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다투다
by문두May 28. 2023
꽃이 다투다
물 건너편에 있는 남산모루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 옛 모습이 남아있어 정겨운 곳이다. 산동네의 구불구불한 골목에서 계단을 만나면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몇 번이나 벼르다가 올라가 보니 한쪽은 약수터로 가는 오솔길이고, 다른 쪽은 멀리서도 잘 보이게 고개를 쭉 빼고 있던 벧엘 교회이다. 이곳에서는 작은 교회와 무당집과 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잡초가 주인인양 부서진 대문 밖으로 환삼덩굴이 널름거리는 패가도 여러 군데 있다.
남산모루여자경로당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은 고향에 홀로 계시는 친정엄마였다. 엄마 연배의 어르신들이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해서 살짝 엿보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이곳은 음식을 함께 나누는 식구食口공동체였고, 함께 노는 놀이공동체였다.
1 맛깔난 음식공동체의 한 중심에 김◯◯어르신이 계셨다. 어르신은 홀로 되신 후 새색시 때 옆집에 살던 친구가 있는 이곳으로 이사 오셨다 한다. “나는 친구랑 맨날 싸우려고 고향 같은 여기에 다시 왔어요.”라고 말씀하신다. 어르신들은 11시쯤 모여서 대개 감자나 고구마를 쪄서 간식 겸 점심으로 드시고, 식사는 오후 5시에 저녁을 드신다. 대부분 홀로 계시는 분들이 많아서 집에 가면 씻고 바로 누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 한다. 칠판 달력에 식사당번을 적어놓고 오자마자 쌀부터 씻어 놓는다. 쌀은 대한노인회에서 지원해 주고 반찬거리는 이것저것 서로 들고 오기도 하고 자체회비로 장을 보기도 한다고 한다.
“요즘 무엇을 해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했더니 김◯◯어르신 말문을 여시며 마음 문까지 활짝 열어 주신다. “나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35년간 가사도우미 일을 했어요. 그렇게 일해 자식들 키우면서 단 한 번도 당당하지 않은 적 없었어요. 딱 세 집에서 일했는데, 한 집에서 17년 동안 일 했지요. 지금도 연락이 올 만큼 나를 보내며 아쉬워했어요. 그 세월을 남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으면 질릴 만도 한데 나는 아직도 음식 만드는 일이 참 좋아요. 맛있게 만들어서 함께 먹으면 좋잖아요. 사실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약을 먹고 있는데,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지라 힘든 줄 모르고 해요. 자식들은 이렇게 하는 줄 몰라요.
반찬이 맛있으려면 들기름 맛이 좋아야 해요. 우리 경로당에서는 이번에 들깨 한 말을 사서 방앗간에 가서 들기름으로 짜왔어요.” 하며 한 숟가락을 직접 먹어보라 하신다. “들기름 하나면 그냥도 먹고 뜨거운 밥에 양념장을 만들어 비벼먹기도 하고, 제철 나물을 실컷 맛있게 만들어먹을 수 있어요. 요즘 흔한 애호박을 찜 솥에 쪄서 깍둑썰기 해 양념장으로 무쳐 먹어봐요. 데친 고구마순도 들기름에 볶으면서 소금과 간장으로 간을 하고 소고기다시다를 눈곱만큼 넣어주면 맛이 더 있어요. 또 들기름으로 불린 미역은 달달 볶아서 국을 끓여 봐요. 구수하고 깊은 맛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찐 감자가 맛있다 하니 감자 찌는 법도 알려 주신다. “쪄 먹는 감자는 큰 것이 좋아요. 먼저 껍질 벗긴 감자를 네 조각으로 쪼개 솥에 잠길 정도 물을 붓고 굵은소금을 뿌려서 푹 삶아요. 젓가락이 감자에 들어갈 정도로 익으면 남은 물을 따라내고 뜸을 들이세요. 마지막에 솥 채 들썩들썩 섞어 까불어 주면 감자에서 분이 나와 포근포근해져 맛있어요.” 손님이 왔으니 오늘은 수박을 쪼개 먹자며 꺼내오더니 썰어서 각각 접시에 따로 담아 주신다. “이렇게 깍둑썰기 해 포크로 찍어 먹으면 손을 버리지 않아 놀면서도 먹기 좋아요.” 하셨다.
네 번째 만남에서 한 번은 꼭 대접해 주고 싶다며 야채해물전을 해주셨다. 도토리가루, 부침가루와 부추, 노란색 파프리카, 애호박, 버섯, 풋고추, 깻잎, 오징어 잘게 썬 것, 양파와 감자 간 것을 듬뿍 넣은 전을 해바라기씨 기름으로 노릇노릇 부쳐주셨다. 하루 전부터 재료를 준비하셨다는데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벌써 동네잔치였다. 휴대용 가스버너를 두 군데나 펴놓고 양쪽에서 굽는데, 나도 옆에 쪼그리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어르신들과 전 부치듯 나누었다. 뜨끈한 전을 권하는 데로 손으로 쭉쭉 뜯어먹었다. 맛도 있지만 좋은 재료를 쓰셔서인지 많이 먹어도 속이 편안했다. 나는 이제 전을 먹을 때마다 어르신의 정이 가득 들어 있는 이 야채해물전이 떠오를 것 같다.
어르신들이 먹고사는 법은 내가 꿈꾸는 세상과 비슷한 점이 있다. 건강한 공동체의식의 회복을 위해 하루 한 끼 정도는 모든 지역민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운영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혼자 먹을 때는 별 맛을 못 느끼는 것 같다. 소박한 음식도 여럿이 함께 먹으면 맛이 있다고 느낀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따뜻하고 좋은 기억에는 꼭 맛있는 음식이 있었다. 명절이나 제삿날, 혼인식이나 환갑, 생신잔치. 심지어 초상을 치를 때도 함께 나누는 음식이 있어서 잔칫날이었다. 모를 심거나 추수를 하는 날, 마을 공동의 일을 하면서 먹었던 음식들도 잊을 수 없다.
식구공동체는 1인 가정이나 맞벌이 가정, 조손 가족의 짐도 덜어주고, 먹는 자리를 통해서 지역민들의 교류도 생기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도울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맞닿아 나눔이 이루어질 것 같다. 그 자리가 날마다 잔치가 될 것 같고, 작은 음악회나 시낭송이나 연극무대 같은 문화 공간으로 변모하기도 할 것 같다. 음식 끝에 정情나는 법이니 지역민들이 밥 한 끼만 같이해도 서로에 대한 이해가 생겨 많은 사회문제가 없어질 수도 있겠다 싶다. 이미 전국적으로 잘 구축되어 있는 경로당을 어르신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확장시키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만약 하루 한 끼가 무리가 있다면 백일, 첫돌, 책례, 성년례, 혼례, 수연례, 상장례 같은 통과의례라도 지역사회에서 챙겨주는 시스템은 어떨까 싶다. 사람이 한 명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 과정을 사회가 따뜻하게 지켜보고 책임져 주는 시스템 말이다. 이제는 가정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을 어느 정도는 개방해야 될 시대가 된 것 같다. 그만큼 가정의 자생력이 약해져 있다. 가정이 가졌던 식구공동체 기능을 사회가 일부분 감당해 준다면 세상이 좀 더 살만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현실성이 부족한 이상주의자의 꿈에 불과한 일이겠지만.
2 먹을 것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먹는 이야기가 길어졌다. 먹었으면 신명 나게 잘 놀아야 소화도 잘된다. 이제 놀이공동체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곳에서는 네 명만 모여지면 판이 벌어진다. 많이는 다섯 팀까지 한꺼번에 벌어진다는데, 중요한 준비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모포인데 꼭 미군부대 것을 고집한다. 15년째 쓰고 있다는 모포는 닳아져 하얗게 되어 매끈매끈하다. 둘째는 10원짜리 동전인데 꼭 황동으로 만든 옛날 동전이어야 한다. 이쯤 이야기하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눈치챘을 것이다. 이 놀이가 꽃들의 전쟁이라는 것을. 꽃판의 장점은 몸이 불편한 사람도 앉을 수만 있으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꽃판에 참여하는 어르신들의 준비 자세를 보라! 다리나 허리가 아픈 분들은 베개를 받치고 앉았고, 입고 있는 옷이나 버선은 꽃무늬 물결이다. 물 흐르듯 매끄럽게 판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이야기꽃과 웃음꽃도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정월 송학에 백학이 울고이월 매조에 꾀꼬리 운다삼월 사쿠라 북치는 소리천지 백파에 다 날아든다사월 흑싸리 못 믿어서오월 난초가 만발했네유월목단에 나비 청해칠월 홍싸리 멧돼지 뛰고팔월공산에 달이 밝아구월국진에 국화주요시월단풍에 사슴이 놀고오동복판 거문고는 줄만 골라도 빙글뱅글우중에 해님이 양산을 받고 동네방네 유람할까다 돌았네 다 돌았네 이백사십으로 다 돌았네-고창 화투타령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꺼림칙해하고 도박이나 중독성 위험이 있다고 걱정하지만, 경로당에서는 문제가 안 될 것 같다. 사실 밖에서 들어오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음식이든 종교든 무엇이든 받아서 우리 것으로 만들면 그만이지. 극장식 공연도 가끔은 좋지만 매일 즐기기는 판이 작아도 너도 나도 주인공이 되는 꽃판이 최고! 사계절 12개월 48장의 꽃패가 돌아가면 남편, 자식, 며느리 이야기, 먹고사는 이야기, 몸 아픈 이야기, 병원 이야기도 함께 돌아간다. 기계에 기름 치듯 이야기를 섞어서 잘도 돌린다. 아프다는 사람도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가 돈다. 청단, 초단, 홍단에 난초약, 비약, 풍약이라는 변수에 20끗, 10끗, 5끗 점수를 계산해서 돈이 돌아가고, 운이 좋아 많이 딴 사람은 개평을 내놓아 모아지면 반찬값이 된다. 내 입에 들어갈 음식이 되기에 잃은 사람도 많이 딴 사람을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안 싸우는데 계산 잘못해서 서로 싸운다는 남산모루 경로당, 이곳은 꽃이 다투는 “꽃판”이다. “하루 종일 놀아도 많이 잃으면 3천 원에서 4천 원 정도 잃어요. 한 끼 밥 사 먹는 요량하고 놀아요.” 라고 경로당회장님이 말씀하시며 꽃이 피어나듯 웃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