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사도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핍박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그의 이름은「사울」로 바리세파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 그는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가말리엘문하에서 정통 율법을 배웠다. 바울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다. 〔빌3:5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사도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율법의 의로는 점과 흠이 없는」완벽한 바리새인이며, 종교인이었다. 그 들은 한 자리에서 613가지 율법을 단숨에 암송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준수하면서 조금도 흠이 없이 살아가는 자칭 의인들이었다. 또한 혈통을 무척 중히 여겼는데, 바울은 12지파 중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으로 이방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이스라엘족속이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어느 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그가 빛 가운데서 발견한 것은 자신이「흙으로 잘 빚어서 만들어 놓은 허상의 장막 집」인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은「아담과 하와」처럼 무화과나무 잎을 열심히 엮어서 자신의 허물을 가리고 있었던 가증스러운 모습을 발견하자, 그 열심과 수고를 주님의 십자가에 내려놓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제껏 그가 쌓아왔던 모든 것은 마치 바닷가모래위에 세운 모래성과 같아서 어느 날 파도가 쓸고 지나갈 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빛이 비치자 소리없이 사라져버린 새벽안개처럼 말이다.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러면 당시 사울이 생명처럼 붙들고 자랑하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물론 그의 높은 학문과 완벽한 율법을 들 수가 있겠지만, 거기에 더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열심은 예수를 증거하는 자들을 훼방하고 붙잡아다가 핍박하는 일이 사울의 임무로 당시 그것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최고의 가치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딤전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당시 그들에게 희생된 성도가 우리가 잘 아는「스데반」집사였다. 「스데반」집사가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하자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돌로 쳐서 죽이고 만다. 그런데 그 앞에서 지켜본 증인이 바로 당시의 사울이었다는 것이다.
〔행7: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저희가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사울이 그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런데 참으로 가슴 아픈 사실은, 우리 주변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증거하는 귀한 교회가 있는가 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버젓이 장사를 하면서 각종 불법을 자행하는 타락한 교회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지의 나라, 이스라엘은 어떠한가!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곳에도 살인과 방화와 테러가 끊이지 않고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어째서 이러한 끔찍한 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지 성경을 살펴보자.
이스라엘은「구약 성경」을 믿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거의가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직도 이스라엘을 구원 할 자신들의「메시야」가 오지 않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 아버지가 요셉이며 목수로 예수는 그저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출21:12이하 「살인한 자는 죽음을」「칼에는 칼」「이는 이」「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설명을 하면,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린치를 가한다면, 그 사람도 거기에 상응하는 값을 꼭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므로 살인이 복수를 부르고 복수가 또 살인을 부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중동에는「살인과 방화와 테러」가 끊이지 않고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구약 성경」은 율법서다. 율법 안에는 절대로「용서와 자비」라는 말이 없다. 오직 저주와 사망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모르는 그들은 오히려 율법을 각종 범죄와 살인 무기로 사용하여 테러와 방화를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온 인류에게 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요13:34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구약에서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율법」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사랑」이시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사랑하신 십자가의 사랑이시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면서 까지 인류를 사랑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그것은 이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죄로 타락해 있던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인류의 모든 죄인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운명하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받아서 서로 베풀면서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러므로 그들이 범죄와 살인과 방화와 테러를 일삼는 것은 하나님의 깊은 뜻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요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사도바울은 찬란했던 학문과 율법, 그리고 하나님을 향했던 땀과 그 열심을 주님의 십자가에 다 내려놓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마치 거대한 모래성이 어느 날 파도에 휩쓸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사도바울은 그렇게 빈 털털이가 되어 보잘 것 없는「장막 집」으로, 거지「나사로」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우뚝 나타났다는 것이다.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