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랑공주와 에드워드 8세
도대체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이길래 전혀 상관도 없을 것같은 “낭랑공주와 에드워드 8세”라고 생뚱맞게 제목을 붙였을까요? 더구나 한국사람과 영국사람인데요. 연상을 위하여 부연해 본다면 “낭랑공주와 호동왕자”,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의 관계를 힌트를 준다면 어슴프레 짐작이 가실 겁니다. 예, 바로 이 “낭랑공주와 에드워드 8세” 이 두 분의 공통점은 “사랑을 위하여 왕실도 버린 사람”들이죠. 그 아름답고 슬프고 아련한 사랑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 낭랑공주와 호동왕자의 비련의 이야기
나는 사춘기 때(1960년 대 중학교 시절)에 “사랑을 위하여 왕실도 버리고”로 시작되는 “공주의 비련”이란 대중가요를 즐겨 부른 적이 있습니다. 이 노래는 “낭랑공주가 호동왕자를 위하여 자기 나라의 자명고를 찟고 아버지와 나라를 배신하고 사랑을 택한” 내용과 관련해서 참 놀라운 마음으로 어린 나이에도 아리게 또는 아름다운 사랑을 떠올리며 자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1956년 명국환이 처음 부른 이 “공주의 비련”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런데 이 곡의 노래 1인칭 시점의 주인공이 낭랑공주 여자인데, 남자가 부른 게 좀 그래서인지, 1964년 리바이블하여 여자가수 박정심이 불렀으나 워낙 명국환이 더 인기가 있어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명국환의 “공주의 비련”을 더 듣고 불렀죠.
사랑을 위하여 왕실도 버리고
그대따라 가리라 기약했더니
이다지도 세상은 말이 많은가
아~아 공주 몸이 원망스러워
씌워진 의무이라 난들 어이하리오
부질없이 임가슴에 불을 놓고서
못이루는 이사랑 원망을 마오
아~아 이내 순정 무너만진다
아마 지금 60대 중반 이후 어르신들께선 익히 들으셨던 노래로 기억되실 겁니다. 요사히 이기적인 사랑이 판치는 세상에 이 노래가 생각나는 것은 고귀한 참된 사랑이 아름답다는 나만의 생각은 아니겠지요. 사실 대학다니기 전까지는 이 노래와 관련하여, 낭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는 위에 서술한 대로, ‘그저 자명고를 찢고 아버지보다 사랑을 택한 낭랑공주’, ‘어떻게 적이 쳐들어 오면 북이 저절로 울리지?’ 하며 신기해 했던 기억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중 대학에 들어가고 국문학을 전공하고 고전문학을 공부하던 중에 “삼국사기”에 기록된 “낭랑공주와 호동왕자”의 기록을 보고 또 한번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 사기(史記)에 의하면 낭랑과 호동 두 사람은 모두 죽게 되는 비극적 결말인데,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죽음의 숭고함이 아니라, 낭랑공주의 헌신적인 사랑과 호동의 정략적인 계략이 가슴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내용을 가감첨삭없이 원문(한문)을 그대로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문 원문은 생략합니다.)
삼국사기 제14권 고구려본기 제2(三國史記 卷第十四 高句麗本紀 第二)
여름 4월(음력, 양력으로 6월: 글쓴이 첨가),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리오?”
낙랑왕 최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이하지 않겠다.”
이전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것을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에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뒤에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대비를 하지 않았고, 우리 병사들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뒤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낙랑을 없애기 위하여 청혼하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후에 그녀를 본국에 돌려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겨울 11월(음력, 양력으로 다음해 1월), 왕자 호동이 자살하였다. 호동은 임금의 둘째 왕비인 갈사왕(曷思王) 손녀의 소생이었다. 그는 얼굴이 아름답고 고와서 임금이 매우 사랑했으므로 이름을 호동이라고 지었다. 첫째 왕비는 호동이 적통을 빼앗아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임금에게 참소하였다.
“호동은 저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자못 음행하려 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였다.
“너는 호동이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 하여 미워하느냐?”
첫째 왕비는 임금이 자기를 믿지 않음을 알고, 장차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하였다.
“바라건대 대왕께서 몰래 엿보소서. 만약 그와 같은 일이 없다면 제가 죄에 대한 처벌을 받겠습니다.”
결국 대왕이 호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그에게 죄를 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왜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
호동이 대답하였다.
“내가 만일 해명한다면 이것은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요, 왕에게 근심을 더해주는 것이니, 이를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는가?”
호동은 곧 칼에 엎어져 자결하였다.
사관이 논평한다.
임금은 참소하는 말을 믿고 죄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호동에게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자식이 아버지에게서 책망을 들었을 때에는 마땅히 아들인 순(舜)임금이 아버지인 고수(瞽)에게 했던 것과 같이, 조금 때리면 맞고 많이 때리면 피하여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호동은 이러한 행동을 할 줄 모르고 죽지 않을 일로 죽었다. 이는 작은 일을 삼가는데 집착하여 대의에 어두운 것으로, 옛날의 공자(公子) 신생(申生)의 죽음에 비유할 만하다.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 15년(서기 32) 기록
이상이 낭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역사적 사실기록인데, 그야말로 호동은 낭랑을 이용하여 자국의 승리를 이끌었으나 낭랑공주을 위하여 목숨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 죄의 대가인지 왕위 후계 음모에 휘말리어 자결의 비극을 맞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왕실도 버린 낭랑공주에 비하여 호동왕자의 너무나 동떨어진 행동은 실망을 금할 수 없게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 낭랑공주이야기는 이쯤해두고 저 멀리 영국으로 건너가 에드워드 8세의 사랑을 위하여 왕실을 버린 멋진 남성을 소개할까 합니다. 호동왕자가 남자 망신 다 시켰다고 한다면, 에드워드 8세는 남자의 자존을 맘껏 드러낸 분입니다.
(2)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의 세기적 사랑 이야기
정말 “사랑을 위하여 왕실을 버리고, 황제의 명예와 대영제국의 세계 최고의 통치자의 영광을 버리고 사랑을 택한 남자, 에드워드 8세- 진정 존경합니다. 나는 못 할 것 같은데요.
"I have found it impossible to carry the heavy burden of responsibility without the help and support of the woman I love."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무거운 책임을 이행해 나가기가 불가능하다고 깨달았습니다."
1936년 영국의 에드워드 8세가 사랑하는 여인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버릴 때 행한 연설입니다.
1) 에드워드 8세(Edward VIII)
1837년부터 1901년까지 64년간 영국을 통치하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만들어 역사상 전무후무한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던 빅토리아 여왕, 그녀는 스무 살 때 동갑으로 외사촌 간인 독일 색스 코버그 고타가의 왕자 앨버트 공과 결혼했는데 둘 사이의 맏아들이 바로 에드워드 7세입니다. 이어 조지 5세가 191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1917년, 그는 모든 독일계 작위 칭호를 버리고, 가명(家名)을 윈저 왕가로 변경합니다.
한편 그는 1894년 서리 리치먼드에서 조지 5세의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활달한 성격인 그는 황태자 때부터 세계 각지를 여행하여 상하 각층의 사람들과 널리 사귀었으며, 사회문제에도 조예가 깊어 인망이 높았죠.
훤칠한 외모와 뛰어난 패션감각, 위트있는 성격, 격식을 따지지 않는 털털함으로 영국민의 사랑을 온몸에 받았던 에드워드 8세였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왕위 계승은 탄탄대로였고 그가 사랑때문에 왕위를 버리라고는 그 누구도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2) 윌리스 심프슨(Wallis Simpson)
그녀는 1896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해군 조종사 스펜서와 결혼했지만 남편의 의처증과 폭력에 시달리다 결혼 10년 만에 이혼한 비운의 여인 심프슨은 이혼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세계를 떠돌다가 이듬해 영국인 사업가 심프슨과 결혼하여 런던에 정착하는데 이것이 그들이 만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원래 침착하고 지적이며 세련된 감각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남편의 재력을 바탕으로 단숨에 런던 사교계의 떠오르는 별이 되는데··, 아무리 '제 눈이 안경'이라지만 평범한 외모(?)에 이혼 경력까지 가진, 더욱이 유부녀인 그녀가 현대판 신데렐라가 되리라고는 역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3) 첫 만남
사랑을 위해 고귀한 왕위를 헌신짝처럼 버려 20세기 최고의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불리는 두 사람,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1931년 어느 날 사교계의 한 파티에서였습니다.
여우사냥에서 갓돌아온 에드워드 8세(Edward VIII)가 푸른 드레스을 입은 윌리스 심프슨(Wallis Simpson) 그녀에게 "미국의 센트럴 히팅이 그립겠군요" 하고 말합니다.
이때 그녀는 "황태자 전하로부터는 그런 상투적인 말보다 독창적인 그 무엇을 듣고 싶었는데..." 하고 감히 당돌하게 답하죠. 이것이 그들의 첫 대화인데 결국 위 말에서 세기적인 사랑의 씨앗이 뿌려진 것입니다. 그들도 결국 첫눈에 서로에게 사로잡혀 버리고 이후 그들은 우정을 가장하여 만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1번 이혼 경력에 지금은 유부녀인 그녀에게 끌린 에드워드 8세는 정말 사랑에 눈이 멀었나 봅니다.
4) 왕위냐 사랑이냐의 선택
그들의 은밀한 만남은 이후에도 계속되지만 다수의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것이라, 결국 그들의 금지된 사랑도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이에 대해 영국민과 왕실은 처음에는 왕세자의 철없는 불장난이라고 생각해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죠.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엷어지는 일반적인 사랑과 달리 그들의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갔고, 급기야 1936년 아버지 선왕 조지 5세가 돌아가시게 되자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 중대한 국가적 현안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사랑이냐, 왕위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실존적 선택의 기로에 선 에드워드 8세는 그녀와의 결혼을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끝내 실패하게 됩니다.
영국 헌법에 국왕이 이혼경력이 있는 평민과 결혼해선 안 된다는 규정은 없지만, 보수적인 청교도 정신과 미국 경시 사상 속에서 왕실과 귀족, 그리고 볼드윈 수상을 비롯한 내각, 의회 모두 반기를 든 것이죠. 당시 아직 권력에 오르지 않은 윈스턴 처칠만이 그들의 유일한 지지자였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인생 최대의 갈림길에서 '왕위'보다 '사랑'을 선택합니다.
"I have found it impossible to carry the heavy burden of responsibility without the help and support of the woman I love."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무거운 책임을 이행해 나가기가 불가능하다고 깨달았습니다."
1936년 영국의 에드워드 8세가 대국민 방송을 마친 후 그날로 구축함을 타고 연인을 만나기 위해 조국을 떠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을 끝까지 반대한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죠.
"나는 당신의 모든 걸 차지하기 위해 '작은 이득'을 버렸소. 앞으로 남자들은, 나 역시 당신을 위해서라면 왕위라도 버릴 수 있다며 연인을 설득하겠지요."
이후 그는 '윈저공(Duke of Windsor)'으로 격하되고 왕위는 그의 동생인 조지 6세로 이양되는데, 바로 현재 60여 년 이상 영국 왕실을 지키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왕위를 물려받을 그의 동생인 조지 6세는 심히 말을 못하는 말더듬이였고 후계자로서 에드워드보다 훨씬 모자란 사람임에도 실행한 것은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5) 결혼
심프슨은 유부녀였기에 그녀의 법적 이혼절차가 마무리된 1937년 6월 3일 그들은 마침내 프랑스 투르 인근 샤토드캉데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국교회 신부를 주례로 모신 영국식 결혼식이었지만, 총 하객이 16명 뿐으로 왕실의 결혼식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초라한 결혼식이었죠. 단 한 사람의 하객도 보내지 않은 영국 왕실은 그녀에게 공작부인의 지위도 내리지 않고 단지 윈저공작과 함께 사는 ‘평민’ 아내로만 대우했습니다.
한편 그녀는 결혼식 날 하얀 웨딩드레스 대신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온몸을 푸른색으로 장식했는데 이는 그와의 첫 만남을 기념하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의미에서죠. 세계인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이 결혼식은 그녀의 푸른 웨딩드레스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는데, 이후 '심프슨 블루'는 귀족과 왕족에 굴하지 않은 당당한 서민을 뜻하는 색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6) 화해
결혼 후 그들은 본의 아니게 망명객이 되어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거부되었는데 이는 여전히 국민들에게 인기가 높던 그를 견제하기 위한 왕실의 조치였죠.
결국 그들은 도버해협을 건너지 못하고 프랑스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지만 죽음이 서로를 갈라 놓을 때까지 아름다운 사랑은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할 필요가 없소. 또 그렇게 하지도 않소. 나는 당신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오. 시계바늘을 지금 다시 돌려 놓는다해도 나는 같은 길을 선택했을 것이오."
1972년 그가 죽기 직전 남긴 말인데 이때 그녀는 검은색 상복 위에 블루 숄을 걸치고 장례식장에 나와 다시 한번 그들의 로맨스를 상기시키게 됩니다.
그의 사후 영국 왕실은 그가 윈저성내 프로그모어에 묻힐 것을 허락하였는데 14년 후 1986년 숨을 거둔 그녀도 결국 남편 곁에 나란히 묻히게 되죠.
마침내 영국 왕실과 그들의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인데, 그녀의 마지막 유언도 '블루 옷'으로 갈아 입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기의 사랑을 보면서 괴테의 말이 떠 오릅니다.
"우리만이 사랑할 수 있고, 이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었으며, 이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음을 믿을 때 진정한 사랑이 찾아온다."
그들의 위대한 사랑을 볼 때마다 세속의 왕관이 아니라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왕관'이라고 생각됩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의 국왕자리를 단지 사랑때문에 던져버린 낭만남자 에드워드 8세, 두 차례 이혼 경력에, 뛰어난 미인도 젊지도 않았지만, 남편의 왕위를 포기하게 만든 묘한 매력의 심프슨 부인이 어떤 분인지 정말 보고 싶습니다.
칸트가 말했습니다.
"남자의 첫사랑을 만족시키는 것은 여자의 마지막 사랑뿐이다."
세월이 흘러도 위대한 사랑은 물질도 부귀 영화도 아닌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을 낭랑공주와 에드워드 8세에서 느끼게 됩니다.
2015년 3월 4일 새봄에 다비드가 고귀한 사랑을 올려 봅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좋은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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