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3. 4. 30(주일) - 부활절 넷째 주일 - (2023년 18주)
제목; “삶을 통해 전해지는 부활 생명 복음”
성경; 행 9:36-43 (p.203) (시 23:1-3, 518<252>, 515<256>, 621)
<예배의 부름>(시 23:1-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과 희망의 계절 부활절(Easter) 넷째 주일을 맞이하며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강, 구원과 생명의 감격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또 ‘갈아엎는 달’ 4월을 보내고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면서, 나의 묵은 마음 밭을 갈아엎고 생명의 씨를 뿌리며, 가정 해체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주인 되는 가정을 이뤄가시길 축원합니다.
오늘이 4월 30일, 4월 마지막 날인데, 인류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오늘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 세계를 종말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독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자살한 날입니다.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56세의 일기로 자살했으며, 그가 자살하므로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립니다.
오늘은 히틀러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목사로서 히틀러 암살단에 가담했다가 히틀러가 자살하기 21일 전인 1945년 4월 9일 교수형을 당하므로, 끝내 2차 세계대전의 종언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님에 관한 말씀을 나누면서,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데 앞장서야 하는 목사로서 독일 고백교회를 이끌면서 히틀러 암살단에 가담한 본회퍼 목사에게 ‘당신은 왜 히틀러 암살단에 동참했는가?’하고 물었을 때 그는 디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목사로서의 나는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그 가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의 손에서 핸들을 빼앗아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표상이 된 본회퍼의 삶과 사상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 혹은 도전은 무엇일까요? 어떤 분이 세 가지 점이 중요하다고 요약했습니다.
첫째, 진실한 신앙인의 삶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의 제자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하나의 종교인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본회퍼의 신학은 복종의 신학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되심을 몸 전체로 고백하고 입증하는 신학이었다. 그의 생애 전체는 예수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삶이었으니, 그의 생애가 그의 신학의 가장 훌륭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본회퍼에게 있어서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믿음의 대상 정도가 아니라 사나 죽으나 들어야 할 생명의 말씀이요 온몸과 마음을 바쳐 따라가야 할 주님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그저 교회 출석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본회퍼가 보여주듯이 예수를 따르는 길은 단순한 종교인의 삶이 아니라 예수만 바라보며 살고, 예수 때문에 기꺼이 고난도 당하며, 오직 예수만이 절대적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불러 죽으라고 하신다”라고 말한다. 과연 오늘 우리는 예수의 제자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의 종교인으로 살고 있는가, 본회퍼의 도전은 너무나 엄중하고도 무겁다.
둘째 도전,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본회퍼는『옥중 서간』에서 놀라운 통찰력으로 시대의 변화를 읽는 가운데, “종교의 시대는 사라졌고 세계는 성년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특정한 종교적인 영역이 아니라 철저히 세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며 이런 제자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드렸듯이 이웃을 위한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히 이웃을 위한 존재(the being for others)이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교회 내부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교회 예산과 프로그램의 많은 부분들은 교회 내부만을 지향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있는 '세상'이 하나님의 땅이요 구체적인 선교와 봉사가 이루어지는 곳임을 망각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 본회퍼는 오늘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안에서의 삶이요 이웃을 위한 삶임을 온몸으로 힘 있게 일깨우고 있다.
세 번째 메시지,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다.
교수대를 향해 걸어가면서 그는 그의 동료 죄수이자 교인들에게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새로운 시작입니다”라는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그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님을 믿었다. 죽음 이후에도 그의 삶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심판과 보상이 있음을 믿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옥중에서도 목사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삶의 소망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돈과 명예, 사람들의 인정 같은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배금주의(拜金主義)가 정점에 달하여 돈이 신의 자리를 차지한 이 시대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사는 삶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계속 말씀드리지만, 예수님 부활은 부활절 하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삶을 지배해야 하고, 매일매일 예수 부활 생명의 향기가 나야 하며,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신구약 성경 말씀과 예수님의 메시지가 지금도 우리의 생각과 삶 속에 살아있고, 지배되므로,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생명 복음의 전파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행 9:36-43)은 병들어 죽은 다비다가 부활의 증인인 베드로를 만나므로 되살아나며,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더 확실하게 해줍니다.오늘 초대 교회 당시 가장 약자였던 과부로 죽은 다비다가 베드로를 만나므로 되살아나듯이,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사명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도행전 개요 :
오늘 본문 다비다의 부활을 보기 전에 사도행전에 관해서 먼저 살펴보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기술한 신약 성경의 유일한 역사서입니다. 초대 교회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겨났으며, 어떻게 발전해 갔는지를 증거하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 사업에 동참하여 각자 자신의 본분을 잘 감당하도록 권고합니다. 그리고 의사인 누가가 기록한 신약의 두 책인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은 각각 독립된 두 권의 책이 아니라, 동일한 단행본의 1권과 2권으로 보아야 합니다. 저자가 본래 계획하고 의도한 것이 한 권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서두(행 1:1)에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을 가리킵니다.
먼저 사도행전의 구조는 지리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구조는 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를 토대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① 사도행전 1:6-8:1은 예루살렘의 전도 활동이고, 둘째, ②사도행전 8:2-11:18은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서술하며, 셋째, ③사도행전 11:19-28:31은 땅 끝(로마)까지의 전도 활동을 기술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약속이 문자 그대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또 사도행전의 구조를 성령의 역사에 의한 인물 중심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열두 사도의 행전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보여준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 행전’이라고 불릴 만큼 성령을 강조합니다. ‘영’, 혹은 ‘성령’이라는 단어가 마태복음에는 17번, 마가복음에 23번, 누가복음에 38번, 요한복음에 21번 그리고 사도행전에 69번 나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의 사용 횟수를 합하면 무려 107번이나 됩니다. 사도행전의 성령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성령에 대한 약속(행 1:4-5)으로부터 시작해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행 2장)하여, 사도들이 성령에 충만하게 됩니다(행 4:23-31). 성령을 거역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임을 당합니다(행 5:1-11).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습니다(행 8:14-17). 빌립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행 8:29), 고넬료와 그 권속이 성령을 받으며(행 10:44-48),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주어집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성령의 부름을 받았고(행 13:1-4), 예루살렘 회의도 성령의 인도로 되어 집니다(행 15:28). 바울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전도 활동을 하며(행 16:6-7), 소아시아의 에베소 제자들까지 성령을 받았습니다(행 19:1-6). 또한 성령이 감독을 세우기도 했습니다(행 20:28). 이것은 사도행전의 목적이 사도들 개개인의 활동사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그 역사가 어떠한가를 보여주려는데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성령에 사로잡힌 대표적인 두 인물 곧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및 활동, 그리고 바울의 회심과 그가 기독교 지도자가 되어 활동한 역사,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까지의 세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에 대한 기록이 그 중심을 이룹니다. 이 인물을 중심으로 사도행전을 나누면 2-12장은 베드로 행전이며, 13-28장은 바울 행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의 말씀대로 그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아 한낮 어부에 불과한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위대한 설교자가 되어 한 번에 3,000명을 회개시키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바울 역시 교회를 핍박하는 인물이었으나, 성령의 역사로 변화를 받아 이방인의 사도로서 놀라운 일을 행했습니다. 이같이 사도행전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복음 전파 사역을 충실히 감당함으로 교회가 성장, 발전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사도행전이 단순한 역사적인 서술이라기보다는 저자의 분명한 신학적인 경향과 의도를 가진 역사서라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 말씀 :
오늘 우리의 본문은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주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선교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9장은 교회를 핍박했던 사울이,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성도들을 결박하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사흘 동안 눈이 멀었다가 아나니아를 통해서 눈을 뜨는, 다메섹에서의 사울의 회심(1-9)과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소명과 세례(10-19a),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하는 전도와 탈출(19b-25),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의 인정을 받는 사울(26-31)등 사도행전 후반부 선교의 주인공이 되는 사울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베드로의 애니아 치유(32-35), 다비다 살림(36-43)이 연결됩니다.
이 모든 과정의 결론은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지고, 부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35)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42)
그리고 이어지는 10장에서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 복음을 전하고, 성령이 임하고 세례 받음으로 복음이 이방으로, 땅끝까지 전파되어 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이 이방으로, 땅끝으로 전파되는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여제자 다비다(도르가)의 선행과 구제를 배워야 합니다(36-39).
오늘 본문 36절에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신약성서에서 오직 여기에만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제자”(마데트리아, μαθήτρια)라는 호칭이 사용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회복음(Social Gospel)으로 불리는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의 관심이 당시 사회적 약자인 여인에게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누가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차이가 없으며, 교회도 그러해야 한다는 신학적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누가가 여성에게 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본문의 도르가라 하는 다비다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훌륭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행한 그녀의 삶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아”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모범적인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선행과 구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다비다는 사회 안전망 제도가 충분하지 못했던 당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회보장제도가 거의 없었던 당시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끼니 걱정해야 하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하시면서 선행과 구제를 통해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부활의 주인공인 “도르가라 하는 다비다”의 이름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아람)어 이름인 “다비다”(테비타, טביתא)와 헬라(그리스)어 이름인 “도르가”(도르카스, Δορκάς)는 ‘아름다운 눈을 가진 동물’, ‘사슴’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서 그녀가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렇게 히브리식 이름과 헬라식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복음이 유대 지역을 넘어서서 헬라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13:9 이하에서 히브리 이름 사울(Saul)을 그리스-로마 이름 바울(Paul)로 사용하는 사도행전 저자의 문학적 기법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39절에서는 “도르가”라는 이름을, 40절에서는 “다비다”를 사용하면서 유대적 영역과 그리스-로마적 영역의 혼재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행전의 저자는 지명이나 이름을 통해서 이방 선교를 준비하는 문학적 신학적 의도를 엿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사도행전 저자의 의도는 여제자인 다비다의 삶이 선행과 구제를 통한 선한 영향력을 전하며 살아가므로 많은 사람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였고, 또 사도 베드로가 지체하지 않고 속히 와달라고 간청하게 되는 것입니다(38).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도 역시 다비다가 이웃을 위해서 지은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면서(39) 그의 선행과 구제를 통한 선한 영향력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 성도들 역시, 이 다비다와 같이 주변인인 과부들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선행과 구제를 통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므로 생명을 살리는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 베드로의 치유와 생명을 살리는 사역과 능력을 배워야 합니다(40-41).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40-41)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베드로는 룻다에서 8년 동안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워있는 애니아를 만나 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31-35). 그리고 그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도구로 섬긴다는 점입니다. 그가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라고 선언하자 곧바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참조. 눅 5:24). “네 자리를 정돈하라”(스트로손 세아우토, στρῶσον σεαυτῷ)는 직역하면 ‘네 자신을 위해 준비하라’(prepare for yourself)입니다. 이 말은 다시 ‘잠자리를 정돈하다’혹은 ‘음식을 준비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숙어적인 표현입니다. 물론 본문에서는 일차적으로 그가 누워있던 자리를 치우는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가 오랫동안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었으므로 다시 음식을 먹고 힘을 얻게 되는 과정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므로, ‘음식을 준비한다’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네 자리를 정돈하라”는 그 사람의 완전한 회복을 함의합니다. 즉 예수님의 치유 능력으로 애니아는 이제 걷게 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룻다에서 욥바로 온 베드로는 죽은 다비다를 씻어 누인 다락방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외칩니다. “다비다야 일어니라!”이 외침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죽었던 다비다가 부활하여 일어나 앉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 무릎을 꿇고서 간절히 기도했듯이(40a) 우리도 병든 자 앞에서, 많은 문제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기도 후에 베드로가 “다비다야 일어나라”(40b) 담대하게 외쳤듯이 우리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고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고 외치므로 죽은 소녀가 곧 일어나 걸었습니다(마 6:41-42).
우리는 앞선 애니아의 치유와 다비다의 부활에서 사도 베드로의 치유와 소생의 능력을 확인함으로 하나님의 이방 선교 계획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여기 “다락방”(37)이라는 말에서 구약성서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적을 회상시켜 줍니다. 열왕기상 17:17-24에서 엘리야가 다락방에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고, 열왕기하 4:32-37에서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결국 이 “다락방”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통해서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베드로가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위대한 구약성서의 인물과 견줄 만한 예수님의 사도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는 베드로의 치유와 부활 이야기를 엘리야와 엘리사의 치유 이야기와 연관시키면서 이방 선교의 관심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다비다를 살리는 베드로를 통해 구약성서의 위대한 인물이었던 엘리야와 엘리사의 모습을 회상시키는 동시에,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병들어 죽었던 다비다를 고치는 동시에 그에게 새로운 삶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병든 사람과 병들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베드로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측면인 베드로에게 능력을 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2-13)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예수님께서 하셨던 놀라운 기적적인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베드로와 같이 간절히 기도하고, 담대하게 외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병든 자를 일으키고 생명을 살리는 귀한 성도님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3. 다비다의 부활은 또 다른 생명 살림으로 이어집니다(42).
죽었던 다비다의 부활은 또 따른 생명 살림의 역사를 이룹니다.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게 했고 또한 아프게 했던, 선행과 구제로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한 여제자의 죽음의 소식이 부활의 소식으로 바뀌었을 때, 그 기쁨이 전해지는 속도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삽시간에 욥바의 모든 지역에 이 소식이 퍼졌습니다. 욥바에 거하는 이들 중 다비다의 소식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욥바의 더욱 많은 사람들은 다비다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다비다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 이름을 믿게 되었습니다. 42절은 다비다의 기적 그 이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다비다의 죽음 앞에 흐느껴 울었던 모든 과부의 탄식과 원망을 기억하십니까?(39)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끄심 앞에 저항하며 울부짖던 바로 우리들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하신 기적이 끝나고 나서야 그 이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 때에 그러한 고통을 우리에게 주셨는지를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비다의 죽음 앞에 가리어졌던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비다의 죽음과 삶 전체가 욥바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욥바와 이방의 수많은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선행과 구제로 칭찬받던 다비다를 죽음에 처하게 하시고, 또한 그녀를 다시 살리셨던 것입니다. 다비다가 살았을 때는 가난한 자들만이 그녀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지금은 욥바의 모든 영혼들이 영생을 얻는 더 큰 구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삶 전부를 통해 하나님의 큰 구원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삶과 죽음과 다시 삶의 기적을 통해 욥바의 영혼 구원을 위한 도구로 온전히 쓰임 받았던 다비다의 삶처럼, 오늘 성도 여러분 삶의 순간순간이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데 귀중한 도구로 쓰임 받는 또 다른 기적의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4. 신분과 인종, 성적 차별의 벽을 넘는 합력과 생명 살림을 가져옵니다(43).
다비다의 부활은 이렇게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이루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를 이룹니다. 그것은 신분과 인종의 벽을 뛰어넘는 합력을 가져옵니다.
먼저 베드로가 살려준 사람이 헬라파 유대인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생명 살림, 곧 부활은 여자나 남자나 전혀 구분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비다의 부활을 이룬 후에 사도 베드로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여러 날 머무르게 됩니다.여러분 개역한글 성경에서 “피장”이라고 말하는 “무두장”이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무두장”(피장, 브로세이/브로슈스,βυρσεῖ.)이라는 직업은 ‘죽은 짐승의 가죽을 취급하고 가공하는 직업’으로, 짐승의 악취와 피로 인해서 부정한 직업으로 인식되어,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유전인 탈무드의 미쉬나에 의하면 이 무두장이 남편을 둔 여자는 단지 남편이 무두장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편견을 무시하고 그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유대적 시각과 관점을 가진 베드로가 유대 정결법을 어기면서까지 부정한 직업 종사자를 만나고, 그의 집에 머무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 이유는 베드로가 짐승의 악취와 피처럼 부정한 것을 다루는 시몬의 집에 거함으로써 유대인의 종교적 편견을 넘어서, 인종적 신분적 차별을 뛰어넘으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어지는 10장에서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러가는 과정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평소에 행하시고 가르치시던 것을 실행해 옮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아들(돌아온 탕자)의 비유’ 등을 통하여 예수님의 관심이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드라크마 하나, 집 나간 아들에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관심도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말하는 갈라디아서 3:27-29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인종적, 신분적, 성적 차별도 철폐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미치는 보편적인 구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를 살리고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므로 더 큰 이방 선교를 준비합니다. 이어지는 기아샤라의 이달리야 백부장인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고 복음을 전하므로, 복음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벗어나서 땅끝으로, 유대인을 벗어나서 이방인으로 전파되는 선교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은 모든 인종적, 신분적, 성적, 지역적 차별을 넘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합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고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차별과 벽을 허물고 생명을 살리는 선교의 역군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5. 결(結) : 모든 사역과 능력의 결과는 생명 살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죽은 다비다가 부활한 후에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42)고 했고, 바로 앞에서 8년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쳐주신 후에도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35)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바로 앞 사울의 회심과 전도를 통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고 말합니다. 또 이어지는 10장에서 베드로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고,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임하고(10:44), 그에 따라 세례를 베풉니다(10:47). 그리고 이 일이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전해지므로,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자들이 비난할 때,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결론 역시 생명 살림이었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19-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은 생명을 살리고 교회가 부흥하는 역사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기록이 사도행전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하존교회 역시 성령의 충만을 받고,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정하는 증인으로 나서므로 생명 살림의 역사를 이뤄가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 성도,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III.
모두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는 복음을 완성시킨 본회퍼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면서, 행동하는 신앙인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 말씀드렸는데, 오늘 말씀의 결론도 본회퍼가 남겼던 「자유를 찾는 길」이란 시를 나누면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옳은 일을 하려고 하라.
가능한 것 속에 떠 있지 말고
용감하게 현실적인 것을 붙잡으라.
자유는 사고의 도피 속에 있지 않으니
그것은 행동 속에만 있다.
소심한 망설임에서
삶의 풍파 속으로 나오라.
하나님의 계명과
신앙만을 의지하라.
그리하면 자유는 기쁨으로
네 영혼을 맞이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참 자유를 찾고 나누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갑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벗어나, 룻다와 욥바에서 애니아를 치유해 주고, 죽은 다비다를 살려주며, 이어서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고, 성령의 임함과 세례, 생명 살림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통해 남자 여자의 성적 차별, 유대인과 이방인의 인종적 차별, 천대받던 무두장(피장)이의 집에 거하므로 신분적 차별을 넘어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살리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며,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부활 생명 복음을 전하므로 생명을 살리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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