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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 5,7-9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9,25-27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기념해야 할 일일까요?
어쩌면 고통은 저주요 재앙일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는 고통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고통, 사랑으로 생기는 고통, 사랑하기에 받는 고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쁨을 배우게 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마치 우리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건너감이듯이, 바로 그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넘어가듯이, 사랑에서 피어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으로 건너감이요, 바로 그 고통을 통하여 기쁨으로 넘어감입니다.
우리는 바로 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양’을 통해서 그 신비를 보았습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예수님과 함께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매 맞으시면 성모님도 매 맞으시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성모님의 '통고, 통애(compassio)'를 말합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참여(partitipatio)'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아파하는 것에 참여하신 사랑입니다.
이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고, 아드님의 제사를 모성애로써 함께 바치셨으며, 당신이 낳으신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셨다.”
(교회헌장 58항)
또 바오로 6세 교종의 문헌 <마리아 공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신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계시며,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의 어머니로서 고통을 당하셨다."
(마리아 공경 7)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처참해진 모습을 애끓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장면입니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있는 성모님의 이 광경은 인간적인 고통과 신앙적인 굳셈이 함께 연출되면서, 그지없이 비장하면서도 동시에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통과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동시에 드러나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이토록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나아가 동의만하고 의탁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성원하면서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성모님과 함께 오늘 우리도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바칩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당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하소서."
하오니 어머니,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고통을 통하여 기도하고, 고통과 함께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 안에서도 희망하고, 고통 안에서 믿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그분의 어머니께서 서 계셨습니다.”
(요한 19,25 참조)
어머니!
당신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게 하소서.
믿음으로 서 있게 하소서.
십자가 밑이 저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당신과 함께 아들의 남은 고통에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고통도 구원도 함께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어제 주님의 십자가 현양 축일에는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나눔을 했습니다만, 오늘 주님의 어머니 통고 축일에는 긴 병에 성인 난다는 나눔을 하려고 합니다.
성인이라면 긴 병에도 환자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싶은 거지요.
우리의 현실을 보면, 아들은 어머니가 오래 앓게 되면 엄마를 버려 불효자가 되지만, 엄마는 아들이 아무리 오래 앓아도 그 아들을 버리지 않는데, 이 면에서 성인과 어머니는 같습니다.
그런데 성인과 어머니의 공통점이 또 있습니다.
어머니나 성인 모두 내리사랑을 한다는 점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머니의 사랑은 인간적인 내리사랑이라면, 성인의 사랑은 성스러운 내리사랑이겠지요.
그런데 성스러운 내리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사랑을 내리받아서 하는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충만해져야지만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과 성모님 사랑에는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아들의 고통에 버리고 떠나지 않고 함께 한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인류 구원과 사랑에 함께 한다는 면에서 성모의 사랑은 다릅니다.
보통의 엄마는 자기의 아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함께 하지만, 자기 아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싫어하고 자기 아들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저의 어머니도 제가 신부 되는 것을 처음에는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고 나중에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게 되셨지만, 그런 다음에도 북한 일과 같이 너무 힘들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의 경우는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들이 자신을 바치실 때 그것을 말리지 않으시고 다만 십자가 밑에서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아들을 성전에서 봉헌하실 때 가슴이 꿰 찔리는 고통을 당하실 것이라는 얘기를 시므온에게 들으셨을 때부터,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냐는 매정한 핀잔을 아들에게 들으셨을 때부터 이미 예견하고 각오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들이 죽은 다음에도 이어졌을 겁니다.
얼마 전 읽은 콜로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하지요.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남은 생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아들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모자란 부분이 혹 있다면 당신이 채우시겠다는 마음으로 여생을 사셨을 겁니다.
아들의 고통을 함께 하신 마리아는 아들의 구원도 함께 하신 우리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분이십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어머니의 고통을 거울삼아>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이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 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카 1,38).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고(마태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 구유에서 해산해야 했고(루카2,7), 또한 아기 예수님과 함께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 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의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카 2,34-35)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돌아오는 길에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여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루카 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라고 외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 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 b3,33-35)라는 말을 흘려 들어야 했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 관계를 맺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쳤습니다.
성모님에게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
(교부 푀멘)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옆에 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우리 곁에 늘 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니와 함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배우자의 아픔을 공감할 때 나타나는 표징>
오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고통은 예수님의 아픔과 그 결을 같이 합니다.
오늘은 두 복음이 나오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나중에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통 때문에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고 한 시메온의 예언이고, 그다음은 골고타에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아드님을 보아야 하는 고통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모 마리아의 고통은 마치 아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당하는 고통과 같습니다.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 당하는 고통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는 있어도 교회는 예수님을 새 아담, 성모님을 새 하와라고 부르는 교부들의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성모님으로부터 교회가 탄생하였다는 것입니다.
골고타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요한을 아들로 맡기시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이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를 맡기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아픔을 함께 느낀다는 데 있습니다.
아내의 자격은 남편이 아내와 자녀를 살리기 위해 밖에서 고생하는 남편의 힘듦을 얼마나 이해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만큼 구원자로 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분은 없으셨습니다.
영혼이 칼에 찔리는 고통을 누가 느껴 보았을까요?
그만큼 성모님께서 우리 어머니가 되기에 합당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만약 배우자가 나에게 해주는 고통에 대해 잘 안다면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까요?
남편은 분명 자신이 번 모든 돈을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내어놓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는 것을 믿으면 아내도 그 돈을 피같이 아껴 쓸 것입니다.
TV 고민 상담 프로그램에 보면 아내의 과소비 때문에 힘들어하는 남편이 나옵니다.
오은영 리포트 결혼 지옥 ‘금전적 신뢰 깨진 폭탄 부부’를 보니 남편도 분노를 참지 못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아내도 귀걸이 사는데 300만 원 쓰고 피부 관리받는 데 900만 원을 쓰는 내용이 나옵니다.
남편은 월 400씩 꼬박꼬박 가져다주며 자신은 한 달에 10만 원 이상 써 본 적이 없다는데 아내가 그렇게 과소비하고 빚만 늘어나니 신뢰가 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도 비싸게 술을 마시고 다니고 한 것은 아니기에 대부분은 남편이 아는 것들이었지만, 카드 지출 내역과 통장 지출 내역은 남편에게 보여주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신뢰가 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치미'에서 배우 주우와 김선희 부부도 비슷한 이유로 출연하였습니다.
김선희 씨가 지나치게 과소비한다고 남편이 고발하듯이 아내를 데리고 나왔지만, 사실 그렇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자녀를 키우며 자신만을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 엄마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남편은 자신이 매달 500씩 주는데 생활비는 700씩 들어가는 것에 신뢰를 잃어갔던 것입니다.
저는 남편이 아내를 위해 모든 돈을 다 주는데 아내가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혹은 아내가 돈을 얼마나 저축해 놓았는지의 재정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말은 남편이 돈 벌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느끼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돈 쓰는 것을 일일이 남편이 안다면 답답해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하겠지만,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둘은 서로 신뢰를 잃게 되고 결국 그 피해는 아이들이 보게 됩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해 부부싸움을 많이 하게 되면 자녀는 생존 욕구가 강해지고 그러면 나쁜 아이로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신자들이 내는 돈에 대해 불투명하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신자들은 본당 사제를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제와 신자들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가운데 좋은 자녀들이 탄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솔직하게 공개하고 혼날 게 있으면 혼이 나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본당에 내는 돈이 그들의 살과 피와 같은 아픔을 공감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레위기에도 신자들이 낸 봉헌은 거룩한 것이니 사제들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아픔을 아신다는 것과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 잘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의 아픔보다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더 중요하게 여겨 두렁이로 몸을 가린 것을 보면 연결이 쉬워집니다.
진실하지 않으면 자기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그러면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관계에서는 숨기는 게 없어야 합니다.
남편이 모든 것을 다 가져다주었다면 아내도 모든 지출 내역과 통장 잔고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영화 ‘허삼관’에서 하정우는 아내가 이전 애인의 아이를 배어 자신에게 시집왔었다는 것을 10년 뒤에나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남의 아이를 키웠다는 생각에 분노하였지만, 키운 정이 작지 않아 아이를 살리기 위해 계속 피를 팔며 자신은 죽어가다시피 합니다.
하지원은 남편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계속 피를 판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 신장을 아들에게 줍니다.
서로 상대의 고통을 알고 그 고통 때문에 나도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일이 사랑일 것입니다.
신뢰를 잃으면 내어줄 수 없습니다.
상대가 나와 가정을 위해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알면 솔직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상대가 나를 위해 흘리는 피의 고통을 함께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요한으로 상징되는 교회를 맡기실 수 있으셨던 것은 당신의 피를 결코 헛되이 쓰지 않는 마음을 가지셨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배우자의 아픔을 공감할 때 나타나는 표징은 아마도 먼저 재정의 투명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기쁨의 어머니>
1)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가 예수님과 사도단을 완전히 떠난 것은 예수님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마르 14,50)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믿음도 부족하고 용기도 부족했지만, 그래도 ‘사랑의 부족’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성모님과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와 ‘어떤 제자 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끝까지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되어 있는 그 제자를 우리 교회는 ‘요한 사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달아나지 않고 예수님 곁에 있었을까? 아니면 달아났다가 되돌아왔을까?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십자가 곁에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다섯 사람 가운데에서 성모님의 사랑은 다른 네 명의 사랑과는 성격도 다르고 차원도 다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고 키운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네 명의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2) 사랑은 ‘모든 것을 함께 겪는 것’입니다.
옆에 함께 있는 것도 분명히 사랑이고, 중요한 일이지만, 단순히 옆에 있어 주는 정도를 넘어서 모든 것을 함께 겪는 것은 ‘완전한 사랑’에 도달한 것입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성모님의 온 생애는 모든 일을 예수님과 함께 겪은 생애입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픈 일도, 영광스러운 일도....
3)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라고 맹세했습니다(요한 13,37).
물론 나중에 순교함으로써 그 맹세를 지켰지만,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말로만’ 사랑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 사도를 만나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고,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대답했습니다(요한 21,15-18).
그때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사랑한다면 행동으로 내 양들을 사랑하여라.”라는 당부로 해석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행동으로(온 삶으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실행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생애 전체가 그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즉 교회와 함께 계셔 달라고 어머니께 부탁드리는 말씀입니다.
‘사랑으로’ 함께 있어 주기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14,18-19)
믿음이 좀 부족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또 승천하신 뒤에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고아처럼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모든 제자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맺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모님과 함께 지내면서,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예수님께서 지키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표현만 보면 어머니를 모셔 달라고 부탁하시는 말씀인데, 뜻을 생각하면 “어머니와 함께 있어라.”, 즉 “어머니를 본받아서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성모님은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신 분이고 중심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어머니 옆에 함께 있으라고 당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 말고 누구를 본받을 수 있을까?
물론 훌륭하고 거룩하고 위대한 성인 성녀들이 많긴 하지만, 성모님은 ‘첫 자리’에 계신 분이고, 그 모든 성인 성녀들도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면서 성모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축일 이름이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로 되어 있어서 성모님의 고통에 초점을 맞춰서 묵상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고통뿐만 아니라 성모님의 생애 전체를 묵상하고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습니다.
‘생애 전체’ 라는 말은 성모님의 기쁨에 초점을 맞춰서 하는 말입니다.
사실 성모님은 ‘기쁨의 어머니’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루카 1,46-47)
그 기쁨은 슬픔을 초월한, 또는 슬픔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영원하고 참된 기쁨’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슬픔이 아니라 바로 그 기쁨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 성모님과 함께>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주님은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그 선을 베푸시나이다."
(시편 31,20)
새벽부터 내리는 가을비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시는 고통의 성모님 눈물같습니다.
어제 모처럼 따뜻하고 반가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요즘 보기 드문 책입니다.
책 표지도 따뜻했고 편안했습니다.
힘들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평범한 일상을 참으로 성실히, 따뜻하게 소박한 꿈을 펼치며 살아가는, 우리 한 수도형제도 참여한 여덟분의 젊은이들의 글 모음집, <요즘 잘 지내나요?>라는 책입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이런 글을 쓰는 영혼들은 꽃같이 아름다운 영원한 청춘입니다.
서서히 음미하며 읽을 계획입니다.
책 서두에 '들어가며' 중 일부 대목을 인용합니다.
“편하게 안부조차 묻기 어려운 요즘 시대에 8명의 작가가 모여 <요즘 잘 지내나요?>를 출간합니다.
서로 다른 지역, 삶, 경험이지만 글을 쓰며 좀 더 가까워지고, 깊어졌습니다.
이 깊이는 바다처럼 서로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돌아올 리 없는, 바쁘게 흘러간 당시의 나는 잘 지냈는지 묻고 싶기도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께도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요즘 잘 지내시나요?”
새삼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라는 말마디도 생각났습니다.
윗 여덟 분의 젊은이들, 참으로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잘 지내십니까?
잘 들여다 보면 바다처럼 깊이 하나로 연결된 삶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로 하면 예수님 중심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바다같은 깊이의 삶입니다.
오늘은 9월15일,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어제 9월14일 아드님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이은 어머님의 기념일입니다.
이왕이면 기념일이 아니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축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모자분의 축일이 참 상징성이 깊습니다.
바로 우리의 순교적 삶 중심에 언제나 살아 계신 모자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육친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어도 성모 마리아 어머님은 영원히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산책 시 어머님 대신 성모님을 넣어 어머님 은혜 동요를 부르곤 합니다.
얼마전에는 피정온 자매님들과도 함께 불렀습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언제나 여전히 우리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새로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 은혜를 생각하며 부르면 마음은 동심이 되고 참 편안해집니다.
세상의 무수한 고통 중의 어머니들 역시 고통의 성모 마리아 어머님을 생각하면 큰 위로와 힘을 받으리라 생각됩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성모 마리아가 생애 동안 겪었던 일곱가지 슬프고 아픈 사건을 가리키는 '성모칠고'가 생각납니다.
성모칠고는 가톨릭 교회의 대중적 신심입니다.
고통의 성모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이 이 기념일을 정하였고, 1908년 성 비오 10세 교황이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날인 오늘로 옮겨 기념하게 했습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성모칠고를 열거해 봅니다.
1.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보면서 훗날 마리아가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플 것이라고 예언한 일.
2. 헤로데의 눈을 피해 온갖 고생을 하며 이집트로 피난 간 일.
3.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소년 예수를 잃어버린 일.
4. 십자가 지고 가는 예수를 만난 고통.
5.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본 고통,
6.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린 고통.
7. 아들 예수를 무덤에 묻은 고통.
참으로 고난과 시련의 슬픔과 고통으로 점철된 성모님의 삶이었지만, 믿음으로 이 모두를 이겨낸 참으로 주님의 전사인 성모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 전 20절까지 계속되는 부속가는 얼마나 애절하고 깊은지 성모신심의 절정을 대하는듯 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성모님처럼 강합니다.
오늘 복음 장면도 바로 성모님의 고통스런 모습의 절정이자 철저한 케노시스 자기비움의 극치입니다.
흡사 예수님 중심으로 한 이등변 삼각형의 모습 같습니다.
저절로 우리 삶의 자리도 계시됩니다.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을 대변하는 어머니 곁에 선 애제자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성모님의 자녀가 되어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신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중심에 모신 예수님의 모습이 히브리서에 은혜롭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아마도 성모님 역시 아드님의 수난과 고통을 함께 겪으면서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도 한없이 깊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으로부터 귀한 가르침을 얻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은 고난을 겪음으로 순종을 배워가는 '순종의 학교, 순종의 여정'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요 마지막 순종은 죽음입니다.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이 되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자 희망이요,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 삶보다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인 우리를 보며 어머님께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셨던 애제자, 이 사람이 가리키는 바, 바로 우리 믿는 모두입니다.
성모님의 자녀인 우리들, 바로 우리의 복된 신원입니다.
과연 마리아 성모님의 자녀다운 삶인지 뒤돌아보게 합니다.
이어 애제자에게 하는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평생 언제나 모시고 살아야 할 성모님, 얼마나 행복한 우리들인지요!
육친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어도 마리아 성모님께서 늘 우리를 사랑으로 기르시고 타이르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니 말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 장면이 미사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모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 같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언제나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묵주기도 잘 바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효성깊은 성모님의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아침성무일도 즈가르야 후렴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비통의 어머니시여, 기뻐하소서.
당신은 큰 고통을 겪으신 후, 천상 영광으로 구원되시고,
온 누리의 여왕으로서 당신 아드님 곁에 좌정하셨나이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시나 휴양지는 그곳을 대표하는 ‘랜드마크(Landmark)’가 있습니다.
바르셀로나에는 ‘성가정 성당’이 있습니다.
뉴욕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북경에는 ‘자금성’이 있습니다.
서울에는 ‘경복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주님무덤 성당’이 있습니다.
로마에는 ‘바티칸’이 있습니다.
파리에는 ‘에펠탑’이 있습니다.
물론 랜드마크 이외에도 볼 곳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랜드마크가 있기에 사람들은 그곳을 먼저 찾게 됩니다.
신문 홍보를 하려고 LA에 갔다가 ‘맘모스 산과 요세미티 국립공원’엘 다녀왔습니다.
맘모스 산에도 랜드마크가 있었습니다.
‘데블스 포인트파일(Devils Postpile)과 레인보우 폴(Rainbow Falls)’입니다.
시간이 부족한 저는 레인보우 폴은 다음을 기약하고 데블스 포인트파일을 다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유혹을 받았을 것 같은 높은 절벽에 기암괴석이 있었습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는 ‘브라이덜 폭포(Bridalveil Falls)와 글래셔 포인트(Glacier Point)’가 있습니다.
폭포도 좋았지만 빙하 전망대에서 바라본 하프 돔(Half Dome)은 아름다웠습니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자비와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고통’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인간이 가지는 4가지 고통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가족의 죽음, 친구의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처럼 미워하는 사람을 매일 보는 것은 칼에 찔리는 것 같은 아픔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를 원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좌절입니다.
거짓된 자아에 빠져드는 고통입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것은 정체성의 혼란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집착을 버리면 고요함이 오고,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나의 세계에서 찾기도 하고, 깨달음을 삼라만상에서 찾기도 합니다.
이렇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바른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우리의 문화와 전통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스며들어있습니다.
교회의 핵심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과 부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영원한 생명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라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불교의 고통은 인간의 집착에서 시작되었다면, 교회의 고통은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불교에서 고통은 우리의 노력으로 버려야할 대상이지만, 교회에서 고통은 나의 구원과 타인의 구원을 위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원리와 기초에서 교회의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다.”
불교와 교회에서 바라보는 고통의 현상은 비슷하지만 불교와 교회에서 바라보는 고통의 본질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처님과 예수님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부처님 상은 자비롭고, 너그럽고, 풍채가 좋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예수님 상은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처절한 모습입니다.
불교의 고통이 버려야 할 것이라면 교회의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지고가야 할 디딤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모든 고통은 아드님, 예수님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고통에 함께 하시면서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성모님은 모든 고통을 받으셨지만, 좌절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고 하지만,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하지만, 성모님의 고통은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드렸고,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을 받아들여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고 신앙의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휴가 때, 경상도의 군위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여기가 너무 멋있다는 평을 인터넷에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위 지역 여행의 첫 번째 장소가 영화 촬영지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무런 감응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주변 경관도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고, 촬영했던 집 역시 별 볼 일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른 관광객들은 “너무 좋다”를 외쳤습니다.
여기가 주인공이 앉아 있던 곳이라면서 마루에 앉아 사진을 열심히 찍고, 마당에 놓인 자전거를 타면서 주인공이 타던 자전거라면서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찍부터(83년) 컴퓨터 모니터를 봐서 시력이 안 좋아진 후로 영상을 잘 보지 않습니다.
극장에 가 본 지도 거의 10년이 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영화 촬영지라고 해서 기억나는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자기가 너무 종교에만 빠져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외 성지순례를 가서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셨던 분은 계속해서 감탄사를 외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읽지 않고,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셨던 분은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십니다.
“왜 이렇게 성당만 가는 것입니까?”라는 불평만 하십니다.
주님을 알아야 미사나 기도를 통해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큰 기쁨도 얻을 수 있습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 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날에 맞게 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남기신 유언을 들려줍니다.
그 자리에서 이 유언을 들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십자가 곁에 있었던 성모님과 몇 명의 여인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특히 성모님께서 아들과 함께 하면서 더욱 하느님의 뜻을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시메온 예언자에게 들었던 “이 아기는 이스라엘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의 말이 다시금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커다란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함께 할 것을 더 분명히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큰 희망을 발견하면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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