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9월 13일, 제 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될 당시만 해도 영화계의 많은 사람들은 과연 영화제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아시아권에서는 이미 동경국제영화제가 우리보다 먼저 출발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서울도 아닌 부산에서, 국제영화제 개최가 가능할 것인지 모두들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전 세계의 영화인들은 세계 10대 영화제에 부산국제영화제를 당연히 포함시키고 있다. 물론 영화제에 랭킹 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칸느나 베를린, 베니스 등 세계 3대 영화제 이외에 모스크바, 로카르노 등의 영화제와 거의 동등하게 부산국제영화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영화제 첫 해인 1996년, 파이오니어지에서는 [이 영화제는 한국 영화 그리고 세계 영화에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정확하게 실현됐다. 1998년 3회 영화제부터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에서는 [아시아의 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1999년 버라이어티지는 [만일 지난 주 당신이 아시아 지역으로 건 전화에 아무 응답이 없었다면, 그건 아시아의 거물들 대부분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위트 있게 부산국제영화제의 달라진 위상을 표현했다. 그때부터 일본의 니카타 신문도 [급격한 변모와 그 열기, 일본을 위협하는 존재로,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힘]이라고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관객들로 붐비며 해외 감독들이 가장 오고 싶어 하는 영화제](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2000), [도시 전체가 흥분과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BBC 뉴스, 2001), [올해 가장 중요한 하나의 사건이 언제였냐고 한다면, 부산국제영화제가 될 것이다](비지니스 타임즈, 2002),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 내에서 중요한 문화적 영향력뿐만 아니라 경제적 중요성도 지니고 있다](저펜 타임즈, 2003), [그 열기에 놀라 압도되었다. 그리고 부러워지기 시작했다](서일본신문, 2003) 해외 언론의 이 같은 평가는 한결같이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놀라움에서 시작되어 부러움으로 끝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적 개최는 한국 영화 전반에 활력을 불어 넣었고, 한국 영화가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데 중요한 길을 열어 주었으며, 영화제작자와 감독, 평론가, 관객 등이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10회를 맞이하게 된다. 지난 2월말 부산국제영화제 총회가 개최되었고 10주년 행사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발표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 그 어느 때보다도 성대하게 치러질 계획이다. 그렇다면 부산국제영화제는 어떻게 출발하게 되었을까?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영화평론가 이용관 김지석(당시 경성대 영화과 교수)씨 등이 중심이 되어, 칸느나 베니스처럼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에서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를 만들어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1995년 무렵부터 국제영화제 개최를 부산 시에 건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황당한 이야기로 듣던 부산 시에서도 그들의 열기에 감복하고 청사진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김지석씨 등은 문화부 차관을 거쳐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역임했던 김동호씨를 찾아가 위원장으로 영입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부의 따가운 시선이었다. 우선 영화계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를 개최한다는 소식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해외 게스트를 초청하는 것도 어려웠고, 작품을 받기는 더욱 어려웠다. 부산이라는 도시가 한국의 어디에 있는지 설명부터 해야 했고, 영화제의 성격이나 방향 등에 대해 수없이 반복해서 이해를 시켜야만 했다. 그렇게 힘들게 치러진 제 1회 부산국제영화제에는 모두 27개국 170편의 작품이 초청되었다. 지난 제 9회 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 61개국 243편이니까 외형적으로도 지난 10년의 변화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를 성공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 관객이다. 제 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한 관객은 18만 4천여명. 이 숫자는 조금씩 변화는 있지만 지금까지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1회 영화제가 시작되자 부산 남포동 영화의 거리에는 주최 측이나 해외 게스트들의 입을 다물게 할 만큼 어마어마한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영화의 거리에 서 있으면 걷지 않아도 저절로 움직일 정도로 수많은 관객들이 전국 각지에서 빼곡하게 몰려들었다.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딪친 어깨에서 어깨로 전해져갔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밤새도록 영화에 대한 토론이 영화인들과 관객들 사이에서 이어졌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단기간에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요인은, 관객의 자발적 참여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객의 욕망을 누구보다 빠르게 예감하고 영화제 개최를 강력하게 추진하며 영화제 산파역을 담당했던 김지석씨 등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한 해외 게스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혹은 다른 해외 영화제에서 만난 세계의 영화인들에게 부산의 이 놀라운 영화 열기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2회, 3회가 거듭되자 영화제 사무국에서는 더 이상 해외 작품들을 초청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되었다. 이제 누구나 부산국제영화제를 알고 있었다. 오히려 참가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정중하게 거절해야 하는 형편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해외 영화인들이 자비를 들여 비행기표를 끊고 호텔을 예약하면서 부산에 오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산파역을 담당했고 현재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 프로그래머로 있는 김지석씨는 누구보다도 부산국제영화제의 핵심 인물이다. 김동호 집행위원장, 이용관 부집행위원장과 전양준 월드시네마 프로그래머, 김지석 아시아 영화 프로그래머, 허문영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홍효숙 와이드앵글 프로그래머, 체제로 되어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에서 유이랗게 부산에 거주하며 영화제 사무국에 상주하고 있는 사람이 김지석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체성을, 아시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확립시킨 사람이다.
-국제영화제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관객들에게 평소 접하기 힘든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해야 한다.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주류 메인 영화이외에는 대중들과 접하거나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는데, 영화제는 그런 기회를 제공한다.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는 역할도 중요하다. PPP 운영 목적이, 완성된 영화를 대중들에게 소개하고 그것이 팔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 재능 있는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문화적 차원에서의 역할과 산업적 차원에서의 역할을 다 같이 해야 한다. 일정한 규모 이상의 영화제는 그런 산업적 규모를 갖춰가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초창기에는 검열 문제 때문에 말썽이 나기도 했다.
그때는 배급사가 알아서 문제 장면을 자체 삭제했었다. 그 뒤로 그런 문제는 없었다. 지금까지 제한 상영을 두 번 했는데(신상옥 감독의 [탈출기],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초창기에는 그런 문제가 심각했다.
-매년 수백벌의 프린트가 전 세계에서 오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길 것 같다.
프린트 문제는 매년 발생한다. 뱅쿠버가 우리 보다 일주일 앞서 시작한다. 아시아 영화에 정통하고 우리와도 친분이 두터운 토니 레인즈가 프로그래머여서 항상 협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 뉴욕 영화제가 작년부터 10월초로 옮겨왔다. 도쿄 영화제는 부산영화제가 끝나고 1주일 뒤에 시작한다. 이렇게 영화제들이 겹치기 때문에 원할하게 프린트를 가져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10년을 정리한다면?
영화제 문화가 전무했던 상황에서 새로운 문화를 일궈냈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선에서 한국 영화의 세계화에 기여를 했고 PPP를 통해 아시아 영화산업 발전에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생기기 전에는 해외영화제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어떻게 세일즈 해야 하는지 몰랐었다. 그러나 부산에 오는 해외 영화인들과 잦은 접촉이 생기면서 그런 노하우를 축적한 것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사업적으로, 지역적으로도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또 부산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높여주고, 부산 시민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자긍심과 문화적 긍지를 높여준 측면이 있다. 단순한 축제를 넘어서서 지역 내 새로운 산업을 일궈내고 그 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모티프를 제공했다.
-10주년 기념사업은 어떤 것들이 계획되고 있는가?
10주년 기념책자를 발간하고 기념 사진전 및 영상물을 제작할 예정이다. 또 시대의 흐름에 맞게 영화제 제자나 로고, 심볼 마크 등의 이미지 통합작업도 시행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10월 6일 개막식을 치룬 다음 날, 10월 7일 영화제의 숙원이었던 부산 영상센터의 기공식이 있다는 것이다. 해운대 센텀시티 내의 9500평 부지에 영상센터가 만들어지면 영화제 전용관을 갖게 된다. 현재 남포등 지역의 극장과 해운대의 극장으로 이원화 되어 운영되면서 관객들이 양쪽을 오고가는 불편이 모두 해소된다. 460억원 예산으로 건립되는 영상센터는 전 세계 어느 영화제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환경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영상센터의 실내는 3천평 정도이고 나머지 넓은 공간에서 다양한 영화적 체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싶다.
-현재 영상센터의 설계는 완성되었는가?
설계지침서는 완성되었다. 국내외 건축가 10명에게 지명 공모전을 실시해서 6월말이면 당선작이 발표될 것이다. 영상센터는 2008년 완성되며 13회 영화제부터는 영상센터 내의 영화제 전용관에서 개최된다.
-그 외의 10주년 행사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만희 감독 회고전과 함께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국제 학술대회가 개최된다. 또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아시아 영화산업의 성장에 대한 학술대회도 개최될 예정이다. 지난 해 후 샤오시엔과 테오 앙겔로폴리스의 마스터 클래스 반응이 너무 좋아서 올해는 2명 이상의 특별 마스터 클래스를 실시할 예정이다. 한국어로만 통역되었던 지난해와 달리 한국어와 영어로 진행된다. 또 영화제에 참가하는 외국인 일반 관객들이 증가하고 있어서 티켓 예매 등 외국인 서비스를 강화하려고 한다. 그리고 해운대의 실내 공간에 관객들만을 위한 페스티벌 카페가 운영된다. 영화제 티켓을 가지고 오면 저렴한 가격으로 술과 음료를 제공하고 영화인들과 대화가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김동호 위원장님과 프로그래머가 동력이다. 약간의 미묘한 차이는 있다. 나는 부산에 거주하기 때문에 시 당국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1997년말부터 부산국제영화제의 발전을 위한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부산시 공무원과 부산발전연구소, 그리고 김지석이 참가하는 이 모임에서, 어떻게 영화제가 성공할 수 있는지 스터디를 했다. 아젠다는 내가 만들었다. 1998년 당시 안상영 시장이 취임 직후 칠레 등 자매결연도시 순방을 했는데 이용관부위원장이 같이 갔다가 L.A에 있는 필름 커미션 기구를 보고 돌아와서 만든 게 부산영상위원회다. 박광수 감독이 위원장을 맡아 부산 영화산업과 관련된 구체적인 것은 영상위원회에서 계획, 집행하고 있다.
-그동안 부산국제영화제가 성장한 만큼 함께 성장한 감독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지아장커 감독을 들 수 있다. 그 외에 홍콩의 프르투 첸, 싱가포르의 로이스톤 탄, 태국의 논지 니미부트르와 펜엑 라타나루엥 감독은 데뷔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왔다. 또 이란의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서클] 프로젝트가 PPP(부산 프로모션 플랜)에서 처음 알려진 뒤 베니스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뉴커런츠가 배출한 감독들도 화려하다. 역대 뉴커런츠상을 수상한 감독들의 가장 최신작을 모아 상영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쪽에 좋은 감독들이 있다. 악탄 압티칼리코프(키르키즈스탄), 잠세드 우스마노프(타지키스탄) 감독은 주목할만한 감독들이다. 최근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바흐만 고바디(이란), 위싯 사사나투엥(방콕)을 들 수 있다.
-왜 필름 마켓을 만들지 않는가?
마켓이라는 용어는 영원히 쓰지 않을 생각이다. 홍콩이나 동경, 방콕영화제 등이 부산영화제에 밀려서 자꾸 마켓을 만들고 있는데, 마켓은 잘못 만들면 실패한다. 동경영화제에서 마켓을 만들었다가 크게 실패했다. 부산영화제는 현재 마켓은 없지만 그 기능은 하고 있다. 2008년쯤에는 마켓 기능을 공식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난 10년 동안 언제가 가장 힘들었는가?
물론 1회 때가 가장 힘들었다. 그리고 IMF 당시 부산국제영화제도 초긴축 예산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예산에서 3억원을 줄였는데도 5억원 정도 적자가 났다. 관객이 감소한 것은 아닌데 스폰서가 줄어들고, 기타 경비는 올라가고, 이중고를 겪으며 심각한 위기를 맞았었다.
-부천의 경우에서 보듯이 지자체와 보조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영화제가 파행적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지 않은가?
우리는 사공이 많이 없어서 배가 산으로 갈 걱정은 별로 없다. 부산의 경우, 영상위원회가 큰 흐름을 잡고 시행을 해나가고 있다. 오히려 역으로 부산독립영화협회나 영화평론가협회나 대학 등이 좀 더 우리를 도와주어야 하는 입장에 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영화를 봐야 하지 않는가?
단편을 포함해서 1년에 800편정도 본다. 그리고 1년의 1/4은 해외 영화제에 참가하거나 내가 맡고 있는 아시아 각국을 방문하여 영화정보를 수집하고 좋은 영화들을 초청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제를 맡고난 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대학교수를 그만 두었다. 지금 내 직업은 영화제 프로그래머다. 3회 영화제 세미나를 했을 때 유지나 교수가 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겸직해서 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질문했다. 나는 그 다음 해 대학 교수를 사임하고 영화제에 전념하고 있다. 사실 모든 직책이 다 그럴 필요는 없지만 프로그래머나 팀장은 전념해야 한다. 그리고 집행위원장은 외교력이 필요한 자리다. 행정관료 출신으로 관료 사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동호 위원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큰 마찰 없이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그 행사가 잘될 때다. 관료들은 행사가 잘 치러지면 그들이 없어도 잘될 거라는 환상을 갖는다. 부천의 경우가 그렇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장기 비전은 어떤 것이 있는가?
지금 여러 아시아 국가들이, 필름 아카이브 개념이 없어서 소중한 영화가 사라지고 있는데, 그 자료들을 수집 보존하고 싶다. 아시안 필름 아카이브를 만들 부지는 있다. 부산 시에서는 이해를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이미 97년도에 세운 장기 플랜 로드맵에 들어 있다. 로드맵을 따라 주는 시가 고맙다. 김동호 위원장에게도 그것까지는 만들고 은퇴하셔야 한다고 말한다. 또 영화제 인프라를 구축하고 내실을 기하는 쪽으로 포인트를 맞춰나가고 있다. 베를린은 55년, 칸느는 58년, 베니스는 61년이 된다. 이제 10년 된 영화제가 뭐 대단하겠는가. 그런 거보다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면서 내실을 다지는 게 더 중요하다. 지금까지 해 온 일을 조금씩 확장해 갈 것이다. PPP도 매년 조금씩 키워나간다. 갑자기 몸집을 키우면 부작용이 일어난다. 방콕영화제가 그렇다. 갑자기 규모를 키워서 혼란이 생긴다. 스텝들의 전문성이 떨어지니까 과부하가 걸린다.
-현 단계에서 더 도약할 수 있는 로드맵도 존재하는가?
영화제의 정체성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다. 내실을 기하고 내부 인프라를 다지는 쪽으로 도약해야 될 것이다. 영화제의 성격이나 방향은 이미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대신 운영상의 미숙함이라든가, 인프라가 부족해서 생겨나는 불편함 등을 점진적으로 개선시켜 나가야 한다. 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이나 영화계 인사들에게 안락한 환경을 제공하고 영화문화나 영화산업에 있어서 어떤 기능을 할 것인지 장기플랜이 나와야 된다. 궁극적인 목표는 부산이 아시아 영화문화와 산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부산시나 정부에 끊임없이 제안을 하고 부사영화제의 역할 확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해나가려고 한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부산 이전은 그런 차원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인가?
영진위의 부산 이전 이야기는, 정부나 부산시 차원에서 할 일이다. 우리가 먼저 꺼낼 말은 아니다.
-영화제에서 상영된 좋은 작품들이 일반 보급망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공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서 작년부터 시작한 게 CJ 컬렉션이다. 부산영화제가 추천한 작품들 중에서 CJ엔터테인먼트가 판권 구입한 5편은 올해 안에 CGV를 통해 공개될 것이다. KBS에서는 주기적으로 아시아 영화를 방송할 계획을 갖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아시아 영화의 중심으로서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룩한 성과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영화제 문화가 전무한 상황에서 부산국제영화제를 처음 기획한 산파역 중 한 사람이다. 현재도 영화제 집행위 내부에서 유일하게 부산에 거주하면서, 부산 시 당국과 긴밀한 협조아래 영화제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다양한 계획을 수립, 집행해나가고 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우면서도 강력한 추진력을 갖춘 그의 모든 촉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발전 방향에 집중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