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천제강림신화와 天孫 관념
<金石文>
1)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1) 生[而*]2)有聖□3)□□□□. □命駕,」 巡幸4)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5)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罡, [履*]」龍頁6)昇天.
(광개토왕릉비 ;금석문1권 p.8)
<옛적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河伯(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 있었다(5자 불명).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天帝의 아들이며 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2)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1) 生[而*]2)有聖□3)□□□□. □命駕,」 巡幸4)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5)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罡, [履*]」龍頁6)昇天.
(광개토왕릉비 ;금석문1권 p.8)
<옛적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河伯(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 있었다(5자 불명).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天帝의 아들이며 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주몽신화 유형:주몽신화는 부여족이 공유하고 있던 동명신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전승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3) 모두루묘지
3 河 泊 之 孫 日 月 之 子 鄒 牟*
4 聖 王 元 出 北 夫 餘 天 下 四*
5 方 知 此 國 郡* 最 聖 個 □ □
6 治 此 郡* 之 嗣 治* □ □ □ 聖*
49 □ □ △ 昊 天 不 弔 奄 便* △
50 △ □ 奴 客 在 遠 哀* 切 如* 若
51 日* 不 □ □ 月 不 □ 明 △ △
52 △ □ □ □ □ □ □ □ □ □
53 □ □ □ □ □ 國* □ □ □ □
54 知* □ △ △ 在 遠* 之 □ □ □
<3-6행:고구려 국가의 내력을 서술한 부분으로, “河泊의 손자이며 日月의 아들인 鄒牟 聖王이 북부여에서 나셨으니,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天下四方이 알지니 ···
49-54행:광개토왕의 죽음에 대한 모두루의 감회를 서술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즉 “昊天이 어여삐여기지 않아 (광개토왕이 승하함에), 老客(모두루)은 遠地에 있었으나 그 哀切함이 마치 해와 달이 빛을 잃은 듯하여 ···”란 뜻의 표현이 있었던 것 같다.>
4) 海隅開族, 河孫效祥, 崇基峻峙, 遠派靈長. 家聲克嗣, 代業逾昌, 澤流氵虒」水, 威稜帶方.
(扶餘隆 墓誌銘 ;금석문1권 p.548)
<바다 한 귀퉁이에서 겨레를 이루니 河伯의 자손으로서 상서러움을 드러냈고, 나라 기틀을 우뚝 세우니 국운이 멀리 이어져 내려왔도다. 집안의 명성을 능히 계승하고 대대로 이어받은 국업이 더욱 번창하였으니, 은덕이 체氵虒 水에 흘러넘쳤고 위엄이 대방에 발하였구나.>
*부여융은 의자왕의 아들로서, 당나라 낙양에 들어가 죽었는데, 이 비문을 통하여 백제가 멸망기까지에도 고구려와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명문에서 백제 왕실을 河孫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아마 ‘河伯의 자손’ 또는 외손이란 뜻이 될 것이다. 곧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라는 건국신화와 통하는 구절이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를 합하여 兩貊이라 표현한 것이라든가, 桂累가 어지러워지고 遼河가 평안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표현에서도 고구려와의 일체의식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부여융을 辰朝人 곧 백제 이전의 辰國人으로 서술한 것은 백제인들의 진국 계승 관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三國史記>
4) 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 收而養之 及年十餘歲 岐嶷然夙成 六部人 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 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故 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蘿井 곁의 숲 사이에 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어서, 그곳으로 가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큰 알만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깨보니 그 속에서 한 어린아이가 나왔다. 소벌공은 그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서 잘 길렀는데, 10세가 되자 유달리 공은 그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서 잘 길렀는데, 10여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다. 육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신기하므로 모두 우러러 받들게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朴)이라 말하였는데, 혁거세가 난 큰 알의 모양이 표주박같이 생겼으므로, 이를 인연으로하여 박(朴)으로써 姓을 정하였다. 그리고 居西干이란 진한 사람들의 말인데 왕이라는 뜻이었다. (혹은 귀인을 이르는 말이라고도 한다.)>
6) 五年 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老嫗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名之 及長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行能內輔 時人謂之二聖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
<5년(전 53) 정월에 龍이 알영정에 나타나서 오른쪽 겨드랑이 갈빗대 밑으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한 노파가 이를 보고 이상히 여겨 데리고 와 기르며, 그 우물 이름을 따서 閼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알영은 자랄수록 그 덕용이 뛰어났는데, 시조가 이 말을 듣고 그를 맞아 왕비로 삼았다. 알영왕비는 마음이 어질고 행실이 착하여 안으로 모든 일을 잘 도우므로, 그때 사람들은 그를 맞아 시조 혁거세와 아울러 두 聖人이라고 말하였다.>
7) 九年 春三月 王夜聞 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遲明 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掛樹枝 白鷄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 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姓金氏 改始林名鷄林 因以爲國號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9년(65) 3월에 왕은 밤에 금성(월성) 서쪽 始林 숲속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파견하여 이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색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으므로 돌아와 이 사실을 아뢰었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한 다음, 이를 열어 보니 조그만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기뻐하며 군신들에게 이르기를,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준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거두어 길렀다. 그런데 그는 자람에 따라서 아주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으므로, 이름을 閼智라 하고, 그가 금궤 속에서 나왔음을 인연으로하여 성을 金씨라 하고, 또 시림을 고쳐 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8) 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 鄒牟 一云 象解(象解 恐當作衆牟)) 先是 扶餘王解夫婁 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相對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蛙一作蝸)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立爲太子 後其相阿蘭弗曰 日者天降我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腴宜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募漱 來都焉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 問之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態心山下(心 遺事作神) 鴨淥邊室中私之 卽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炤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男兒 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嶷然異常 自作弓矢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 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而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王以肥者自乘 瘦者給朱蒙 後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小 而朱蒙殪獸甚多 王子及諸臣 又謀殺之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而不可 與其遲留而受辱 不若遠適以有爲 朱蒙乃與鳥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鳥 下文及遺事竝作烏) 行至淹체水(一名蓋斯水 在今鴨綠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魏書云至音述水(音 當作普))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予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黙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黙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本川(魏書云至紇升骨成)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皇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一云 朱蒙之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時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世二十一年甲申歲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蓮靺鞨部落 恐侵盜爲害 遂壤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王見沸流水中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答曰 我是天帝子 來都於某所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可乎 王忿其言 因與之鬪辯 亦相射以校藝 松讓不能抗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高씨이고 이름은 朱蒙이다. (또는 鄒牟 또는 象解라고도 함). 이보다 먼저 부여왕 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서 山川에 제사를 드리고 嗣子를 구하였는데, 하루는 왕이 탄 말이 鯤淵에 이르러서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니, 그 밑에 한 어린 아이가 있는데 빛은 금빛 같고 모양은 개구리와 같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令胤(아들)을 주신 것이다’하고 곧 거두어 기르며 이름을 金蛙라 하였는데,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세웠다. 뒤에 그 재상 阿蘭弗이 왕에게 말하기를, ‘요사이 하늘에서 나에게 이르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너희들은 여기를 피하라. 동해 바닷가에 땅이 있는데 迦葉原이라 부르고, 땅이 기름지므로 오곡을 심기에 적당하니, 가히 도읍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는 드디어 왕을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東扶餘라 하였다. 이때 그 옛서울에는 한 사람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하나, 자칭 천제의 아들 解慕漱라 하며 곧 도읍하였다. 동부여 해부루왕이 돌아가시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에 금와왕은 한 여자를 太白山 남쪽 優渤水에서 만나 사정을 물으니, 그 여자는 말하기를, ‘나는 본래 河伯의 딸로서 이름을 柳花라고 합니다. 여러 아우들과 더불어 나가 노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와서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나를 熊心山 밑 압록강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정을 통하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에게 몸을 바쳤다고 책망하고 내쫓으므로 끝내는 우발수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하였다. 금와왕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데려다가 깊숙한 방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비춰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한 그를 따라다녀 드디어는 아이를 배고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들이만 하였다. 금와왕은 이를 버리게하여 개와 돼지에게 주었지만 먹지 않고, 또 길 가운데 버렸지만 소와 말이 이를 피하고, 나중에는 들에 버렸더니 새들이 모여들어 날개로 이를 덮어 주었다. 금와왕은 이것을 갈라 보려고 하였으나 또한 깨뜨리 수 없으므로 드디어는 그 어미에게 둘려주었다. 그 어미가 물건으로 이를 덮어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그 속에서 나왔는데, 골격이 준수하며 모양이 영특하였다. 그 나이가 7세 때에는 남달리 뛰어나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이를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말에 활 잘 쏘는 사람을 朱蒙이라 한 까닭으로 그를 주몽이라고 이름하였다. ······ 그는 쫓는 군사에게 잡힐까 염려하여 물에 빌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망하다가 추병이 박도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하니 이때 魚鼈(고기와 자라)들이 물위로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 주므로 주몽 등은 강을 건널 수 있었는데, 곧 어별들이 풀려 헤어지자 쫓아오는 군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나는 지금 天命을 받들고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마침 세 어진 사람을 만났으니 이 어찌 하늘이 보내준 것이 아니랴’ 하고 드디어는 그들의 재능에 따라 각각 일할 것을 맡기고 함께 졸본천(魏書에서는 홀승골성에 이르렀다고 함)에 이르렀는데, 그 땅이 기름지며 아름답고 산하가 험고하므로 드디어 여기에 도읍을 정하려 하였다. ······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아무데에 도읍하였습니다’하니 송양은 말하기를 ······>
<三國遺事>
9)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三國遺事> 권1 「紀異 제1」 고조선)
<魏書에 이르되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壇君王儉이 있어, 도읍을 阿斯達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하여 朝鮮이라 일컬으니, 高와 同時라 하였다. 古記에 이르되, 옛날에 桓因의 庶子 桓雄이 있어, 항상 天下에 뜻을 두고 人世를 탐내거늘,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三危太白을 내려다보며 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만 한지라 이에 天符印 三個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雄이 무리 三千을 이끌고 太白山 꼭대기 神壇樹 밑에 내려와 여기를 神市라 이르니 이가 桓雄大王이다. (그는) 風伯·雨師·雲師를 거느리고 穀·命·病·刑·善·惡 등 무릇 인간의 삼백육십여사를 맡아서 人世에 있어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그때 一熊一虎가 같은 굴에서 살며 항상 神雄에게 빌되 원컨대 化하여 사람이 디어지이다 하거늘, 한번은 神雄이 신령스러운 쑥 한자래와 마늘 20개를 주고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日光을 보지 아니 하면 곧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어서 먹고 忌하기를 三七日만에 곰은 女子의 몸이 디고 범은 능히 忌하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熊女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항상 壇樹아래서 축원하기를 아이를 배어지이다 하였다. 雄이 이에 잠간 변하여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壇君王儉이라 하였다. 唐高(요)의 즉위한 지 50년인 庚寅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朝鮮이라 일컫고, 또 도읍을 白岳山 阿斯達에 옮기었는데, 그곳을 또 弓忽山 또는 今彌達이라고도 하니 治國하기 1500년이었다. 周의 虎王 즉위 己卯에 箕子를 朝鮮에 봉하매, 壇君은 藏唐京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山神이 도니, 壽가 1908세였다 한다. 唐의 裵矩傳에는 高麗는 본시 孤竹國인데 周가 箕子를 봉하여 朝鮮이라 하였고, 漢은 三郡을 分置하여 玄菟·樂浪·帶方이라 하였으며, 通典에도 이 說과 같다.>
10)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募漱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 移都于東扶餘 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祖
(<三國遺事> 권1 「紀異 제1」 북부여)
<古記에 이르되 前漢書에 宣帝 神爵 3년 임술 4월 8일에 天帝가 訖升骨城(大遼 醫州)에 내려와서 五龍車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王을 일컫고 國號를 北扶餘라 하고 자칭 解慕漱라 이름하였으며, 아들을 낳아 扶婁라 하고 解로 氏를 삼았다. 王이 뒤에 上帝의 命으로 도읍을 東扶餘에 옮겨가고 東明帝가 北扶餘를 이어 일어나 도읍을 卒本州에 정하여 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高句麗의 시조이다.>
11) 北扶餘王解夫婁之相阿蘭弗 夢 天帝降而謂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謂東明將興之兆也) 東海之濱 有地名迦葉原 土壤膏腴 宜立王都 阿蘭弗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夫婁老無子 一日祭山川求嗣 所乘馬至鯤淵 見大石 相對俠(淚)流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爲太子 夫婁薨 金蛙嗣位爲王 次傳位于太子帶素 至地皇三年壬午 高麗王無恤伐之 殺王帶素 國除
(<三國遺事> 권1 「紀異 제1」 동부여)
<북부여왕 解夫婁의 相 阿蘭弗의 꿈에 天帝가 내려와 이르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이 곳에 나라를 세우러하니 너는 피하라. 동해가에 迦葉原이란 곳이 있어 땅이 기름지니 王都를 세울만 하다 하였다. 아란불이 왕을 권하여 도읍을 그곳에 옮기고 국호를 東扶餘라 하였다. 夫婁가 늙고 아들이 없어 하루는 山川에 제사하고 後嗣를 구할 쌔 탔던 말이 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들치니 金色蛙形의 小兒가 있는지라 왕이 기뻐하여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라 하고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金蛙라 하였다. 금와가 장성하매 태자를 삼고 夫婁가 돌아간 후 금와가 位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에 位를 태자 帶素에게 전하였던 바, 地皇 3년 임오에 高麗王 無恤(대무신왕)이 쳐서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12) 高句麗 卽卒本扶餘也 或云今和州 又成州等 皆誤矣 卒本州在遼東界 國史高麗本記云 始祖東明聖帝姓言(高)氏 諱朱蒙 先是 北扶餘王解夫婁 旣避地于東扶餘 及夫婁薨 金蛙嗣位 于時得一女子於太伯山南優渤水 問之 云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態神山下 鴨淥邊室中知(私)之 而往不返(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 名曰夫婁 今按此記 則解慕漱私河伯之女 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于此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光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照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五升許 王棄之與犬猪 皆不食 又棄之路 牛馬避之 棄之野 鳥獸覆之 王欲剖之 而不能破 乃還其母 母以物裏之 置於暖處 有一兒 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岐嶷異常 自作弓矢 百發百中 國俗謂善射爲朱蒙 故以名焉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技能莫及 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若不早圖 恐有後患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王自乘肥 瘦者給蒙 王之諸子與諸臣將謀害之 蒙母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不可 宜速圖之 於是蒙與烏伊等三人爲友 行至淹水(今未詳)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孫 今日逃遁 追者垂及 奈何 於是魚鼈成橋 得渡而橋解 追騎不得渡 至卒本州(玄菟郡之界) 遂都焉 未皇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時年十二歲 漢孝元帝建昭二年甲申歲 卽位稱王 高麗全盛之日 二十一萬五百八戶 珠琳傳第二十一卷載 昔寧禀離王侍婢有娠 相者占之曰 貴而當王 王曰 非我之胤也 當殺之 婢曰 氣從天來 故我有娠 及子之産 謂爲不祥 捐圈則猪噓 棄欄則馬乳 而得不死 卒爲扶餘之王(卽東明帝爲卒本扶餘王之謂也 此卒本扶餘 亦是北扶餘之別都 故云扶餘王也 寧禀離 乃夫婁王之異稱也)
(<三國遺事> 권1 「紀異 제1」 고구려)
<앞서 북부여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피하고 부루가 돌아간 후 금와가 위를 이었다. 이때에 (금와가) 태백산 남쪽 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나 물으니, 대답하되 나는 본시 河伯의 딸로 이름은 柳花인데, 여러 아우들과 나와 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있어 자기는 天帝의 아들 解慕漱라 하고, 나를 熊心山하압록강가의 집속으로 꾀어 私通하고 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 부모가 나의 중매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 이곳으로 귀양보낸 것이라 하였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그를) 방속에 가두었더니 日光이 비쳐왔다. 몸을 피하매 그리고 쫓아와 비치며 인하여 태기가 있더니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닷되들이만 하였다. 왕이 그것을 버리어 개와 도야지에게 주니 모두 먹지 않고 또 길에 버리니 牛馬가 피하고 들에 버리니 새와 짐승이 덮어주었다. 왕이 (이를) 깨트리려다가 깨트리지 못하고 그 어미에게 돌려 주었다. 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나이 겨우 칠세에 숙성하여 범인과 다르고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번 쏘면 백번 맞추었다. 國俗에 활 잘 쏘는 것을 朱蒙이라 하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 이에 주몽은 烏伊 등 세사람으로 벗을 삼아 淹水에 이르러 물에 고하되 나는 天帝의 子요 河伯의 孫인데, 오늘 도망하는데 쫓는 자가 거의 닥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하였다. 이때에 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이루어 건느게 하고 곧 흩어지니, 쫓아오던 적기가 건느지 못하였다. 졸본주에 이르러 도읍을 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여가가 없고 다만 집을 비류수 위에 짓고 거기에 거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인하여 高로써 氏를 삼았다. 이때 나이 20세였으니 漢孝元帝 建昭 2년 갑신에 즉위하여 왕이라 일컬었다. 高麗가 전성하던 때는 22만 580호가 되었다. 琉璃傳 제21권에 기재하되 옛날 寧稟離王(영품리왕)의 侍婢가 임신하였는데, 相장이가 占을 쳐 가로되 貴히 되어 왕이 되겠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자식이 아니니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侍婢가 아뢰되 하늘로부터 (무슨) 기운이 내려와 임신한 것이라 하였다. 그 아이가 나매 상스럽지 못하다 하여 도야지 우리간에 버리니 도야지가 입김을 넣어주고, 마굿간에 버리니 말이 젖을 먹이어 죽지않게 하여 마침내 扶餘王이 되었다.>
13) 按上文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降 弩禮王九年 始改六部名 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 長福部爲父 臨川部爲子 加德部爲女 其實未詳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 建虎元年 又云 建元三年等 皆誤) 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議曰 我輩上無君主臨理蒸民 民皆放逸 自從所欲 합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於是乘高南望 楊山下蘿井傍 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跪拜之狀 尋撿之 有一紫卵(一云靑大卵) 馬見人長嘶上天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驚異之 浴於東泉(東泉寺在詞腦野北)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盖鄕言也 或作不矩內王 言光明理世也 設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讚仙桃聖母 有娠賢肇邦之語是也 乃至鷄龍現瑞産閼英 又焉知非西述聖母之所現耶) 位號曰居瑟邯(或作居西干 初開口之時 自稱云 閼智居西干 一起 因其言稱之 自後爲王者之尊稱) 時人爭賀曰 今天子已降 宜覓有德女君配之 是日 沙梁里閼英井(一作娥利英井)邊 有鷄龍現而左脇誕生童女(一云龍現死 而剖其腹得之) 姿容殊麗 然而唇似鷄觜 壯浴於月城北川 其觜撥落 因名其川日撥川 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奉養二聖兒 男以卵生 卵如瓠 鄕人以瓠爲朴 故因姓朴 女以所出井名名之 二聖年至十三歲 以五鳳元年甲子 男立爲王 仍以女爲后 國號徐羅伐 又徐伐(今俗訓京字云徐伐 以此故也 ) 或云斯羅 又斯盧 初王生於鷄井 故或云鷄林國 以其鷄龍現瑞也 一說 脫解王時得金閼智 而鷄鳴於林中 乃改國號爲鷄林 後世遂定新羅之號 理國六十一年 王升于天 七日後 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 曇嚴寺北陵是也 太子南解王繼位
(<三國遺事> 권1 「紀異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上文을 보건대 이 六部의 조상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弩禮王 9년에 비로소 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또 六姓을 주었던 것이다. 지금 風俗에는 中興部를 어미, 長福部를 아비, 臨川部를 아들, 加德部를 딸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자세치 않다. 前漢 地節 원년 임자 3월 초하루에 六部의 조상들이 각기 자제들을 데리고 闕川岸上에 모여서 의논하되 우리가 위에 백성을 다스릴 君主가 없어, 백성들이 모두 放逸하여 제맘대로 하니, 어찌 덕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아니 하랴 하고,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楊山下 蘿井곁에 이상스러운 기운이 電光과 같이 땅에 비치더니 거기에 白馬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보니 한 붉은 알이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길게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그 알을 깨어보니 모양이 단정한 아름다운 童子가 나왔다. 경이히 여겨 그 아이를 東泉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日月이 청명한지라. 인하여 그를 赫居世王이라 이름하였다. (아마 鄕言일 것이다. 혹은 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說者는 이르되 이는 西述聖母의 탄생한 것이니 중국 사람들이 仙桃聖母를 찬양하여 娠賢肇邦이란 말이 있는 것도 이 까닭이라 하였다. (그리고 보면 鷄龍이 祥瑞를 나타내고 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西述聖母의 現身을 말한 것이 아닐까.) 位號를 居瑟邯(혹은 居西干이라고도 하니, 이는 그가 처음 입을 열 때 自言하되 ‘閼智居西干이 한 번 일어난다’ 하였으므로 그 말로 인해서 일컬었는데, 이로부터 王者의 존칭이 되었다.)이라 하였다. 時人이 서로 다투어 치하하기를 이제 天子가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있는 女君을 찾아서 짝을 지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이날에 사량리 閼英井가에 鷄龍이 나타나 왼편 갈비에서 童女 하나를 탄생하니(혹은 龍이 나타나 죽으매 그 배를 갈라 동녀를 얻었다 한다), 자태와 얼굴은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 北川에 가서 목욕시키니 그 부리가 빠짐으로 그 내를 撥川이라 하였다. 宮室을 남산 西麓에 세워서 두 聖兒를 받들어 기르니, 사나이는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은 박과 같았다. 향인들이 박을 朴이라 하므로 인하여 그 성을 朴이라 하였고, 여자는 그의 나온 우물로 이름을 지었다. 二聖의 나이 열세살이 되자 五鳳 원년 갑자에 남자가 왕이 되어 그 여자로 왕후를 삼고, 국호를 徐羅伐 또는 徐伐(지금 俗에 京자를 訓하여 서벌이라 이르는 것도 이 까닭이다)이라 하고 혹은 斯羅 또는 斯盧라고도 하였다. 처음에 왕이 鷄井에서 출생한 까닭에 혹은 鷄林國이라 하니 鷄龍이 상서를 나타낸 까닭이었다. 일설에는 脫解 때에 金閼智를 얻을 때 닭이 숲속에서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鷄林이라 하였다 한다. 후세에 드디어 新羅란 국호를 정하였다. (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2년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라더니 그 후 칠일만에 遺體가 흩어져 땅에 떨어지며 왕후도 따라 돌아갔다 한다. 國人이 合葬하고자 하매 큰 배암이 쫓아와 방해하므로 五體를 각각 장사지내어 五陵이라 하고 또한 蛇陵이라고도 하니 曇嚴寺 北陵이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이 位를 이었다.>
14) 永平三年庚申(一云中元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己) 八月四日 瓠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櫃 掛於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鷄鳴於樹下 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櫃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 故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抱載還闕 鳥獸相隨 喜躍蹌蹌 王擇吉日 冊位太子 後讓於婆裟 不卽王位 因金櫃而出 乃姓金氏 閼智生熱漢 漢生阿都 都生首留 留生郁部 部生俱道(一作仇刀) 道生未鄒 鄒卽王位 新羅金氏自閼智始
(<三國遺事> 권1 「紀異 제1」 김알지 탈해왕대)
<永平 3년 경신 8월 4일에 瓠公이 밤에 월성 西里를 가다가 큰 光明이 始林(혹은 鳩林) 속에서 나타남을 보았다. 紫色 구름이 하늘에서 땅에 뻗치었는데 구름 가운데 黃金 궤가 나무끝에 걸려 있고 그 빛이 궤에서 나오며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우는 지라 이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그 속에 童男 하나가 누어있다가 일어났다. 마치 혁서세의 古事와 같으므로, 그 말에 인하여 閼智라 이름하니 閼智는 곧 우리 말에 小兒를 말함이다. 童男을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등이 서로 따르며 기뻐해서 모두 뛰놀았다. 왕이 吉日을 택하여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후에 婆娑에게 사양하고 왕위에 나아가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金씨라 하였다. 알지는 熱漢을 낳고 漢은 阿都를 낳고 都는 首留를 낳고 留는 郁部를 낳고 部는 俱道(혹은 仇刀)를 낳고 道는 未鄒를 낳아 鄒가 왕위에 오르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서 시작하였다.>
15)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 所居北龜旨(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 )有殊常聲氣, 呼喚衆庶, 二三百人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 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 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玆故降矣. 儞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踊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炘而歌舞. 未幾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裏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 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尋還, 裏著抱特而, 歸我刀家. 置榻上. 其衆各散. 過浹辰. 翌日平明. 衆庶復相聚集開合. 而六卵化爲童子. 容貌甚偉. 仍坐於床. 衆庶拜賀. 盖恭敬止. 日月而大. 踰十餘晨昏. 身長九尺, 則殷之天乙. 顔如龍焉, 則漢之高祖. 眉之八彩, 則有唐之高. 眼之重瞳則, 有虞之舞. 其於月望日卽位也. 始現故諱首露. 或云首陵. (首陵是崩後謚也).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爲五伽耶主.
(<三國遺事> 권2 「紀異 제2」 가락국기)
<後漢 世祖 光武帝 建武 18년 임인 3월 禊浴日(계욕일)에 그 곳 북쪽 龜旨峰에서 무엇을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났다. 衆庶 2,3백인이 이곳에 모이니, 사람의 소리는 나는 듯 하되 그 형상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九干들이 이르되 우리들이 여기 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냐. 대답하되 龜旨라 하였다. 또 말하되 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롭게하여 임금이 되라 하였으므로 이곳에 일부러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峰上에서 흙을 파면서 노래하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지 않으면 구어먹으리’ 하고 舞蹈하면 大王을 맞이하여 歡喜勇躍할 것이라 하였다. 九干 등이 그 말과 같이 모두 기뻐서 歌舞하다가 얼마 아니하여 쳐다보니 紫色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는지라,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폭에 金합이 싸여있었다. 열어보니 해와 같이 둥근 六個의 黃金 알이 있었다. 모두 驚喜하여 百拜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싸가지고 我刀의 집으로 돌아와 榻(탑)위에 두고 각기 흩어졌다. 12時를 지나 이튿날 平明에 衆人이 다시 모여 합을 여니, 여섯 알이 化하여 童子가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하므로 상에 앉히고 여럿이 拜賀하고 극진히 위하였다. 나날이 자라 십여일을 지나매 신장이 9척이나 되었으니 이는 殷의 天乙과 같고 그 얼굴이 龍과 같았음은 漢高祖와 같고, 눈섭의 八彩는 唐高(요임금)와 같고 눈에 동자가 둘씩 있음은 虞舜과 같았다. 그달 보름날에 즉위하였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諱를 首露라 하고 혹은 首陵이라 하며 나라를 大駕洛 또는 伽耶國이라고도 일컬으니 곧 六伽耶의 하나요, 나머지 五人은 각각 가서 五가야의 主가 되었다.>
16) 屬建武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 九干等朝謁之次. 獻言曰. 大王降靈已來. 好仇未得. 請臣等所有處女絶好者. 選入宮闈. 俾爲伉儷. 王曰. 朕降于玆, 天命也. 配朕而作后. 亦天之命. 卿等無慮. 遂命留天干押輕舟, 持駿馬. 到望山島立待. 申命神鬼干, 就乘岾. (望山島. 京南島嶼也. 乘岾, 輦下國也. )忽自海之西南隅. 掛緋帆, 張茜旗, 而指乎北. 留天等先擧火於島上. 則競渡下陸. 爭奔而來. 神鬼望之. 走入闕奏之. 上聞欣欣. 尋遣九干等. 整蘭橈, 揚桂楫而迎之. 旋欲陪入內. 王后乃曰. 我與[爾]等素昧平生, 焉敢輕忽相隨而去. 留天等返達后之語. 王然之. 率有司動蹕. 從闕下西南六十步許地. 山邊設幔殿祗候. 王后於山外別浦津頭, 維舟登陸. 憩於高嶠. 解所著綾袴爲贄. 遺于山靈他. 其地(他)侍從媵臣二員. 名曰申輔, 趙匡. 其妻二人. 號幕貞. 幕良. 或臧獲並計二十餘口. 所齎錦繡綾羅, 衣裳疋段, 金銀珠玉, 瓊玖服玩器, 不可勝記. 王后漸近行在. 上出迎之. 同入帷宮. 媵臣已下衆人. 就階下而見之卽退. 上命有司, 引媵臣夫妻曰. 人各以一房安置. 己下臧獲各一房五六人安置. 給之以蘭液蕙醑. 寢之以文茵彩薦. 至於衣服疋段寶貨之類. 多以軍夫遴集而護之. 於是王與后共在御國寢. 從容語王曰. 妾是阿踰陁國公主也. 姓許名黃玉. 年二八矣. 在本國時. 今年五月中. 父王與皇后顧妾而語曰. 爺孃一昨夢中. 同見皇天上帝. 謂曰. 駕洛國元君首露者. 天所降而俾御大寶. 乃神乃聖. 惟其人乎. 且以新莅家邦. 未定匹偶. 卿等湞遣公主而配之. 言訖升天. 形開之後. 上帝之言. 其猶在耳. 儞於此而忽辭親向彼乎, 往矣. 妾也浮海遐尋於蒸棗, 移天夐赴於蟠挑. 螓首敢叨. 龍顔是近.
(<三國遺事> 권2 「紀異 제2」 가락국기)
<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에 九干 들이 朝謁할 때 아뢰기를 대왕의 강림하신 이래로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시었으니 신등이 둔 처녀중에서 절묘한 자를 궁중에 뽑아 드려 배필을 삼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가로되 내가 여기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요 나의 배필로 后가 되는 것도 또한 하늘의 명령이니 그대들은 염려치 말하하고 드디어 留天干을 명하여 輕舟와 駿馬를 가지고 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또 神鬼干을 명하여 乘岾으로 가게 하였다. ······ 왕이 그러이 여겨 有司를 거느리고 궐하에서 60보쯤 되는 山邊에 가서 幔殿(임시로 장막을 친 殿)을 베풀고 기다렸다. 山外 別浦津頭에서 王后는 배를 매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며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그것을 선물로 삼아 山靈에 주었다. ······ 이에 왕과 왕후가 함께 침전에 계실 새 왕께 조용히 말하되 나는 본래 阿踰陁國의 公主인데 성은 許씨요 이름은 黃玉이나 나이는 二八이라 금년 5월에 본국에 있을 때 부왕이 황후로 더불어 나에게 말씀하기를 어제밤 꿈에 함께 上帝를 뵈오니 上帝의 말씀이 가락국왕 首露는 사늘이 내려보내어 등극케 하였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神聖스러운 이다. 또 새로 나라를 다스리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잠은 깬 후에도 上帝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거기로 가라 하시었다. 그래서 내가 바다에 떠서 蒸棗(증조 ;찐 대추)를 구하고 하늘에 가서 蟠桃(반도 ;仙桃 복승아)를 얻어 螓首(진수 :美人의 네모번듯한 이마)로 외람히 龍顔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하였다.>
<中國正史朝鮮傳>
17) 高句麗, 其先出於夫餘, 王嘗得河伯女, 因閉於室內, 爲日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遂. 旣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 夫餘王棄之與犬, 犬不食. 與豕, 豕不食. 棄於路, 牛馬避之. 棄於野, 衆鳥以毛茹之. 王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母以物裏置於暖處, 有一男破而出. 及長 字之曰朱蒙, 其俗言朱蒙者, 善射也. 夫餘人以朱蒙非人所生, 請除之, 王不聽, 命之養馬. 朱蒙私試, 知有善惡, 駿者減食令瘦, 駕者善養令肥. 夫餘王以肥者自乘, 以瘦者給朱蒙. 後狩于田, 以朱蒙善射, 給之一矢. 朱蒙雖一矢, 殪獸甚多. 夫餘之臣 又謀殺之. 其母以告朱蒙, 朱蒙乃與焉違等二人, 東南走. 中道遇一大水, 欲濟無梁, 夫餘人追之甚急.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孫, 今追兵垂及, 如何得濟? 於是魚鼈爲之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渡. 朱蒙遂至普述水, 遇見三人, 一著麻衣, 一著納衣, 一著水藻衣, 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高爲氏.
(<北史> 列傳 고구려)
<고구려는 그 先祖가 夫餘에서 나왔다. 夫餘王이 일찌기 河伯의 딸을 붙잡아 방안에 가두어 놓았는데, 햇빛을 받게 되어 몸을 돌려 피하였으나 햇빛이 다시 따라와 비추어 주었다. 얼마 후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되들이 만하였다. 부여왕이 그 알을 개에게 주었으나 개가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다 버렸으나 소나 말들이 피해 다녔다. 들판에 버려 두었더니 뭇새가 깃털로 그 알을 덮어 주었다. 왕은 그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게 되자, 결국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고 말았다. 그 어머니가 다른 물건으로 이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사내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가 성장하여 字를 朱蒙이라고 하니, 그 나라 속언에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 주몽은 이에 焉違 등 두사람과 함께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중도에서 큰 강을 만났는데, 건너려 하여도 다리는 없고, 부여 사람들의 추격은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이 물에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河伯의 외손이다. 지금 뒤쫓아 오는 병사들이 들이닥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자, 이 때에 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 올라와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건넌 뒤 고기와 자라는 금방 흩어져버려 추격하던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은 마침내 普述水에 이르러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무명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부들로 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주몽과 함께 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高句麗라 하고 인하여 성을 高씨라 하였다.>
18) 高句麗者, 出於夫餘, 自言先祖朱蒙. 朱蒙母河伯女, 爲夫餘王閉於室中, 爲日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遂. 旣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 夫餘王棄之與犬, 犬不食. 棄之與豕, 豕又不食. 棄之於路, 牛馬避之. 後棄之野, 衆鳥以毛茹之. 夫餘王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裏之, 置於暖處, 有一男破殼而出. 及其長也, 字之曰朱蒙, 其俗言朱蒙者, 善射也. 夫餘人以朱蒙非人所生, 將有異志, 請除之, 王不聽, 命之養馬. 朱蒙每私試, 知有善惡, 駿者減食令瘦, 駕者善養令肥. 夫餘王以肥者自乘, 以瘦者給朱蒙. 後狩于田, 以朱蒙善射, 限之一矢. 朱蒙雖矢少, 殪獸甚多. 夫餘之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 告朱蒙曰 國將害汝, 以汝才略, 宜遠適四方. 朱蒙乃與烏引 烏違等二人, 棄夫餘, 東南走. 中道遇一大水, 欲濟無梁, 夫餘人追之甚急.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如何得濟? 於是魚鼈並浮, 爲之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遂至普述水, 遇見三人, 其一人著麻衣, 一人著納衣, 一人著水藻衣, 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爲氏焉.
(<魏書> 列傳 고구려)
<고구려는 夫餘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朱蒙이라 한다. 주몽의 어머니는 河伯의 딸로서 夫餘王에게 잡혀 방에 갇혀 있던 중, 햇빛이 비치는 것을 몸을 돌려 피하였으나 햇빛이 다시 따라와 비추었다. 얼마 후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되들이 만하였다. 부여왕이 그 알을 개에게 주었으나 개가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다 버렸으나 소나 말들이 피해 다녔다. 뒤에 들판에 버려 두었더니 뭇새가 깃털로 그 알을 감쌌다. 부여왕은 그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게 되자, 결국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고 말았다. 그 어머니가 다른 물건으로 이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사내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가 성장하여 字를 朱蒙이라고 하니, 그 나라 속언에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 주몽은 이에 烏引·烏違 등 두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중도에서 큰 강을 하나 만났는데, 건너려 하여도 다리는 없고, 부여 사람들의 추격은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이 강에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河伯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길에 추격하는 군사가 바싹 쫓아오니, 어떻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자, 이 때에 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 올라와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건넌 뒤 고기와 자라는 금방 흩어져버려 추격하던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은 마침내 普述水에 이르러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무명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부들로 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주몽과 함께 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高句麗라 하고 인하여 성을 高씨라 하였다.>
19) 高句麗者 其先出自東明. 東明本北夷索?離國王之子. 離王出行, 其侍兒於後姙娠, 離王還, 欲殺之. 侍兒曰 前見天上有氣 如鷄子, 來降我, 因以有娠. 王囚之, 後遂生男. 王置之豕牢, 豕以口氣噓之, 不死. 王以爲神, 乃聽母收養, 長而善射, 王忌其猛, 復欲殺之. 東明乃奔走, 南至淹滯水, 以弓擊水, 魚鼈皆浮爲橋, 東明乘之得度, 至夫餘而王之焉. 其後之別爲句麗種也.
(<梁書> 諸夷列傳 高句麗)
<고구려는 그 선조가 東明으로부터 나왔다. 東明은 본래 北夷 離王의 아들이다. 離王이 출행한 사이에 그의 시녀가 後(宮)에서 임신하였다. 離王이 돌아와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앞서 하늘 위에 큰 달걀만한 氣가 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이 저에게 내려와서 임신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녀를 가두어 두었더니 뒤에 사내 아이를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내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이를) 신령스럽게 여겨 거두어 기르도록 허락하였다. 장성하면서 활을 잘 쏘니, 왕은 그의 용맹함을 꺼리어 다시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東明이 도망하여 남쪽의 淹滯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떠올라 다리를 놓아 주었다. 동명은 이들을 밟고 강을 건너 夫餘에 이르러 (그 나라의) 왕이 되었는데, 그 후손의 한 지파가 句麗의 종족이 되었다.>
20) 高句麗之先 出自夫餘. 夫餘王嘗得河伯女, 因閉於室內, 爲日光隨而照之, 感而遂孕, 生一大卵, 有一男子破殼而出. 名曰朱蒙. 夫餘之臣 以朱蒙非人所生, 咸請殺之. 王不聽. 及壯, 因從獵, 所獲居多, 又請殺之. 其母以告朱蒙, 朱蒙旣夫餘東南走. 遇一大水, 深不可越. 朱蒙曰 我是河伯外孫, 日之子也. 今有難, 而追兵且及, 如何得渡? 於是魚鼈積而成橋, 朱蒙遂渡, 追騎不得濟而還. 朱蒙建國, 自號高句麗, 以高爲氏.
(<隋書> 東夷列傳 고구려)
<고구려의 先祖는 夫餘에서 나왔다. 夫餘王이 일찌기 河伯의 딸을 붙잡아 방안에 가두어 놓았는데, 햇빛이 따라 다니면서 그녀를 비추었다. (그 빛을) 받고 마침내 임신하여 큰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 소에서)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니 이름을 朱蒙이라 하였다.······ 주몽은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중도에서 큰 강을 만났는데, (물이) 깊어서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나는 河伯의 외손이요 태양의 아들이다. 이제 어려움을 당하여 추격하는 군사가 곧 뒤쫓아 오는데 어떻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자, 고기와 자라가 함께 모여서 다리를 만들어 주어 주몽은 건너 갈 수 있었으나, 추격하던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고 돌아갔다. 주몽은 나를 세워 스스로 국호를 高句麗라 하고 高씨로 성을 삼았다.>
21) 高麗者 其先出於扶餘. 自言始祖曰朱蒙. 河伯女感日影所孕也. 朱蒙長而有材略, 夫餘人惡而逐之. 土于紇斗骨城, 自號曰高句麗, 仍以高爲氏.
(<周書> 異域列傳 고구려)
<고구려는 그 선조가 夫餘에서 갈라져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는 朱蒙인데, 河伯의 딸이 햇빛에 감응되어 잉태하였다고 한다. 주몽이 장성하여 재주와 지략이 있자, 부여 사람들이 미워하여 쫓아버렸다. 이에 주몽은 紇斗骨城에 살면서 스스로 국호를 高句麗라 하고, 이어 高씨로 성을 삼았다.>
22) 註)魏略曰舊志又言昔北方有豪離之國者其王者侍婢有身王欲殺之婢云有氣如雞子來下我故有身後生子王捐之於溷中猪以喙噓之徙至馬閑馬以氣噓之不死王疑以爲天子也乃令其母牧畜之名曰東明常令牧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施掩水以弓擊水魚龜浮爲橋東明得度魚龜乃解散追兵不得度東明因都王夫餘之地
(<三國志> 魏書 東夷傳 부여)
<魏略:옛 기록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옛날 북쪽 지방에 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왕의 시녀가 태기가 있으므로 왕은 종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시녀는 말하기를, 하늘에서 계란 같은 것이 내려와 소인의 입으로 들어가더니 태기가 있기 시작하더라고 한다. 十朔이 되어 자식을 낳자 왕은 이것을 돼지우리에 버렸다. 그랬더니 돼지는 입김으로 어린아이 몸을 녹여 주어 죽지 않게 한다. 왕은 天帝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동명 활을 몹시 잘 쏜자, 왕은 그가 자기 나라를 빼앗을까 걱정하여 죽이려 했다. 이에 동명은 도망하여 남쪽 施掩水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 속에서 물고기와 자라떼가 나와 다리를 놓아 주었다. 동명이 이 다리를 건너 저편으로 도망하자 물고기와 자라떼는 물 속으로 흩어져 버려, 동명을 쫓아오던 군사들은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동명은 부여 땅에 도읍을 정하고 왕이 되었다.>
23) 初, 北夷索離國王出行, 其侍兒於後姙身, 王還, 欲殺之. 侍兒曰 前見天上有氣, 大如雞子, 來降我, 因以有身. 王囚之, 後遂生男. 王令置於豕牢, 豕以口氣噓之, 不死. 福徙於馬蘭, 馬亦如之. 王以爲神, 乃聽母收養, 名曰東明. 東明長而善射, 王忌其猛, 復欲殺之. 東明奔走, 南至淹滯水, 以弓擊水, 魚鼈皆聚浮水上, 東明乘之得度, 因至夫餘而王之焉.
(<後漢書> 東夷列傳 夫餘國)
<처음에 北夷의 索離國王이 출타 중에 그의 侍女가 後(宮)에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 왕이 돌아와서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가 말하기를, ‘지난 번 하늘에 크기가 달걀만한 이상한 氣가 있어, 저에게로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대로 임신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왕이 그녀를 (옥에) 가두었는데, 그 뒤에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갖다 버리게 하였으나, 돼지가 제 입김을 불어 주어 아이는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으로 옮겼으나 말도 역시 그와 같이 해주었다. 왕이 그 아이를 神異하게 생각하여 그 어미에가 거두어 기르도록 허락하고, 이름을 東明이라 했다. 東明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이 그의 용맹함을 꺼리어 다시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동명은 남쪽으로 도망하여 掩遞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모여 물 위에 떠올랐다. 동명은 이를 밟고 물을 건너서 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日本六國史>
24) 天皇所遣之使 與高麗神子奉遣之使
(<日本書紀> 권25 孝德천황)
<大化 원년(645) 가을 7월 정묘 초하루 병자, ··· 巨勢德太臣이 고려의 사신에게詔를 내려 “明神御宇日本天皇의 詔旨이다. 과거는 짧으나 앞날은 길다. 그러므로 천황이 보낸 사신과 고려의 神의 아들이 받들어 보낸 사신은 온화한 마음으로 서로 이어 왕래할 만하다”고 하였다. 또 백제 사신에게 詔를 내려 “明神御宇日本天皇의 詔旨이다. 과거 우리의 먼 조상의 시대에 백제국은 內官家가 되었으니, 비유하자면 세 개로 묶은 그물과 같았다. ···>
25) 書尾虛陳天孫僭号 ··· 故妄稱舅甥 於禮失矣
(<續日本紀> 권32 光仁천황)
<寶龜 3년(772) 2월 기묘, 渤海王에게 칙서를 내려, “天皇은 삼가 高麗國王에게 문안한다. ··· 그런데 이제 보내온 글을 살펴보니 갑자기 부친이 행하던 법식을 고쳐, 날짜 아래에 官品과 姓名을 쓰지 않고 글의 말미에 거짓되이 天孫임을 참칭하는 칭호를 써놓았다. ··· 高氏의 때에는 병란이 그치지 않아 (우리) 조정의 위엄을 빌리기 위하여 그 쪽에서 兄弟를 칭하였다. 바야흐로 이제 大氏는 일찍이 아무 일 없이 편안한 연고로 함부로 外叔과 甥姪이라 칭하는데, (그것은) 禮를 잃은 것이다. 뒷날의 사신을 다시는 그래서는 안된다.>
26) 其百濟遠祖都慕王者 河伯之女 感日精而所生 황태後卽其後也
(<續日本紀> 권40 桓武천황)
<延曆 8년(789) 12월 임자, (皇后를) 大枝山陵에 장사지냈다. 황태후의 성은 和씨이고 이름은 新笠이다. 正1위에 추증된 乙繼의 딸이다. 어머니는 정1위에 추증된 大枝朝臣眞妹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녕왕의 아들인 純陁太子에서 나왔다. ··· 그 백제의 먼 조상인 都慕王(주몽)이라는 사람은 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이로 말미암아 諡號를 받들었다.>
27) 百濟久素王時 聖朝遣使 徵召文人 久素王卽以狗孫王仁貢焉 是文武生等之祖也
(<續日本紀> 권40 桓武천황)
<延曆 10년(791) 가을 7월 신사, 4월 무술, ··· 칙을 내려 그 본계를 물으니 最弟 등은 “漢高祖의 후손 鸞이라 하는 사람의 후손 王狗가 백제에 옮겨와 이르렀는데, 百濟 久素王 때에 聖朝에서 사신을 보내어 文人을 찾으니 久素王이 곧 그(王狗)의 손자인 王仁을 바쳤습니다. 이가 곧 文·武生 등의 선조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最弟 및 眞象 등 8인에게 宿禰의 성을 내렸다.
28) 夫百濟太祖都慕大王者日神降靈 奄扶餘而開國 天帝授籙 (物+心)諸韓而稱王 ··· 於是 始傳書籍 大闡儒風 文敎之興 ··· 高麗國遣使上烏羽之表
(<續日本紀> 권40 桓武천황)
<延曆 9년(790) 가을 7월 신사, 좌중변 정5위상 겸목공두 百濟王仁貞, 치부소보 종5위하 百濟王元信, 중위소장 종5위하 百濟王忠信, 도서두 종5위상 겸동궁학사 좌병위좌 이예수 진연진도 등이 표를 올려 “저희들은 本系가 百濟國 貴須王에서 나왔습니다. 귀수왕은 백제가 처음 일어난 때로부터 16대 임금입니다. 대저 백제의 太祖 都慕太王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扶餘에 머물러 나라를 열었습니다. 天帝가 籙을 주어 모든 韓을 통솔하고 王을 칭하게 되었습니다. 시대를 내려와 近肖古王에 이르러 멀리서 聖朝의 교화를 사모하여 비로소 貴國에 朝聘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神功皇后가 섭정하던 해의 일입니다. 그 후 경도풍명조어우 應神천황은 상모야씨의 먼 조상인 황전별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내어 학식이 있는 사람을 찾아 모셔오게 하였습니다. 그 나라의 임금인 귀수왕은 공경하게 사신의 뜻을 받들고 宗族 중에서 택하여 그 손자인 진손왕(일명 지종왕)을 보내어 사신을 따라 입조하게 하였습니다. 천황은 가상히 여겨 특별히 총애를 더하고 황태자의 스스응로 삼았습니다. 이에서 비로소 서적이 전해지고 儒風이 크게 열렸으니, 文敎의 일어남이 진실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 타전조어우 敏達천황이 다스리는 때에 이르러 高麗國에서 사신을 보내어 까마귀 날개에 쓴 표를 올렸습니다. 여러 신하들과 史官들은 그것을 읽어내지 못하였는데, 辰你(-亻)가 나아와 그 표를 가져다가 읽고 잘 베껴내어 表文을 풀이해 아뢰었습니다.>
29) 祝者연(廴+西)託神語報曰 屈請建邦之神 ··· 原夫建邦神者 天地割判之代 草木言語之時 自天降來 造立國家之神也
(<일본서기> 권 19 欽明天皇)
<16년(555) 봄 2월, 蘇我卿이 ‘옛날 大泊瀨천황 때 그대의 나라가 고구려로부터 침략을 받아 위험하기가 鷄卵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했습니다. 이에 천황이 神祇伯에게 명하여 공경히 神祇로부터 계책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祝者가 이에 신의 말에 의탁하여 “나라를 세운 神(백제의 건국신?)을 청해 모셔와 장차 망하려는 임금을 가서 구하면 나라는 반드시 평온해지고 사람들은 잘 다스려져 편안해질 것이다”라고 보고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神을 청하여 가서 구원하였으므로 社稷이 평안해졌습니다. 무릇 나라를 세운 신이란 하늘과 땅이 나뉘어 구분되고 풀과 나무가 말을 할 때,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운 신입니다. 지난번에 그대 나라에서는 (祠堂을) 돌보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지금이라도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 神宮을 수리하여 神靈을 받들어 제사지내면 나라가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그대는 나의 말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