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새 : 붉은머리오목눈이와 알
"그까짓 1000억,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과 그의 연인 자야의 사랑
19.01.31
오마이뉴스 임영열 기자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사랑하는 연인 나타샤를 남겨두고 홀로 먼길 떠나는 백석의 흉리는 과연 어떠했을까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196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눈 내리는 겨울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한 소설, '설국(雪國)'의 첫 문장이다.
환상적이고 섬세한 문체가 그려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겨울 풍경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설경의 극치다.
함박눈이 쌓인 시골 간이역사의 하얀 겨울밤과 기차 차창에 비친 여인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눈과 기차와 여인'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표현한 소설의 첫 구절은 겨울이 되면 널리 회자되고 인용되고 있다.
백석과 자야의 사랑
▲ 젊은 시절 자야와 백석
소설 '설국(雪國)' 못지않게 겨울이 오면, 흰 눈이 푹푹 날리는 겨울밤이면
희미한 백열전등이 졸고 있는 옛날식 목로주점에 앉아 소주잔 기울이며 읊조리고 싶은 한 편의 시가 있다.
'겨울밤의 밑바닥'을 온통 하얗게 칠해 놓은 시가 있다.
'기차와 여인' 대신 순수하고 아름다운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나오는 시 말이다.
각설하고, 이쯤에서 어떤 시인지 한 번 감상해 보자.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한국인의 애송시 목록에 들어 있고,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백석(白石, 1912~1996)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김광석이 불렀던 '이등병의 편지'를 작사 작곡한
싱어송라이터 김현성의 음반으로 나왔고, 요즘에는 동명 타이틀의 뮤지컬로도 선보였다.
여인과 흰 눈, 흰 당나귀를 통해 눈 내리는 겨울밤의 환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시다.
아름답고 순수한 여인 나타샤와 함께 눈이 푹푹 내리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출출이(뱁새) 우는
깊은 산골 마가리(오막살이)로 들어가 방해받지 않고 사랑을 이루고 싶은 백석의 마음을 담고 있다.
어찌 백석의 마음만 그러하겠는가. 누구의 훼방도 없는 곳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이루고 싶은 것은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다. 그러나 어쩌랴. 현실은,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다. 여러 가지로 누추하기 짝이 없다.
뾰족한 수가 없다. 혼자서 쓸쓸히 쓰디쓴 소주(燒酒)잔을 기울이는 수밖에는.
짧은 만남 긴 이별
시인 백석,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1930~40년대 한국 문단을 풍미했던 모더니즘 시인이다.
김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조선일보 사진부 기자였던 아버지 덕에
오산중학교를 거쳐 일본 아오야마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으며 시집 <사슴>을 비롯하여 약 백여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문단 내 최고의 미남(美男) 시인으로 통했다.
1936년 함흥에 있는 영생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 운명의 여인, '나타샤'를 만난다.
어느 날 학교 교직원들이 다른 학교로 전근 가는 교사를 위해 요정(料亭)으로 송별식을 하러 갔다.
백석 옆에 문학을 이해하는 인텔리 출신의 '진향'이라는 기생이 앉았다.
둘은 보자마자 문학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빛의 속도로 가까워지며 불꽃 같은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진향이 들고 다니던 이태백의 시집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뒤적거리다가
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다. 머잖아 닥쳐올 그들의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
자야오가는 전쟁터에 나간 남편의 무사귀환을 비는 여인, 자야의 애타는 심정을 담고 있는 시다.
서울에서 태어난 자야(본명 김영한 1916~1999)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할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열여섯 살이 되던 1932년 일제 강점기 때 기생 조합인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당시 조선 정악(正樂)의 대부, 하규일의 문하에서 궁중무와 가곡을 배웠다.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김영한은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고,
훗날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하규일 선생 약전>과 <내 사랑 백석> 등의 저술을 남겼다.
백석과 자야는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현실은 소주처럼 쓰디 썼다.
함흥 제일의 명문가 집안에서 기생 출신을 며느리로 받아들일 일은 만무했다.
두 사람은 서울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다. 서울에서 3년 동안 동거하며 사랑을 불태운다.
이때 백석은 여러 편의 서정시를 발표한다.
그중에서 <바다>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야와 관련된 시다.
백석의 부모는 백석과 자야를 갈라놓을 심사로 강제로 결혼을 시킨다.
두 번이나 결혼을 시켰지만 그때마다 백석은 자야 곁으로 돌아온다.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자야는 백석의 구만리 같은 인생길에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해 거절한다.
결국 백석은 1939년 홀로 만주로 떠났고 자야는 서울에 남게 된다.
사랑하는 연인을 남겨두고 먼 길 떠나는 백석의 흉리는 과연 어떠했을까.
그렇게 두 사람은 3년간의 꿈같은 사랑을 뒤로 한채 영영 만날 수없는 긴 이별의 시간을 맞이한다.
▲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 극락전.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 기도의 도량으로 바뀌었다.
자야는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며 "천억 원의 돈도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 했다
▲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 극락전에 모셔진 고 김영한 길상화 보살의 영정.
대원각 시주하고 백석문학상 제정한 자야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떠나보내고 서울에 홀로 남은 자야는
성북동에 있는 한식집 청암장을 사들여 요정으로 바꾼다.
삼청각, 선운각과 함께 제3공화국 시절 '요정 정치'의 본산인 대원각은 그렇게 탄생한다.
자야는 빼어난 미모와 수완으로 정·재계 거물들을 상대하며 많은 돈을 벌었지만
마음속에는 늘 백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북에 남게 된 백석을
평생 잊지 못한 자야는 그가 그리울 때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애송하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던 1980년대 후반 자야는 법정(法頂, 1932~ 2010)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받아
법정 스님에게 "아무 조건 없이 대원각을 시주할 테니 절로 만들어 달라"라고 부탁한다.
평소 무욕을 강조하던 법정 스님은 "나는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며 이를 사양한다.
이후에도 자야는 뜻을 굽히지 않고 시주 의사를 밝히자
법정스님이 시주를 받아들여 1997년 '길상사(吉祥寺)'가 창건된다.
▲ 길상화(김영한)가 여생을 보냈던 길상헌
▲ 길상사에 세워진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자야가 대원각을 시주한 대가로 받은 건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이었다.
낙성 법요식 때 한 기자가 물었다. "천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시주하셨는데 아깝지 않으십니까?"
길상화는 "그까짓 천억 원,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 거야"라고 한 말은
유명한 일화가 되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또한 자야는 남은 돈 2억 원을 창작과 비평사에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했다.
시인 안도현과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이 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 말년의 백석과 자야
남북 분단 이후 평양에 남아 있던 백석은 당 충성심이 약한 인민들을 숙청하는 이른바 '붉은 편지'를 받고
양강도 협동농장으로 쫓겨갔다. 백석은 그의 천재적 문학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1996년 84세를 일기로 양강도에서 쓸쓸히 삶을 접었다.
'천억 원의 돈도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하다'며 백석과 그의 시에 무한한 사랑을 보였던 자야도
백석이 이승을 떠나고 3년이 지난 1999년 겨울, 첫눈이 푹푹 나리던 날
순백의 길상사 뒤편 언덕에서 흰 당나귀 타고 평생 그리워하던 연인, 백석의 곁으로 돌아갔다.
세상에는 많은 사랑 이야기가 있다. 백석과 자야의 아팠지만 아름다웠던 문학적 사랑은,
시가 되고 연가가 되어 차디차고 황량한 겨울밤의 밑바닥을 훈훈하게 덥혀주고 있다.
길상사 경내에 자리 잡고 있는 공덕주 김영한의 공적비 가까이에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이 그녀를 그리며 써내려간 연시(戀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어,
평생을 홀로 살며 백석을 그리워하던 김영한과 그의 연인 백석과의 서글픈 사랑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시인 백석 이야기
일본 유학시절의 백석
만년의 백석 : 북한 인민증에 붙어있는 사진
백석 (白石, 1912년 7월 1일 ~ 1996년 1월).
한국의 시인. 평안북도 정주 출생이다.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백시박 (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 사진계의 초기적인 인물로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을 지냈으나,
퇴임 후에는 귀향하여 정주에서 하숙을 치며 생활했다고 한다.
백석은 일제강점기인 청년기에 문인으로서 활동하였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라 알려져있다.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1924년(13세) 오산 학교에 입학했는데,
재학시절 오산 학교의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동문들은 회고한다. 오산학교 졸업후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의 미남으로 평가받던 백석,
그의 멋진 헤어스타일이 그의 감각을 말해준다.
그는 함흥시의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상점에 자주 나가 러시아말도 배웠다.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하였던 어학의 천재라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조만식 선생의 일을 도우면서 하필이면 북한에서 우익활동을 하는 바람에
문인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당하고,
1996년 타계하기까지 반평생을 영영 절필한 채로 보냈다.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에 잔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문학작품을 오랫동안 금서 취급했다.)
6.25 전쟁이 터지기 전에 남으로 내려올 기회는 있었을 텐데
그대로 북에서 잔류했던 이유는 알 수 없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첫번째 부인이 여기저기 연애질하고 다니던 백석을 증오하여
월남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별렀기 때문이라 하는데...
어쨌든 59년 이후 그는 정말로 삼수갑산 중 삼수로 가서 평생을 살았다.
사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네이버 인물 소개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면 정말 잘 생겼다.
게다가 키는 무려 185cm!!! 오오 백석 오오!
그에게 날아든 팬레터의 무게만
백석에 달했다는 이야기도 백석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전해진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중하여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서북방언을 시에 넣기도 하고
서사를 시에 넣은 이야기시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통영을 아주 좋아했던 시인. 통영에 란이 살았기 때문이다.
또 그의 시에는 먹을 것들이 많이 등장하기로 유명한데,
백석의 시에 나오는 음식을 연구한 식품영양학과 논문이 있을 정도이다.
백석의 시 <국수>를 읽고 나서 국수가 땡겨서 동치미에 국수 말아먹었다는 사람도 있다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연구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6년임이 밝혀졌다.
백석이 태어난 정주는 이광수, 김억, 김소월 등
문단사적으로 대가들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백석은 반세기 가까이 남쪽과 북쪽 모두에서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었다.
시집도 <사슴> 한 권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이 이토록 수많은 시인들과 문학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 그의 노력과 시를 읽을때마다 묻어나오는 솔직함과
서민적(방언)이고도 아주 서정적인 시를 백석만의 언어로 쓴 이유가 크다.
대표적인 시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우난 곬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흰 바람벽이 있어>, <고독>, <여승>이 있다.
대표작 중의 하나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가 누구인가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데
백석의 상대로 김진세(백석의 제자)의 누이, 란(蘭),
자야(子夜)라고 불렸던 기생 출신 김진향 씨가 있다.
백석은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 작가였다.
고당 조만식선생의 비서로 그는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번역하며 북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 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백석은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우연한 기회에 시인 백석에 대해 알게 되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일제시대 시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일본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로서 준수한 외모와
당시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뭇여인의 흠모를 한몸에 받았던 인물.
해방이 되면서 북에 남게 되자
남한에서는 좌경으로 볼리어 그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북한에서는 공산치하에서 고생하다가 서글픈 말년을 맞았다 한다.
70년대 삼청각과 함께 한국 요정정치를 주름잡았던
대원각의 여주인 김영한여사가 평생을 기다리며 사랑했던 인물로
김영한 여사는 임종에 이르러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함으로써
오늘날 길상사가 되었다고..
이번 주말에는 길상사나 한번 둘러볼까 한다.
시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시인 백석'
(1912-1996,평안북도 정주 출생)
해방후 남북분단의 이데오르기적 상황속에서
남에서는 월북시인이라 금기시되고
북에서는 정치적인 글을 쓰지않아 핍박받은
비운의 시인 백석 (본명; 백기행)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은
2005년 <시인세계>가 시인 156명을 대상으로
지난 100년 동안의 시집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집이 무엇인지
설문 조사했을 때 1위를 차지했으며,
2000년대에도 관심이 지속되며,
2012년 백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백석문학전집>(총 2권)이 발간되었다.
백석 시집 <사슴> - 시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시인, 백석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백석 시집 <사슴> - 시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시인, 백석
'시인 백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입니다. 고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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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백석은 첫 시집 ‘사슴’을 자비로 출판한다.
당시 ‘사슴’의 가격이 2원이었는데,
다른 시집보다 두 배가량 더 비싼 가격이었다.
당시 말 한 필이 오원 이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이 이 원이었으니 꽤 비싼 값이었다.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어
대부분 증정용으로 시집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사슴’을 구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필사해 가지고 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시인 윤동주도 연세대 도서관에 있던 ‘사슴’을
옮겨 적어 다닐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을 살펴보면
윤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흰 당나귀는 백석과 윤동주 모두 좋아하는 이미지인데
프랑시스 잠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한다.
백석이 이토록 시인 들에게 존경받게된 것은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과
그의 시를 읽을 때 마다 느껴지는 솔직함과
서민적이거나 아주 서정적인 시를
백석만의 언어로 표현한 이유라 할 수 있다
<여승>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리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설겨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여승>은 한 여인이 남편과 자식을 잃고 여승이 되는 과정을 묘사하며
식민지 민중들의 삶에 드리워진 비극을 말한다.
그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승이 된 게 아니다.
갈 곳이 없어서 여승이 됐다.
여인과 여승 사이를 가르는 거리에서 시인은 끝 모르는 슬픔을 느낀다.
여인과 대화할수록 시인의 서러움도 그만큼 깊어진다.
시인은 여승이 되기 전에 여인을 만난 적이 있다.
평안도에 있는 어느 깊은 산 금점판에서 여인은 파리한 모습으로 옥수수를 팔았다.
십 년 전에 돈 벌러 나간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나이 어린 딸아이는 배가 고프다고 자꾸만 보챘다.
여인은 보채는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여승이 된 여인의 삶은 마치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도 같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는 진술로
시인은 고단한 삶에 지쳐 활기를 잃은 당대 민중들을 표현한다.
시대를 초월한 감수성, 슬픔 속에 피어난 감각적 이미지
백석을 다른 시인들과 구별 짓게 만드는 요소는
유난히 쓸쓸함과 그리움과 자책과 슬픔이 배어나는 그의 독특한 감수성에 있다.
백석이 마주하고 그려내는 삶의 이야기는
가끔 아늑하고, 때로 비참하며, 자주 쓸쓸하고 서럽다.
그러나 백석의 시가 비단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동화적 상상력 등 독특한 기법으로
세련된 감각을 획득하고 시의 스펙트럼을 확장한다.
시각이미지와 청각이미지 정도에 갇혀 있던 종래의 이미지 표현의 테두리를
크게 확장시킨 것이 백석 시가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이다.
1930년 19세의 나이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934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는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여러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백석시인은 훤칠한 키에 용모도 준수하고
일본유학시절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며
러시아어도 공부하여 외국어에 능통했다
그는 월북 시인으로 규정돼 출판금지 대상이 됐다가,
1988년 납북·월북 작가 해금 조치가 되며 문학사에 복귀했다.
이후 백석의 시는 시선집이 처음 나온 이래
문단과 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활발히 조명되기 시작한다.
해금 이후 그와 관련된 연구 논문만
600편이 넘는 것만 봐도 그 관심을 알 수 있다.
위 사진은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 교사 재직 시절로
졸업앨범에 실린 모던보이의 시절.
이런 백석이 기생 신분인 자신과 사랑에 빠지다니,
김자야는 <내 사랑 백석>을 집필할 수밖에.
물론 그후 방응모 사장과의 인연으로 조선일보에 근무함.
부모의 자야와의 결혼 거부와 창씨개명을 피하기 위해
농사지을 땅을 찾아 이주한 한국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모여 살던 만주로 도피함.
자야는 서울로 이주.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사랑이야기
키 185cm의 훤칠한 미남이었던 모던보이 백석 백기행 (1912~1996)
1929년 오산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컬러 복원)
저급함과 경박함과 상스러움만이 난무하는 야만(野蠻)의 시대에
전혀 뜻밖의 사건이 한 시인의 삶과 그의 문학을 추억하게 만들고 있다.
그 주인공은 한때 ‘월북시인’으로 잘못 알려져 오랜 세월 작품 소개가 금지되기도 했던
천재 시인 백석(白石ㆍ1912~1995)이다.
주로 문인, 수험생ㆍ교사, 젊은층에서 회자돼온 시인 백석이 대중의 관심 속에 들어온 것은
유산 다툼이 그 발단이 되었다. 서울 성북구 성북2동, ‘꿩의 바다’라는 별칭이 있는 이곳은
기막힌 풍광으로 여러나라 대사관저가 밀집해 있다.
이 산비탈에는 길상사(吉祥寺)라는 절이 있다.
3공화국 시절 유명한 요정 대원각(大苑閣)이 있던 곳이다.
대원각의 여주인은 1999년 여든세 살로 숨진 김영한씨. 김씨가 1000억원대의 부지와 건물을
아무 조건 없이 길상사 회주(會主)인 법정스님에게 시주한 사실은 유명한 얘기다.
지난 11월 말 서울지법 민사19부는 김영한씨의 외동딸 서정온(58)씨가
KAIST를 상대로 낸 유류분(遺留分) 반환청구 소송에서
“KAIST는 서씨에게 44억원을 지급하라”는 내용의 조정이 성립됐다고 밝혔다.
3년을 끌어온 이번 법정다툼은 김씨가 1999년 사망하면서 자신의 재산 가운데 현금과 부동산 등
31억원을 딸에게 남긴 반면 나머지 재산인 서울 서초동 빌딩 등 122억원 상당 모두를
“과학기술 발전에 써달라”며 KAIST에 기증하면서 발생했다.
김영한씨가 주목을 받는 까닭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는
보통사람은 감히 상상조차 어려운 기부 정신 외에도 그가 황토색(黃土色) 짙은 서정으로
1930년대 우리 시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시인으로 평가받는 백석의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천재시인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1935년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의 미남으로 평가받던 백석은
같은해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일하게 된다.
백석과 김영한의 극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에서 이루어진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다.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명(技名)은 진향(眞香).
그는 조선 권번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의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 문하에서 여창가곡, 궁중무 등을 배운다.
문재(文才)를 타고난 김영한은 기생 생활 중에도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은
기생 김영한의 능력을 높이 사 일본 유학을 주선한다.
신윤국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그는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김영한은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했으나
면회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에 눌러앉는다.
그는 고민 끝에 다시 함흥 권번으로 들어가는데, 그 배경이 순진했다고 한다.
그는 기생이 되면 큰 연회에 나갈 기회가 많고
자연스럽게 함흥 법조계 유력인사를 만나게 되면
스승을 특별면회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진향은 끝내 스승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했지만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진향은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난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함흥에서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사랑의 도피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어느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 편이 ‘장안 달 밝은 밤에’로 소개된 적이 있다.
진나라 때부터 민간에서 불려진 노래로
이백 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야가’를 썼다.
백석이 하늘에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영한은 ‘내 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같았다.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비슷한 시기 천재작가 이상(李箱)은
황해도 배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잠시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 살림을 차렸고,
현재의 교보문고 뒤편 피맛길에서 훗날 ‘오감도’가 탄생하게 되는 제비다방을 연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 ‘여성’에 발표한 ‘바다’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자야와 관련된 작품이었다.
백석은 어느날 ‘바다’가 실린 여성지를 갖고와서는 자야에게 보여주며
“이 시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썼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첫인상은 외국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란 말을 썼었는지...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 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하고 웃었다 ..."
-자야의 글 중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백석에게는 실제로 자야말고도 세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1. 장정옥 : 1939~1940
2. 문경옥 : 1942~1943
3. 이윤희 : 1945~1996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사랑의 도피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한다.
마침내 1939년 백석은 홀로 만주로 가게되고
두 사람은 영영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됩니다
백석은 만주에서 세관업무 등 일을 하다가
해방되자 북한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의 북한에서의 말로는
정치적인 글쓰기를 강요당하는 체제하에서
34년간 시를 쓰지않게 되고,
1996년 쓸쓸히 생을 마감합니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라는 시에서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노래한다.
< …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를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현재의 장춘)으로 떠나는데,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조국이 광복을 맞은 후 고향 평북 정주로 돌아와 1948년 잡지 ‘학풍’에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시를 발표한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
그 어느 바람 세인 씁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
이 작품이 백석이 서울에서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백석이 월북한 적이 없었음에도
‘월북작가’로 분류된 까닭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함흥과 정주를 마음대로 오가며 문학활동을 하던 백석은
한반도의 허리가 잘리면서 북쪽을 선택한 결과가 되었다.
그는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작가였다.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87년 9월,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는 ‘백석 시선집’(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다.
이동순 교수는 한 달 뒤인 10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이동순 교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이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월북’ 아닌 ‘재북’ 작가로 완전 복원 돼
이동순 교수는 김영한으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김영한은 자신을 찾아온 백석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인 이동순 교수에게
백석이 붙여준 이름 ‘자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한 많은 지난날을 나지막이 털어놓았다.
이동순 시인은 그 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 동시에 함흥 시절에 쓴 백석 시의 애틋함과
고뇌와 갈등 따위가 일시에 정동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한 선배 시인의 풍모와 체취를
새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나는 몹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다.”
이동순 교수는 일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의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이 나온 뒤에도 이동순 교수는 백석의 삶에 대한 미진함과 아쉬움이 남아
자야에게 백석과 보낸 3년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이동순 교수는 자야가 글솜씨가 있는 데다 1953년 만학으로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할 정도의 학구파였기에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자야는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무리를 해 두 번씩이나 입원을 하기도 했다.
김영한은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출간했는데, 이 교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의 필치(筆致)로 쓴 원고를 이 교수가 현대적 필치로 바꾸고
부족한 부분은 구술정리로 보완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되었다.
이동순 교수는 “백석은 1930년대의 모더니즘과 민족주의를 결합한 유일한 사례였다”면서
“백석의 작품이 수능시험에 출제되었다는 것은
‘월북 시인’에서 ‘재북 시인’으로의 완전한 복원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생전의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시를 조용히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술회한다.
생전의 고 김영한 길상화 보살
김영한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다.
시집을 대상으로 한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작을 발표해 현재 5회를 맞고 있다.
황지우, 최영철, 신대철 등이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이다.
비운(悲運)의 시인 백석이 남긴 시(詩)와 비련(悲戀)의 사랑,
그리고 자야의 고결한 영혼은 스산한 이 겨울을 훈풍(薰風)으로 감싸안고 있다.
바다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을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김영한은 1955년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한정식당을 열게 됩니다
대원각은 1970년,80년 대에 서울의 대표적 요정이며
군사독재시절 권력층과 부유층이 많이 드나들던 장소로
김영한은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며 큰돈을 모읍니다
그러던중 김영한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대원각을 불사로 시주하기로 결심하고
법정스님과 10년간 권유와 거절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1997년 길상사라는 절로 거듭나게 됩니다
김영한으로부터 시주받은 대원각을 길상사로 만든 법정스님
당시 대원각의 자산가치는 1천억대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길상사라는 절이름은 법정스님이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그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총 7000평이 넘는 공간에 40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자리해 인상 깊었다.
암자 비슷한 건물도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어
'요정 정치' 시절 신상 노출을 고려한 것으로 보였다.
1997년 12월 14일 대한조계종 송광사 분원인 길상사로 개원했다.
송광사 분원이 된 건 법정스님이 1954년 송광사에서 득도한 연(緣) 때문인 듯하다.
법정스님은 1932년 10월 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2010년 3월 11일 입적하셨다.
그녀는 부모에게서는 '김영한'이란 이름을, 권번에서는 '진향'이란 기명을,
연인 백석에게서는 '자야'란 애칭을,
법정으로부터는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고 치열하게 살다가
지난 1999년11월14일 육신의 옷을 벗고 길상화로 돌아갔다.
말을 못할 정도로 기력이 약해진 노년 나이 때에도 자신의 아파트에서
국학 후학(대학생 등)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소원대로 눈 오는날 다비한 유해는 길상사의 뒤뜰에 뿌려졌다.
자야는 대원각을 시주한 데 이어 카이스트(KAIST)에도 122억원을 기증했다.
창작과비평사에도 2억원을 기증해 ‘백석문학상’을 만들었다.
10대의 기생 시절에도 불우이웃을 위해 1주일간 번 화대
65원 42전이란 큰돈을 종로경찰서에 내놓기도 했다.
당시 최고급 해군 단화가 2원 10전이었으니 돈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시주한 천억대의 돈은
백석의 시 한줄 만도 못하다
'김영한의 인터뷰 중'
매년 7월1일 백석의 생일이 되면
김영한은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그 날은 종일 음식을 일체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9년 11월14일 그녀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길상사 경내의 뒤쪽 언덕에 김영한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길상사 경내 김영한 공덕비
* 길상화는 눈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유해를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
사당과 아래의 공덕비, 아래쪽에는 백석의 위 시 판액을 둔 것으로 보아
유해는 주로 이곳에 뿌려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녀가 죽은 후 눈이 소복이 내리던 날 절 곳곳에 뿌려줬다고 한다
길상화의 심정으로는 자신의 공덕비 자리에
백석의 이 시를 석각해 두기를 서원했으리라 본다.
기생 자야는 영어교사 백석의 시를 사랑했고,
대원각 1천억의 재산은 백석의 시 한 줄에도 비길 수 없다고
무소유를 실천한 법정스님에게 장담했으니까.
기생시절의 김영한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기울어진 가세로 인해 15세때 팔려가다시피 결혼했으나
병약한 남편이 우물에 빠져죽게 됩니다
그후 16세의 나이로 진향이란 이름으로
권번기생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비록 기생이지만 그녀는 개화적인 성장과정과 더불어
일본문화학원을 수학하고 문학에도 재능이 있는
엘리트여성이었습니다
백석에 의해 자야라 불리웠던
김영한(金英韓, 본명: 김진향,법명: 吉祥華,1916~1999)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습니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의 꽤나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몇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기생이기도했습니다.
본명이 김영한으로 진향은 기명(기생의 호칭).
자야 여사가 호기심에 함흥 시내 번화가로 나들이 갔다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히라다 백화점 책방에서 문예춘추, 여원, 자야오가라는 책을 사가지고 와서
백석 시인에게 보였는데 그때 지어준 이름으로
자야는 백석시인과 김진향 여사 사이에만 통하는 애칭이 되었습니다.
백석은 기생과의 동거를 한사코 반대하는 부모와 장남으로서의 갈등,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조만식선생의 사랑을 받아 눌러 앉았고
자야는 서울 대원각 여주인이 되었다.
대원각은 삼청각과 더불어 서울의 가장 큰 요정이었는데
말년에 법정 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해서 지금은 길상사 라는 절로 바뀌어 있다.
그녀는 자신의 글에서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포함한 많은 시가
자신을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진위를 알 수는 없으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라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만학으로 졸업하였으며,
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1990년에는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에는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펴냈습니다.
그녀는 백석과의 사랑을 나누었던 인연으로
1997년 11월 사재 2억을 출연, 백석문학상 (창작과 비평사 주관)을 제정했습니다.
[신간] 내 사랑 백석…백석의 연인 '자야', 팔순에 옛사랑을 추억하다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
2021-04-02
18세 때 기생이었던 자야(왼쪽)와 백석 시인.
기생 김진향, 스무살에 백석과 만나
아호인 '자야'라 불리며 애틋한 사랑
연인의 고뇌와 갈등 영화처럼 펼쳐져
시인 백석(1912~1995)과 그의 영원한 연인인 문학 기생 김자야(1916~1999·본명 김영한·기명 김진향)의
짧고도 영원한 사랑을 담았다. 이 책은 1995년, 1996년, 2019년에 이어 최근 네 번째(3판2쇄)로 출간됐다.
이 책은 팔순의 김자야가 백석과의 만남과 옛사랑을 추억하며 쓴 산문이다.
책이 나오기까지 시인이자 가요평론가인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가 큰 역할을 했다.
이 시인의 발문 '아름다운 인연, 아름다운 족적'엔 김자야의 원고 집필과 완성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1부(운명), 2부(당신의 '자야'), 3부(흐르는 세월 너머)로 나뉜다.
1부에서는 김영한이 기생 김진향으로 입적할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성장기와 젊은 시인 백석과의 애틋한 첫 만남을,
2부에서는 백석으로부터 '자야'라는 아호로 불리며
절정의 사랑을 나누었던 3년간의 이야기를,
3부에서는 팔순에 가까워진 자야의 심경을 차례로 보여준다.
책 끝에는 김자야의 집필과 출간을 뒷바라지하며
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세상에 알린 이동순 시인의 발문과 백석 연보를 덧붙였다.
멋쟁이였던 모던보이 백석이 어떻게 토속적인 시를 쓸 수 있었는지,
그의 시에 나오는 '나타샤' '고흔 당신' '허준' 같은 시어에 얽힌 실제 인물들은 누구인지,
그의 성격은 어떠했는지, 교사와 기자로 일하다가 다시 만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인지 등
젊은 시절 백석의 삶과 그 궤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함흥권번의 기생이었던 김진향은
스무 살 때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던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그날은 내가 함흥권번에 소속이 되어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으로 나갔던 바로 첫날이었다.
영생고보의 어느 교사가 이임하는 송별회의 자리인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당신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은인이신 해관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타관 객지에 잠시 와서 머물고 있는 처지였고,
당신 역시 서울에서 그 바람 센 함흥땅으로 부임해와 있는 멋쟁이 시인 총각이었다.
어쩌다 우리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 그렇게도 어이없이 사로잡히고 말았는지."
(46쪽, '마누라! 마누라!')
"말없이 연거푸 기울어지는 술잔에 용기를 얻은 당신은 술상 아래쪽에서 더덤썩 나의 손목을 잡았다.
꽉 잡힌 내 손목에는 이미 불꽃 튀는 사랑의 메시지가 뜨거운 전류처럼 화끈거리며 전달이 되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당신의 말이 나의 귀를 놀라게 하고, 또 의심케 했다."
(47쪽, '마누라! 마누라!')
2부는 백석과의 사랑 그리고 이별의 기록이다.
백석이 지어준 '자야'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 청진동 시절 자야를 두고
'세 번'이나 새로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냉엄한 신분제 시대의 사랑,
거리에서 지인이나 자야의 손님과 마주칠 때마다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시인과 기생 커플의 고뇌와 갈등,
백석 집안의 극렬한 반대와 자야의 방황,
자야에게 중국 지린성 창춘으로 도망가자고 제안하는 백석의 사랑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연인의 이야기 속에서 백석과 백석 시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백석의 시 '바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등에 애정의 흐름이 드러난다.
마지막 장에는 백석의 시를 어루만지며 그들의 젊은 시절과
북으로 가 생사조차 알 길 없는 백석을 그리워하는 자야의 애틋한 정이 고여 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통영에 남겨진 시인 백석의 흔적
통영 충렬사 건너편에 작은 쉼터 공원,
푸르바다빛을 품은 물고기등을 올라탄 조형물이 하나있습니다
그리고 공원 한 쪽에 백석 시비가 서있습니다
백석시비 '통영2'
백석 시인과 통영처녀 '난蘭'
1935년 젊은날의 백석시인은 신문사에 근무할 때
친구 허준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난 통영 처녀
란蘭(본명 박경련) 에게 첫눈에 반하고 맙나다
당시 란은 18세 나이에 통영출신으로
이화여고에 재학 중이었다고 합니다
백석이 짝사랑했던 통영 처녀 박경련 <출처: 통영시>
그후 백석은 란을 짝사랑하게 되어 잊지못해
란을 만나기 위해 3번이나 통영에 가지만
번번히 만나지 못하고
낙담하여 낮술을 마시고
충렬사계단에서 《통영2》시를 쓰게 됩니다
..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같은
물이 솓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것만 같고"
....
백석시인,<통영2 중에서>
백석이 난이를 기다리며 <통영2>시를 쓴 충렬사
통영2 시에 나오는 '명정샘'
백석 시인
사랑하는 여인과 친구를 모두 잃게되다
그러던중 친구 신현중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신현중을 통해 란의 어머니에게 청혼할 뜻을 전하게 되나
백석의 집안환경때문에 거절당하게 되고
오히려 신현중과 란이 결혼을 하게됩니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사랑과 친구를 모두 잃게된 백석은
자신의 시로 버림받은 아픔을 토로합니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위에서
마른 말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간것과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일을 생각한다"
백석시,<내가 생각하는 것은>중에서
백석 시인이 사랑했던 란이 살던 명정골
놓친 사랑의 바다, 얽힌 사랑의 사찰… 나타샤 거기 있나요 | 서울신문 (seoul.co.kr)
놓친 사랑의 바다, 얽힌 사랑의 사찰… 나타샤 거기 있나요
[작가의 땅] <23>시인 백석의 통영 그리고 서울 길상사
2021-12-06
서울신문 소설가 이은선
▲ 조선 시대 한강 이남 최고의 관청으로 평가되는 세병관의 지과문.
세병관은 충청 전라 경상을 아우르는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이순신 장군 등이 거쳐간 곳이자 삼도의 문화가 오갔던 장소다.
모르긴 몰라도 백석도 자주 거닐었을 게 분명하다.
반수연 작가 제공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중략)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통영 명정에 있는 오래된 우물 곁에 세워진 백석의 시비.
명정은 백석이 사랑했던 여인 난이 살았던 곳이다
겨울이 잇닿아 오면, 아니 눈이 내릴 때마다 생각나는 시가 있다.
‘눈이 폭폭 쌓이는 밤’에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고 싶다던 사람과 그의 나타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물론 나는 이 시를 언어영역(요즘은 국어 영역!) 지문의 한 구절로 처음 접했다.
월북한 시인의, 해금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작품을 수능 문제로 풀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사랑은 하고 라니. 눈이 푹푹 나리거나 날리거나 사랑은 했다니.
어조사 ‘은’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
전북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중략)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든데 /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 /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중략)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여가며 /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백석의 ‘통영’)
백석이 사랑하는 여인 ‘난’을 만나기 위해 자주 찾았다는 통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은 하늘보다 더 짙푸른 바다를 볼 수 있는 날이었다.
‘천희’ 혹은 ‘난’을 기다렸다는 충렬사 앞은 절기는 겨울이지만
아직 가을을 품고 있는 노란 은행잎들이 빗줄기처럼 흩뿌려지는 중이었다.
이쯤에서 백석이 앉아 있던 걸까,
저 우물가에 정말로 난이 다녀갔을까 하며 통영 곳곳을 거닐었다.
사랑을 찾아왔지만, 거절당한 사람의 마음이 돼 통영 곳곳을 다녀 보았다.
그런 이가 맞는 비라니. 백석의 표현대로라면 ‘김 냄새 나는 비’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난 백석은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교사가 되고 싶어 했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 탓에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바로 대학으로 진학을 하지 못했다.
1929년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 선발시험에 붙어
일본의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의 아들’이 당선된다.
언어를 배우는 능력이 비상했던 덕분에
1학년 때는 영어를, 2학년 때 프랑스어를, 3학년 때는 러시아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영어사범이 전공이었지만 독일어를 더 좋아해서 정식으로 독일어 수업을 들었다.
이런 까닭에 해방 이후 북에서 수많은 번역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한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조선일보에 입사해 교정부에서 일을 한다.
그와 동시에 ‘여성’의 편집을 도맡기도 했다. 이 즈음에 소설 대신 시를 쓰기 시작한다.
시 ‘정주성’(定州城)을 시작으로 수많은 시를 쏟아내기 시작했으며
신문사의 출판부로 자리를 옮겨 잡지 ‘조광’의 창간에 참여해 대성공을 이룬다.
잡지 편집자로도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 백석이 낮술을 마시고 난을 기다렸다는 충렬사와 계단. 맞은편에 명정이 있다.ȫ
1936년 백석은 첫 시집 ‘사슴’을 자비로 출판한다.
당시 ‘사슴’의 가격이 2원이었는데, 다른 시집보다 두 배가량 더 비싼 가격이었다.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어
대부분 증정용으로 시집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사슴’을 구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필사해 가지고 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시인 윤동주도 연세대 도서관에 있던 ‘사슴’을 옮겨 적어 다닐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말 한 필이 오원 이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이 이 원 정도였다고 한다.
100부 한정 판매를 하였는데 시인 윤동주는 이 책의 필사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을 살펴보면
윤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흰 당나귀는 백석과 윤동주 모두 좋아하는 이미지인데
프랑시스 잠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한다.
해방 후에 고향 정주로 돌아간 백석은 그곳에서 분단이 되기까지 계속 머무른다.
남으로 가자는 동료들의 제안도 마다하고 스승인 조만식의 곁에 남아 시를 쓰고
러시아어 번역과 함께 아동문학을 연구했다.
1950년대 초까지도 북한 문단에서 꽤 권위를 인정받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 갔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 외부활동을 하지 않은 채 칩거하며
엄청난 양의 러시아 소설들을 번역했다고 한다.
1958년 백석은 “사상과 함께 문학적 요소도 중요시하자”는 주장을 했던
이른바 ‘붉은 편지 사건’으로 인해
김일성 정권의 문예정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자아비판을 강요당한다.
이후 양강도 삼수군의 협동농장 축산반으로 쫓겨나 아예 북한 문단에서 사라지게 된다.
백석은 삼수군의 양치기와 농사꾼으로 살기 시작했지만
평양에서 유명한 시인이 왔다는 소문이 퍼져
그곳의 아이들에게 문학 교육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1996년 감기에 걸려 고생하다 갑자기 사망했다고
아내가 증언해 주어 백석의 사망이 밝혀진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통영까지 찾아갔지만 거절당한 뒤에 백석은 세 번의 결혼을 한다.
그리고 남쪽에는 그를 평생 그리워한 여인 자야(김영한)가 있었다.
김영한의 호인 ‘자야’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함흥관 기생이었던 그는 백석의 애인으로 지내며 동거를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부모의 강요로 결혼을 한 것이다.
자야는 김숙이라는 필명으로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하기도 한다.
백석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떠나지만
그에 대한 마음을 지우지 못하고 한 달 만에 경성으로 돌아온다.
만주의 산징으로 같이 떠나자는 백석의 청을 거절한 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고 회상한 자야.
그 뒤로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하다가 말년에 법정 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했다.
당시 돈으로 1000억원이 넘는 거액이어서 스님은 몇 번이고 고사했지만
결국 대원각을 길상사로 개조했고,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다.
“1000억원이란 돈도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김영한의 말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
▲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 세워진 길상화 공덕비.
본명이 김영한, 법명이 길상화인 함흥관 기생 자야는 백석과의 못 이룬 사랑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생전 운영한 요정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고, 대원각은 길상사로 다시 태어났다.
마음은 자신과 있지만 다른 여인과 결혼을 세 번이나 한 사람,
북으로 가서 연락조차 하지 않은 사람을 평생 기다리며
그의 시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삶은 어떠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아직도 길상사에 오롯이 남아 있다.
최근 소설집 ‘통영’을 낸 반수연 작가는 통영 사람이다.
그에게 백석과 통영에 대해 물었다. 해금된 이후로 읽게 된 백석의 시편들 중에서
통영 연작시들을 특히 인상 깊게 읽었다고 했다.
반 작가의 친정어머니가 기거하던 맞은편 아파트에
100세를 넘긴 ‘난’의 올케언니가 살았다는 말도 전해 주었다.
반 작가에게 통영, 그리고 백석의 자취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통영 기행’에 대해 물었더니
단번에 ‘세병관’을 먼저 둘러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영은 통제영의 줄임말이며 충청 전라 경상을 아우르는,
한강 이남 최고의 관청기관이 바로 세병관이라고.
300년 동안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 삼도수군통제사가 190명이나 거쳐 갔다고 한다.
그들이 오가는 동안 삼도의 문화가 얼마나 많이 오갔겠는가 하는 것은 이미 너무도 유명한 사실.
문화대박람회가 이루어진 장소가 세병관이고
또 옛 건축 양식을 현재까지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곳이니
통영 여행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했다.
세병관에서 충렬사, 백석의 시가 새겨진 명정 우물을 돌아 서호시장을 둘러보며
예전의 문화와 현재가 만나고 있는 것들을 즐겨 보라는 말을 전해왔다.
그것이 ‘통영’이라고도 했다.
▲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 세워진 길상화의 삶에 대해 소개한 글.
본명이 김영한, 법명이 길상화인 함흥관 기생 자야는 백석과의 못 이룬 사랑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생전 운영한 요정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고, 대원각은 길상사로 다시 태어났다.
통영과 서울의 길상사는 백석과 그의 사랑들로 매우 유명해졌지만,
단순히 그것만을 이야기하기에는 거기에 서린 시간과 마음 그리고 발길이 너무 많고 깊다.
백석의 시를 따라 통영을 걷고 길상사에 서린 사랑의 마음을 읽는 일.
이루지 못한 사랑들이 아직도 꿈틀대는 그곳들을 새롭게 걸어 보는 일부터 이 겨울은 시작될 것이다.
나와 나타샤가 사랑은 하고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들어가는 그 밤에는
김 냄새 나는 비와 눈이 번갈아가며 내릴 테니까.
그때 어디선가 응앙응앙 우는 당나귀의 흰 울음소리가 들릴지 어찌 알겠는가.
그것들을 찾고 보러 통영과 서울의 길상사로 떠날 겨울이 왔다.
▲ 소설가 이은선
소설가 이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