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삼거리에서 무작정 끌려가 피곤죽이 되도록 얻어맞아』
증언자: 윤영화(남)
생년월일: 1944년생(당시 나이 36세)
직업: 이발사
조사일시: 1988년 11월
유리창 파편 오른쪽 팔뚝에 무수히 박혀
1980년 당시 나는 진월동 개방대학(現 광주경상대학) 입구에서 이발관을 하고 있었다. 원래 이 마을 토박이로 군대 가기 전부터 이발 기술을 익혀 몇 해 전 가게를 냈다. 시내에 난리(광주 민주화 운동)가 났을 때에는 이발하러 오는 사람이 현저히 줄었으므로 문을 닫고 날마다 집 앞에 모여 동네 사람들과 그날그날 보고 들은 사실에 대해 서로 얘기하는 것으로 소일했다.
5월24일 이전에는 시내 상황이 궁금해서 두 번이나 나가 봤지만 별 탈 없이 그냥 돌아왔다. 24일 그날도 집 앞 삼거리에서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하다가 점심때가 되어 일어서는데 난데없는 총소리가 터지면서 총알이 날아왔다. 바로 앞이 우리 집이었지만 뛰어가지 못하고 제일 가까운 집으로 들어갔다. 총알에 맞은 유리창이 깨지면서 파편이 오른쪽 팔뚝에 수없이 박혀 입고 있던 흰옷을 빨갛게 물들였다. 함께 몸을 숨기고 있던 사람이 옷을 찢어 팔뚝을 묶어 주었다.
잠시 총소리가 뜸하더니 계엄군들이 문을 열어젖혔다. 총을 겨누며 나오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데모한 사람이 아니다. 이 동네 살고 있다』고 했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기만 했다. 나의 목소리가 쉰 듯하자 데모하다 목이 쉰 것으로 알았는지 특히 나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나는 원래 목청이 좋았다. 노래도 잘 불러서 MBC 주최 벚꽃놀이 자랑에 나가 입상할 정도였다. 그런데 군대 가서 구호 제창하고 군가를 악을 쓰며 부르는 사이 성대에 이상이 생겼다. 그때부터 완전히 쉰 목소리가 나오다가 몇 년 후에는 거의 소리가 나오지 않아 성대수술을 받았지만 여전히 목이 잠긴 소리가 난다.
얼마나 맞았던지 피곤죽이 된 나를 옆구리에 총부리를 대고 지프차에 태웠다.
반항할 기력도 없어
반항할 기력도 없었지만, 설사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옆구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그들을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를 태운 차는 광주-목포 간 도로에 진주한 계엄군이 있는 곳에서 멈췄다. 차에서 내리자 그곳에 있던 계엄군들이 무수히 달려들어 또 때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가슴이 부어오르고 온몸의 감각이 없어질 정도였다. 피투성이가 다 되도록 무자비하게 구타한 놈들은 나를 철도 너머 반반한 터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이미 같은 마을의 최철진, 김행남, 김영묵씨 등이 끌려와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몰골은 눈뜨고는 도저히 못 볼 지경이었다. 총에 맞아서 쏟아지는 피로 인해 땅바닥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엎드려 있는 동안 사망한 군인 약 20명을 헬기로 어디론가 싣고 가는 것을 보았다. 아마 조금 전의 총격전에서 사망한 군인들인 것 같았다. 죽은 군인들을 먼저 옮기고 제일 나중에 우리들을 통합병원으로 옮겼다.
통합병원에 도착해서는 신원을 파악, 명단을 작성한 후 함께 간 사람 중 나만 차에 태웠다. 트럭이였는지 대형버스였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꽤 많은 사람을 싣고 상무대로 갔다. 그때까지도 치료를 전혀 받지 못한 상태였다. 눈을 가려 끌고 다녔으므로 처음에는 어디가 어딘지 통 알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리자 곧바로 기합과 구타가 시작됐다. 엎드려 기합을 받으면 등 위로 올라서서 무수히 때리고 짓밟았다. 눈을 가려 어딘가로 끌고 가더니 한참을 더 구타한 후 헌병대 영창에 넣었다. 온몸이 쑤시고 부어올라 험상궂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고, 가슴은 숨을 쉬기도 곤란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그날부터 조그만 사무실로 불려 나가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사무실에는 책상과 의자가 여러 개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나를 보더니 편히 앉으라고 해 비교적 편안한 상태로 조사를 받았다. 그때는 별로 맞지 않았지만 내 옆에서 조사받던 다른 사람들은 무지하게 많이 맞았다. 질문하는 내용은 주로 『총을 쏜 사실이 있느냐 없느냐? 몇 사람이나 죽였나?』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총을 쏘지 않았으므로 『아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곳에서 4~5일이 지난 후 다시 불러내더니 또 눈을 가리고 구타하기 시작했다. 여러 명이 불려나가 기합받고 구타당하는데, 『24, 쪼개버려』 하는 말이 들렸다. 그러자 나를 엎드리게 하더니 등에 올라가 몽둥이로 엉덩이 양쪽을 수없이 내려쳤다. 아마도 내가 잡혀갈 때 등에다 「24」라고 썼던 모양이다. 그날 군인들이 많은 사상자가 났기 때문에 24일 잡혀온 내게 화풀이를 해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더욱 많이 맞았다.
한참 그렇게 두들겨 패더니 눈을 가려 또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곳에도 역시 많은 사람이 잡혀와 있었는데 화장실을 갈 때에도 눈을 가려야만 했다. 나는 너무 많이 맞아서 혼자서 걸을 수조차 없었다. 의무관은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군용 매트리스를 보내주어 가마니 대신 그곳에 누워 있었다. 화장실을 혼자 가지 못해 대여섯 명이 매트리스와 함께 옮겨 주었으나, 도저히 앉을 수 없어 선 채로 대소변을 보았다. 이렇게 매트리스에 들려서 화장실을 다닐 때는 눈을 가리지 않았다. 그 틈에 주위를 둘러보니 상무대 내에 있는 교회인 것 같았다.
교회에서 조사받을 때도 질문내용은 항상 『너 총 쐈지? 몇 명 죽였나?』였다. 나는 「아니」라고만 대답하며 끝까지 버티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때리던지 그 고통을 참느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악물었다. 그곳에서 10여 일을 살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잡혀간 지 13~14일 만에 풀려났다.
석방 후 만신창이가 된 육체로부터 오는 고통 때문에 아무 일도 못 하고 누워서만 지냈다. 워낙 없이 살다 보니 병원에는 못 가고, 돈 안 들고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 먹었다. 뱀술, 소 쓸개, 개 쓸개 등을 많이 먹었더니 차츰 좋아졌다. 그런데 석방 직후에는 아무 이상 없던 이가 흔들리고 들떠버렸다.
처음에는 흔들리고 아프던 이가 다 어긋나고 통증이 심해져서 어금니를 모두 뽑아버렸다. 상무대에서 조사받을 때 고통을 참느라 악물었던 후유증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건강이 좋지 못해 이발소 일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상무대에서 당한 일을 말하면 안 된다고 교육받았다. 아무 말도 않고 살아가려니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동네 사람들은 아무 말 않고 그렇게 지내는 나를 실제로 미쳤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 내가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지금도 날이 궂거나 비가 올 때면 2~3일은 통증에 시달린다. 날씨에 상관없이 평소에도 가끔 왼쪽 다리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고 꼬집어도 감각이 거의 없다. 밤에 자다가 왼쪽 다리가 마비되면 집사람을 깨워 한동안 주물러야 정상으로 돌아온다.
올해(1988년) 부상자회에 가입하고, 한 동네 사는 부상자나 유족들과 모임을 만들어 놀러도 다니는데 경찰들이 다 알고 있다고 했다. 경찰이 우리 모임의 어떤 사람을 찾아와 모임을 갖지 말라고 했다.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조사, 정리 ; 양난희, 양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