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병원 흉부외과 宋明根(송명근·56) 교수는 3층 수술실 5, 6, 7호실을 오가며 세 명의 환자를 순차적으로 수술할 예정이다. 마지막 수술은 밤 10시쯤 끝난다.
흉부외과 전공의들이 가슴뼈를 절개해 모세혈관 지혈을 마무리하면, 그 순간 宋교수가 들어가서 심장판막 수술을 하고, 전공의들이 가슴뼈를 붙이고 봉합한다.
5호실 수술방에 누워 있는 朴모(63·남)씨는 심장판막이 고장난 환자다. 宋교수가 개발한 심장판막 장비를 판막에 끼우는 수술을 받는다. 멸균포에 싸여 수술대에 오른 환자는 가슴 부분만 네모 형태로 노출돼 있다. 수술실은 22℃로 약간 서늘했고, 온통 녹색이었다.
천장의 멸균공기 공급장치 작동음이 간혹 들렸고, 환자의 상태를 나타내는 모니터가 『삐~삐~』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그래프를 그리고 있었다. 커다란 카트 위에는 수술도구들이 가득했다.
나는 가운을 입고 수술을 지켜보았다.
5호실 환자의 수술은 마무리돼 가고 있었다. 흉부외과 지현근(44) 교수, 전공의 1명, 간호사 2명 등 5명이 수술대에 마주 서서 환자의 심장을 봉합하고 있었다. 宋교수는 가슴 봉합을 의료진에게 맡기고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다음 수술환자가 있는 6호실로 서둘러 건너갔다.
宋明根 교수는 6호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의 도움으로 멸균복과 수술용 장갑을 새로 착용했다. 심장판막 성형술을 받으려는 환자 金모(56·여)씨의 흉곽을 김준석(40) 교수가 절개해 수술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준비됐지?』
宋교수의 말과 함께 심장판막 수술이 시작됐다. 김준석 교수와 전공의, 마취담당 교수, 심폐기사, 간호사 등 6명의 의료진이 宋교수의 손끝에 시선을 모았다.
宋교수는 혈액공급이 중단된 심장을 메스로 단숨에 잘랐다. 심장수술 중에는 심장의 기능이 멈춘다. 체외순환펌프를 통해 혈액을 온몸에 공급한다. 宋교수는 핀셋과 메스로 절개된 심장을 가리키며 이상부위와 수술방법을 간결하게 설명했다.
수술에 참여하고 있는 간호사의 설명이다.
『환자는 대동맥이 확장돼 내부에서 혈액의 역류를 방지하는 판막이 非정상적인 방법으로 변형돼 교정수술을 받고 있습니다. 고가의 인공판막 수술을 받는 대신, 宋교수님이 개발한 심장판막 장비로 수술을 받으면, 환자가 자신의 판막을 성형해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거의 없습니다』
『시간 충분해! 똑바로 해!』
심각한 표정으로 심장수술 환자의 상태를 듣고 있는 송명근 교수. |
수술에 필요한 기구가 즉각 손에 쥐어지지 않으면 『이 방에는 할머니들만 있나?』하고 간호사들을 나무랐다. 宋교수의 목소리가 간간이 높아졌다.
『서둘지 마!』, 『천천히, 침착하게!』, 『시간 충분해! 똑바로 해!』
판막성형이 끝나고, 고정링 삽입이 시작되자 긴장감이 감돌았다. 10분 후 외부링까지 고정을 끝내고 절개했던 대동맥을 다시 봉합했다. 손은 여전히 분주했지만 宋교수는 『앞서 수술한 5호실 환자의 마무리 진행상황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심장 수술이 마무리되고 체외순환펌프에서 심장으로 혈액을 공급하자, 환자 金모씨의 심장이 「툭툭」 뛰며 피를 온몸으로 힘차게 짜냈다. 피로 뒤엉긴 심장이 뛰는 모습에서 생명의 신비감이 느껴졌다. 의료진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심장에서 출혈부위를 찾아 지혈하고 완벽한 마무리를 했다.
宋교수가 허리를 펴고 뒤로 물러섰다. 심장수술이 끝난 것이다.
오후 7시쯤, 宋교수는 5호실로 건너가 수술의 최종 마무리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宋교수는 『환자는 앞으로 숨차지 않을 것』이라면서 『30분 뒤 7호실에서 세 번째 수술이 진행된다』고 했다.
『앞으로 10년간 토요일 못 쉴 것 같다』
宋明根 교수는 1997년 벤처사업에 나서 기존 제품의 절반 가격밖에 안 되는 심장판막 장비를 개발했다.
全세계에 특허를 받았다. 벤처사업 성공으로 宋교수의 재산은 2007년 말 현재 200억원을 넘어섰다. 현재 세계 심장판막 시장 규모는 1조5000억원 규모다. 宋교수가 개발한 심장판막 장비는 앞으로 5년 안에 세계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할 전망이라고 한다. 그의 재산이 앞으로 수천억원대까지 불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宋교수 부부는 2002년 「죽은 뒤 全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유언장을 쓰고 변호사 공증을 마쳤다. 다행히 자녀들(1남1녀)이 宋교수의 뜻을 따라 주었다고 한다.
宋교수는 한사코 『기부와 관련된 얘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졌고, 그 이야기를 또 하면 자랑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2월2일 토요일 오후, 宋明根 교수를 건국대병원에서 다시 만났다. 宋교수의 방은 건국대병원장실 바로 옆에 있었다. 보랏빛 티셔츠 차림의 宋교수는 『새벽 3시30분에 시작한 응급환자 수술이 오후 1시에 끝났다』고 했다.
『심장이 심근경색으로 파열된 환자였어요. 병원에 왔을 때 거의 「DOA(도착시 이미 사망) 상태였어요. 심장 마사지를 해서 살린 다음 수술대에 올렸어요. 이런 응급수술이 한 달에 열다섯 건 정도 됩니다』
宋교수 책상 위에는 스티커가 수북이 쌓여 있다. 응급 심장병 환자를 위해 365일 가동되는 핫라인(010-7448-3030) 스티커였다.
『전담 간호사나 레지던트가 24시간 전화를 받아 즉시 제게 알려 줍니다. 앞으로 토요일 수술을 정례화할 겁니다. 제가 자리를 뜨면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환자들이 있으니까 앞으로 정년퇴임 전까지 10년간 토요일을 반납해야 할 것 같습니다』
宋교수는 『토요 휴무일이라 비서가 출근하지 않았다』면서 캔커피와 오렌지 주스를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챙겨 내놓았다. 그의 명함에는 「송명근 심혈관외과클리닉」이란 직함이 적혀 있었다.
『예전에는 병원이 의사를 고용해 좌지우지했습니다. 이젠 의사가 병원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우를 요구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클리닉에 생존인물의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후배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될 겁니다』
宋明根 교수는 지난해 10월1일 서울아산병원에서 건국대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심폐기사·간호사 등 그와 호흡을 함께한 팀원들이 그를 따랐다.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그의 영입을 위해 金敬姬(김경희) 건국大 이사장과 吳明(오명) 총장이 직접 나섰다고 한다. 부천세종병원을 2년 만에 심장분야 최고에 올려놓았고, 서울아산병원을 5년만에 최고에 올려놓은 그가 건국대병원에서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한 셈이다.
宋교수는 『다른 병원에서 꺼리거나 수술에 실패한 환자들을 우선대상으로 하고 있어 3차 병원을 넘어 4, 5차 병원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며 『우수한 인적자원, 첨단장비, 그리고 투자라는 삼박자가 갖춰져 있으므로 3년 내 한국 최고의 심장센터, 10년 내 심장수술 3000건을 넘어서는 세계 3大 명문센터로 만들 자신이 있다』고 했다.
「족보」를 멀리한 의대생
고교시절 경복궁에서. 왼쪽이 송명근 교수. |
부친은 宋明根군에게 『성현들이 내세운 학설이 틀릴 수 있고, 그것을 교정하는 게 후학들의 몫이다』라고 가르쳤다.
서울의대에 진학한 그는 우직하게 공부했다.
『기본서적을 다 읽고 시험을 치르면 성적이 형편없었어요. 동료들에게 공부방법을 물었더니 시험에 났던 것을 모아 둔 「족보」가 있다는 거예요.
「의학을 공부한다는 의대생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고 시험에 났던 문제를 달달 외워서 어떻게 환자를 볼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성적이 안 나오더라도 미련하게 전과목 책을 다 읽고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공부한 게 도움이 됐습니까.
『의대를 졸업하고 나니까 내 세상인 것 같았어요. 사물을 보는 확고한 시각이 생겼습니다. 족보를 보고 공부한 뒤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는데, 책을 읽고 탄탄하게 생각하고 정리한 것은 내 것이 되니까요』
宋교수가 공개한 서울大 의대 본과 1학년 때의 일이다. 생화학을 강의하는 김승헌 교수가 新陳代謝(신진대사) 과정을 그려 오라는 과제를 내주었다고 한다.
『교과서에 대사과정 그림이 있어서 베껴 가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사과정을 관심 있게 보았어요. 탄수화물 대사가 대사의 중심이고, 단백질이 탄수화물로 변했다가 지방으로 변하는 사이클이 보이는 거예요. 사이클을 세 개로 大別(대별)해서 분자식도 안 쓰고 볼펜으로 끄적여서 제출했지요. 다른 학생들은 컬러펜에 스티커까지 붙여서 요란하게 제출하더군요. 저는 풀이 죽어 점수가 안 나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강의시간에 김승헌 교수가 『이거 누가 낸 거야』라며 宋明根군이 낸 과제물을 흔들었다. 야단맞을 각오로 숨을 죽이던 그에게 이런 말이 들려왔다.
『나는 서울大 의과대학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대사과정을 본과 1학년생이 분석해서 그려 온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턴 때 B형간염에 걸려
본과 4학년 때의 일이다. 외부 논문을 연구해 의대교수들 앞에서 내용을 요약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외국의 유명한 교수 논문인데 엉터리였어요. 5분 동안 요약발표하고 나머지 5분 동안 비판했습니다. 「첫째는 통계처리의 방법이 틀렸고, 둘째는 질환을 컨트롤하는 약이 틀렸고, 셋째는 약의 메커니즘을 잘못 해석했다」고 했어요. 「결론적으로 이 논문은 엉터리고 함부로 인용하면 안 될 것 같다」고 했어요.
발표가 끝나자 金鍾煥(김종환) 교수가 「야, 이놈아, 배우는 놈이 외국 유수의 교수 논문을 비판하다니 버르장 머리가 없다」고 하셔요. 선생님께 「제가 사람을 비판한 게 아니고 논문을 비판한 겁니다. 大家(대가)도 잘못된 것을 만들 수 있는데 무조건 저를 나쁜 놈이라고 하시면 당황스럽습니다」라고 했지요』
宋明根군은 다른 논문을 끌어대 가며 논문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준비를 철저히 했고, 막힘 없이 말을 하니까 李寧均 교수님이 김승헌 교수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세요. 「나는 서울大 의과대학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라고요』
宋明根은 인턴기간 중 조직적합성 검사를 하다 B형간염에 걸려 두 달간 고생했고, 尿崩症(요붕증: 목이 말라 다량의 수분을 요구하는 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인턴봉급을 털어 명동 수입약품상을 헤맸다.
宋明根을 눈여겨본 李寧均 교수가 그에게 흉부외과를 권했다.
레지던트 시절, 심장수술
1988년「스승의 날」은사 이영균 선생과 함께. |
『레지던트 3년차일 때입니다. 李寧均 선생님이 저희들 취직 걱정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수술경험을 쌓도록 기회를 달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대뜸 「레지던트가 심장수술을 하는 경우는 전 세계에 없어」 하셨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다음날 李선생님이 자신의 환자 수술을 제게 맡기셨습니다』
―당시 수술 기억이 나십니까.
『처음이라 「심실 중격 결손증」 증상이 있는 비교적 쉬운 환자를 주셨어요. 李교수님은 조수 자리에서 지켜보셨지요』
한번은 대동맥 파열 환자를 수술하던 李교수가 『영안실로 보내라』며 수술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나가신 후 제가 계속 수술을 했습니다. 환자를 깨끗하게 처리해서 중환자실로 내려보냈습니다. 얼마 후 李교수님께 「선생님 나가신 다음에 출혈을 막고 인조혈관을 사용해 수술했고, 지금 중환자실에서 회복 중입니다. 환자 가족들이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깜짝 놀라셔요』
―李교수가 화를 내지는 않았습니까.
『아니오. 아침에 환자를 확인해 보시고 뿌듯해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그 후 두 번 더 있었어요』
―宋교수를 굉장히 신뢰했겠습니다.
『치료에 대해 자신 있게 잘잘못을 보고하니까, 선생님께서 저를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인정하셨죠』
1970년대 후반, 흉부외과의 심장판막 수술 성공률은 반반이었다. 입원하러 들어온 환자들이 앞서 수술한 환자의 사망소식을 듣고 퇴원하는 일이 속출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 경제여건으로 심장수술은 사치였어요. 1976년 국민소득이 1000달러가 안 됐고, 심장수술하는 데 2만 달러가 들어가니… 수술 기자재가 부족했고요. 미국에서 원조받은 장비를 사용했습니다. 심장수술 성공 가능성이 낮으니 누가 수술을 하려고 하겠어요』
서울대병원 흉부외과장인 李寧均 교수는 무료수술을 펼쳤다고 한다. 환자에게 나오는 「급식」이 꽁보리밥에 김치뿐이라 환자들의 회복이 늦었다. 심장수술의 개척자였던 李교수는 박봉을 털어 삶은 달걀을 환자들에게 먹였다.
『이놈아! 환자를 똑바로 봐야지』
국군서울지구 병원 군의관시절인 1981년, 권총사격을 하는 송명근 대위. |
『그럴수록 도전정신이 생겼어요. 결혼 직전인 레지던트 2년차 때 한 번 도망을 간 적이 있어요. 새벽 5시부터 저녁 때까지 李寧均 선생님 수술에 붙어 있었어요. 저는 세 끼를 굶고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환자를 꿰매고 있는데 오후 6시 무렵 외출했던 李寧均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야, 이놈아! 환자를 똑똑히 봐야지. 염증 환자에게 항생제 투입을 안 하면 어떡하냐」고 호통을 치세요. 간호사와 인턴에게 주사 지시를 했는데 인턴이 깜빡 했던 거지요』
노발대발 야단치는 李교수에게 섭섭한 감정이 들었던 宋明根은 4년차 레지던트 치프에게 『배우는 게 없고 날샜다』고 통보하고 무작정 부산 해운대로 내려갔다.
사흘 뒤 서울대병원으로 돌아가 짐을 싸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李교수였다. 李교수는 『金아무개 환자 소변 나오는 게 부족한데 가서 알아 봐!』라고 지시했다. 宋明根이 『소변 잘 나오고 있습니다』 하자, 李교수는 『朴아무개 환자를 가서 봐』라며 전화를 딱 끊었다.
『「너 왜 도망 갔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일 수술하는 거, 준비 철저히 해」라면서 또 전화를 딱 끊으세요. 그날밤 고민을 했죠. 「선생님이 문제 삼지 않고 양보하시는데, 과연 나는 잘한 것일까. 사소한 것이라도 한 번 더 확인하는 의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뉘우치고 다음날 수술준비를 했습니다. 옆에서 李寧均 선생님이 「씨익」 웃으세요』
1979년 레지던트 4년차가 되자 李교수는 宋明根에게 흉부외과의 한 해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宋明根은 『10kg 이하 아이들의 심장수술 성공률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전에 10kg 미만 아이들을 한 명도 못 살렸어요. 제가 「프로토콜」을 짜서 수술하기로 했습니다. 신생아들은 링거가 조금씩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손으로 링거 양을 조절해서 수술했습니다』
1979년 10월, 5개월 반 된 5kg 신생아를 수술하는 데 성공했다. 宋明根의 4년차 「레지던트 치프」가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미국으로
1950년대, 1960년대에는 서울大 의대 졸업생의 90%가 미국에 갔다고 한다. 미국의 병원들은 한국 의사들이 몰려와 포화상태가 되자 ECFMG(수련의 자격시험)를 폐지하고 VQE(비자자격시험)를 만들었다.
『VQE 1회 시험에 한국의사 500명이 응시해 2명만 합격했어요.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때 한국 의사들이 미국에 의사로 가는 것은 끝났다고 자포자기했어요』
1981년 군의관으로 입대한 宋明根 대위는 국군서울지구병원 흉부외과에 배속됐다. 그는 병원에서 환자를 보는 틈틈이 VQE 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1983년 10월 미국에 가서 시험을 치렀고, 합격했다.
宋明根은 1984년 초 미국의 10大 병원에 편지를 썼다. VQE에 패스한 사람이 全세계적으로 드물었기 때문에 선택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스탠포드大 부속병원, 메이요클리닉, 미네소타大 부속병원 등 10大 심장센터에 원서를 냈는데 아홉 군데에서 「바로 오라」는 답장이 왔어요』
―오리건大를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오리건大에는 인조판막의 창시자인 「앨버트 스타」가 있었습니다. 앨버트 스타가 한국전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특별히 좋은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게다가 누이가 오리건州 유진에 살고 있었어요』
宋明根은 1984년 7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제가 그 병원에서 영어를 제일 못 하는 사람이었어요. 심장외과에 동양인이라고는 어렸을 때 이민 온 인도 의사 한 명이었습니다.
2~3일 내 수술할 환자가 12명이나 대기하고 있는데 원무과에서는 「미국 의사면허증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미국 의사시험 우여곡절 끝에 통과
미국 오리건大 부속병원 도서관에서. |
『전공 부분 다섯 개 중 네 개를 틀렸어요.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죠.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시험관으로 나선 미국 의사들이 「실력은 완비되어 있는데 영어가 문제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할 필요가 있는가」라면서 수근거려요. 제가 틀린 답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하라」면서 힌트를 줘요. 시험관이 「간신히 통과했으니 더욱 열심히 하라」면서 악수를 건넸어요. 그렇게 미국 의사면허증을 받았습니다』
宋교수는 병원 근무 첫날부터 당직을 했다. 일과가 오후 9시에 끝났고, 다음날 수술할 환자 12명을 인터뷰해야 했다.
『70代 환자가 저를 보자마자 「다른 의사를 데려오라」고 해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어요. 도대체 내가 뭘하고 있는 것인가. 이 노인은 장 클로드氏로 한국전 참전용사였습니다. 아들뻘 되는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게 불쌍했는지 노인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전쟁터에서 꿩 잡은 이야기를 40여 분간 들려 주더니 내가 환자 인터뷰하는 데 동행해서 통역을 맡아 주었어요. 밤 12시가 넘어서야 인터뷰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과 미국의 흉부외과 의술 수준 차이는 어느 정도였나요.
『완전히 극과 극이지요. 첫날 수술은 판막수술이라 그런대로 잘했습니다. 둘째날 제임스 우드 교수의 관상동맥 수술에서는 헤맸습니다. 제임스 우드 교수가 「정맥을 떼어 내라」고 하는데 내가 벌벌 떨고 있으니까 「뭐 이런 사람을 뽑았나」 해요』
다행히 오리건大 부속병원 도서관에는 심장수술 全과정이 녹화된 비디오가 있었다.
『제가 혈관 떼어내는 것에 한 번 실패한 이후 미국 의사들은 두 번 다시 시키질 않았어요. 간호사에게 그 일을 시키고 제게는 실이나 당기고 있으라고 해요. 간호사의 조수로 전락한 거지요.
수술이나 당직을 마치면 비디오를 보아 가면서 수술 요령을 터득했어요. 당시 미국에서는 관상동맥 수술이 70%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관상동맥 질환은 서구식 음식과 스트레스로 생기는 거예요』
소 심장 사서 수술 연습
병원에 들어간 지 보름 만에 宋교수는 2주치 급료 1200달러를 받았다. 한국의 대학병원 과장 월급이 한 달에 84만원이었던 시절에 월 2500달러는 고액임금이었다.
그는 슈퍼마켓에서 소 심장을 구입해심장수술을 연습했다.
수술 기회를 한 번도 잡지 못한 宋明根 교수는 1986년 1월 앨버트 스타 과장을 찾아가 따졌다.
『앨버트 스타가 「당신은 수술을 해본 적이 없지 않느냐」고 해요. 그래서 제가 「수술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럼 끝까지 수술을 하지 못하는 거냐」고 항의했습니다』
앨버트 스타는 교수들을 불러 宋明根에게 수술을 주라고 했다. 그는 『오늘 당장 수술시켜 보고 못 하면 그때 그만두게 하라』고 했다.
「타고난 외과의사」
판막기능 보조장치인「SS-Ring」을 이용한 동물실험을 하고 있는 송명근 교수. |
『아마드가 다른 교수 세 명과 함께 「大家가 있는데 지금까지 수술을 안 시켰다」면서 수술장으로 들어왔어요. 제게 엉성한 펠로를 붙여 주고, 수술장 밖에서 잘하는지 보자는 자세로 노려보고 있었지요』
―불안했겠습니다.
『초조하기 짝이 없지요. 제게 호의적인 마취과 선생을 방패막이 삼아 수술을 했습니다. 전날밤 소 심장 20여 개를 갖고 연습을 했어요. 아마드 교수 등의 눈에는 처음 수술해 보는 놈이 까부는 모양이었겠지만, 저는 심장 꿰매는 연습을 1000번도 더해 본 것이죠』
―수술은 잘 진행됐나요.
『수술이 시작되자 주위가 조용해졌어요. 내가 꿰매는 것을 보더니 전부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다른 교수들의 수술 시간보다 25%나 절감된 1시간20분 만에 일사천리로 퍼펙트하게 끝냈거든요. 이 얘기를 보고받은 앨버트 과장이 제게 「타고난 외과의사」라고 해요. 타고난 외과의사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전부 연습으로 이뤄진 거지요』
宋明根 교수는 이후 앨버트 스타의 수술에 전속의사처럼 따라 다녔다.
『내게 수술을 맡기고 자기는 커피를 마시고 돌아다녀요. 수술이 끝날 때쯤 들어와서 「이번에도 아주 좋다」라고 한마디해요. 「너는 세계적 명의가 될 것」이라고 격려해 주더군요. 처음엔 프라이드가 생겼는데 「神의 손」이란 소문이 퍼지자 온갖 복잡한 일이 몰렸어요』
―덕분에 흉부외과의 신기술을 빠르게 습득한 거군요.
『엄청난 심장 관련 신기술을 이때 다 배운 겁니다』
宋明根 교수는 귀국을 결심했다. 귀국 전 그는 2년 동안 모아둔 2만5000달러를 털어 3개월간 세계 10大 심장센터를 둘러봤다.
『집사람이 「한국에 가면 집 한 채 값인데 이것을 다 쓰면 어떡하냐」고 했어요. 저는 「이런 기회가 없는데 나중에 배우러 온다면 10만 달러를 들여도 모자란다」고 했지요. 세계 흉부외과 학회장을 맡고 있는 앨버트 스타의 소개로 영국과 미국의 10大 심장센터를 모두 둘러봤습니다』
그는 1986년 8월 귀국했다. 앨버트 스타 교수는 떠나는 그에게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어라」, 「일을 확대시켜라」, 「창의적이고 새로운 일을 창조하라」. 그러면 당신은 성공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의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부천세종병원을 택했다. 부천세종병원은 한양대병원장을 지낸 朴永寬(박영관)씨가 개원한 곳이다.
「스타의사」가 만든 세종병원의 성과
서울대병원이 한 해 500건의 심장수술을 하고 있을 때, 부천세종병원은 한 해 700건의 심장수술을 해냈다. 부천세종병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심장센터로 부상했고, 신기술을 배우러 오는 의사들로 넘쳐났다.
『부천세종병원의 성공소식이 전해지자 젊은 의사들이 해외 학회에 나가고 공부하는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흉부외과는 1980년대 후반까지도 미국에 비해 제일 낙후됐던 분야인데, 현재는 세계 최고 수준이 됐습니다. 세계학회에서 인정하고 있고, 일본에서 배우러 옵니다. 일본에 제자교수가 많습니다』
그는 1989년 3월 서울大 의대 선배인 故 李文鎬(이문호) 초대 서울중앙병원장과 閔丙哲(민병철) 서울중앙병원 외과과장의 권유로 아산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산병원은 관상동맥 수술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한 해에 관상동맥 수술이 100건을 넘기는 병원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 의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산병원은 1~2년 만에 200건을 훌쩍 넘겼고, 대동맥 수술에 이어 1992년 심장이식 수술을 시작했습니다』
부도난 의료기 개발 회사 인수
송명근 교수가 서울중앙병원 재직 시절인 1993년, 故 정주영 회장과 심장이식 수술 성공 축하파티를 하고 있다. |
宋明根 교수는 기존의 대동맥 판막 수술법에 불만이 많았다. 심장에서 대동맥으로 피가 뿜어져 나가는 길목인 대동맥 판막에 문제가 생기면 판막 전체를 인공판막으로 갈아끼우는 것이 정통 수술법이었다.
금속판막의 경우, 혈전(핏덩이)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평생 항응고제를 복용하고, 소·돼지 등 조직판막은 7~10년이 지나면 갈아끼워야 했다. 인공판막 비용만 400만~500만원이었다.
『미국에서 앨버트 스타 교수에게 아이디어를 냈고, 한국에 돌아와 부천세종병원에서 비밀리에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1988년 기초연구가 됐고, 1992년 「대동맥 판막 환자는 전부 고칠 수 있다」는 이론적 배경을 만들었습니다』
宋교수는 도살장에서 돼지 심장 5~10개를 사 와 자신이 개발한 판막기능 보조장치인 「SS-Ring」 수술법을 연습했다. 그동안 사용한 돼지 심장이 1000여 개라고 한다.
『잘 작용하지 않는 환자의 판막을 수선해 영구적으로 사용하는 판막성형술을 20여 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했고, 1997년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宋교수는 심장판막을 제조판매하는 「사이언시티」社를 설립했다. 한 세트 가격이 240만원 선으로 기존 인공판막 가격의 절반으로 낮췄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녹십자와 동아제약을 접촉했지만 부정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의 의료기기 회사인 「테르모」에서는 부사장이 찾아와서 기술을 팔라고 했습니다. 2002년 부도상태에 몰린 서울大 의대 후배의 회사 「사이언시티」에 공동 출자해 자본금 15억원으로 회사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의 제품은 미국·유럽·일본 등 전 세계에서 특허를 받았다.
『심장수술로 유명한 미국 뉴욕의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에서 「수술법을 전수해 달라」는 제의가 왔어요. 미국의 유명 의료기기 회사는 「경영권을 5000만달러(475억원)에 인수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고, 캐나다의 한 의료기기 회사는 우리 제품을 몰래 복사해서 팔다가 발각됐습니다』
판막성형술에 대한 한국 식약청의 최종 사용승인이 2006년 11월 나왔다. 미국과 유럽에서 사용승인이 나오는 대로 본격적으로 시장개척에 나설 계획이다.
―판막성형술의 시장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생산자 시장으로 보면 1조2000억원, 소비자 시장은 8조원이에요. 미국에서 「5000만 달러에 팔라」고 제의해 왔는데, 생각해 보세요. 연간매출이 1조원이고, 특허권이 20년인데 5000만 달러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에요. 미국 측에서는 「판막성형 시장의 65%를 차지하는 미국에서 시장을 선선히 내줄 줄 아느냐. 한국에서 만들면 들어오지 못한다」고 半협박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송명근 교수의 가족사진. 앞줄 오른쪽이 치과의사였던 선친 송영환 선생. |
『돈은 비료 같은 것』
―재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니까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미국 측에서 5000만 달러에 팔라는 제의를 받으니까 솔직히 겁이 났어요. 제 몫만 200억원이 넘는 것 아닙니까. 주식배당에 로열티까지 합하면 계산이 안 되더라고요(웃음). 돈에 대해 無방비 상태로 있다가는 자식을 망치고 나 자신이 망가지겠다고 생각했어요』
―기부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이 반대하지 않았나요.
『흔쾌하게 동의했어요. 집사람이 정은 많지만 자식문제에서는 저보다 더 냉정합니다. 돈이라는 게 비료 같아서 잘 쓰면 사회에 꽃이 피게 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썩고 냄새가 나는 거죠.
심장 수술은 생명이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돈이 있는 노인들의 경우 수술을 앞두고 자식들이 재산싸움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깜이 안 되는 자식을 위해 재산을 물려주려다 망신 당한 분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더욱 사회 환원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천문학적으로 커질 텐데, 돈이 어디에 쓰이기를 원하세요.
『심장병 연구와 소외된 노인들의 복지, 버려진 고아들을 위해 쓸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이런 내용으로 유언장 공증을 다시 받을 겁니다』
―자녀들에게는 「결혼비용을 포함해 3억원씩만 주겠다」고 하셨다면서요.
『자식은 물론 앞으로 맞을 사위나 며느리는 빈털터리 집에 들어온다고 보면 됩니다(웃음). 집까지 다 넘겼으니까요. 능력 있으면 적은 돈으로도 자수성가하게 돼 있고, 능력 없으면 소박하게 살면 됩니다. 하나님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은 행복의 크기를 주셨어요』
―자녀들을 모두 의사로 만든 건 교수님의 뜻입니까.
『전혀 제 뜻이 아닙니다. 딸 윤주(26·연세大 의대 세브란스병원 인턴)는 필력이 좋아 기자가 되기를 권했는데 본인이 의대에 진학했어요. 아들 준영(28·중앙大 의대 의학과 3년)이는 서강大 컴퓨터공학과에 다니다가 「아빠처럼 새로운 일에 뛰어들어 富를 창출하고 싶다」면서 의대시험을 다시 보았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늘의 뜻』
―지금까지 수술을 몇 건이나 하셨습니까.
『심장이식을 비롯해 판막수술, 대동맥 수술, 관상동맥 수술을 합쳐서 8000여 건을 했어요. 1년에 하루도 안 쉬고 400건씩만 해도 20년을 해야 하는 양입니다』
―주말에도 병원에 나오면 부인의 불만이 클 텐데.
『처음에는 불평했는데 지금은 즐거워해요. 제가 바지 하나 구두 하나 사본 적이 없어요. 집안 돌아가는 일은 퇴근해서 10분 정도 듣는 것에 그칩니다』
―월급이 얼마나 됩니까.
『이번에 옮기면서 처음 알았어요. 병원장 대우니까 건국대병원에서 가장 많은 축에 속하겠죠』
―가장 기억에 남는 수술은 어떤 겁니까.
1992년에 있었던 첫 심장이식 수술이라고 답할 것 같았는데 宋교수의 답변은 달랐다.
『수술마다 드라마거든요, 사람의 생명은 하늘의 뜻인 것 같아요. 경찰청 고위 간부를 지내신 한 분이 심장이식을 위해 전국의 뇌사자들을 몽땅 수배했어요. 한 달 동안 나오지 않아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돌아가신 지 이틀 만에 기증자가 나타났어요.
어떤 분은 119구급대원으로 봉사하다가 심장마비로 들어오셨는데 몇 시간 만에 기증자가 나타나서 새 생명을 얻었어요. 욕심부리지 말고 덕을 쌓고 사는 게 최선입니다. 촌각을 다투는 환자를 다루면서 하루하루 옷깃을 여미고 살고 있습니다』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새벽부터 오후까지 8시간 동안 응급환자 수술을 한 宋明根 교수의 눈꺼풀이 내려앉고 있었다. ●
사진 : 이태훈
첫댓글 송명근교수님을 자세히 알수있는2008년3월호
월간조선에심층취재한 송교수님의 기사입니다 2011.9월호 월간조선에 카바수술의 안전성에대한 독창적수술법인가?미완의위험한수술인가?의 심층취재 전문기사는 10월호가 발간되면 다시올리겠읍니다
송카사모와 송명근 교수님께 긍정적인 지지하는 기사게재에 기자와 편집장님께 감사 드리며...우리회원 2000여명, 유료기사 1000원씩이면 200여만원. 책으로 사면 2천여만원...10월호가 나오기 전에 게재를 참는 것은 월간조선에 대한 우리카페의 예우이며, 초상권과, 지적재산권의 범위 안에서 활동하고자 하는 우리회원들의 의지와 일치하는 방향이라 생각하며 적극 동의 합니다. 기사 게재 기다립니다.
우와 송명근 교수님은 일반인은 아니시군요, 누군가가 말했듯이 천년에 한번 나올까 하는 '명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잘읽어보았읍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잘읽었습니다.
송교수님께 수술 받은 40대 가장입니다. 새로운 삶을 준비하며 지금은 즐겁게 욕심부리지 않고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건강하세요. 송교수님
감사합니다. 송교수님은 심장에 관한 한 명의입니다. 저도 MBC-TV 성공시대에서 봤지요.
단숨에 읽어내려갔습니다!!
감동받았습니다~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다시 한번 송교수님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심장에서는 전세계적을 유명한 분과 같이 이시대를 산다는 것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