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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샤워장에서 망신살◈
죽암 장석대
1995년 8월15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날은 광복 제50주년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40주년을 맞는 해 라서, 경기도 가평군
용추골에서 고교 동기들이 95년도 정기총회를 여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회갑을 갓 넘긴 나이였지만 자영업을 한창 할 때라 주머니 사정도 좋았고,
기회있을 때마다 산 따라 물 따라 산채진상을 즐기며 젊음을 과시할 때였습니다.
서울의 동창들을 승용차에 태우고 용추골 어귀에 들어서니, 성하(盛夏)의 계절에 광복절
공휴일을 놓칠세라 모여든 피서객들은 이미 성시(盛市)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2차선 좁은 도로 한 쪽에는 빈틈없이 주차해 놓고 있어서, 음료수를 싣고 오가는 트럭과
마주칠 때면 꼼짝 달싹할 수가 없었지요. 입장료 1천원을 받고도 가든 말든 나 몰라라
하는 안내원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애타는 마음은 아랑곳없이 피서객들은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개울에서
신나게 물장구 치고 있었고, 형형색색의 텐트와 파라솔은 어느 해변가를 방불케 했습니다.
울창한 숲 속에서 목청 놓아 울어대는 매미소리,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랩송의 합창은
그야 말로 용추골 교향악단 리허설 한 장면 같았습니다.
버너에서 풍겨 나오는 삼겹살의 구수한 냄새로 시장기를 달래며 가까스로 용추계곡 휴양
지에 이르니, 생각보다 용추계곡의 풍광은 아름다웠습니다. 천추만대에 걸쳐 자연이 연출
해 놓은 용추계곡은 그야말로 자연과 인간이 같이 호흡하고 움직이는 한 폭의 동양화
같았습니다.
억겁의 세월 속에서 그 모습 버티어 온 기암괴석들, 맑은 물이 재잘대며 흐르는 계곡에서
62명이란 전무후무한 많은 동기들이 모여 성대한 총회를 열었습니다.
그당시 춘농고 42회인'李賢稙동기가 수원시 어느 구청장에 재임하다가 고향인 가평군수로
부임한지 몇개월되지 않은 시기였고, 고향인 가평으로 금의환향했다는 뜻에서 똥개 두
마리를 내놓아 어느 때보다 푸짐한 동창회였습니다.
찌는 듯한 찜통더위에 개고기로 포식 한데다 쏘주니 맥주니 실컷 마신 터라 비지땀은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 많던 친구들은 하나 둘씩 뿔뿔이 헤어지는 가운데
서울 친구들은 여기까지 온 김에 개울가에 가서 발이나 담그다 가자는 의견이 모아졌지요.
그래서 막상 개울가를 둘러보았지만, 이미 피서객들이 요소마다 진을 치고 있어서 윗통
벗고 물끼 끼어얹을만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리 저리 싸다니다가 희한한 사건으로 몰고간 문제의 커다란 "샤워장" 간판이 눈에
번쩍 들어 왔습니다. 보아하니 6.25때 흔히 보아온 반원형 퀀셋트 샤워장이었습니다.
그 샤워장 양쪽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어쩐지 고요했습니다.
Y사쓰를 벗어 어깨에 맨 동기들은 목마른 야수와 같이 앞다투어 활짝 열린 샤워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샤워꼭지를 틀어보니 얼음 같은 지하수가 쏟아지는데, 정신이 바짝 나더군요.
"아이고 차거워, 웬 물이 이렇게 차 담" "이런 데 두고 어딜 싸다녔어, 그러게 말이야,
병신 같이"하며 한 마디씩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헤매봐도 비누 꼬투리라곤 하나 없었습니다.
그저 쉰내 나는 땀을 씻어 내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얼마나 물이 차가웠던지 오들오들 떨무렵이 였지요.
누군가가 "똑똑 똑"하고 노-크를 했습니다.
어느 친구가 뒤 따라 오는 줄 알고 "귀신 같이 찾아오네" 하며 무심코 문을 열었지요.
그 순간 "악"하는 비명소리는 나와 어떤 여자와의 합창 소리 였습니다.
그 찢어지는 소리는 어느 악기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괴상한 굉음이였지요.
서로가 놀라서 문고리만 꼭 잡고 얼굴만 서로 빼꼼히 처다 보고 있었지요.
게다가 중요한 부분은 감추려 하지도 않고요.
사실 나의 거시기는 오그러 붙어서 가리나 마나했고, 너무 자지러지게 놀라 가릴
겨를도 없었지요. 그럴 때는 누구나 그랬을 겁니다.
정신을 차리고 내다보니, 비키니 차림의 두 아가씨가 혼비백산하고 뛰어 가는 꼴은
볼만했습니다. 내가 하도 악쓰는 바람에 친구들도 웬 일인가 하고 나의 어깨를 짚고
내다보며 "저 런 저 런, 병신 같은 년들, "남탕"이란 한글도 모르나 하며 웃어댔습니다.
흘린 수건을 허겁지겁 주워 달아나는 꼴을 보고 한 바탕 배를 잡고 웃어 재켰습니다.
시원하게 샤워를 끝내고 샤워장을 나와 문을 닫으니 이게 웬 일입니까.
"여자샤워장"이란 팻말이 문 바깥쪽에 붙어 있었습니다.
애시 당초 활짝 열린 문을 살펴보지 않고 들어온 것이 망신살의 원인이었습니다.
"한글도 모르는 병신 같은 년들"이라 욕했던 우리가 한없이 부끄러워씁니다.
오히려 혼비백상하여 달아난 아가씨들이 "한글도 모르는 무식한놈들'이라고 했을 겁니다.
아무튼 그 때 누군가가 "스냅사진" 한 장 찍어 두었더라면 사진전회에서 大賞을 받아
놓은 밥상일 텐데 말입니다.
199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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