 一九六一年 歸國 後 一九八九年
에 別世하였다 이제 歷史에 묻혔던 이 記念碑를 再建하여 두 분의 힘들었
던 生涯를 되돌아보면서 兩國民의 진정한 和解와 永遠한 平和를 希望한다“
1669년에 소오요시자네(宗義眞)가 건설한 역대 대마도주들의 거처 金石城(킨
세키죠)을 지나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본 100대 온천에 속한 미우
다해수욕장 옥천으로 차량으로 이동하는데 가이드의 온천욕 유의사항이 까
다로워 때려 치울 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산행으로 흘린 땀을 대충 씻고-
남들보다 일찍 온천을 끝내고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산책하려니 처음 대마
도에 입항 할 때는 썰렁했던 마음이 자연의 포근함에 동화되면서 안정을 찾
았다 오늘의 숙소 “民宿 虹 니지”를 찾아 갔다 민박집은 도로에서 10여분
삼나무 숲을 지나 바닷가에 있었고 집 앞은 해변으로 코 앞에 섬들이 대여
서개 있어 조망이 좋아서 몇일 머물면서 푹 쉬고 싶었다 저녁은 해산물 바
베큐로 한 사람당 가리비 4개 아지 1 소시지1 오징어 돼지고기로 지글지글
하니 술 맛이 땡겼고 동행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고 밤 늦게까지 즐기는
적극파도 몇 사람 있었다 -잠자는 사이 요란스럽게 천둥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98주년 삼일절로 내년 후년엔 100주년이 된 다 문득 한일합병의 치욕을 당하여 黃玹(1855(철종 6)∼1910.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시인·문장가)선생의 絶命詩가 떠 올랐다
鳥獸哀鳴海岳嚬: 새와 짐승은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찌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세상은 이미 사라졌는가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회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이 정녕 어려워라
키사키 전망대로 갔다가 와타즈미신사(和多都美神社)로 이동하니-
• 와타즈미신사
히코호롣미노미토토와 토요타미히케노미코토를 기리는 해궁으로 바닷신 신사중에서 가장 유서 깊은 신사로 예로부터 용궁전설이 전해진 다 본전 정면의 5개의 문중 2개는 바닷속에 세워져 있어 민물과 썰물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하여 먼 옛날 신화시대를 연상할 수 있는 신비로운 풍경이 펼처진 다
-해설판은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로 되어 있다
오전 일과를 끝내고 작은 어촌마을 골목에 카이칸 식당을 찾아들어 점심을 먹었는데 초밥에 우동인데 식당에 좋은 시가 걸렸는데 출처를 알 수 없었다
점심 후 처음 들린 곳은 자연휴양림안에 있는 나루타키 폭포인데 폭포를 찾아가는 곳에 도리이는 키가 작아서 머리 끝에 닿을랑 말랑 했고 빨간색으로 칠해진 작은 사당이 있는고 폭포는 지난밤 천둥 번개치면서 비가 내렸지만 빈약한 물줄기를 볼 수 있었는데 도로에서 폭포를 찾아가는 길이 운치가 있었다
도리이 유래-퍼옴
도리이(鳥居)는 전통적인 일본의 문으로 일반적으로 신사의 입구에서 발견된
다.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는 두 개의 기둥이 서있고 기둥 꼭대기를 서로
연결하는 가사기(笠木)로 불리는 가로대가 놓여있는 형태이다. 제일 위에 있
는 가로대의 약간 밑에 있는 두 번째 가로대는 누키(貫)라 부른다. 도리이는
전통적으로 나무로 만들어져있고 대개 주홍색으로 칠해진다. 오늘날의 도리
이는 돌이나 금속,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도리이는 불경한
곳(일반적인 세계)과 신성한 곳(신사)을 구분짓는 경계이다. 이나리 신사는
대체적으로 많은 도리이를 갖고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종종 감사하는 의미
로 도리이를 기부해왔다. 교토의 후시미 이나리 신사에는 이러한 도리이 수
천개가 있다.
미우다해수욕장(三宇田海水浴場)으로 이동 했는데 해수욕장은 고운 모래가 깔렸고
바다는 비취색으로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아름다운 해수욕장으로 일본 해수욕장 100선에 들고 바위섬도 있다
대마도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한국전망대로 이동하니...
• 한국전망대-퍼옴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에 위치해 있고 날씨가 좋으면 부산이 보이는 곳
으로 유명하지만 날씨가 안 좋아서 50km 거리 부산은 안보였다 한국전망
대 앞섬에 자위대 레이더기지가 대한해협을 감시하고 있다
• 조선국역관사순난지비-옮김
1703년 2월 5일 대마도 5대 번주 종의방 취임을 축하하기위해 조선국 역
관사 118명을 태우고 부산항을 출발 대마도 와니우라항 입항 직전 바다에
갑자기 돌풍이 불어 예인선을 타고 영접 나갔던 일본인 4명 포함 112명이
몰사했던 사실을 기념하기위해 2003년 3월 7일 한국전망대 옆에 건립 되었
다
한국전망대 곁에는 아이스크림 자판기가 있다
서울로 돌아가려고 히카타항에서 16시30분 오션플워를 또 타려니 좌석은 2F M 15번이다
• 하카타항(일본어: 博多港 (はかたこう)
후쿠오카 현 후쿠오카시 하카타구에 있는 특정 중요 항만이며, 후쿠오카 시에 의해 항만 관리가 되고 있다. 하카타만에 접하며, 1899년 8월 4일에 개항했다. 옛날에는, 나노츠(那の津), 나오츠(那大津), 하카타츠(博多津)로 불렸다.
나는 산행과 관광으로 쓰시마를 다녀오지마는 백제의 왕인박사는 문화를 전
수하려 스쳤고 의병장 최익현은 항일운동 하다가 잡혀 와서 굶어 죽었고 덕
혜옹주의 恨이 서렸거니와 통신사들이 오고간 섬을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60여 차레 일본 정부에 반환을 요
구 했으며 대마도 아리랑도 있거니 대마도에는 아리랑 축제가 열린 다
대마도는 우리 땅
아~ 아~ 우리의 아리랑과 무궁화꽃 노래가
항상 울려 퍼지는 곳
우리의 섬 대마도...
아~ 부산의 야경이 아름답게 보이는
우리의 섬 대마도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조상 대대로 우리의 은혜를 입은 곳
대마도....
우리의 땅 이곳은 언제부터 음~
왜인들이 차지하여
왜구들의 소굴이 되었는가..
한맺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제부터 쓰시마란 이름으로 바뀌어
침략자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는가..
(2절)
이승만 대통령이 반환하라 외쳤던
우리의 섬 대마도..
왜구들의 소굴이 되었는가...
(반복)침략자 일본은 들어라.
그대들의 스승 호오슈의
위대한 뜻을 기억하며 대마도를 반환하라.
우리의 섬. 대마도!
• 대마도와 우리나라와의 관계
삼국시대 초에는 쓰시마를 津島라고 불렀다. 고려 말부터 고려에 조공을
하고 쌀 등의 답례를 받아갔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창조 신들이 쓰시마를
일본 최초의 섬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 다 이 열도는 역사상 한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세기에서 1868년까지 이 열도는 다이묘[大名] 소씨[宗氏]의 봉토였다
1274, 1281년에 몽골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주민들이 대량학살당했다
1376년 홍산대첩에서 최영이 왜구를 무찔렀다.
1380년 황산대첩에서 이성계가 왜구를 무찔렀다.
1426년 세종대왕은 부산포, 염포, 내이포 등 3포를 개항하였다.
임진왜란 이후(1607~1811) 200여년간 12회에 걸쳐 무역사절단 5355명 평균 446명이 다녀갔다
1861년에 러시아는 이 지역의 토지사용권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으며 1905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패했다
대마도 여로
두 마리의
말이 마주보고 있는
神의 선물
아름다운 섬
무인도 103개
유인도 5개로
제주도의 2/3 크기로
쓰시마는
삼나무 숲이 하늘을 찌른 다
1998년엔
년중
450명 찾든 섬
최근엔
45000으로
한국인 95%
여로나 산행 말고도
낚시나
캠핑으로
심심하면 찾는 다
民宿 “虹”의 밤은
천둥 소리
요란스럽고
날 밝으면
아리아케 오른 다
2017년3월1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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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르신.~
자연길에서 뵈온지가 조금 된것같았는데.
대마도 다녀 오셨군요..ㅎㅎ
여행기 잘읽고 갑니다..
항상 활동적이시고 좋은글 저희에게 남겨주시는것
감사드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
독도는 우리땅. 대마도도 우리땅 . 분하고 억울 하오이다. 땅 찾지 못한 해방후의 친일 위정자들. 가슴 아픔니다.
늘 건강하셔서 자주 뵙기를 ~~
설렁설렁 다녀왔는데 자세하게 알려주시니
새롭게 다시 음미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세한 여행기에 감탄을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사진 한 장 없이
대마도 구석구석을 본 듯 합니다
좋은 시과 역사 이야기
많은 걸 느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마도에 대하여 소상하게 올려주신 글 공부하는 마음으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삼나무가 아름다운섬 덕혜옹주님이 사셨던 섬이었군요
대마도도 북간도처럼 힘이 없어 일본에게 빼앗긴 우리땅
치욕의 삶을 사신 우리옹주님 모두 가슴이 아프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대마도에 갖다왔지만 이렇게 많은 정보가 있었나 싶네요~
늘 좋은 글과 많은 지식을 전달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리고 수고 하심에 다시한번 고개 숙여 인사 드립니다~늘 홧팅! 해주시고 늘 건강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