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스폐셜 21회 '영상완도 바닷 속 3만 청자의 비밀 ' (1999.03.27.)
*역사스페셜 제 21회
완도바닷속,
30,000청자의 비밀(원고더빙용)
..99년3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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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DEO A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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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C.G.>
- 바다로 죽 나아가는 느낌의 25" -음악 2,3"흘리다가-
C.G.... 서남해안에 위치한 완도앞바다-
-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 음악 -방울이 작아질 즈음에 멘트 큐)
- 방울의 양이 작아질 즈음 멘트 큐 그 바닷속 깊은 곳에 고려시대 보물이 있었다.
- 바다밑의 보물 모습 보이면 수만점의 청자가 실린 한척의 침몰선-한호흡만 쉬고 멘트 이어서)
- 카메라 돈다.. 이제 그 침몰선이 1000년의 침묵을 깨고 우리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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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타이틀> .. 화면 스틸 잡히면
완도바닷속,
30,000청자의 비밀(더빙원고용...99년3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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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기본세트..
유물,유적이라고 하면 아마 누구나 고분이라든가 주거지터와같은 땅위의 유적을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바닷속에도 아직 발견되지않은 수많은 유물들이 잠들어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닷속에 잠긴 침몰선- 바로 해저유물선입니다(뒷화면에 신안유물발굴장면 뜬다)
이 해저유물선 중에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뒷화면 가리키며) 지금 제 뒤의 화면으로도 나오는
신안유물선입니다.
지난 75년 신안앞바다에서 발견된 대규모의 중국무역선으로 이 배를 인양하는데 무려 8년이라는 기간이 걸렸
습니다.
그리고 이때 배와함께 (강조)40.000여점 의 화려한 유물이 인양되었던//
뭐,수중고고학상 세계적인 사건이었습니 다...
(화면 사라지고)
그런데 비록 신안유물선만큼 세상의 조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우리 역사상 아주 큰 의미가 있는 유물선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신안유물선인양작업이 막 끝나가던 83년12월에 인양된 유물선입니다.
(MC오른쪽에 효과음과함께 두루마리 지도 생긴다..손으로 끈 당기다.)
유물선이 발견된 곳은 신안앞바다에서 얼마 떨어지지않은 완도앞바답니다.
당시 이곳에서 건져올린 건 배 한척과 30.000여점의 청자를 비롯한 각종 유물이었습니다.
바닷속에서 순수한 우리 유물이 그것도 수만점이나 인양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안유물선에 가려져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오랜 세월 그늘에 가려져있던 완도해저유물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과연 이 배는 30.000여점의 청자를 싣고 어디로 무엇을 하러가던 것일까?
우선 16년전 발굴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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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30.000여점의 청자를 싣고 가던 고려 배..완도앞바다에서 침몰하다!!!
# 헬기 & 배 타고 현장
- 헬기샷으로 완도... 21"
"전라남도 완도"자막 나오면 멘트 시작))
지난 83년말 침몰선과 함께 수만점의 귀중한
- 배에서 본 약산섬 유물이 발견된 곳은 전라남도 완도의 어두지
- 바위에서 틸업.발굴지점 라는 섬에서 불과 72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틸업해서 발굴지점 스틸 잡히면)) 이곳 바다밑에서 유물이 발견된 건 우연이었다.
- 자료화면 15" 조개잡이를 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네점의 청자가 걸려서 올라온 것이다.
감정결과 고려시대것이었다.이후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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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위에서 이명희 인터뷰 21" * 이명희 인터뷰(테이프1 1652)
제가 들어갔을때는 조금때라 60센티정도의 시야가 있었는데 그 해저의 도자기와 배가 있는 상태는 야구장의
마운드처럼 볼록하게 길이 15미터정도의 유물이 덮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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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밑 그림 16" 바다밑엔 예상보다 많은 양의 유물이 있었다. 더욱이 유물의 상태도 양호했다.
-잠수사 그림 잠수사들은 조심스레 유물들을 끌어올렸다.
-그물에 올라오는 유물들 18" 유물인양작업은 2차로 나눠서 3개월간 이뤄졌다.
그동안 매일같이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많게는 하루에 2000점이상이 나오기도 했다.
- 그릇 타이트 끝날즈음 유물의 대부분은 그릇 병 항아리와 같은
-배위에 늘어놓은 유물들 10" 실생활용기들이었다.
현장에선 바로 유물감정작업에 들어갔다. 언제 쓰여졌던 그릇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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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이인터뷰 27" *윤용이교수 인터뷰(테이프16 0031
0912)완도에서는 2만여점에 달하는 사발이 있다.
이 사발들은 하나같이 밖으로 벌어진 형태...
굽은 대마디굽이라고 약간 벌어진 형태...
-인서트 사발 보여주기 이렇게 밖으로 벌어진 형태가 대체로 이 청자들이 12세기전반의 일반적인 형태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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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들정리모습팬(자료화면) 11"(인터뷰 끝나고 바로)
12세기전반...바로 고려중엽의 것이었다.
이러한 청자들이 모두 3만6백여점-
가마터를 제외하고 이렇게 많은 청자가 한꺼번에 나온 건 처음이었다.
-나무망치 팬 27" (위의 멘트 끝나고 2"정도 띄우고)
이외에 비록 그 수가 적긴 하지만 나무와 흙 그리고 청동으로 만든 유물들도 나왔다.
- 토제 시루 -음악-
- 나무 함지 요즘도 시골 가면 볼 수 있는 나무함지도 있고//
- 청동완 -음악-
- 청동수저 (수저나올 때 멘트)청동제 그릇과 수저도 있다.
- 유물들 팬 13" 이렇게 완도앞바다에서 인양된 유물은 모두 30.701점-
바다밑에 잠들어있던 고려시대 유물 수만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다시 바다인양자료화면 11" 3만여점의 유물을 인양한 것으로 발굴작업은 마무리되는듯했다.
겉으로는 배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 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 다시 바다 35" ----------------------------------
*이명희 인터뷰테이프 2 3142)
처음에는 배가 있으리라고 상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군데 집중적으로 많은 유물이 있었기 때문에 좀
배가 있지않을까 생각하다.
잠수사를 통해서 조사를 하게하다. 그때 철장을 가지고 찌르면 뻘일 때 쑥 들어가고 도자기면 소리가 난다.
그런데 나무가 물에 물컹물컹한 것기 있다고 보고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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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화면잠수부들 9" 우선 뻘을 파보기로 했다.
만일 뻘속에서 진공상태를 유지했다면 배는 남아있을 것이다.
- 바다밑의 배부분 사진 16" 발굴팀의 예상은 적중했다.
뻘을 걷어내자 배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법 완전한 형태의 나무배였다.
- 배조각 끌어올리는 사진 하지만 나무가 많이 부식되어있어 그대로 인양할 수는 없었다.
조각마다 번호를 매긴 뒤 하나씩 떼어내어서 올렸다.
-보존처리 모습 8" 잠시 포우즈...화면 틸다운 되면 멘트 시작)
이렇게 끌어올린 조각이 모두 81조각이었다
-보존처리액속의 나무조각 3" 보존을 위해 특수약품처리를 한 뒤
-조립모습 8" 배의조각들을 하나하나 다시 붙여나갔다.
-음악-
-전시된 배 20" 이것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1000여년전 3만점의 청자를 싣고 가다가 완도앞바다에서 침몰했던 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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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기본세트에 실물복원배 갖다놓고..그 옆에 선 유인촌)
배 45도각도로 세워져있다..그 중간즈음에 서있는 유인촌)
지금 제 옆에 있는 것이 당시 바다에서 건져올린 배를 실물그대로 재현해놓은 것입니다.
길이가 7미터고 높이가 1.5미텁니다.
현재 배의 앞부분과 뒷부분은 부식되어서 완전한 형태는 볼 수 없지만 배의 기본구조는 갖춰져있는 상탭니다.
배를 좀 자세히 살펴보면 저판부분으로 가서 손으로 가리키며)
아래엔 하나 둘 셋 넷 다섯 모두 다섯조각의 긴 나무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전형적인 통나무배의 형태를 갖추고있는 것입니다
다시 옆으로 와서)
그리고 이 바닥의 마지막부분을 보면 니은자모양의 나무를 붙이고 그 위에 나무를 붙여서 배옆면을 만들었는데
(손으로 가리키며) 한쪽은 네 개고 또 한쪽은 다섯 개가 남아있습니다.
다시 앞을 보고)
사실 이 배의 발견은 사학계를 흥분시킨 사건이었다.
고려의 해상활동이 활발했다고 전해지긴하지만 실제 배는 남아 있지않아서 고려배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완도앞바다에서 기본구조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배가 인양된 것입니다.
과연 12세기 당시 이 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완전한 형태로 복원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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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배 복원..침몰선은 전형적인 우리의 한선이다..
# 목포해양유물전시관...
- 전시관의 배 16" 비록 배바닥과 옆면만이 남아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배엔 배의 원형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숨어있다
-잠시 포우즈-
우선 배 옆면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불에 탄 듯 그을린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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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한실장 배부분 가리키며37" *테이프 7 1613
저희도 처음에는 상당한 궁금증을 가지고 확인을 했었는데요...만약에 화재에 의한 소실이라면 배 안쪽면부터
불에 탄듯한 흔적이 있어야할 것이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전부 해수와 바닷물이 맞닿는 바깥부분만 탄화된 흔적을 볼 수 있다.
-네 안쪽은 그런 흔적이 없고 그러네요
=그렇다..바로 이것이 전통한선의 해충구제법이라는 연훈법..근세까지와서도 활용이 되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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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바깥부분 6" 불에 탄 흔적은 바로 이 배가 우리 전통한선임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돛구멍 8" 또한 배의 중앙부분엔 돛대를 꽂았던 구멍이 선명히 남아있다.
-돛구멍 5" ------------------------
*김용한실장 배부분 가리키며 *테이프 7 1613
배의 저판 가운데 부분에 돛대 꽂았던 받침 구멍이 하나 있다. 거의 중앙에 위치해있다.
이걸로 봐서 이 배는 돛대를 하나 꽂았던 외돛대선박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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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철씨 상상도 펴놓고
있는 모습 12"
-상상도 보여진다. 완도해저유물선은 돛이 하나 달린 전통한선인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해서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는 배의 상상복원도를 그렸다.
-상상복원도 6" 완도해저유물선은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컴퓨터그래픽 배바닥과 22" 우리는 배의 구조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 옆면부분 기위해 배를 컴퓨터그래픽
으로 복원해보기로 했다.
-음악-
-배바닥 3개 조립 조립 끝나면 배바닥과 옆면이 여러개의 나무조각으로 이어져있는 상태- 이것이 현재 바다
에서 건져올린 배의 모습이다. 이제 이 위에 하나씩 덧대어나갈 것이다.
-배바닥이 끝나고 디졸브
되기직전 우선 부식되어 없어진 배 옆면을 하나 덧붙였다.
배앞뒷부분 조립 12" 그리고 배의 앞면과 뒷면은 여러개의 나무로 평평하게 막았는데
이는 우리 전통한선의 특징이다.
-실물배에서 가룡목
끼워져있던 흔적 10" 현재 남아있는 배엔 가룡목이라는 부분이 있다.
바로 배의 양쪽이 벌어지지않도록하기위한 버팀목이다.
-c.g.) 가룡구멍에 가룡목 설치되다.
11" 배 내부에 이러한 가룡목들을 대고///
- 돛대부분 돛대는 돛구멍이 있었던 위치에 하나 세운다
- 돛 펴지면 이제 갑판을 씌울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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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철 인터뷰 26" (테이프 9 2554)
짐을 부리기위해 갑판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일정부분 선원들이 활동하는 앞부부과 키를 잡을 수 있는
뒷부분에 약간의 갑판시설이 있었을 것같고 중앙부는 짐을 부리기위해 갑판 설치하지않았던 것으로 저희들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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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갑판 설치.. 20" 이렇게 배의 앞뒤에 약간의 갑판을 씌운다
-C.G.)키,닻,물레,노 이제 이 위에 노를 올리고 //
키를 만든다.//
그리고 선원들의 생활공간을 만들고 //
마지막으로 닻을 설치한다.
이것이 완도앞바다에 침몰했던 고려배다.
-C.G.)만들어진 배, 카메라
워킹으로 16" 길이 9미터 너비 3.5미터
깊이 1.7미터의 나무배...
이 배는 우리 한선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그 중 하나가 배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라는 것이다.
-신안선 바닥 비교 17" 이에 비해 외국배는 바닥이 브이자모양이다
신안앞바다에서 인양된 중국무역선도 배바닥이 브이자모양을 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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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한 인터뷰 41" 테이프 6 1126
무엇보다도 큰 특징은 우리 한선의 구조는 단면상으로 봤을 때 평저선..바닥이 뾰족하지않고 평평하다.
이와같은 평저선특징은 비교적 수심이 낮은 곳에서 항해하기 유리하고 우리와같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경우
썰물 때 갯벌위에 편히 배가 앉을 수 있다
나무못 사용한 것도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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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복원배의 가룡목부분19" 배가 벌어지지않도록하기위한 버팀목으로 가룡목을 쓴다는 것도 우리배의 특징
이다. 이에 비해 중국무역선인 신안해저유물선은 격벽이라고해서 넓은 나무판을 이용한다.
-가야토기(평저주형) 13" 이렇게 완도해저유물선은 형태나 제작기법에서 전형적인 전통한선의 모습을 띄고
있다.
그동안 토기와 문헌으로만 볼 수 있었던 우리 배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준 것이다.
-복원된 배 풀..카메라워킹12" -음악-
돛을 하나 단 평저형의 선박-
12세기 전반 완도앞바다를 항해하던 배는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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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영상으로 복원한 완도배 위에 서서)
복원한 배위에 서있는 유인촌 풀샷)
지금 제가 타고있는 배가 바로 고려시대 바다위를 유유히 떠다녔던 뱁니다.
이 배가 30.000여점의 청자를 싣고 가다가 어떤 이유에선지 완도앞바다에 고스란히 가라앉은 것입니다.
카메라 서서히 MC로 줌인)
그렇다면 이 배는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다가 가라앉은 것일까?
잠시 포우즈) 바로 이 배에 실린 유물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효과음과 함께 배에 유물들 실린다..원래 발견당시 형태로...
배 앞부분의 청동유물들 손으로 가리키며)
그럼 유물들을 하나씩 볼까요..지금 이 유물들은 발굴당시에 있었던 그 위치에 그대로 올려놓은 것인데요..
우선 배앞부분에 보면 몇점 안되긴 하지만 청동과 나무로 만들어진 유물들이 있습니다.
배 앞 바닥에 있는 청동수저와 그릇 가리키면 청동수저와 유물 타이트)이 중에 청동수저와 그릇은 상당히 많이
부식되어있는데 그런데 이 청동그릇을 자세히 보면 단지 부식된 것이 아니라 오래 사용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릇옆면 타이트)그릇 옆면을 보면 끊어져서 철사로 이어놓은 것이 보이지요..
수저닳은 부분) 그리고 수저도 끝부분이 닳아없어졌습니다.
다시 MC 얼굴)이렇게 그 수가 적은데다가 닳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배앞부분에 있는 유물들은 선원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청자 쪽으로 돌아서며)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배에서 인양된 유물 중 우리의 시선을 끄는건 청잡니다.
30.000여점의 청자들이 배 중간에 이렇게 볼룩하게 쌓여있었습니다.
병,항아리부분 손으로 가리킨다..타이트)그 종류를 보면 병도 보이고 항아리도 보입니다.
하지만 청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건 그릇입니다. 그런데 그릇도 크기가 각기 다릅니다.하나씩 살펴보면
대접 하나 집어서)이건 대접이라고 합니다..요즘의 대접과 모양이흡사하지요..
여기에 밥이나 국을 담아 먹었을 것으로 보이고
배안에서 접시 하나 집어서)이건 접십니다.반찬그릇이지요..
완 가리키며) 그리고 이건 대접과 접시의 중간 크기되는 그릇인 데 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찻잔이라고
하는데요..요즘의 찻잔과는 모양이 아주 다르지요...
고려시대는 떡차라고해서 차잎을 쪄서 덩어리로 만들어놓은 뒤 그것을 물에 풀어서 마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넓은 찻잔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장고 들어보이며)그런데 여기 보면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위와 아래가 트여있어서 병이나
항아리도 아니고....대체 이건 어디에 쓰던 물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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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청자로 만든 장고 이용되다!!
# 그동안 발굴된 청자장고
-국립중앙박물관의 장고 14"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완도해저유물선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모양의 청자가
한점 전시되어있다.
모양뿐만아니라 색깔이나 문양도 완도것과 똑같다.
-이대 박물관 8" 그런가하면 이화여대박물관에도 같은 모양의 청자가 한점있다.
-이대 박물관
-장고앞에서 PD와 나선화선생 ----------------------------
10" *나선화교수 인터뷰(테이프
-무늬는 좀 다른데 모양 똑같네..
이게 뭔가...?
=장고다..지금 대개 나무통으로 만들어서 양쪽에 가죽을 끼워서 소리를 내는 악기중 하난데 이것은 청자로 된
장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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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 타이트 7" 바로 장고몸통이다.
그렇다면 이 청자로 만든 장고몸통은 직접 악기로 쓰였던 것일까?
- 전일평교수 찾아가서 기록 함께 9" 실제 기록을 찾아보면 장고몸통은 지금처럼 나무로만 만들었던 건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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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전인평교수 인터뷰(테이프 14 -1335)
우리나라 악학궤범을 보면 장고를 만들때 재료로 나무를 쓰는 것이 가장 좋고
도자기로만든 것이 다음이고 기와로 만든 건 좋지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해
남에서 나온 도자기장고는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였던 장고라고 생각한다.
# 밀양백중놀이 보존회
- 차 트래킹 17"
- 보존회외경 그런데 지금도 이러한 도자기장고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있다.
밀양지역의 민속놀이이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밀양백중놀이가 그것이다.
- 장고 들고 설명
-사기로만든 악기들 앞에 펼쳐놓고 48"
설명하기 --------------------------- *테이프11 5322.. 요건 중요무형문화재 밀양백중놀이의 특수 악기다.
명칭은 사장고...머슴들이 독뚜껑 끼워서 요렇게 엮어서 장고모양으로 요렇게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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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연주한다. 연주음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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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는 물장고다..물로 가득 채우고 큰 박을 엎어서 아낙네들이 길쌈할 때라든가 요럴 때 치는데 저희들이 백중
놀이할 때 할머니들이 엉덩이춤 춰가며 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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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연주하다.. 15" 이렇게 현재 밀양 백중놀이에서는 옹기을 이용한 장고들이 쓰이고 있다.
-옹기장고 보기 그런데 그 중에 시선을 끄는 장고가 하나 있었다. 바로 몸통전체를 옹기로 만든 장고다.
-옹기장고 설명
(테이프11 5508) 10" -------------------------------
요거는 사장곤데 옹기 만드는 재료로 요렇게 장고모양 만든 사장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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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모습 20" 옹기장고는 나무장고에 비해 무겁기 때문에 앉아서 민요를 부르거나 장고연습을 할 때 이용된
다고한다
그렇다면 이 옹기장고와 같은 도자기류인 청자장고도 그 쓰임새는 유사할 것이다
# 조기정선생 장고 직접 만들기
-외경 7" 그렇다면 청자장고는 어떤 소리를 낼까...
직접 청자장고를 만들어서 연주해보기로 했다.
-조기정성형 35" 이곳은 고려시대 방법 그대로 청자를 만드는 곳이다.
청자장고를 만드는 과정은 일반 청자제작과정과 별반 다르지않다.
다만 몸체의 모양을 만드는 방법이 특이한데 장고몸통은 우선 두부분으로 나눠서 만든다.
그리고 형체가 만들어지면 장고중심 부분을 칼로 잘 다듬어서 하나로 연결하게된다.
-조각모습 5" 이후의 작업은 일반 청자제작과정과 동일하다. 몸체에 조각을 하고 유약을 바른 뒤
-유약1 5" 고온에서 구워내는 것이다.
-가마 불 10" -음악-
-장고 나오면 13" 이렇게해서 청자장고 하나가 구워졌다.
- 장고 끈매기 34" 이제 이렇게 만들어진 청자장고몸통에
가죽을 대고 끈을 맨다. 가죽은 지금의 장고처럼 각각 소가죽과 말가죽을 댔다.
- 끈매기 (잠시 포우즈)
그리고 두가죽을 끈으로 이어주면 장고는 완성된다.
- 다 조인 뒤 쳐본다 과연 청자장고는 어떤 소리를 낼까?
그리고 그 소리는 악기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소리일까?
# 청자장구 연주해보기(해남)
-직접 연주 11" -연주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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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연주자 인터뷰
이 도자기장고는 지금 많이 사용되고있는 오동나무장고에 비해 연주를 하거나 반주하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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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그림 좀 흘리다가 스튜디오로 20" 연주음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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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기본세트)
( 뒷화면에 청자 연주 화면 흘리다..고개 끄덕이는 시늉..
가락 듣다가 돌아서며)
이렇게 완도에서 인양된 배엔 실제 사용되었던 청자장고를 비롯해서 대접 접시 완..그리고 병 항아리와 같은
실생활용기가 가득 실려있었습니다.과연 이 3만여점의 청자들은 어디에서 어디로 실려가던 것일까...
(옆에 탁자 생기고 그 위에 녹청자들 올려져있다.)그런데 완도앞바다에서 인양된 청자를 보면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청자와는 좀 다릅니다. 사실 청자라고하면 이름 그대로 푸른빛...그러니까 비색을 띄는
청자를 머릿속에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청자는 비색보다는 녹갈색에 가깝습니다.
이 청자는 어떤 청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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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완도앞바다에서 인양된 청자는 녹청자로 일상생활에 쓰이던 막청자였다.
# 비색청자와 녹청자 비교
-비색청자 컷트 8"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청자다. 색상이나 문양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녹청자 8". 이에 비해 완도앞바다에서 발굴된 녹청자는 청자특유의 비색을 띄지않는다...
-두청자 한화면에 함께 7" 뿐만아니라 비색청자에 비해 표면처리가 거칠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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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윤용이교수 인터뷰(테이프 16 0248)
보통 질이 떨어진 청자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막청자라고 할 수 있는데
(중간 자르고) 기존의 청자에 비해서 그리고 모래라든지 이런게 상당히 많이 섞여있고
(중간 자르고) 또 유색도 황갈색이나 녹갈색과 같은 보통 청자라기보다 갈색을 많이 띄는
유형의 자기- 아 그래서 이건 조잡한 자기 막청자..그래서 녹갈색을 띈다고해서 녹청자라고 이름을 붙인
범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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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청자들 20" 그러니까 완도앞바다에서 인양된 청자들은
녹청자로 질이 낮은 청자였다.
처음 녹청자는 조잡하다는 이유로 초기청자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완도에서 인양된 녹청자는 그릇의 형태로 보아 12세기것이다.
15" 사실 12세기는 고려청자에 있어서 절정기다.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비색이 완성된 시기가 바로 이때인 것이다.그런데 이때 질이 낮은 녹청자도 생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녹청자 내화토 8" 더욱이 녹청자엔 대량생산의 흔적이 있다.
그릇바닥의 하얀 점토가 그것이다...
-C.G. 포개구운 흔적 18" 이는 청자를 구울 때 포개서 구운 흔적이다...
-C.G.)가마에 넣어서 포개구이 그릇을 구울때 서로 붙지않도록하기위해서
내화토라고하는 열에 강한 흙을 그릇바닥에 발라두는데 그것이 하얗게 남은 것이다.
-오른쪽으로 갑발 생기다. 이에 비해 비색청자는 갑발이라는 보호용기에 넣어 굽는다..
-녹청자들 18" 그렇다면 비색청자가 완성될 정도로
고도로 청자제작 기술이 발달해있던 그때-이런 질이 낮은 녹청자를 그것도 대량으로 생산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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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모 인터뷰 31" *테잎12
0309) 지금 우리 현대생활로 봤을 때 백화점
일류 만든 것 비싸다. 그러나 시장 가면 100분의1로 좋은 걸 살 수 있다. 어느 사회나 고급 비싼것 있고 수요층
있고 또 저급하지만 대중이 부담가지 않고 쓸 수 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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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팬...비색청자 다양한 33" 이는 청자의 생산품목으로도 입증된다.
비색청자의 경우
그 품목은 아주 다양할 뿐만아니라 문양도 화려하고 정교하다.
화려한 문양의 주전자도 있고//
섬세한 모양의 연적도 있다.
그리고 베개와 기와도 청자로 만들었다.
다양한 품목을 소량으로 정성껏 만든 흔적이다.
-음악-
-녹청자 그릇들 14" 이에 비해 녹청자는 생산품목의 90%이상이 대접,접시,병과같은 반상기다.
적은 품목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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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나선화선생 인터뷰(테이프17 3828)
녹청자는 바로 우리 생활용기의 주체였다.
(중간 자르고)대량생산체계를 가지고 많은 양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 생활에 널리 보급되고 우리 생활
용기의 주체라 할 수 있는 것이 녹청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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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뒷화면 쌓인 청자그림들)
우리는 흔히 청자하면 상감청자와 같은 화려한 고급청자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보신 것처럼 고려시대엔 비색의 고급청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대량생산되던 녹청자가 있었습니다.
지금으로치면 비색청자는 고가품이라면 녹청자는 중저가품인 셈인데요....(잠시 포우즈) 완도해저유물선에는
이러한 녹청자만 30.000여점이 실려있었습니다. 과연 이 녹청자는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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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배의 출항지는 해남이었다.
#완도앞바다 그릇들
- 녹청자 그릇들 풀 7" 3만점에 달하는 녹청자의 행선지를 밝히기 위해선 우선 녹청자가 어디에서 생산되었는
지부터 알아봐야한다.
- 그릇 뒤집어본다 10" 청자중엔 더러 제작처나 사용처등을 그릇바닥에 써놓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완도앞바다에서 인양된 녹청자에도 제작지가 표시되어있지않을까...
- C.G. 뽑아져나온다 19" 그런데 그릇바닥엔 표기되어있는 건 글씨가 아니었다.
마치 상형문자와 같은 것으로 그릇마다 각기 다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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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윤용이 인터뷰
완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도자기는 1자나 7자나 3자 이런 예도 있지만 많은 경우 물음표라든지 특이한 기호가
많다. 이러한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현재까지 알 수 없다.
다만 강진 용운리의 제작용구에 나타난 예를들면 엑스자나 동그라미나 구멍같은 여러 기호가 있다.
이런 기호의 예를 보면 여러 공방의 것이 한 가마에서 구워졌을 경우 나중에 구분을 위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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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인종류들 한 화면에 15" 완도바닷속에서 인양된 녹청자에는 이러한 기호가 모두 100여종류나 나왔다.
그렇다면 이는 그만큼 많은 도자기공방이 밀집되어 있던 지역에서 생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 해남 현장
-해남현장 헬기 28" 그런데 완도앞바다에서 3만여점의 녹청자가 인양되기 불과 2개월전 해남에서 대규모의
녹청자가마터가 발견되었다.
발견지점은 바로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사적지표지 현재 사적지로 지정되어있는 이곳에서는 무려 104기의 가마가 발견되었다.
이는 국내가마터 중 손가락에 꼽힐정도의 큰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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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욱 교수 인터뷰(테이프3 1350)
저희들 조사할 당시 바닷물이 저기 언덕부분까지 들어와서 발굴하는 가마터에 파도가 치면 물이 들어올
정도로-아주 환경이 좋았던 곳이다.
가마터는 해안선따라 죽 형성되어있었던 그런 자연적인 조건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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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와 바다 C.G. 14" (2-3" 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인해 논으로 변했지만 이곳은 원래 해안가였다.
이 해안가에 104기의 가마가 즐비해있었던 것이다.
-해안의 파편들 사진 7" 당시 해안가엔 청자파편들이 마치 조개껍질처럼 널려있었다.
-현장 풀 35"
-파편 줍다. 현재 104기의 가마는 땅속에 묻혀있어 육안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도 바닥에 널려있는 청자파편들을 통해 이곳이 얼마나 큰 가마터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완도앞바다에서 인양된 녹청자는 이곳 해남에서 생산한 것일까?
지리상의 위치나 가마터의 규모로 봤을때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사진 15" 그런데 지난 92년 이곳에서는 한기의 가마에 대한 발굴작업이 이뤄졌다.
당시 가마에서는 760여점의 가마파편들이 나왔다...만일 이 파편이 완도녹청자와
-가마현장 30" 동일하다면 완도바닷속에 있던 3만여점의 녹청자가 이곳 해남산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발굴했던 가마는 파편만을 걷어낸 뒤 다시 덮었기 때문에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가마 옆에 자리한 퇴적층은 그대로 드러나있다.
퇴적층은 도공들이 실패한 그릇을 버렸던 곳으로 청자파편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이곳에서 나온 청자파편과 완도의 청자는 과연 동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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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실장인터뷰(테이프 4 4413)
43" 당시 유물들은 760여점 나왔는데 대부분이 대접과 접시고 그외에 철화장고편이라든가 합이라든가 항아리
종류 극소수...
태토라든가 철화장고..여러가지 정황으로 봤을 때 그리고 이 남해안 일대에 대단위로 녹청자 제작하는 곳
이곳밖에 없다..
역사적인 배경이라든가..유적배경을 종합해 볼 때 해남진산리일대에서 만들어서 싣고가다가 침몰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추정된다.
---------------------------------- -목포대학교 인양유물들 6" 당시 발굴을 담당했던 목포대학박물관을
찾았다.
-그릇파편 12" 해남가마에서 나온 청자파편들이다.
비록 파편이긴하지만 그릇의 몸체나 굽의 형태가 완도녹청자와 동일하다.
-철화장고편 13" 그리고 무엇보다 철화장고편은 한눈에 완도것과 똑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고고학적인 분석결과 이곳 해남가마와 완도녹청자의 제작시기가 동일하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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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성낙교수 인터뷰(테이프9 5041)
저희들은 가마발굴통해 두가지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하나는 숯을 이용해 측정핟. 그 결과 1030년과 1050년
11세기 전반과 중반..
또 하나는 고지지자기 방법인데 고지지자기 방법은 흙속에 있는 자기의 방향을 통해 추정
이결과 12세기로 추정되다.
따라서 이 녹청자가마의 연대는 11세기중엽으로 부터 12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가마로 추정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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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과학연구실외경 27" 그릇의 기형과 제작시기만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완도바닷속에서 인양된 녹청자
와 해남 청자의 성분을 분석해본결과 청자의 주요성분의 함량이 거의 비슷하게 나왔다.
-전문가에게 설명 듣다. 이는 완도바닷속의 녹청자가 바로 해남산인지를
-당시 자료 펼쳐보이며 인터뷰 확인시켜주는 보다 확실한 근거다.
-당시 자료 펼쳐놓고 인터뷰 -------------------------------------
29" *인터뷰(추후)
각 가마터의 성분지도를 서로 비교하고 완도앞바다에서 나온 녹청자를 비교해보니까
해남 진산리의 가마터 자기와 완도유물선의 자기와 동일한 군 형성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완도유물선 자기는 해남 진산리에서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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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원면
-헬기샷 8" 최근 해남에선 또하나의 대규모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진산리 옆에 위치한 화원면 신덕리가 그곳이다.
-변선생 26" 이곳에선 지역 향토사학자들에의해 가마터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곳에서도 역시 어렵지않게 고려시대 녹청자 파편들을 볼 수 있었다. 제법 완전한 형태의 그릇들도 있었다.
-산속으로 들어가서 45" 이곳에선 야트막한 산 경사면에 가마들이 형성돼있었다.현재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조사된 것만 80여기가 된다고 한다.
-현장음...제가 보기엔 이쪽으로 이렇게 옆에 가서 보시면...보시면 가마 벽 나오지
보이지.-
가마 구멍이 보였다.
이렇게 현재 해남엔 진산리와 신덕리 일대 모두해서 180여기의 가마터가 있다.
지금으로치면 해남은 대규모 녹청자공단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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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기본세트..)
고려시대 해남에선 녹청자가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실제 해남에서 녹청자를 어느 정도나 생산했을지 간단히 추정해 볼 수 있는데요...
(오른쪽에 액자에 사진 나온다) 지금 이 사진이 앞서 보았던 해남에서 발굴된 가마 사진입니다....이 가마의
크기는 길이 24.5미터에 너비 120센팁니다. 이 하나의
가마가 한번에 구워낼 수 있는 양을 가마의 크기와 그릇의 크기를 이용해
계산해보면 대접의 경우 대략 2,000점정도가 나온다고 합니다. 대단한 양이지요...
그런데 이런 가마가 해남엔 180여기나 있습니다.
그러니 해남의 모든 가마가 한번 불을 땔 경우 만들어지는 대접이
무려 360.000점이나 되는 것입니다.
뭐 이정도면 고려시대 해남에서 만들어냈을 녹청자가 어느
정도 됐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돌아서며)
이렇게 대량으로 생산되던 녹청자 중 일부가 완도바다속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녹청자는 어디로 옮겨지던 것일까
이는 고려시대 대량으로 만들어지던 녹청자를 사용하던 사람이 과연 누구였는지를
밝히는 단서가 되기도 할텐데요....우선 당시 항로를 살펴보겠습니다.
지도 두루마리 등장..손으로 끈을 당기면 남도전도 등장..손으로 위치 가리키며)
당시 항로를 보면 배는 우선 해남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침몰위치가 이곳 완도 앞바다..그러니까 해남에서 출발..
동남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지도로 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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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인근지방을 돌며 청자 팔던 배..암초에 걸려 좌초하다.
-어두지섬 현장 17" 30.000여점의 녹청자가 어디로 실려가던 것인
지를 밝히기위해선 우선 침몰지점의 상황을 살펴야한다.
배가 침몰해있던 곳은 완도 약산섬에서 불과72미터 떨어진 지점- 이 배의 침몰원인은
어두지섬 끝단에 위치한 암초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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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희인터뷰 테이프1 2849
선박이 좌초된 환경을 한번 조사해보며는 저 등대에서 우측으로 죽 내려오면서 15미터가량의 암초가 있다.
거기서 안개 때문에 좌초되어서 72미터까지 흘러내려와 좌초된 것이 아닌가..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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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지섬 현장 7" 배가 부딪친 건..완도섬끝단의 암초...그렇다면 이 배는 완도에 정박하려한 것일까
- 배 C.G. 13" 그러나 설사 이 배의 목적지가 완도일지라도 3만여점의 청자가 모두 완도에서만 쓰여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 배는 또 어디로 가려한걸까? 이는 배의 규모로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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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김용한 인터뷰(테이프 6 1613)
구조나 화물 봤을 때 먼바다 항해하는 배가 아니라 연안을 따라 운항하던 연안 운반선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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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선(돛이 두개) 13" 그렇다면 이 배가 연안을 따라 갈 수 있는
거리는 얼마나 될까..
당시 개경까지 운항되던 조운선은 돛이 두 개였다...그런데 완도선은 돛이 하나다
따라서 이 배는 가까운 지역을 다니던 배로 보인다.
-해도 19"
(해도의 선따라 C.G.선 생기다) 실제 서남해안의 연안항로는 아주 발달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이 지도는 고대부터 쓰이던 서남해안의 연안항로를 정리해놓은 건데 유난히 섬이 많은
서남해안의 특성에 맞게 내륙은 물론이고 섬까지 자세히 뱃길이 이어져있다.
- 고려사의 기록 14" 또한 고려예종때의 기록을 보면 남도 지역의 사람들이 연안선을 따라 인근지역으로
물건을 팔러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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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서성호선생 인터뷰(테이프 13 1758)
고려시대에는 조운이 매우 발달했기 때문에 지방과 지방..지방과 중앙을 연결하는 선상활동이 굉장히 활발히
이뤄지다.
마찬가지로 도자기판매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이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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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광사
30" 그렇다면 이 녹청자를 사용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해남 인근지역에 서 하 무려 3만여점이나 되는 녹청자를 지난 87년 전남승주의 송광사에서는 다량의 녹청자가
발굴되었다.
당시 발굴된 것은 주로 녹청자 파편들로 대접과 접시 완과같은 반상기들이다.
송광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로 고려시대에도 이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이 녹청자는 고려시대 이곳 송광사에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마시는 모습 17" 녹청자를 이용했던 사람들 중엔 승려들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 이곳 외에 미륵사지에서도 녹청자가 발굴되었다.
# 용인 석곽묘의 녹청자들
-박물관 녹청자들 18" 사찰외에 녹청자가 주로 발견되는 곳은 고분이다.
지난 94년 용인 좌항리에서 두 점의 녹청자가 발굴되었다..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녹청자 병이다.
-무덤발굴사진 13" 그런데 이 녹청자 역시 고려시대 석곽묘에서 나왔다.
석곽묘는 주로 지방의 부유한 사람들이나 .관원...또는 향리등의 무덤이다.
-광주박물관 팬 9" 이는 고려시대로 치면 중산층에 해당되는 계층으로 고려시대 인구에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해로 C.G. 11" 해남에서 출발한 완도해저유물선은 인근 내륙이나 섬으로 녹청자를 팔러가던 중이었다.
-배 가다가 가라앉는 25"
C.G.(클로징성) 그러던 중 암초에 걸려 바다밑에 가라앉게 된 것이다. 이렇게해서 3만여점의 녹청자는 오랜
세월동안 바닷속에 가라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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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징(기본 세트)
1000여년간 바닷속에 잠들어있던 한척의 고려배와 3만여점의 청자-
이는 우리에게 고려시대 비색의 고급청자와 함께 녹청자가 있었으며 그 녹청자는 대량으로 생산이 되어서
널리 쓰여졌던 고려시대 대표적인 생활용기였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한호흡 쉬고)
사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하면 누구나 첫손가락으로 꼽는 것이 청자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껏 우리가 생각해온 청자는 비색의 고급청자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완도앞바다에서 인양된 30.000여점의 청자를 통해 고려시대 청자는 비색청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며(강조)결코 귀족들만의 전유물도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고려시대 청자문화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포우즈)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다양함이 있었기에
고려는 청자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