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4월 27일 陽曆 2번째기사 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13도에 유교를 장려할 것에 대한 명령을 내리다
詔曰: "國家之開設學校, 作成人材, 將以廣知見而求進益, 以爲開物成務利用厚生之基本也。 現今世界各國之烝烝日上, 富强無敵者, 豈有他哉? 不過曰從事格致之學, 究解物理之蘊, 識已精而益求其精, 器已巧而愈出愈新也。 有國之要務, 寧有先於此哉? 我國之人才, 未必多讓於外國, 而特以敎之無素, 故人民之知見未開, 農商之功業不興, 以致民産日蹙, 國計日絀。 而新設學校, 僅爲文具而止, 全昧敎育之方, 五六年來, 了無寸進之效。 至於商工學校, 尤爲急先之務, 曾有去年下勅, 而迄無開設之議。 如是伈泄, 何事可做? 良庸慨然。 自政府另飭該部, 無得踵前因循, 一槪認眞辦理, 期有作成開進之功。" 又詔曰: "世界萬國之尊尙宗敎, 靡不用極, 皆所以淑人心而出治道也。 我國之於宗敎, 何其泛尊而無其實也。 我國之宗敎, 非吾孔夫子之道乎? 蓋自黃帝、堯、舜, 繼天立極, 禹、湯、文、武、周公, 聖聖相承, 傳精一之心法, 敍天秩之典禮。 至吾夫子, 則稟太和之元氣, 集群聖之大成, 其倫則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 其文則《詩》、《書》、《易》、《禮》、《春秋》, 其宏綱大目, 則自明德而新民也, 自格致誠正, 以至修齊治平也, 垂百王之大法, 立萬世之人紀。 外此道, 則人不得以爲人, 國不可以爲國。 歷代君臣, 皆遵此道以爲治, 而亂臣賊子, 懼而不敢肆也。 顔、曾、子思, 傳得其宗, 而鄒 孟子闡而大之, 遏人欲而存天理, 闢楊、墨而衛正道。 其功豈不偉哉? 中間湮晦, 千有餘年。 周、程、張子, 尋墜緖而接道統。 至晦庵、朱子, 則又集群儒之大成, 正九經之箋註, 使斯道大明, 如日中天。 吾儒之學, 至此而門路始正, 趨向有方矣。 粤我大韓, 自箕聖設八條之敎, 敷仁賢之化, 國之宗敎, 肇基于此。 降及三韓 三國之際, 儒術未明, 俗尙猶陋, 斯道或幾乎熄矣。 至勝朝之末, 諸儒始講程、朱之說, 興學校之政, 洎于我朝, 重熙累洽, 治敎休明, 群賢輩出, 儒風大行, 實有以洗羅、麗之陋, 而接洛閩之緖矣。 至我正廟, 以天縱之聖, 懋日新之工, 發揮斯文, 崇奬儒學, 鼓舞一世, 而躋之文明之域, 巍巍乎其功也, 郁郁乎其文也。 敬讀雅誦序文, 則聖祖之允承朱子之統有不可誣矣。 昇平郅隆五百有餘年, 夫豈無自而然耶? 奈之何挽近以來, 世級日降, 其始也尙口耳而外身心, 崇虛文而昧實學, 今則竝與其文而闕不講。 絃誦不聞於庠序, 經籍徒抛於案閣, 居官者知有身而不知有國, 爲士者患無位而不患無學, 以致慾浪滔天, 名敎掃地, 禮防大懷, 彝倫斁喪, 變怪式日而生, 亂逆接踵而出, 至於乙未之變而極矣。 嗚呼! 是豈非宗敎不明之禍耶? 亂極而治, 剝盡而復, 理之常也。 朕承祖宗之業, 居君師之位, 經百艱歷千刦, 而耿耿此心, 惟在於維持宗敎。 慨然思有以廻瀾障川, 而皇太子令聞夙彰, 睿學日就, 從玆以往, 朕與東宮, 將爲一國儒敎宗主, 闡箕、孔之道, 紹聖祖之志。 咨爾臣僚百執事, 其各悉心對揚, 尊聖以嚮道, 躬行以率下。 崇禮義而敦風俗, 勵名節而懋實用。 至於中外釋奠之禮, 加倍肅虔, 黌宮養士之節, 認眞擴張。 凡奬學之規, 選士之法, 劃一妥定, 俾有風勸而野有遺賢, 古今同歎。 略依伊川學制, 設招賢堂於成均館, 以延宿學隱淪之士。 且皐比之座, 鑑評之職, 古有司業、中正等官, 可以倣行, 竝令學部, 改定成均館官制章程以入。 仍將此詔旨, 布諭十三道, 咸使聞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나라에 학교를 설치한 것은 인재를 양성하여 장차 지식과 견문을 넓히고 더욱 전진하게 하여 만물의 도리를 알고 일을 처리하여 이루며 기물의 사용을 편리하게 하여 재물을 풍부하게 하는 기초의 근본을 삼자는 것이다.
현재 세계 각국(各國)이 날로 상승하여 당할 수 없이 부강해지는 것이 어찌 다른 데 원인이 있겠는가? 이치에 맞는 학문에 종사하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며 정밀한 지식을 더욱 정밀하게 하고 기묘한 기계가 날이 갈수록 더 새로운 것이 나오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이보다 앞서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인재가 외국보다 크게 못한 것이 아니며 다만 일상적인 교육이 없기 때문에 인민들의 식견이 열리지 못하고 농상(農商)의 공업(功業)이 흥기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생업이 날로 영락하고 나라의 재정이 날로 궁해가고 있다. 그러나 새로 설치한 학교는 겨우 형식을 갖추는 데 그치고 교육의 방도에는 전혀 어두워 5, 6년 동안 조금도 전진한 성과가 없다. 상공 학교(商工學校)에 이르러서는 더욱 급선무가 되니 일찍이 지난해에 명령을 내렸으나 아직도 개설(開設)에 대한 의논이 없다. 이와 같이 질질 끌어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개탄할 노릇이다. 정부(政府)에서 해부(該部)에 단단히 신칙하여 종전의 폐풍을 따르는 일이 없도록 하며 일관되고 진지하게 해 나간다면 기어코 이루어서 개진하는 성과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세계 만국에서 종교를 높이고 숭상하여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것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정사를 잘 다스리는 방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종교는 어째서 존중되지 않고 그 실속이 없는가? 우리나라의 종교는 우리 공부자(孔夫子)의 도가 아닌가? 대체로 황제(黃帝)·당요(唐堯)·우순(虞舜) 때부터 시작하여 하늘의 명을 이어 왕위를 세웠고 하우(夏禹)·성탕(成湯)·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의 훌륭한 성인(聖人)들이 계승하면서 정일(精一)한 심법(心法)을 전승하고 하늘의 질서와 전례(典禮)를 발전시켰다. 우리 공부자에 이르러 태화(太和)한 원기(元氣)를 타고나 여러 성인들의 뜻을 집대성(集大成)하여 그 윤리(倫理)는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늙은이와 어린이, 벗과 벗의 관계를 규정하였고 그 문물 제도는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예기(禮記)》·《춘추(春秋)》이니, 큰 강목(綱目)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며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부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이르는 것이다. 백왕(百王)에게 전해 준 대법(大法)이고 만대 사람의 기강을 세웠으니, 이 도를 벗어나면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고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 없다. 역대의 임금들과 신하들은 모두 이 도리를 준수하여 나라를 다스렸는데 나라를 배반하는 신하와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들은 두려워서 감히 제멋대로 행하지 못하였다.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가 그 도를 전하였는데 맹자(孟子)가 크게 천명하여 인욕(人慾)을 막고 천리(天理)가 존재하게 하였으며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물리치고 바른 도리를 호위하였으니 그 공적이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중간에 막히고 숨겨져 천여 년의 세월이 지나 주자(周子)·정자(程子)·장자(張子)가 그 도통(道統)의 실마리를 찾았고 회암(晦庵) 주자(朱子)에 이르러 또 여러 선비들의 뜻을 집대성하고 구경(九經)의 전주(箋註)를 바로잡았으니 유교(儒敎)를 마치 해가 중천에 솟아 있듯이 크게 밝혔다. 우리 선비들은 나아갈 학문의 길이 비로소 바르게 되었고 취향의 방향이 있게 되었다.
아아! 우리 대한(大韓)은 기자(箕子)가 팔조(八條)의 가르침으로 어진 교화를 펴게 되었고 나라의 종교는 여기에서 기초가 비롯되었다. 삼한(三韓)과 삼국(三國)에 내려와서 유술(儒術)이 밝지 못하고 풍속이 아직도 비루한 것만 숭상하여 유교는 거의 사라질 뻔하였다. 고려 말에 이르러 여러 선비가 비로소 정자와 주자의 학설을 강론하고 학교에 관한 정사가 흥하게 되었다. 우리 왕조에 이르러 더욱더 발전하여 정사와 교화는 밝아지게 되었고 어진 사람들이 배출되어 유풍(儒風)이 크게 행해졌으니 실로 신라와 고려의 어지러운 기풍을 씻어버리게 되었고 염락(濂洛)과 관민(關閩)의 학통이 이어졌다. 우리 정묘(正廟) 대에 와서는 하늘이 낸 훌륭한 성군(聖君)으로 날로 새로워지는 공부에 힘쓰고 유교 학문을 발휘하여 유학을 숭상하고 장려하여 한 세대를 고무하니 문명한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높고 높은 그 공적과 빛나고 위대한 그 문장이며, 공경하여 아(雅)와 송(誦)의 서문(序文)을 읽으면 성조(聖祖)가 주자의 도통을 이었다는 것은 속일 수 없는 바가 있다.
태평하고 융성한 5백여 년의 역사가 어찌 저절로 그렇게 되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근래에는 세상 기풍이 날로 저하되어 처음에는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으면서 마음을 닦는 공부를 등한히 하고 내용이 없는 글을 숭상하여 실제적인 학문에는 어두웠으며 오늘에는 그 형식마저 없어지고 있다. 거문고를 타고 글을 외우는 소리가 상서(庠序)에서 들려오지 않고 경서는 책상에 버려지고 있다. 벼슬살이 하는 자는 자신만 알고 나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며, 선비라는 자는 벼슬을 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지 학문이 없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욕심은 하늘에 넘치고 명분과 교화는 쓸어버리듯 없어지며 예법은 크게 무너지고 윤리는 퇴락하였다. 변괴는 날마다 일어나고 난신과 역적은 뒤따라 나와 을미년(1895)에 와서는 변란이 극도에 달하였다.
아아! 이것이 어찌 종교가 밝지 못한 데로부터 온 환란이 아니겠는가? 변란이 극도에 이르면 다스려지고 박괘(剝卦)가 다하면 복괘(復卦)가 오는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짐(朕)은 조종(祖宗)의 위업을 계승하여 임금의 자리에 있는데 온갖 고통을 다 겪고 온갖 변란을 다 당하였다. 그러나 이 마음은 오직 종교를 유지하는 데 있고, 개연한 생각은 역류를 돌려세우는 것에 있다. 그리고 황태자에 대한 착한 소문이 일찍이 퍼지고 재주와 학문이 날마다 전진하여 이제부터는 짐이 동궁(東宮)과 함께 한 나라 유교의 종주(宗主)가 되어 기자와 공자의 도를 밝히고 거룩한 성조(聖祖)의 뜻을 이을 것이다.
아아! 너희 신하들은 모든 일에 각각 마음을 다하여 대양(對揚)하고 성인을 존중함으로써 도를 따르며 몸소 실천함으로써 아랫사람들을 인솔하며, 예의를 숭상하고 풍속을 돈독히 하며 명분과 절개를 장려하고 실용에 힘쓰도록 하라. 중외(中外)에서 문묘(文廟)에 제사를 지내는 예식에 이르러서는 배로 엄숙하고 공경스럽게 하며 횡궁(黌宮)에서 선비들을 양성하는 일은 진지하게 확장할 것이다. 모든 학문을 장려하는 규정과 선비를 천거하는 법은 하나로 잘 정하여 권고하는 기풍이 서게 할 것인데, 시골에 어진 사람이 묻혀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통탄할 일이니, 대략 이천(伊川)의 학제(學制)를 따라서 성균관(成均館) 안에 초현당(招賢堂)을 설치하고 풍부한 학문을 지니고 숨어 있는 선비를 맞이하라.
그리고 강론하는 자리와 감평(鑑評)하는 벼슬로는 옛날에도 사업(司業)·중정(中正) 등의 관리가 있었으니 모방하여 시행할 것이다. 아울러 학부(學部)로 하여금 성균관의 관제장정(官制章程)을 개정(改定)하여 들이게 하라. 그리고 이 조지(詔旨)을 13도(道)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