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 양용찬 열사 생가방문
일시: 2016년4월2일(토)오전10시~11시 30분
장소: 제주 서귀포시 양용찬열사 생가
참석: 윤호상 상임의장, 이지영상임대표, 조순호고문
내용: 양용찬열사 기념사업회방문및 유가족 격려
진행: 김한솔사무국장, 양용찬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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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용찬열사 유가족과 함께 기념인증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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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2일(토) "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는 윤호상 상임대표의장님과 이지영상임대표와.조순호고문,김한솔 사무국장이 양용찬열사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안내를 받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자리하고있는 양용찬열사 생가를 방문하여 양용찬열열사 어머님과 형님및 누나등 유가족을 찾아뵙고 양용찬열사의 정신과 뜻을 돌이켜보고 유가족과 환담을 나누며 위로 격려하였습니다. 5년전에 생가를 방문하였을때는 양용찬열사의 아버님께서 생존하셨는데 이미 고인되어 안타까움을 더하였습니다.
제주도는 2002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2007년에는 유네스코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정되는 지 역을 포함하고 있다.
한반도의 서남쪽 100킬로 지점에 위치한 제주도, 그곳에 강정마을이 있다. 강정마을 은 정부 스스로 오래 전부터 ‘절대보존지역’으로 지정한 곳으로 어떠한 개발행위도 허 락하지 않았던 곳이다. 이런 곳을 바다 밑 10만여 평을 파헤치고, 거대한 방파제를 만들어 함정 20여 척이 정박하는 대규모 군사시설이 지금 건설하고 있다.현재 강정마을은 군사시설 건설을 찬성하는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의 반목과 갈등이 깊다. 21년 전 ‘제주도 개발특별법’에 반대하며 분신자살한 ‘양용찬 열사’는 무명의 용사이 다.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세계적인 관광지 제2의 하와이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써, 생활을 보금자리로써 제주도“를 원한다고. ‘양용찬 열사’가 분신자살한 21년 전 그 날의 신문기사를 잠시 살펴보자.
제주도 개발특별법 제정 반대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제주도 남단 서귀포에서 한 청년이 분신자살을 해 충격을 던지고 있다. 5-6월 전국적으로 번졌던 민주화 투쟁의 열기와 수많은 사람들의 분신을 접했
던 우리들에게 이곳 제주에서의 분신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11월 7일 오후 7시 40분 경, 양용찬 씨(26세),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 회원, 이하 나사청)가 온 몸에 석유를 뿌리고 건물 옥상에서 분신, 1층 건물로 투신을 하였다. 현장을 처음 목격한 바로 옆 건물의 김춘호 씨(한라장식대표)에 따르면, 한 어린이가 그 장면을 보고 신문지에 불이 붙은 줄 알고달려가 불을 끄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중략)이때까지도 그들은 전혀 당사자가 양용찬 씨인 줄은 몰랐다. 오후 8시 20분경 경찰들이 사무실에 들어가 신원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유품을 확인하고알 수 있었다. 당시 양용찬 씨는 유서를 써놓은 대학노트 1권과 현금 17만2백2십원, 가방 등의 유품들을 남겼다. (이하 중략)
- ‘기어이 한 젊은이의 목숨까지, 특별법 반대 민자당 타도 외치며, 서귀포
청년 분신자살‘ , 1991년, 「주간 탐라」의 기사 중에서 -
열사가 온몸으로 사랑했던 조국, 그 제주는 지금 어떠한가?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 등으로 제주도민이 서로 반목하고 있는 지금, 이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본고에서는 무명의 양용찬 열사가 쓴 글, 세 편을 심도 있게 살펴보려 한다.
두 편은 그가 분신자살을 시도한 그해, 1991년 초중반에 쓴 부모님에게 올린 편지이다. 또 한 편은 그가 남긴 유서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인이라 일컬음을 받는 국민, 그 국민의 한 사람이었던 양용찬 열사, 26세청년이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찾고 싶었던, 자신의 소유 여부를 따지지 않고 남겨진 민초들에게 되찾아 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찾고자 한다.
양용찬 열사가 걸어온 길
1966년 음력 9월 19일 제주도 남원읍 신례리 778번지에서 아버지 양봉옥, 어머니 정순자 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남
1983년 4월 서귀고 고등학교 2학년 때 현재 열사가족이 살고 있는 신례리 676번지로이사함. 방 네 칸에 수도와 전기가 있는 마당 넓은 새집에 살면서 한라산 등반을 즐김
1985년 3월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입학, 학생회 소속 학술부에서 활동, 학생운동권에 발을 디디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음, 2학년 학술부장을 맡음
1986년 2월 휴학계를 제출하고 11일에 군에 입대1989년 5월 4일 육군 병장으로 제대, 복학을 거부
1989년 5월 제대하고 며칠 후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 가입. 낮에는 일당 일만 오천 원(분신당시 이만 원) 타일공으로 일하면서, 청년회 ‘농민사랑’ 동아리에서 활동함
1990년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 내 ‘서귀포지역문제대책위원회’ 위원회에서 활동우루과이라운드에 의한 농수산물 수입개방, 제주도개발특별조치법 등을 고민하기 시작함, 농협에서 미국산 오렌지농축액을 수입, 농협연쇄점에서 판매하는 것을 확인,
9월 3일 제민일보에 전면광고로 미국산수입오렌지 판매금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실음, 이 시기에 정부와 민자당은 제주개발특별법을 여러 차례 수정 발표를 함
1991년 11월 7일 오후 7시 40분 경,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 3층 옥상 계단에서 분신 투신, 50여분 후 서귀포의료원에서 사망진단, 11월 11일 신례리 산 53번지 마을 공동묘지에 가족장으로 안장
2011년 11월 6일 일요일, 분신 20주년 추모식 및 기념비 제막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가 공동의 문제에 직면한 경우에 의사소통의 중요성은 커진다.” 의사소통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의사소통의 부재로 인한 죽음이 다시는 이 땅에 없기를 바란다. 그의 글을 수사학으로 분석한 본고를 통해 그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그래서 값없이 나누어 주길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실히 알았다. 그의 글은 단지, 개인의 외침이 아닌 이 땅의 주인인 국민 모두의 외침이다.
양용찬 열사 즉, 서민들이 바란 것은 제2의 하와이가 아니었다. 세계적인 제주도가 아 니었다. 그들은 허리가 휘도록, 등이 굽도록 하늘 한번 쳐다보지 않고 부지런하게 호미와 괭이로 일군 자갈밭에서 식구들이 먹을 만큼의 곡식만을 거두고 싶었을 뿐이다
.
개발법, 특별조치법은 강자(强者)들을 위한 법이었다. 강자를 위한 법은 오늘날에도 그가 갔던 길과 똑같은 길로 우리를 내몰고 있다. 강자의 법은 서민들은 몇 십년간 살았던 곳을 강제로 떠나게 만들고, 몇 십 년을 일했던 직장을 떠나게 만든다.
그의 글은 수사학의 학문으로 접근할 수 있는 훌륭한 텍스트이다. 개인의 글이 대중을일깨울 수 있는 연설문이 되었다. 끝으로, 양용찬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무명 용사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래는 1983년 12월 31일, 양용찬 열사의 일기장에 적힌 글이다.
종을 울려서 떠나보내라, 낡은 것들을
울려서 받아들일 지어다, 새로운 것을
울려 펴져라, 행복한 종소리여
눈 내리는 벌판을 넘어 올해도 저물어 간다.
이 한해를 떠나보내게 하라
울려서 보내라, 거짓을
울려서 마중하자, 진실을
울려서 환영하자,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울려서 받아들이자, 선을 사랑하는 중생의 마음을
- <테니슨/ 제야의 종소리 (인 메모리엄 중에서)>-
이 책의 저자 최연미 씨는 양용찬 열사의 마지막 모습을 저서에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그 시간에 용찬이는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 사무실이 있는 건물 옥상을 향해 쉰일곱 개의 계단을 혼자서 올라갔습니다.
백열 장의 검은 노트 한 권.다섯 장이 뜯겨져 보이지 않았습니다.가지런히 뜯겨진 맨 앞 첫 장에 열일곱 줄로 된 유서,뒤로 백 장이 백지였습니다.
첫댓글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의 광범위한 활동에 경의를 표합니다.그리고 존경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종횡무진 거칠것없이 행동하는 유족님들의양심의 표상입니다. 하늘나라에게산 원혼들들께서도 활짜 웃으실것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