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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기-13차시 합평작품
1. 세종대왕 자태실을 보고/변미순2
-골골이 보물이 있다.
1) 가까운 사이일수록 소홀히 하는 잘못처럼 지척에 있기 때문에 가보지 못한 곳이 있었다. 조선 최고의 성군이셨던 세종대왕의 아들 태반을 묻어둔 ‘세종대왕 자태실’이다. 풍수지리학에서 명당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귀가 솔깃해지기도 하고, 한편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왕권 쯤 되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2) 최고의 명당 세곳 중 낙점된 곳이 성주군 월향면 인촌리의 작은 산이다. 산봉오리 상단이 원래부터 작은 분지처럼 평편하였으니 보기드문 모습이고 올라서보니 배산임수도 확실하였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만 성주 이씨의 문중 묘가 그 근처에 있다는 것을 고하지 않아 파직되었다더라는 이야기도 전할 만큼 명당이었다.
3) 세종대왕의 큰아들 문종이 임금이 되는 것은 확실하여 예천군의 명당명사인 명봉사에 안태되었다. 나머지 세종의 아들 18명 왕자의 태반과 종손 단종의 태까지 모두 19기가 이렇게 한곳에 모여 태실이 만들어진 예는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다고 했다.
4) 출산 후 부속물로 나오는 모든 것을 태(胎)라 하였고, 왕족의 태가 귀하니 아무데나 버릴 수도 없었겠다 이해도 되었다. 냉장 냉동고가 없었던 시절에 태반과 탯줄을 백번을 씻어 말리고 항온주(녹두주)로 마지막 헹굼을 하였으며 항아리에 넣어 길한 방에 모셔졌다가 길한 날을 점지하여 태실로 운반되었다고 했다.
5) 죽은 자가 묻히는 묫자리는 살아서 본인이 준비하기도 하지만 자식이 조상을 잘 모시겠다는 의지와 묫자리 덕으로 자식 대가 잘 살기를 바라는 염원적 두리번이다. 태실은 태조차 소홀히 보관할 수 없는 귀한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이생에서의 삶이 창창하기를 기도하고자 부모가 명당을 찾고 안태가 진행되었다.
6) 삼국유사에부터 명당 태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하니 이미 우리나라 전역의 명당은 묘도 태실 자리도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산이나 지역 이름에 태(胎)가 들어간 곳은 대부분 힘있는 권력자의 태실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7) 태조 이성계는 태어날 때부터 왕손이 아니었고 태실조차 없었어도 조선왕조를 창건하였다. 세종의 큰아들 문종은 최상의 곳에 태실이 있었으나 병으로 단명하였고, 어린 단종이 이어가는 듯하였으나 최고의 명당인 집단 태실 속에 있었어도 숙부에게 참수당한 최악의 역사로 남았다. 단종의 숙부로 왕좌를 차지한 수양대군, 세조야 말로 명당의 한점 혈에 자리 잡았다고 해야하나.
8) 시신이든, 태반이든 명당에 모셨다는 것이 산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수단일 뿐이다. 세종대왕의 딸로 태어난 정소공주, 정의공주, 정안옹주, 정현옹주 4명의 태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그녀들의 태를 어떻게 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육백여년 전에는 딸은 존재가 무의미했던 것을 보면서 또 격세지감을 느낀다.
9) 그동안 여성들의 태실이 없어서였을까? 여왕은 세종대왕 때보다 팔백년이나 앞선 신라시대에도 선덕왕, 진덕왕, 진성왕이 있었다. 무슨 근거로 여성을 왕좌에서 도외시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여성의 위치가 당당해졌다. 현대사에 박근혜 대통령까지 여성은 단 4명의 국가원수만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 젊은이들을 보면 분명 여성의 지위가 하늘 끝까지 치쏫아져 있다.
10) 명당에 시신을 두든, 태를 두든 사람으로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매시 행복하기만 했던 사람이 있는가? 또 매번 불행하기만 한 사람은 있을까? 인생 총량의 법칙에 의해 행불행의 비율은 누구나 비슷하고, 태어남도 나의 선택이 아니지만 죽는 것도 불변의 법칙을 받아들여야하는 순리 속에서 희로애락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 한 사람의 인생이 반죽되어 진다.
11) 아들이 스물이라도 후대 왕은 하나가 될 뿐이고, 이미 모두 왕자라는 최상의 위치인데 예나 지금이나 좋은 것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나보다. 명당을 찾아 여러사람 애먹이지말고, 흔적없이 사라지는 돈 뿌려대지 말고 그 여력으로 봉사하고 기부하고 그냥 사는 동안 덕을 쌓아가면 되지 않았을까. 태실을 만들거나 명당을 찾거나 하는 이들은 어쩌면 이미 태어나면서 금수저였을 것인데 무엇을 더 바라고 바래었던가 물어보고 싶다.
12)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은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하여왔고, 세상이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닌가 투쟁하고, 불공평하다고 아우성대어도 보지만 안태를 위한 명당의 태실을 찾으러 힘과 돈을 낭비하는 어둔한 부모가 되지는 않겠다. 말과 행동으로 본보기가 되고, 그들이 스스로 행복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는 현명한 태도와 모습을 갈고 닦아가는 것이 내가 그리고 후대가 바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13) 유적이 시대적 흐름에 따라 논란의 주제가 달라진다. 한때는 부러운 명당찾기의 상징이 되었다가 이제는 남녀 불평등의 불씨가 되었다가 한편 보는 이에 따라 과욕의 모습으로 씁쓸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래도 역사를 통해 후대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보고, 다르게 해석하면서 토론하고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어 보려는 것이 가치가 되는 귀중한 자원이다. 더 많이 보고 이야기 나누어야할 역사적 보물들이다.
2. 낡은 짐 자전거/이호규3
1) 얼마 전, 상주에 있는 자전거 박물관을 다녀왔다. 국내 최초의 자전거 박물관을 보유한 상주는 무려 85,000대의 자전거 보유로 한 가구당 2대꼴이라 한다. 저탄소 녹색성장에 발맞추어 자전거 문화 발전과 이용 활성화에 이바지하고자 개관했다고 한다. 전시관 빼곡하게 수많은 자전거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2층에 올라가면 한쪽 구석에 조금은 낡은 짐 자전거 한 대를 만날 수 있다. 보통 자전거보다 조금 더 크고 뒤쪽에 짐을 싣는 자리가 넓은 편이다. 그 낡은 짐 자전거를 보면서 인자하셨던 작은 아버지가 생각났다.
2) 아버지 형제는 2남 1녀였다. 모두 한마을에서 사이좋게 살았다. 내가 태어날 때쯤 작은아버지는 따로 분가하셨다고 했다. 동네 입구에 집을 짓고 작은 가게도 차렸다. 우리가 어릴 때는 ‘점빵’이라고 불렸다. 골짝 마을이지만 국도가 지나가는 길옆이고 양쪽으로 도로를 접해 있는 나름의 요지였다. 담배 가게까지 겸하고 있었다. 냇가가 바로 옆이라 큰비가 오면 나무로 된 돈통을 들고 우리 집으로 피신 오셨던 기억도 있다.
3) 아버지 형제는 늘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우리가 어릴 적 마당 한쪽 옆에는 대형 철 솥이 걸려있었다. 이웃 사람들이 칡넝쿨 줄기를 걷어오면 그것을 대형 솥에 넣고 삶았다. 어느 정도 끓여서 냇가에 가져가 껍질만 곱게 벗겨서 하얀색이 될 때까지 흐르는 물에 씻었다. 그리고는 마당에 줄을 쳐서 햇볕에 말리는 작업이었다. 남정네들은 산에서 칡넝쿨을 걷어와서 일당을 받아 가고, 여인네들은 냇가에서 칡 줄기를 씻는 작업으로 수당을 받아 갔다. 백옥같이 하얀 칡 줄기 내용물은 어딘가에 납품하셨다.
4) 작업장 근처는 우리의 놀이터였다. 삶은 칡넝쿨의 껍질을 벗겨낸 속껍질 부분도 하얗게 변했고 부드러웠다. 그것을 쌓아놓은 공간은 우리가 올라가 놀아도 푹신할 정도였다. 칡 넝굴 삶기가 끝날쯤이면 숯불에 감자를 구워 주시기도 했다. 가끔은 작은아버지가 적어주시는 메모지를 가지고 점빵으로 가면 숙모님이 필요한 물건과 함께 과자도 주셔서 심부름은 즐거운 놀이였다. 때로는 작은아버지가 할머니 잡수시라고 가져다 놓은 사탕도 우리 몫이 되기도 했다.
5) 너무나 자상하신 작은 아버지였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 엄격하여 어린 시절은 노심초사의 연속이었다. 사형제를 키우려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다른 아버지와는 달리 너무 무서워 우리 형제는 꼼짝할 수 없었다. 동네 아이들과 휩쓸려 다니다가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에 가담하면 그날 저녁에는 회초리를 맞아야 했다. 자식들을 너무 엄하게 대하시는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주 다투셨다. 그에 비해 작은아버지는 아이들과 너무나 친하게 지내시어 사촌 동생들이 부럽기만 했다.
6) 3일, 8일은 시골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학교를 파하면 산골 꼬맹이들은 시골 장터로 달려갔다. 행여나 엄마가 시장에 왔을까 해서였다. 아니면 약장수라도 있으면 구경할 터였다. 아는 동네 아주머니를 만나면 우리 엄마 시장에 안 오셨는지 묻기도 했다. 나는 늘 작은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장날마다 담배를 가지러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작은아버지를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했다. 엄마가 시장에 안 오시는 날에는 작은아버지를 만날 수 있어서 늘 기쁜 하루였다.
7) 동생들이 학교를 다니기 전이다. 시장에서 만난 작은아버지가 주신 용돈으로 과자를 사서 먹으며 십리 길을 걸어왔다. 가끔 집에 가는 길에 만나면 자전거 앞자리에 태워주셨다. 큰 자전거 뒷자리에는 이미 짐이 가득 실려있었지만 사양할 줄도 모르고 그냥 타고 왔다. 평탄한 길도 아니고 비포장 돌자갈 길에 긴 오르막이 있는 시골길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시골 작은 동네에서 작은아버지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추억들로 유년 시절을 보냈다.
8) 초등학교 상급반 정도일 때 일이다. 시골 냇가는 평소엔 물이 적어서 어린 우리들의 키를 넘기는 곳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는 양쪽 갈래의 냇물이 합쳐지는 아랫부분이 제법 깊게 파였다. 어느 날, 많은 비로 인해 냇물의 양이 많았고 물살이 빨랐다. 용맹심이 발동한 꼬맹이들은 누가 저기를 건너갈 수 있겠냐고 담력 시합을 했다. 평소에는 겁이 많은 편인데 그날따라 내가 먼저 하겠노라고 나섰다.
9) 물살이 너무 빨라 안전 조치가 필요했다. 주변에 있던 기다란 폐비닐을 허리에 붙들어 매고 빠른 물살의 냇가로 뛰어들었다. 아뿔사! 떠내려갈까 싶어 허리에 묶은 비닐 때문에 몸이 냇가 바닥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것도 모르고 밖에서는 비닐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순간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든 허리에 묶인 비닐을 풀어야 했다. 비가 온 후라 물도 황토물인데 한 번이라도 마셔버리면 큰일이 날 상황이었다. 긴박한 순간에서 겨우 비닐을 풀고 냇가 옆으로 겨우 헤엄쳐 나왔다.
10) 그때였다. 저 멀리에서 작은아버지께서 회초리를 들고 달려오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남은 옷가지를 들고 줄행랑을 쳐야만 했다. 그렇게 무서운 작은아버지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 생각하니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장난을 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의 작은 아버지였어도 조카를 혼쭐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만났을 때는 다른 어떤 말로도 꾸중하시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였으면 그날 저녁에 회초리로 수없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작은아버지는 엄중한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으로 화를 대신하셨다.
11) 그렇게 자상하시던 작은아버지도 병마 앞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가 일하던 병원에 오셔도 불편을 안 주시려고 살짝 진료만 하고 가시고는 했다. 때로는 복도를 지나다 작은아버지를 만나고는 했었다. 서문시장 노점에서 찹쌀 수제비를 같이 드시며 우리들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병원을 찾으시다 결국 평생 땀흘려 가꾸셨던 양지바른 곳에서 영면하셨다.
12) 낡은 짐 자전거를 보면 늘 작은아버지가 생각난다. 한 동네에서 평생을 같이 사시면서 형제간에 우애로 자식들에게 본을 보여 주셨다. 서로를 위해 볏짚을 밤새 날랐다는 사이좋은 형제 이야기가 우리 부모님 형제분 이야기 같았다. 엄하신 아버지와는 달리 평생 자애로우신 모습으로 우리를 보살펴 주셨다. 상주 자전거 박물관을 둘러보며 아련한 추억의 한 자락을 곱씹어 보았다. 생전에 좀 더 잘 모시지 못함이 후회스럽다. 인자하셨던 작은아버지는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고, 아버지는 지금 병상에 계시니 세월이 무상하기만 하다.
3. 에버그린(evergreen)/김병연5
1)그 일은 10여년 전에 일어났었다.
중학교 시절, 절친하게 지냈던 한 친구에게 차를 20여대나 판매한 나는 평소에도 늘 그에게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3년 내내 줄곧 같은 반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앞, 뒤로 자리 배치가 되어있어서 많은 얘기들을 주고 받곧 하였다. 우리의 우정은 그렇게 싹이 터갔다.
2)그는 성적도 늘 전교 10등 내에서 맴돌았다
반면 나는 그에 미치지 못해 늘 경쟁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더군다나 전교 회장까지 맡았으니 급우들간엔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나보다 키도 컸었고,외모도 준수했다.이미 그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로 내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3)졸업 후 그는 대구 명문 K고에 들어갔고, 나는 다른 학교로 진학하는 바람에 소식이 끊어지게 되었다.
세월은 손살같이 흘러갔다. 다른 친구로부터 그의 소식을 가끔식은 들을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모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이름있는 대 그룹이었다. 역시 공부 잘 하더니만 촣은 희사에 취직했구나 했다. 결혼도 상당히 일찍했다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여전히 미혼이었다
4)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았는지 어느날 회사 사무실로(그 땐 아직까지 휴대폰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다)그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게되었다.
"나 , 영균인데 알아보겠니? 아마 우리가 졸업한지 15년 쯤 되었지싶다 . 그 동안 잘 지냈고...회사 업무용 차가 필요해서 니 한테 부탁할려고 전화했다. 시간되면 얼굴한번 보면 좋겠다." 이렇게해서 지금까지 그와의 굵은 동아줄같은 튼튼한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다.
5)친구 사무실은 10평 남짓한 규모로 임대로 들어있었다. 서로 보자마자 부둥켜 안고 한참이나 있었고, 눈에서는 눈물도 흘러내렸다.그에게 있어서 세월도 비껴가지 못했는가 보다. 얼굴을 보니 무쳑 수척해 보였기 때문이다.잠시후 자조치종을 들을 수있었다.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매형과 같이 사업하다가 그만 부도가 나는 바람에 이렇게 조그맣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노라고.
몹시 안타까운 사연을 듣게 되니 가슴이 미어져왔다
차를 계약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이후 다행히 사업이 잘되어서 계속해서 회사 업무용 차를 수십대나 판매하게 되었으니 나로써도 큰 행운이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든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나는 맨붕에 빠져들고 말았다.
6)"병연아. 할 얘기가 있는데 시간되면 오늘 사무실로
올 수 있겠니?"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이 왠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내가 뭐 그에게 뭐 잘못한 일이 있었나 하면서 급하게 차를 몰았다. 만나보니 얼굴엔 수심이 가득차 보였다. 커피 한잔 하면서 기막힌 사연을 듣게되었다.
7)얼마전 렌트사로 부터 청천벽력같은 통보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3년 전 렌트로 구입한 차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된 것으로 위약금 천만원을 내라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급히 그당시 계약 담당한 렌트사 직원한테 연락하였다. 사무실로 당장 올 것을 종용하자 10분안에 도착하였다. 담당직원은 분명 고객에게 약정 기간내에 주행거리를 초과시, 일정의 위약금을 물도록 되어있는 계약 조항 서류를 내밀면서 분명 고지 했음을 주장하였다.
8)3년 전의 일이라 친구는 들은 기억도 없고, 그런 조항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하였다. 아! 보여준 계약서에는 그런 조항이 명시 되어있었다. 친필 사인도 확인되었다. 직원은 전혀 잘못이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친구는 별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계약체결 당시 좀 더 꼼꼼하게 그런 조항을 새겨 들었으야 했다면서 직원을 돌려보냈다
나는 이 어처구니 없는 기막힌 상황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내 잘못도 한몫하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에 사로 잡혔다.
친구도 넌지시 나에게 그런 중요한 조항을 너도 알고있었을터인데 수시로 체크해주지 못함에 다소의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는 듯했다. 양심상 가책이 들어 위약금 중 일부라도 내놓겠다고하니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곳을 나왔다.
9)그일 이후로 한동안 서로 연락이 없었다.줄곧 냬 마음은 붋편했고 자괴감에 가득찬 니날을 보냈다.
분기마다 열리는 중학교 동창회에서도 얼굴을 볼수 없었다 . 일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가끔씩 그의 근황을 듣게 되었다. 사업상 해외 출장이 잦은 관계로 국내에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았다.
10)올해 구정이 막 지난 어느날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실로 뜻밖이 아닐 수없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들떠기조차 했다. 차 계약때문에 지금 사무실로 올 수 있겠냐고 했다. 즉시 단걸음에 내달렸다. 도착한 곳은 혁신도시내에 위치한 신축 빌딩 10층이었다. 그간 사업이 번창하여 좀 더 넓은 곳으로 옮긴 듯했다. 들어서자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그간의 동향을 들을 수 있었다. 자기 아들 차 구입 때문에 오라고 했다고 한다.
저 몇년 전에 일어났던 일은 까마득이 잊어버린 듯했다. 아니 이전에도 거론초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좌불안석 상태였다.
11)사계절 잎이 지지않는 늘 푸른 나무가 있다. 이름하여 에버그린이다.
'수잔 잭슨'이 부르는 노래를 조용히 들으면서 친구를 떠올려 본다. 그는 사시사철 늘 푸르름을 잃지않고 있는 고봉에 고고히 우뚝 서있는 나무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환경에 따라 시시각각 제 몸의 변화를 달리하는 저 카멜레온이 아니라 한순간 만이라도 푸르름을 띈 그런 존재로 살고 싶다.
내가 무언가를 필요로 할때면 서슴없이 손을 내밀어 주었던 그였다. 연인 보다도 더 아니, 가족보다도 더 나를 생각해주고 아껴주었던 그였다.그에게 진 빚을 언제 갚게될른지...
Sometimes love would bloom in the spring time
Then my flowers in the summer it will grow
Then fade away in the winter
When the cold wind begins to blow
But when it's evergreen, evergreen
It will last through the summer and winter, to
When love is evergreen, evergreen
Like my love for you so hold my hand and tell me
You'll be mine through laughter and through tears
we 'll let the whole world see our love will be evergreen through all the years
But when it's evergreen, evergreen
It will last through the summer and winter, too
When love is evergreen, evergreen
Like my love for you
4. 금배지 /이정열1
1 고등학생 때 다니던 학교에서는 학생회 임원에게 금배지를 줬고 나는 삼 년 내내 그 배지를 놓쳐본 적이 없었다. 진짜 금으로 만든 건 아니었지만 짙은 감색의 교복에 금빛 배지를 달고 거울 앞에 서면 그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배지는 학교의 상징인 큰 역삼각형을 교조인 독수리가 붙잡고 날개를 펼친 형상이었다. 임원에게만 허락되는 배지 다운 생김새였다. 친구들과 다르게 금배지를 달았다고 해서 어깨가 접히지 않거나 목에 힘이 더 들어간 건 아니었다. 보기에 좋다는 것 외에 장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임원으로서 해야 하는 일을 저울질하면 거의 등가교환이라 여겼다. 단점을 꼽으라면 눈에 띈다는 사실이었다. 단체생활에서 눈에 띈다는 건 그리 좋은 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등교할 때부터 달랐다.
2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의 유리창 너머로 시계를 봤다.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할지도 모르는 시각이었다. 냅다 뛰었다. 학교 정문이 비물리적으로 닫히기 오 분 전에 통과했다. 시간 안에 도착했다고 해서 마냥 안전한 건 아니었다. 눈을 부릅 뜬 채 출입문을 지키는 사천왕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선생님이 들어오려는 모두를 붙잡아 세우기 전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눈앞의 계단을 뛰어올라가려는데 불러 세웠다. 아직 지각 전 이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금배지를 단 녀석이 지각에 가까운 시간에 등교한 게 문제였고, 스리피스의 교복에 뛰어오느라 조끼와 바지 사이로 삐져나온 셔츠가 복장 불량이었다. 잃어버리면 재발급하는데 사천 원인 학생증이 뛸 때 얼굴을 치지 않도록 셔츠 단추 사이로 집어넣어 놓은 것도 문제였다. 여기 나 같은 것들 천지인데 왜 나만 잡냐는 말은 금배지를 달고선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3 대신에 이러시면 교실 도착할 땐 지각이라고 사정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었다. 다음부터는 등교 시간보다 훨씬 일찍 오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라는 가벼운 훈계를 듣고선 서둘렀다. 그래도 선생님께 붙잡혀 있을 때 숨을 골라서 다행이었다. 난관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학교 건물까지 가는데 계단 오십 개 정도, 건물에 들어가서도 그만큼은 더 올라가야 했다.
4 다행히 담임선생님께는 혼나지 않았고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친구들과 다를 바 없이 앉아있지만 마냥 동일하지는 않았다. 오늘이 며칠인지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반 전체에 긴장이 깔렸다.
“29일이니깐……. 3번. 문제 풀어봐.”
항상 이런 식이었다. 피보나치수열도 아니고, 소수[솟수](素數)도 아니고 아무 상관 없는 호명이었다. 미리 짝을 지어서 문제 풀이를 익혀놓은 28번, 30번, 9번 19번은 다 풀 수 있는데 3번이라니 아찔했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왔다. 교복 안에 체육복도 걔네만 입혔다. 연거푸 세 명이 풀지 못하자, 기회가 끝났다. 우리의 전술이 잘못됐다.
“안 되겠다. 실장이 누구였지. 네가 대표로 맞으면 되겠다.”
내가 풀 수 있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어 저 선생님이 쉬는 시간에 같은 과목이자 옆자리인 담임선생님을 약 올릴 상황을 떠올렸다. 반 평균 점수도 비슷해서 괜한 빌미를 줘서는 안되는데 일 교시부터 종례가 두려워졌다.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건 수업 시간 만은 아니었다.
5 점심시간에도 긴장해야 했다. 남는 책상을 붙여서 잠을 잤다. 엎드려서 자면 불편해서 잔 것 같지도 않기 때문에 사물함 위나 책상을 여러 개 붙여 자야 편하게 잘 수 있다. 가끔씩 점심시간에도 복도를 지나다가 반을 들여다보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오늘은 운이 없었다. 문을 열고선 금배지 단 녀석이 무슨 행동거지냐고 호통쳤다. 너부터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아야 다른 학생들에게 면이 서지 않겠냐는 말씀이었다.
6 오후에는 체육시간이 있는 날이었다. 다른 학생들이라면 앞의 쉬는 시간부터 마냥 즐겁게 운동하는 야외 체육수업이 나에게는 가장 바쁘게 움직여야하는 때였다. 체육 선생님께 미리 기구와 개수를 전달받아 준비해야 했다. 수업 종이 치자마자, 교실 문 잠그는 건 부실장에게 맡겼다. 체육복 갈아입는데 이분, 교무실까지 이분, 체육 창고까지 삼분이면 쉬는 시간이 삼분 남는다. 출석부를 챙겨, 교무실에 걸려있는 체육 창고 열쇠를 찾아야 했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선생님들께 허리 숙여 인사하는 건 당연했다. 미리 정해놓은 반 친구 몇 명을 데리고 여섯 명 당 기구 하나, 기구 여섯이 정상인지 확인하고 운동장으로 옮겼다. 진짜 일은 지금부터였다.
7 공만 있으면 목줄 풀린 개처럼 온 운동장을 휘젓고 다니는 반 친구들을 좌우 정렬 줄 세워야 했다. 몇 명 짚어 종목별로 무리를 이룬 애들을 불러오라 일렀다. 기구 앞에 여섯씩 줄을 세웠는데 둘이 비었다. 다 같이 모여도 빵 먹느라 늦는 녀석들이 있다. 역시 나는 해서는 안 되고 못하는 행동이었다. 체육시간 전에는 음료수를 마시고 싶더라도 다른 친구에게 부탁해야 시간이 모자라지 않았다. 저 멀리서 주머니에 빵 봉지를 구겨 넣으며 오는 둘이 보였다. 그 뒤에는 원근법을 무시한 거뭇한 형체가 보였다. 체육복을 입은 선생님이었다. 뒤나 한 번 돌아보라고 손짓하며 빨리 오라 소리쳤다. 그렇게 체육시간까지 책임을 마무리했다. 남은 종례만 잘 견뎌내면 하루가 끝이었다.
8 돌이켜보면 29일에 9번이나 19번이 아닌 3번을 불렀던 선생님은 괜한 심술을 부린 게 아니었다. 모두가 복습해야 좋다는 뜻이었으리라. 임원인 학생에게 다방면의 모범을 요구한 건 어른의 눈으로 본 세상이 그렇지 않아서 였으리라. 다음 세대인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를 바랐던 선생의 마음이었으리라 그리 짐작했다. 학교를 떠나 화면으로, 눈으로 본 금배지를 단 이들은 흡사 특권 면허를 발급받은 듯 굴었다. 내가 학교에서 달았던 금배지의 무게와 의미는 적어도 그런 면허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 시절의 선생님과 같이 나도 금배지에 할증 중력이 가해진다는 사실이자 바람을 후대에게 전하기만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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