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의 『예수는 괴물이다』
1. 지젝의 ‘기독교’에 대한 독해는 헤겔과 라캉의 개념을 통해 전개된다. 지젝은 ‘생존하기 위해 삶을 버릴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자본주의적 위기 속에서 ‘신학적인 것’과 ‘유물론적인 것’의 통합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 해방적 효과를 추적한다. 이러한 변화적 개념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지젝은 진정한 테러(변화를 위한 시도)는 특수자에 대항하고 ‘보편적-단독자’를 위하는 사랑에서 나온다고 말하며 사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랑은 이렇듯 해방적 집합체 안에서 사람들의 특수한 사회위계 질서 속의 위치를 무시하고 그들을 단독성 속에서 연결하는 보편적 연계의 힘이다.”
2. 지젝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신에 대한 타자성을 사랑의 원리, 신의 인간됨 속에서 만들어진 신과 인간의 화해로 극복했다고 보았으며, 예수의 성육신을 신에게 인간이 접근가능하도록 하거나 인간이 신을 볼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신이 그 자신을 인간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헤겔의 설명을 도입한다. “내가 외부화된/자동화된 눈을 통해 보는 것은, 관점적·왜상적 나 자신의 이미지다. 그리스도는 신의 왜상이다.” 즉 이러한 그리스도의 특별한 성격, 그리스도의 ‘괴물성’이 인간 자유의 토대가 된다. 자유는 우리들 죄에 대한 지불도 아니며 사법적인 희생양도 아니다. 인간에게 개방성을 제정함으로써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3. 예수가 ‘보편적-단독자’에 이르는 자유와 사랑의 개념을 우리에게 전달했다는 것을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통해서이다. 예수는 “하지만 나는 네게 말한다.”와 같은 말로써 율법에 대한 반명제를 지시한다. 지젝은 이것을 헤겔 변증법의 종합명제로 보며 계명은 보충을 통해 상위의 수준으로 상승되고 부정되면서 유지된다고 보았다. 유대율법이 관습과 위계질서를 통해 고착된 사회질서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부모자식과의 관계까지 부정하면서 사회전체의 구조를 위협한다. 이것은 예수가 말을 통해 특수한 사회집단에서 단독적 보편성으로 넘어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4. 예수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법과 사랑의 종합은 헤겔의 변증법적 종합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헤겔에게 모순의 해결은 차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온전히 수용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화해’에서 차이는 지워지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수용되는 것이다. 예수가 말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려왔다.’는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예수의 ‘과잉적인’ 명령 속에는 ‘실제적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물론적 인식과 동일한 관점이 담겨있다. 예수의 그런 과잉은 우리로 하여금 정의의 균형잡힌 교환이라는 ‘황금률’이 내적으로 불가능함을 깨닫게 해준다. 지젝은 극단적인 윤리적 상황이 때론 일상적인 윤리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해준다고 강조하며, 지나치게 난해하고 어려운 특정 개념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철학적 접근을 옹호한다. “제한된 상황에 집중하는 태도를 대중을 경멸하는 ‘프랑스식’ 학문의 기괴함일 뿐이라고 평가해 버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5. 지젝은 유물론과 종교의 결합 가능성을 전개한다. 라캉은 종교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는 증상을 억제하기 위해, 즉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다시말해 뭔가 어긋났고 자연스럽지 않다는 느낌에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종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즉 종교의 전제는 상식적인 세계는 참된 현실이 아니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유물론 또한 이러한 전제에 동의한다. 다만 더 높은 초감각적 현실이 분명히 있다는 주장을 거부할 뿐이다. 유물론보다 신학자들이 더 무신론이라고 라캉은 강조한다.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없으며, 증거라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도 없다. 증거 대신, 신자들은 오로지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욕망으로 추동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최상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해야 한다고 욕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존재하지 않는 사물에 대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신론은 신의 비존재에 대한 최상의 증명인 것이다.”
6. 진정한 근본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관심없으며 그들의 생각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종교 또한 ‘신의 증거’에 매달리지 않는다. 예수의 성육신을 통한 자유와 사랑은 ‘성령공동체’에 의해 축소되었다. “십자가 죽음 이후, 즉 육화된 신의 죽음 이후, 보편적 신은 신자공동체의 정신으로 귀환한다. 신은 초월적인 실재적 실체로부터 가상적/이념적 실재로 이행하며, 단지 행동하는 개인들의 ‘전제’로서만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7. 저자가 전개하는 기독교의 실체에 대한 이론은 헤겔적 개념과 라캉의 정신분석 개념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저자가 강조하는 ‘유물론적 윤리’에 대한 설명은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관점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저자는 유물론적 윤리를 ‘도덕성 없는 윤리’라고 말하며, 도덕과 윤리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도덕성의 기본 규칙은 ‘내가 당신에게 하길 원치 않는 것을 나에게 행하지 말라’이다. 반대로 윤리는 나 자신의 일관성, 내 욕망에 대한 충실함을 다룬다.” 유물론적 윤리는 외부의 기준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해야할 것을 한다. 내가 선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한다. 이같은 순진성은 성찰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8. ‘해야할 것을 한다.’라는 윤리는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라는 나의 모토와 약간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결정의 중심이 자유에 있다는 것은 동일하다. 외부의 기준, 라캉적 ‘대타자’에 의해 호도되는 인간들의 ‘자유’의 상실을 극복하는 것, 이것이 유물론적 윤리의 진정한 목표일지 모른다. 지젝은 유물론적 윤리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감정이입없는 윤리적 괴물은 맹목적 자발성과 성찰적 거리의 기묘한 일치 속에서 해야 할 것을 수행하며, 구역질나는 근접성을 피하면서 타자를 돕는다. 이런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세계는 감상이 아니라 냉정하고 잔혹한 열정이 지배하는 즐거운 공간이 될 것이다.”
첫댓글 - "오로지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욕망으로 추동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최상의 증거..."
- 존재로서의 자유를 획득 or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