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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줄X19줄 안에, 361개의 착점 위에 천하가 담겨 있다. 천국도 지옥도, 살길도 죽을 길도 그 안에 다 있다. 누가 이 묘한 놀음을 사랑하지 않을쏘냐. 이것이 바로 바둑이다. 굳이 신의 ‘한 수’가 아니더라도, 바둑과 같은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신의 게임이다. 그러니 이름하여 신선놀음이다.
흑과 백이 서로를 농락하며, 희롱하며, 기세를 꺾고 들어가며, 패배를 가장하며 싸우는 동안, 분방한 진법 탓에 잠시 잊어버리는 사실을 하나 말해보자면, 바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돌’이 아니라 ‘판’이라는 점이다. 흑과 백이 제 아무리 묘한 수를 부린다 하더라도, 바둑판이 없으면 그 돌들은 말 그대로 돌이다. (영화 속에서 쉽게 흉기로 변하곤 하는 것처럼) 바둑돌 같이 섬세하게 가공된 돌은 애초에 쓰임을 벗어나서는 별 달리 쓰일 구석도 없는 돌일 따름이니, 바둑돌에게 있어 바둑판은 곧 진리이자 생명이다. 판을 떠나면 돌은 끝이다.
(도박꾼이라는 영화 속 설정으로 인해 더욱 그리고 보일 테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은 마치 바둑돌인듯 바둑판을 떠나지 못한다. 사랑하고 증오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살고 죽는 일이 모두 바둑판 안에서만 벌어지고 맺어지는 양, 바둑판에 집착한다. 바둑판 밖에야말로 진짜 세상이 있으나, 바둑판만이 진짜 세상인 듯 목숨을 거는 치들을 보는 것은 역시나 사태를 뒤집어 놓는 기획이 주는 강렬한 몰입과 쾌감을 선사한다. (입신양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슈퍼히어로 계열의 한국판 적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정우성의 단단한 근육이 스크린의 이곳과 저곳을 출몰하며 사시미 칼로 인간의 몸을 횟감처럼 무심히 다루는 순간, 모든 관객들은 제 손톱을 바짝 물어뜯으며 ‘그래, 나도 바둑돌인 것이었어!’라는 짧은 신음을 내뱉고야 마는 것이다. 영화의 문법은 대충 이런 셈이고, 나는 꽤 감탄하며 영화를 (그리고 정우성을) 응시했다.
영화관 밖으로 나오니,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매서운 속담처럼,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야 만다. 바둑돌인 인생이라면, 이제 그 인생이 지긋지긋하다면, 한 번 쯤은 바둑판을 바스러뜨리며 또 다른 살길을 찾아봐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말하자면, '7X8'이라는 이차원의 좌표에 올려놓는 돌 하나가 내 삶의 패착이 될지 신의 한수가 될지를 깨단하기 위해 10년 면벽수련을 하는 대신에, '7X8X20'이라는 삼차원의 좌표를 크게 외치며 나만의 바둑판 위에서 삶을 꾸려나갈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문과 출신들을 위해 말하자면 이과 수학을 하다보면 x축과 y축을 넘어, z축이 나오는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하고, 그때부터 수학에는 ‘무늬’랄 것이 생긴다.) 2차원의 박잡한 세속적 착점에 목숨을 거는 대신, 3차원의 한 ‘장소’ 속으로 인생의 명운을 걸어보는 일을 꿈꿀 수 있음에도, 우리는 모두 한심스런 땅따먹기 전쟁을 하느라 'y'축의 가능성과 풍요로움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y’축이란 무엇일까. 김영민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희망’일 것이고, 내 직감에 의하자면 ‘영성’이다. 영성이나 신비의 문제를 ‘초월’이라 여기는 선생들은 매사 ‘y’축을 건드리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과 대면할 것을 주문하곤 하시지만, 수직적 방향성을 그 무시무시한 '무한'으로 노정하는 대신 ‘축’으로 설정한 이상, 이미 초월의 가능성을 애초에 꺾어버린 셈이니, 그리 저어할 것만도 아니다. 그러니 어설픈 초월의 위험 없이 열심히 살기 위해서라도 3차원의 바둑을 두어 볼 일이다.
내가 여태껏 대면한 이들과의 관계를 떠올려 보니, 바둑이 못될 오목이던, 초인적인 맹기(盲棋)이던, ‘AXB’의 수를 두며 최선을 다했다고 여기는 ‘착한’이들과의 ‘착한’ 바둑이 전부였다. 나는 이제부터 ‘AXBXC’의 바둑을 두려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세속의 지혜를 보란 듯 뚫어내며, “눈에는 귀, 이에는 코”라는 신념으로 살아 낼 수 있는 이, 가위 바위 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세모를 낼 수 있는 이, 어디 계시는지. 당신과 더불어 신선놀음도 무엇도 아닌 허공 속 바둑 한 판을 두며 웃기지도 않게 세상살이를 견뎌내야 할 밖에는 다른 처세의 방도를 나는 찾아내지 못하겠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