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문학관 5기-11차(2017년 3월 27일 월)
1. 항아리/ 곽해숙
1층 마당에 항아리가 있다면 건사하기도 편할 텐데, 우리 집은 3층집 옥상에 있습니다.
장항아리가 비게 되면, 첫번째 씻은 염도가 있는 물은 적당한 통에 담아서 주방으로 들고 내려 와서 개수대에서 버립니다. 옥상바닥에 짠 물을 버릴 수가 없어서입니다. 우수관 가까이로 항아리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옮겨서 맑은 물이 나오도록 씻어서 물을 가득 채워서 서너 번을 우려 냅니다. 항아리는 늘 정갈하게 관리 해야 합니다.
20여일 전에 된장 손보고 비게 된 항아리는 겨울 중이라 옥상 바닥에 물을 버릴 수도 없고, 된장을 퍼 내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막장을 담았습니다. 막장을 항아리에 담으려면 그 된장항아리를 씻어야 했습니다. 살얼음이 낮에는 녹았다 밤이면 다시 어는 기온에 자칫 잘못 바닥에 놓다가 금이 갈 위험성이 있는데도 조심 조심 다용도실로 내렸습니다. 지금 항아리에 담아 보았자 길어야 15일~30일, 옥상에서 햇빛과 바람을 보게 하겠다고한 일이였습니다.
막장은 염도가 된장보다 낮아서 상온에 두고 먹을 수가 없습니다. 콩을 삶아서 청국장을 만들어 말려서, 막장을 담는 것을 언제까지 할 수 있겠나 싶습니다.
충북 시골마을에 사는 지인이, 마을에는 할머니들이 혼자 계시는 분이 많으셔서읍내 병원, 오일장, 미장원으로 모시고 가고, 잔 심부름도 해 드렸다 합니다. 돌아 가시기도 하고, 요양원으로 자식들이 모시게 되고(그것도 모신다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고향을 떠나시면서 남은 물건에 애착을 가지시는 것은 항아리라 했습니다.
예전 시골에서 필요하다 해서 떡 하니 장날 지게나 소구르마를 가지고 가서 척척 돈 세어서 주고는 사지 못했습니다. 항아리마다 살 때의 이야기가 있기도 할 것입니다. 항아리 하나 살려면 푼돈을 모으고 모으고 해서 샀고, 쌀 한가마니, 두가마니 들어 가는 큰 항아리는 반듯한 것으로 샀지만, 고추장, 막장, 항아리는 약간 험이 있으면, 헐하고,사용하기는 지장도 없었습니다.
그 안어르신들께서, 장을 담아서 간장과 된장으로 가르고, 고추장 담고, 젊었던 시절 농사 지으면서 그 많은 가족들과 먹고 살았던 것의 이야기가 또 얼마이겠습니까? 떠나시면서 자식들이 빨리 차에 타라고 재촉을 하고 항아리를 발길 멈추어 보시고 간다 했습니다. 살아서 고향 하직이지만, 그 길이 얼마 가지 않아서 세상 하직 걸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마 그 전에 항아리는 이주사가 알아서 해라 하신다 했습니다. 그 지인도, 아파트에 살다 보니 덩치 큰 개 두마리를 밭의 비닐 하우스에 메어 두었고, 아침 저녁 밥을 주러 매일 가는 곳이고, 항아리들을 비닐 하우스를 의지한양 두었다 했습니다. 항아리들이 점점 많아지니,장삿군이 들어 와 사자해서 정리 했다면서,경주가 고향이셨고, 고향 가시는 길에 항아리 2개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한 개는 고추장 4근 담으면 딱 맞은 것이고, 한개는 더 크서 된장독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항아리를 가져다 주면서 하는 말이 오래도록 흙 위에 엎어 둔 것이고( 잡냄새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누가 항아리를 쓰던 항아리에는 나쁜 것을 담지 않으니 괜찮다 했으나, 소금 위에 쑥의 연기를 내고, 주인이 바뀐 것을 알게 했습니다.
시어머님이 쓰시던 것 중에, 아주 큰 항아리는 건채나 표고버섯 등등을 넣는 저장고가 되었고, 점점 장을 적게 담으니, 내가 산 항아리도 4개나 됩니다.
항아리란 깨어 지면 한 순간이지만, 시어머니가 쓰시던 것을 물려 가면서 쓰게 되고, 저처럼 낯 모른는 충청도 어르신께서 쓰시던 것이 경상도 3층집 옥상에 자리 잡고, 된장, 고추장을 품고 있습니다.
항아리에 장을 보관 한 것도 자주 자주 손질 해 주어야 합니다. 할아리 기공이 잘 트여 있어야 장 맛도 좋거든요. 빈 항아리인채로 몇년을 두면 항아리가 제 빛을 잃습니다. 삭는 듯하게 보입니다. 항아리는 제 역활을 해야 하고, 사람의 잔손길이 부지런하게 닿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치와 같습니다.
2. 인생의 종착지/ 심찬용
고향에 살고 있는 집안 어른이 돌아가셨다. 혼자 외롭게 사시다가 요양병원에 가게 되어 좋아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는데 말이다. 장례식장에 모인 일가친척들은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많은 이야기 중에 내 가슴에 와 닿는 말이 있다. 오늘의 망인과 요양병원에서 같이 지내던 누나가 동생의 사망소식을 전해듣고 “내가 죽어야 하는데 동생이 먼저 갔다”며 통곡했다는 소리가 내 가슴을 짠하게 했다.
지금은 요양병원에 모시는 걸 수긍하지만 십 년 전만해도 불효가 되었다. 아버지가 치매로 인해 몸을 감당하지 못 할 때였다. 매일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이부자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바꾸어야만 했다. 나는 새벽 일찍 직장으로 출근하고 아버지 수발드는 것은 아내 몫이었다. 아버지의 병환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더 심해져갔다.
자식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모셔야만 좋을까 의논을 하여 요양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하였다. 그러자 고향에 있는 일가친척들은 자식들이 부모를 어떻게 그곳에 보내느냐는 식으로 쑥덕쑥덕 뒷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의사, 간호사, 간병인이 24시간 상주하며 시설이 잘 갖추어진 요양병원의 실태를 시골에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설명할 수도 없고 자식들은 고스란히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동네에서 소문난 효자가 있었다. 그의 노모가 치매를 앓고 있었다. 그러자 치매 노인을 방에다 가두어 밖에서 문을 잠그고 들로 일하러 나갔었다. 그러면 노인은 문을 열어달라고 문구멍을 뚫으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방안에서 대소변을 보면서 하루해를 보내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부모를 모시는 것도 그때는 효자라고 했었다. 이것은 아닌 것 같다.
‘겉으로는 효를 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보면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효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줄곧 해 왔다.
우리도 치매가 있는 아버지를 집에서 모시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지만 도시생활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자식들 또한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요양병원은 언제든지 찾아가면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또 부모님에게 급한 일이 생기면 병원에서 자식들에게 연락을 해 주었다.
어느 날 병원에서 급히 와 보라고 해서 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치아가 불편하다고 하셨다. 앰뷸런스를 타고 치과에 가서 틀니를 교정하고 요양병원으로 돌아오면서 아버지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였다고 자랑을 하셨다. 이렇게 병원에서 회복하여 집으로 돌아올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 급성 폐렴으로 타계하셨다. 요양병원이 아버지의 인생의 종착지가 되었다.
장례식장을 나오면서 요양병원에 계시는 상리할매의 안부가 궁금했다. 나는 상리할매를 문병하러 요양병원을 찾았다. 복도를 지나가자 병실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노인들은 웬 낯선 사람인가 하는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병실 안을 살펴보니 80대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간호사가 상리할매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안내를 받고 간 곳은 가장 치매가 심한 병동이었다. 그 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했다. 내가 찾는 하얀 머리의 상리할매는 다른 사람들과 별나게 바닥에서 이빨도 없이 오물오물 혼자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치매가 심해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상리할매의 정신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상리할매는 요양병원 생활이 처음에는 적막강산이었고, 시골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다가 반년이 지나서야 요양병원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어느 날 밖을 내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동생이 보였다. 늘 그리워하던 친정 동생이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하필이면 요양병원에서 동생을 만나다니 기구한 운명이었다. 그는 너무나 반가워서 동생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정신을 차려 동생 얼굴을 쳐다보니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은 주름투성이며 머리에는 흰 눈이 내려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손을 벌벌 떨고 있지 않는가. 친정 동생은 알콜중독자였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내 동생이 이렇게 되다니 어이가 없었다. 동생이 혼자 힘들게 살고 있다는 소식은 소문으로 가끔 들었지만 이렇게 심한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어찌 됐던지 만났으니 반갑고 어릴 때와 같이 한 집에 산다는 게 마냥 행복했었다고 했다. 하루하루 동생 얼굴 보는 낙으로 요양병원 생활은 즐거웠다고 하면서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첫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상리할매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동생을 찾았다. 그가 보이지 않았다.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간병인에게 물었다. 어제 저녁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눈앞이 캄캄했다. 상리할매는 동생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 “내가 먼저 죽어야 하는데 동생이 갔다”며 한없이 울었다고 했다. 결국은 상리할매의 동생도 아버지와 같이 이곳이 인생의 종착지가 되었다.
시골이나 도시를 막론하고 늙고 병든 노인들이 자식들과 헤어져 외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수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노인들은 과연 요양병원 생활이 행복하다고 느낄까? 나 역시 나이가 들어 내 한 몸 감당하지 못하면 요양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요양병원은 늙고 병든 사람들의 마지막 인생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요양병원을 공원처럼 아름답게 꾸며 주말이면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이 찾아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자리매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마음속으로 21세기 요양병원의 신풍속도를 그려본다.
3. 인생은 마라톤 손정숙
오늘도 우리 집 삼식씨는 TV 채널을 이리 저리 못살게 돌리며 보거나 나만 쳐다보고 있다. 내가 오랫동안 죽을 만큼 그의 영역 안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결혼 47년 동안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부가 일생을 함께 산다는 것이 참 어렵고 질기고 오묘한 것 같다.
내 나이 이십대 초반에 친정 부모님은 고모님의 이웃에 잘 아는 집 아들이라고 해서 만나보니 키도 크고 인물도 괜찮고 조그마한 집도 한 칸 부모님으로 부터 받고 기술도 있고 해서 선을 보고 두달만에 결혼을 급하게도 시키셨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사십이 조금 넘긴 젊어서 아는 것도 없이 고모가 중매하면 잘 산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만 믿고 귀하게 키운 맏딸을 결혼 시켰다. 어린 것이 결혼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 한 채 시집이라고 가서 살아보니 남편이 이상했다. 그때는 술주정 하는 줄로만 알았다. 차츰 병이 깊어져 감당할 수 없는 정신분열에 과대망상을 일으키는 조울증 이었다. 잠도 자지 않고 다른 사람과 싸움으로 늘 경찰에 끌려가고 어린 아이가 둘이나 달린 나는 새파란 것이 보호자라고 파출소로 경찰서로 찾아다녔다. 보호자 싸인 하고 경찰서에서 빼 내로 다니느라 내 꼴은 시래기 말려 놓은 것 같이 새까맣게 말라서 기미가 까만 얼굴을 해 가지고 경찰서로 구치소로 찾아다니며 경찰들에게 빌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20대에 그래도 보호자라고 온갖 사정을 다해서 빼내놓으면 촌것이 돼서 빨리 못하고 늦게 빼냈다고 온갖 욕을 다하고 집에 오면 나를 들들 복아서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 보다 나았다.
병원에는 무서워서 못가고 데리고 갈 사람이 없어서 정신과 치료 한번 못 받고 온 식구와 이웃 친구 가족이 죽을 지경이었다.
가계라고 시작해놓은 것은 내차지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한번은 너무 힘이 들어 죽을 작정하고 병원에 혈압 재러가자고 속여서 가서 강재로 주사를 놓고 입원을 시켰더니 한 달 만에 나왔다. 그다음에는 기도원에 넣어도 봤다. 아무리해도 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하루하루 지옥 같은 날 들이었다. 밥 먹는 소리도 듣기 싫고 목소리만 들으면 심장이 벌렁 거리고 가슴은 빨랫돌 얹어놓은 것 같이 숨쉬기도 힘들고 얼굴도 보기 싫어서 고개를 돌리고 살았다. 119가 가끔씩 우리 집에 왔다. 남편이 병원에 안가면 내가 기절해서 가곤 했다. 날마다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싶을 때도 많았다. 그 고생한 이야기를 다 쓰려면 책이 몇 권 될 것이다.
어른이 이런 상황이니 그 와중에 아이들이 애정결핍으로 많이도 힘들어 어려웠다. 그렇지만 엄마 고생하는 것 보고 고맙게도 착하게 잘 자라줬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아들 둘을 유학을 시켜서 외국에 직장을 잡았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도 아이들은 잘 자라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싫어서인지 집을 떠나고 싶었는지 형제가 하나같이 모두 외국으로 짝을 데리고 떠난다 했다. 남편보다 더 의지하던 자식들을 다 보낼 생각을 하니 너무 허전해서 몇날 동안 다리를 펴고 울었다 마음이 죽을 것 같았다. 떠나기 전에 아들 둘 앉혀 놓고 나는 너희들 둘 결혼 시켰으니 내 할 일은 다 했다. 이전에는 내가 너희들 두고 어디로 가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고 힘들어도 참고 살았지만 이제 너희 둘 결혼도 시켰으니 내 할일은 다 했으니 살아온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해서 눈도 못 감고 죽을 것 같다 나는 너희 아버지와 이혼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엄마 그동안 고생고생 하며 여태까지도 잘 견디더니 이러지 마세요 오늘까지 다 무너져가는 우리 집을 엄마가 버팀목이 되어 받치고 우리를 키우고 살아줘서 우리가 이처럼 잘 되지 않았냐고 밤새 붙들고 말렸다.“계속 살면 내가 고생하는 것 누가 알아주는데”라고 말했다. 엄마 고생한 것 우리가 알고 있고 있으면 되지 누가 더 알기를 바라요 남들이 알면 흉만 보지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조금만 더 참고 살아주시면 우리가 정말 잘 할 것이라고 한사코 말렸다.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그 후에도 많은 우여 곡절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잘 참았나 싶다. 인생을 토막으로 잘라서 보고 힘든 다고 포기한다면 좋은 날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사노라면 죽을 것같이 힘들 때도 분명 많다. 마라톤처럼 힘들어도 뛰고 강물처럼 굽이굽이 끝까지 흘러 흘러가면 비바람 부는 날도 있지만 좋은 날도 있고 좋은 끝은 있을 것 이라고 믿는다.
몇 년 전 남편이 암으로 위 절재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끝이 났다 이제는 사는 것이 너무 편안하다. 너무 꼼짝없이 집에만 들어앉아 있어서 문제다. 끝까지 나의 남은 사명은 여전히 삼식씨를 돌보는 일은 계속 되고 있다.
그러다가 내게 우울증이 왔다. 슬프고 속상하고 억울하고 먹지도 자지도 못하다가 병원치료를 받으면서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좋다하여 사진 동호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전국 좋은 곳 다니며 꽃도 찍고 풍경도 찍고 글도 쓰고 하다가보니 마음도 한결 좋아졌다.
몇 년 전부터는 운전하는 사람이 부러워 늦게나마 운전을 배워서 남편이 세워놓은 차를 몰고 다닌다. 여러 가지 취미생활에다 자전거도 타고 내 일생 가운데 끝에 가서 요즘은 마음도 편하고 아무 걱정이 없어 졌다. 자녀들 외국에서 잘 지내고 손자 손녀가 다섯 명이 건강하고 예쁘게 잘 자라고 있다.
그토록 밉던 사람이 이젠 늙고 병드니 젊을 때 늙고 병들면 보자던 마음은 간곳없고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은 미운 정 인가? 아니면 내속에 전능하신 분의은혜인가?
4. 친구 순자 어머니 /김치주
아랫마을에 사는 순자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다. 순자 어머니는 내가 놀러 가면 친절하게 손을 잡아준다.
순자야 놀자 ‘어머니’ 저 왔습니다. 어머니께선 뛰어 나오셔 내손을 꼭 잡고 반갑게 맞아주시며 입가엔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할머니께서, 어저께 밀을 “디딜방아. 에 찌었으니 밀가루를 칼국수 밀어 드시랍니다. ‘아이고. 매번 얻어먹어서 되겠나. 하시며 ’노마님께선. 무고하신지, 할머니의 안부도 묻기도 했다. 순자는 마구 깐에 청소를 시켰더니 곧 나올 것이다 하시며 부엌으로 들어가신다. 나는 순자가 있는 마구 깐으로 가서 멍에를 들고 나와 순자에게 씌우고 도망가고 장난 끼가 발동했다.
우리는 만나면 무슨 장난을 하던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어머니는 소여물 끓이는 아궁이에 불 쑤시개로 휘휘 저어 고구마를 잿불 속에 넣어 구워진 고구마는 두껍게 타면서 익은 것 같다. 땅에 뭍 어둔 항아리를 열고 동치미를 한 대접 담아 무도 숭숭 설어서 주셨다. 국물은 살얼음이 사르르 얼어 후루룩 마시면 속이시원하다. 고구마를 먹고 나면 순자와 나의 입가엔 시커멓게 묻어있고 고구마 껍질 깐 손도 깜둥이였다.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오시더니 이게 뭐니 하시며 물을 적셔 두 사람의 입과 손을 닦아주신 어머니의 포근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둘이서 놀다보니 해가 저물어 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나는 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집에 갈려고 하자 어머니는 할머니께서 보내주신 밀가루를 반죽 해놓았으니 칼국수 끓여 먹고 가라하셨다. 어두워지면 무덤 있는 모퉁이를 돌아가면 무섭다고 하자 어머니께선 할머니께 인사도 드릴 겸 같이 가자하신다. 나의 손을 꼭 잡 고 할머니 방문 앞에 “노마님. 그간 안녕 하셨습니까? 하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 담 너머 철수엄마가 아랫마을 비행기가 추락해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 하자 할머니께선 나에게 앞장서거라 하시며 순자네 집에 가자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사람의 시체는 흰 천으로 씌워져있고 비행기 잔해도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다. 순자네 삽짝에 들어서자 가족은 오열을 하며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한다 ‘청천벽력이’ 무너진 것 같다. 어머니께선 우리 집 에 데려다 준 것 이 마지막이 되었다. 사일만 에 ‘장례’ 치룬 다고했다.
할머니와 나는 망자가 떠나는 마지막 작별을 하기위해 순자동네에 들어섰다. 앞에서는 흰 두루마기를 입고 ‘꽃상여 는 떠나가네. 하고 꽃단장을 차린 상여 열 두부가 나란히 줄지어간다. 뒤에서는 오열을 하며 따라가는 상주들 중 ’네 번째. 어머니 꽃 상여였다. 할머니께선 저 어린 사남매를 두고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며 눈물을 주 루 룩 흘리시며 치맛자락 에 훔치신다. 나도 어머니의 정을 느끼며 다리를 쭉 뻗고 울었다.
일 년 이 되자 할머니는 순자엄마 제삿날을 기역 하시고 소금단지 항아리 속에 조기를 꺼내어 내손에 들려주셨다. 어머니라고 부르며 ‘싸리문’을 삐 거적 열며 들어갔다. 첫. 제삿날은 울음으로 올리고 어머니의 받은 정을 느끼며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해마다 제삿날 이 되면 소금항아리 조기를 들고 참석했다. 지금도어머니의 인자하신 성품이 뇌리에 스쳐 지나간다. 지금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 친구들 에게 포근한 정을 주지 못 했던 것 같다.
5. 선택/ 이예경
잘하고 싶고 잘 되고 싶다. 누구나의 희망 사항이다.
인간관계, 진로, 취업, 결혼, 출산, 육아, 재테크 등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결정의 순간과 맞닥뜨린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카피가 유행처럼 회자하던 때가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며 살아가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 ‘책은 말 없는 스승’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즐겨 보는데 2만 5천 종류가 넘는다고 한다. 꾸준히 가장 많이 판매되는 책이라고 하는데, 읽어보면 비슷한 내용이다. 이런 부류의 책에서 직접적인 해답은 얻지 못할지라도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도 선택은 본인 몫이다.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선택의 순간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에서 두 갈래 길을 다 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어느 한 길을 감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졌다’지만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어떤 길이 잘 간 길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어떤 선택이든 후회는 필연적이라 생각한다.
‘제2의 인생’이라는 결혼에 대한 선택도 그랬다. 맏이를 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막급했다. 태어나는 것은 내가 순서를 정할 수 없었지만 결혼은 맏이나 중간이나 막내, 온전한 나의 선택일 수 있었다. 출생 순서에 따른 성격이나 스타일이 존재한다는 나름의 분석 결과가 있다.
맏이는 책임감도 강하고 포용력 있고 믿음직스럽지만, 고지식하거나 고집이 세다고 한다. 대신 많은 책임이 따른다. 중간은 위, 아래로 치어서인지 경쟁력이 강하단다. 막내는 귀염을 받지만, 받기만 해서인지 이기적이라는 일반적인 평이다. 중간인 나는 맏이나 막내처럼 대우받지 못함이 불만이었다.
형제간 출생 순서에 따른 일반적인 특징에 공감하며 맏이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점잖고 상대를 배려할 줄도 아는, 푸근한 맏아들이 좋았다. 맏며느리로 가서 베풀고 나누면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처녀로 늙더라도 맏이는 안된다’고 하셨다. 엄마의 단호함을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었다. 영남지방에서 내로라하는 양반의 종손인 아버지를 만나 가풍 따라 힘들게 사셨다. 더군다나 부잣집 9남매 맏딸이셨던 엄마가 결혼한 시댁은 땟거리를 걱정하는 학자 집이었다.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이라는 말이 있다. 1년에 열다섯 번 제사를 지내야 했고, 모든 책임은 엄마 몫이었다. 맏며느리는 경제적 어려움이 없어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자리였다.
본인의 결혼조차 부모님의 결정에 따르던 시절이었다. 싫고 좋음을 표현도 못 해 보고 아버지와 결혼하셨던 엄마는 내내 그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내 딸은 절대 맏며느리로 보내지 말아야지.’ 반면, 나는 ‘작은 집 맏이는 중간보다 낫다’며 맏며느리 되기를 주장했다. 그런데 ‘부잣집 맏며느릿감’이라며 맏이만 중매가 들어왔다. 수십 번 선을 보던 중 6남매 중 넷째아들, 엄마는 그 조건을 흡족해하셨지만, 결정적인 순간의 선택이 치명타였다.
막상 결혼해서 보니 시댁은 경우가 달랐다. 모든 의무는 똑같이 나누었지만, 권리나 발언권은 아예 없었다. 이해하기도 어려웠지만 용납하기는 더 힘들었다. 억울한 생각에 어쩌다 남편에게 하소연할라치면 ‘똑같은 자식’이라며 원천봉쇄를 했다. 하지만 어쩌랴? 주사위는 던져졌고 그에 따른 책임은 온전히 나의 몫인걸.
맏며느리로 가서 겪었을 수도 있는 많은 책임과 부당함 또한 감내해야 할 부분이다.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없다고 한다. 나에게 그런 행운이 오겠는가, 언감생심 생각조차 못 할 일이다. ‘그냥 넷째로 살자.’ 돌이킬 수 없다면 받아들이기로 하니 맘이 편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결정하게 되기도 한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의 명암이 엇갈린다. 성공의 답은 알고 있지만, 선택과 실천이 어렵다. 언제 어디서 어떤 결정을 하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나 호기심은 있게 마련이다. 수도 없이 선택하고 후회하는 것이 인생살이다. 하지만 ‘껄 껄 껄’하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며 살아야 되지 않겠나.
이 시간에도 선택의 갈림길에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오늘 점심은 뭘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