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늘 배낭을 하나 지고 다닌다. 거기엔 대개 붉은 페인트칠을 한 쇠로 된 물통과 수첩과 볼펜, 그리고 한두 권의 생물도감이 들어 있다. 그의 신발은 대개 등산화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침에 그는 산을 오르곤 한다. 숲 해설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숲 학교의 선생님이다. 그의 가장 사랑스런 학생들은 이름 없는 풀과 꽃들이다. 혹은 풀이나 꽃과도 같은 사람들이다. 숲 학교의 아이들이 언제나 이름을 불러달라고 손을 들기 때문에 그는 그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느라고 항상 바쁘다. 그에게 있어 모든 사람들은 또 하나의 풀이요, 꽃일 게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자연이란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거울이요, 부활과 소생과 그리움의 상징이며, 언제나 휴식과 위안의 대상인 동시에,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흙, 풀, 꽃, 숲 등, 사랑의 대상인 자연을 다음과 같이 예찬한다.
숲길을 걷는 동안 나는 느낀다
흙의 땀방울, 흙의 입김, 흙의 향기 속에서 내 몸의 일부가 되살아난다 땅에 돋은 풀들이 내 몸에도 돋아나 아지랑이 덤불 속에서 말을 걸어온다 풀의 속삭임, 풀의 노래, 풀의 속마음을 이슬이 맺히는 소리로 듣는다 땅의 얼굴에 돋아나는 붉은 달맞이꽃 노란 치마 민들레, 뽀리뱅이의 어린 이삭 햇살 아래 봉긋이 말을 붙이는데 수줍어 고개 숙인 어린 속잎들 땅을 보며 말없이 이 녀석들에게 기댄다 손을 뻗어 나의 실뿌리로 흙의 가슴을 만지면 흙 속 향기를 따라 여기저기 뭉클함이 잡힌다
내 몸에 돋아나는 그리움의 싹 숲 속에 있으면 늘 움을 틔운다 ―「봄은 설레며 자란단다」 전문
자연과의 일체화를 통해서 자신의 몸이 소생하고 자연에 더욱 친밀하게 다가가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창조의 영감을 얻고 안식과 위안을 얻는 자연이야말로 그에게 최고의 친구이자 사랑의 대상임을 위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혼의 실뿌리를 뻗어 흙의 가슴을 만질 수 있는 사람, 그래서 풀의 속마음까지 읽어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시백 시인인 것이다. ` 2. 낭만주의적 소시민의 현실인식
그는 문명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문명에 의해 훼손되어가는 자연을 안타까워하며 황량한 문명 속에 잃어버린 자연을 복구시킴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하고 본래의 건강한 자연성을 회복시키고자 애쓰며 스스로 자연의 전령사임을 자처하기도 한다.
마포 대흥동 2층 양옥들은 해가 바뀌어도 자라지 않는다 철길 옆으로 비스듬히 휘어 옆 동네 빌딩들이 자라는 걸 바라볼 뿐 불교방송국, 가든호텔, 진도모피, 삼창프라자 빌딩들이 무성한 잎을 내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나는 전지가위로 들쑥날쑥한 빌딩 숲 건물들의 잔가지를 싹둑싹둑 쳐나간다 가지치기를 하고 나자 안경점, 017디지털대리점 곰돌이 책대여점, 문방구, 세탁소가 보인다 나는 들에서 뽑아온 들꽃을 골목길 어귀에 심는다 까치수영, 매발톱꽃, 애기똥풀, 며느리밑싯개까지 빌딩 그늘이 바람을 내며 보호하기 시작한다 나는 마포에서 가지치기를 아직도 하고 있다
골목마다 심을 풀꽃을 찾으러 곧 떠나야겠다 ―「정원사의 꿈」 전문
끝없이 자라나는 자본주의의 욕망과 탐욕스런 문명의 산물들인 고층빌딩들은 경쟁하듯이 자라난다. 시인의 눈은 그것들을 걷어내고 마음의 ‘전지가위’로 잘라냄으로써 소박한 일상의 세목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스스로 정원사를 자처하며 민중적 표상인 ‘풀꽃’들을 들에서 뽑아다가 ‘골목마다’ 심는다. 이 점에서 이시백 시인은 본질적으로 민중적 소시민이자 자연주의자 혹은 타고난 낭만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는 언제나 ‘한 그루의 따뜻한 나무’인 자연을 그리워한다.
나는 애써 너를 보며 태연해 한다 건강도 키도 멀쑥하게 자라지 못한 나 숲의 그늘 속에서 너를 보면 실개천처럼 쪽 뻗은 너를 바라보면 지나온 숱한 날들이 물소리처럼 그리워 너를 껴안아 보지만 유년의 그리움은 멀다 그래도 너는 언제나 나를 껴안아주는 한 그루 따뜻한 나무
심장을 닮은 이파리에서 ‘힘 내세요 기운 내세요’ 도란거리는 초록의 팔랑거림이 좋다 너는 잎 점막에 심장판막이 깊어 양분이 땅속으로 유실되어도 잔가지마다 푸른 방울을 달고 흔들린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푸근하다
잎새마다 녹아 흐르는 따뜻한 향기 따뜻한 음성 따뜻한 손길 벌레 먹은 심장의 커다란 잎으로 갈참나무 오리나무, 나무 나무들 사이 밝게 웃고 있는 나의 힘 쪽동백 ―「언제나 그가 그립다」 전문
치열한 경쟁이 지속되는 문명의 틈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상처받기 쉬우며 사람을 쉽사리 지치게 한다. 그곳으로부터 소외된 화자는 잘 먹지 못하였기에 잘 자라지도 못한다. 그러한 화자에게 자연은 언제나 ‘힘 내세요, 기운 내세요’ 하며 격려해주고 따뜻이 감싸준다. 그는 그러한 자연 속에서 평안과 위안을 얻는다. 자연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며 밝고 믿을 만한 희망과 생명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시인에게 깊은 안식과 평안을 주는 자연이기에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자연예찬론자여서, 그 자연을 훼손하여 이룩한 문명사회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일견 비현실적인 낭만주의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는 매우 현실적인 주제라 할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를 다룰 때조차도 인간사의 현실과 자연을 대비시키면서 정부와 자연이 하나로 합쳐서 문제를 해결하기를 촉구하는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해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나는 두 가지를 다 해결하는 법을 생각한다 정부와 자연이 하나로 합치는 방법 마음은 자연이 되고 몸은 정부가 되는 게다 벚꽃들 바람에 떨어지는 저쪽 담장 아래 젊은 외국인 형제들 검은 비닐을 들고 걸어간다 흰 꽃눈을 맞으며 걸어간다 ―「밀린 월급 주세요」 전문
정부라는 제도는 하나의 문명의 소산인데, ‘마음은 자연이 되고 몸은 정부가 되는’ 이율배반적인 해법이 얼마나 실현가능성이 있을지는 의문이 간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한 고용주들이 인간본래의 본성이자 자연인 ‘양심’을 회복할 때만이 이러한 부당한 사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3. 척박한 삶 속의 허기와 갈증
화자는 문명과 자연, 이 두 가지의 모순을 매우 아름답고도 평화롭게 해결하기를 바라지만, 이러한 이율배반적이고 분열적인 현실 속의 삶이란 숱한 갈등과 피로를 수반하기 마련일 터이다. 그의 시 속의 화자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고뇌와 갈증, 허기로 ‘뒤뚱거리며’(「나이테를 바라보며」) 축구공처럼 직장에서 발로 채인다(「축구공을 닮았다」). 그래서 화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 마리 초라한 ‘염소’의 행색으로 말뚝에 박혀 있거나 거리를 떠돈다. 다음의 시는 어느 면에서 시인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염소는 말뚝에 박혀 짧은 울음으로 서 있다 비탈에 풀을 줄기차게 뜯는 염소 사람이 지나가면 봐 달라고 큰 소리로 자신을 알린다 염소는 다른 소리는 할 줄 모른다 알아도 말하지 않는다 염소 옆을 지나다니며 최근에서야 울음소리 들리고 아랫배 축 처진 초라한 행색이 눈에 띈다
내 목에 묶인 줄로 어디까지 갈 수 있나 가늠해 본다 가족이 살고 있는 저기 오르막 집 중얼중얼 비탈을 오르며 뒤돌아보니 뜯어야 할 풀밭이 바짝 말라 있다 목에 맨 끈을 풀며 큰소리로 울어본다 소리는 사방으로 퍼지나 듣는 이 아무도 없다
목초지를 찾아 헤매인 지 오래되었다 ―「흩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전문
염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므로 큰 소리로 중얼거리거나 울어보기도 하며 자신을 알려보지만, ‘듣는 이’가 아무도 없다. ‘목초지’를 찾아 헤맨 지 오래 되었으나 화자의 가족이 살고 있는 오르막 길 위의 조그만 집은 언제나 풀밭이 바짝 말라 있다. 이렇게 척박한 삶의 조건 속에서 화자는 마음껏 울어보지도 못한 채, 한 마리 말똥구리처럼 삶의 ‘멍에’를 안고 땀을 흘리며 저무는 들길을 괴롭게 걸어간다. 神이 ‘후’하고 숨을 불어제끼자 저기 굴러 떨어지는 말똥구리 빈털터리로 들길 걷는 발소리 닳아버린 더듬이 더듬는 소리 온 들녘 검은 풍뎅이 울음소리
해 저물녘 들길 걷기 괴롭다 ―「나를 찾아가는 동안」 부분
신이 ‘후’ 하고 숨을 불어재끼자 힘없이 굴러 떨어지는 말똥구리들이야말로 나약한 인간들의 보편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다 닳아버린 더듬이를 지닌 채, 빈털터리로 괴롭게 걸어가며 우는 들길, 그것이 우리네 인생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도 이 낭만주의자는 여전히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우려 한다. ‘불빛’ 따라 흔들리는 삶의 웅덩이 가장자리에 ‘부레옥잠’을 피우려는 시인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는 ‘푸른 줄기를 먼 곳으로 뻗기 위하여’ 발버둥친다.
잎자루를 둥글게 하여 공기로 채운다 물밑에선 바람에 밀리지 않으려 숱한 잔뿌리를 내어 호흡을 한다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시장이 사람들로 빽빽하다
점액을 내어 새순을 보호한다 끈끈한 액이 웅덩이를 타고 흘러 밤마다 새벽시장을 연다
좌판에 앉아있는 나
줄기마다 보랏빛 꽃을 피워 백열전등 아래에서 숱한 뿌리를 내린다 불빛 따라 흔들리는 웅덩이 웅덩이의 가장자리에서 꽃 피우는 나를 사람들은 부레옥잠이라 부른다 ―「부레옥잠」 부분
그는 사회로부터 소외당해 있지만, 언젠가는 생의 중심부인 ‘시장’ 안으로 틈입하고 싶다. 끊임없이 ‘무리’ 안으로 섞이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발이 매우 넓다. 그의 수첩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아마도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유대를 형성하며 행복한 연대를 꿈꾸는 듯하다. 한 사람의 힘없는 소시민이지만, 그의 꿈은 원대하다. 그러나 그의 주머니는 늘 비어 있다. 자신을 방어해 줄 ‘침’도 없고 특별히 무리를 불러내는 ‘재주’도 없다. 하지만 삶의 행렬에서 낙오되고 싶지 않기에 그는 ‘톱날 소리에 베이는’ 환청 속에서도 ‘안전모 쓰고 긴 소매 입고서’(「숲에서 일어난 일」) 견딘다. 그러기에 더욱 더 삶의 허기와 간절한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나도 침이 있는 말벌’이라고 우기며 ‘꽃등에’처럼 몸부림치는 것이다.
꽃등에는 자신을 방어하는 침도 없고 무리를 불러내는 재주도 없다 벌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찾아가는 꽃을 따라 뒤쳐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꽃등에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빛 안에 몸부림치는 내가 보인다 물 속 바위 틈에 구더기 시절 습지에서 숨어 지내던 유충 시절 이제 까맣게 잊고 꽃을 찾아 날아다니나 채우고 싶은 주머니는 늘 비어 있다 들녘에 핀 꽃을 찾아 온몸에 꽃가루를 묻히며 벌의 무리에 섞인다 저기 날아가는 붉은머리오목눈이에게 나도 침이 있는 벌이라고 말벌이라고 꽃등에는 우기면서 짧은 날개를 움직인다 꽃술이 흔들리고 다시 관절 마디의 잔털에 노란 화분의 냄새가 묻어난다 ―「뒤돌아서다 멈춰서다」 전문
이처럼 그는 언제나 ‘텅 빈 주머니’를 지닌 채 어딘가에 피어있을 찬란한 생의 광채라 할 ‘꽃’을 찾아 헤매는 꽃등에의 모습에서 자신의 곤고한 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의 모순과 소외 속에서 힘겨운 삶을 영위하는 화자는 마찬가지로 삶의 부조리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민초들 속에서 ‘변두리로 자꾸만 밀려나는’(「나뭇가지에 매달린」)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4. 민중에 대한 공감과 ‘하나’에의 꿈
그 자신이 한 사람의 프롤레타리아이자 소시민이므로 그는 본능적으로 소외된 민중들에게 연민과 신뢰와 공감을 표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측면은 시집 전체로 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민중 지향적 태도는 분명히 나타난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악수를 하는데 가운데 손가락이 짧아졌다 일을 하다가 손가락 3개를 다쳤는데 그래도 하나만 날려 다행이라고 웃는다 회사가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자기가 손가락이 잘리고 나니까 비로소 손가락이 없는 사람이 자주 눈에 뜨인다고 웃는다 ―「뼈를 자르고 웃다」 부분
‘자기가 손가락이 잘리고 나니까/ 비로소 손가락이 없는 사람이 자주 눈에 뜨인다’는 친구의 얘기를 인용하고 그 친구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웃는 있는 이 시의 화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약간의 ‘현실참여’(engagement)적 의식과 포즈를 읽을 수 있으나, 그것이 행동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의 참여의식은 매우 소극적이고 미미한 수준에서 민중들에 대한 심정적 ‘공감’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그의 눈에 비친 민중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너를 며칠 동안 지켜보았다 나무기둥에 걸친 채 바람이 부는 대로 온 몸을 내주며 잔뿌리까지 흔들리는 그네줄의 신세 수염틸란드시아 허공 속에서 한 줌의 흙 향기를 맡아내는 너 공기 중 수분으로 물관의 신경줄을 넓혀가는 끈질긴 몸부림
(…중략…)
수염틸란드시아 허연 잔뿌리 너를 보며 내 밧줄의 끝자락은 어디에 있나 살펴본다 나름대로 묶어두었던 든든한 밧줄 그게 어디에도 없고 폭풍우 지난 자리 아까시나무 잔가지에 걸려 나부끼는 허연 일회용 비닐 끈 바람에 흩날리는 나의 실체가 보인다 변두리로 자꾸만 밀려나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부분
위의 시에 나타난 민중들의 모습은 삶의 그네줄에 매달려 흔들리는 ‘수염틸란드시아’처럼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힘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나무기둥에 걸친 채 바람이 부는 대로/ 온 몸을 내주며 잔뿌리까지 흔들리는’ 나약한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끈질긴 몸부림으로 ‘공기 중 수분’을 흡수하며 ‘물관의 신경줄을 넓혀가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이들은 화자에게 ‘거울’과도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이들을 보며 화자는 ‘변두리로 자꾸만 밀려나는’ 자신의 실체를 비춰본다. 화자 역시 치열한 삶의 중심에서 밀려난 주변부의 곤고한 현실 속에서 속이 ‘썩어 내리’는 삶을 살아오면서도, ‘지상 위의 집’을 상상하며 주택부금을 부어나가는 한 사람의 민중이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현실의 부조리를 타파할 어떤 행동에 나아가기보다는 그저 아파트로 입주할 날을 기다리면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전형적인 소시민 민중이다.
다리도 짧고 눈이 시원찮아도 튼튼하게 만드는 우묵날도래집 자신의 내장에서 체액을 품어내 흐르는 물 속에서 만드는 버거운 집 둥근 홈통 집을 지어 자갈 틈새 꼭꼭 숨어 사는 날도래의 집을 보며 지상 위의 집을 상상해 본다 12년 동안 부은 주택부금 무게가 머지않아 생길 집 한 채 무게만큼 일게다 그 동안 썩어내린 나의 속내도 이제 환하게 새 살이 돋고 있다
아파트로 입주하는 날이 세 달 남았다 ―「주택부금」 부분
그러나 그는 ‘식구를 굶기지 않는다’(「나날이 바쁜 마을」)고 다짐하며 ‘삶의 부조리에 ‘마침표’를 찍어줄 ‘흰 두건의 사내’를 그리워한다. 동학민중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과 같은 존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그러면 그가 꿈꾸는 세상은 어떠한 곳인가? 그곳은 문명적 폭력이 없는 탈문명적 전원의 공간이며 자연을 섬기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들은 죽엽산 자락이 보이는 터에 둥지를 틀었다 부지런히 구들장 이엉 이어서 몸 하나 뉠 공간을 두고 밤이면 소쩍새가 나무를 키우며 아침이면 산새가 깨우는 그곳 첫 닭이 울고 금낭화 고개 숙여 부부의 속내를 대신할 제 자신을 지키며 한울을 응시하는 칼춤에서 번득이는 넋을 보았다
목수의 아들인 그는 긴 머리를 치렁이며 한울에 배알하고 땅에 입 맞추며 하루를 시작한다 바람을 잠재우고 산의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사내 이는 모두 벌거벗은 사내의 덕담 죽엽산은 부부를 포근하게 감싸안아 쪽빛 넘나드는 왕숙천변 아우르며 노래를 읊는다 천지신명이시여! 두루 살피시어 이들을 새롭게 낳으소서 자연으로 거듭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하나이게 하소서, 그렇게 하소서. ―「죽엽산, 장가들다」 전문
이 시는 이 시인의 사상적 배경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로 볼 수 있다. ‘자신을 지키며 한울을 응시’하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이웃들의 삶 속에서 그는 ‘번득이는’ 칼춤과도 같은 민중들의 넋을 발견한다. ‘한울’을 섬기며 ‘땅’에 입 맞추며 살아가는 건강한 자연적 삶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를 단군 이래의 원형적인 한국인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 ‘자연으로 거듭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든 민중들이 ‘하나’ 되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그날을 간절히 염원하는 이 시는 동학의 이념과 자연의 이념이 자연스럽게 결합되고 있어 생태환경을 전공하고 있는 이 시인의 문학사상까지도 유추해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5. 견고한 뿌리 혹은 소금에 이르기 위하여
본래의 건강한 자연을 훼손하고 건설된 문명사회의 척박한 삶 속에서 허기와 갈증을 달래며 곤고한 삶의 길을 걸어가는 시인, 한울을 섬기며 땅에 입 맞추며 건강한 자연의 삶을 꿈꾸는 시인이지만, 엄혹하고도 거친 세상에서 더러 기운을 잃고 실의에 빠지기도 한다.
① 잔디는 이제 힘을 잃었다 땅 속의 두꺼움을 뚫고 물을 빨아올릴 힘이 빠졌다 햇빛은 잔디를 감싸 초록옷을 입혀주지만 그건 이미 잔디가 아니다 ―「다시, 들녘에서」 부분
② 소금을 짓기엔 내가 너무 늙었다
서산 교하리 둔치 소금창고 휘날리는 깃발 사이 갈매기 소리 아직 들리는데 나는 여기 서 있는데 파도만 속없이 왔다갔다 ―「물빛에 어리는 얼굴」 부분
힘을 잃은 잔디와 소금을 짓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중년에 접어든 시인의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물을 빨아올릴 힘을 잃은 잔디는 이미 잔디가 아니듯이, 소금을 짓지 못하는 삶은 얼마나 밍밍한가? 그저 추억과 미련의 ‘갈매기 소리’만 들리고 파도만 속없이 왔다갔다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기어이 살아야겠다는 소시민의 꿈은 끝내 죽을 수 없다.
① 잔디는 노랗고 어둡게 변했으나 뿌리는 아직 살아 있다 잔디가 살아 움직이는 동안 흙의 입자에서 물을 빨아올리는 잔뿌리는 잔디의 어머니이다 잔디가 누렇게 시들어도 들녘의 쥐불로 사라져도 잔디의 어머니는 결코 쓰러지지 않아 땅속 깊이 뿌리로 실하게 살아 푸르게 푸르게 잔디를 낳는다
푸른 줄기는 무디어진 잔디를 밀치고 다시 태어난다 ―「다시, 들녘에서」 부분
② 파도소리 괭이갈매기 울음소리 지치지 않고 물빛 기억 더듬어 촘촘히 돋아난 어린 싹, 소금알갱이 자신이 살아온 이력 가다듬고
물 속에 잠들어 있던 얼레소금 서풍이 불어 몸을 말리는 동안 바닷물 땀내 정제되지 않은 채 바다의 초록 근육을 밀치고
새살을 낸다 ―「빛에 어리는 얼굴」 부분 잔디는 힘을 잃고 노랗고 어둡게 변해가지만, ‘뿌리’는 살아있는 것이다. ‘잔디의 어머니’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부활하는 생명력을 지닌 잔디는, ‘땅 속 깊이 뿌리로 실하게 살아’ ‘푸르게 푸르게’ 다시 솟아오른다. 마찬가지로 파도소리와 괭이갈매기 울음소리도 지치지 않고 마침내 ‘물빛 기억 더듬어’ 새로운 싹을 낸다. ‘물 속에 잠들어 있던 얼레소금’이 ‘새살’을 낸다. ‘무디어진 잔디를 밀치고’ 다시 태어나는 잔디의 영혼, ‘바다의 초록 근육을 밀치고 새살을 내는’ 소금의 영혼이야말로 이 시인이 꿈꾸는 강인한 정신의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강인한 정신을 지향하는 시인의 의지는 ‘2,700m의 상공을 떠가는 북방쇠기러기’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삶이 엄혹하고 추울수록 유난히 많이 우는 ‘별’처럼, 높은 이상과 꿈을 지닌 자만이 멀리 날 수 있는 것이다.
2,700m의 상공을 떠가는 북방쇠기러기는 얼음별과 같다 밤새 날아도 내가 보기엔 그 자리이다 2백 30군데의 지형을 되새김하며 가슴뼈 속 깃털까지 추스르며 바람 따라 날고 있는 북방쇠기러기 되새김하는 감청색 눈빛이 빛난다
하늘에서 얼음별이 빛난다
(…중략…)
강철 얼음이 녹은 툰드라 보금자리 흙 향기 찾아 잿빛 깃털 하나하나 세워 쇠기러기 울음은 별빛이 된다
추우면 별이 유난히 많이 운다 ―「길은 날아야 보인다」 부분
강철 얼음이 녹은 툰드라의 보금자리 흙 향기를 찾아가는 귀향에의 꿈을 안고, 북방쇠기러기는 아름다운 ‘감청색 눈빛’을 빛내며 ‘잿빛 깃털을 하나하나 새우고’ 팽팽한 긴장의 고공비행을 한다. 꿈을 지니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얼음별과도 같은 차갑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녔다. 그러한 쇠기러기의 울음은 별빛처럼 아름다운 노래가 되고, 그 노래는 추우면 추울수록 더욱 맑고 아름답게, 울려 퍼질 것이다. 삶의 조건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삶과 투쟁하는 이들의 영혼은 아름답게 빛을 발하는 것이다. 시인은 잃어버린 힘을 기운차게 복원해내는 ‘생대’와도 같은 정신으로 ‘연실’처럼 팽팽’하게 긴장하는 삶의 ‘긴 여정’(「꿈을 날리다」)을 꿈꾼다.
어인 일인지 그 일에 매달려 있었어요 작년에 들국을 묶어 두었던 50cm 정도 되는 반쪽 대나무 칼을 들어 다듬기 시작했지요, 살을 내는 작업 잃어버린 힘을 기운차게 복원해 내는 대나무 살. 생대의 팽팽함은 아니더라도 그 긴장의 빗살 부단히 깎아 내리자 숨어있던 소리가 들려오고 허리가 낭창하게 휘어지더군요. 이걸로 살을 먹여 두억시니를 잡을 요량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나무를 다듬어 가는 작업은 아마도 어린 시절을 찾아가는 고샅길의 한 모퉁이인지도 모르겠어요 창호지에 살을 붙이고 연 실로 중심을 잡은 다음 가족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 나가 좋은 바람을 택하여 연을 날렸습니다 하늘 높이 보답하는 가오리연 연 실이 팽팽하도록 바람의 여울이 긴 여정을 일러주더군요 자식놈에게 아무 말 없이 내 어릴 때 꿈을 쥐어 주었습니다. ―「꿈을 날리다」 전문
생대처럼 팽팽한 긴장의 빗살을 깎아나가는 삶의 자세야말로 시인다운 삶의 자세일 것이다. 그리하여 대나무를 다듬어가는 작업을 통해 우리네 삶의 밑바탕에 ‘숨어 있던 소리’도 듣고 잃어버린 유년시절의 순수하고도 순결한 시간을 복원해내어 시들지 않을 건강한 삶의 꿈을 후손에 남겨주는 일이야말로 시인이 꿈꾸는 마지막 과업이 아닐까 한다. 이제 시인의 첫시집에 대한 마지막 헌사를 해야 할 것 같다.
6. 에필로그: 시심의 비상과 아름다운 삶에의 의지
시인은 사물의 번역자요, 해설자이다. 제2의 자연을 창조하는 창조자이며, 자연에서 그 자연의 일부인 자신을 보는 해설가인 동시에, 사물의 의미를 번역해내는 번역자이다. 또한 시인은 사물의 새로운 색깔과 빛을 찾아가는 몽상가이며 이미지의 사냥꾼이기도 하다. 이시백 시인은 스스로를 ‘푸른 숲이 그리워 우는 매미’(「그리움은 여름에 온다」)라 한다. 그는 하늘이 부리는 한 마리의 ‘역마’로서 시인의 사명을 자각한다. 그리고 세속적 눈빛을 벗어나 ‘꽃씨를 무심코 바라보는 불두화의 눈빛’(「이사를 다니며」)을 하고 도시의 거리를 헤맨다. 그러므로 그의 시심의 나비는 언제나 꿈틀대며 시간 속에 흔들린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산호랑나비 나의 몸 속에 알을 슬어 애벌레로 3령, 4령… 꿈틀대더니 내 몸을 자근거리며 씹어대더니 애벌레가 되어 굼실거리다가 머릿속 百會 안에 번데기로 자리잡아 어지러움으로 살았다 어지러움 속에서 흔들리며 나비의 길을 알기 위해 햇볕이 드는 정도 바람의 흐름, 흙의 냄새,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찾아 헤매고 헤매다가 길섶사이 호랑나비가 좋아하는 바디나물 젓가락풀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두었다 허물을 벗고 날개돋이 끝나자 산초나무, 황벽나무, 나무숲으로 날아오른다
나비인지 詩인지 왼쪽 날개 비늘가루 색깔 보일락 말락, ―「나비 날아오르다」 전문
마치 한 편의 시가 착상되어 형상화되는 과정을 암시해 주는 듯한 이 시에서 우리는 한 편의 좋은 시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적당한 햇볕과 바람의 흐름에 대한 인식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시인은 ‘나비의 길’을 알기 위해 끝없이 방황한다. ‘나비의 길’은 곧 시의 길, 시심의 길이 아닐까 한다. 시심의 ‘호랑나비’가 좋아하는 흙의 냄새를 찾아, 시의 바디나물, 시의 젓가락풀과 같은 이미지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찾아헤매는 이미지의 사냥꾼이므로 그것들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언어의 골짜기를 헤매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다가 마침내 뒤뜰에 누워 ‘어둠 속에서 촘촘히 박혀 빛을 내뿜는’ 향기 그윽한 창포 잎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옷장 속의 옷을 꺼내들자 옷 속에 묻혀 잠들었던 무늬들 참았던 숨을 고르며 옷감 속의 무늬가 살아난다 초록의 창포 잎들 어둠 속에서 촘촘히 박혀 빛을 내뿜으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줄이야 이렇게 꽃들 시들지 않고 뒤뜰에 피어나던 5월 단오의 창포 햇살 속에서 수십 차례 핀 연후에 옷소매에 들어앉은 초록 잎의 그림내 향기 그윽한 ―「뒤뜰에 눕다」 전문
수많은 습작들을 거치고서야 어둠 속에 촘촘히 박혀 빛을 내뿜고 있는 삶의 옷감 속의 무늬들을 읽어낼 수 있으며, 햇살 속에서 수십 차례 핀 연후에야 옷소매에 들어앉은 초록빛 창포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되살아나는 잔디처럼 견고한 뿌리를 지니고 시의 나비를 찾아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군데군데 보이는 언어의 이완을 극복하여 압축미를 살림으로써 ‘생대’와도 같은 살아 있는 정신으로 ‘연실’처럼 팽팽’하게 긴장하는 언어의 마디를 이어감으로써 시 장르의 매력을 살려나갔으면 한다.◑ (시인, 동원전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