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맹 (色盲, Color Blindness)
색조(色調)의 식별 능력이 없는 상태(색각 이상)로 대부분이 선천적이며, 후천적으로는 망막질환이나 시신경질환의 경우에 볼 수 있으나 그 예는 드물다. 사람의 망막의 시세포에는 추상체(錐狀體)와 간상체(桿狀體)가 있는데, 추상체는 밝은 곳에서 작용하여 색을 감각하지만 간상체는 어두운 곳에서 작용하여 색을 감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 이상의 밝기가 없으면 사람의 눈은 색을 감각하지 못한다. 색맹은 전색맹과 부분색맹으로 대별되며, 부분색맹은 적록색맹과 청황색맹으로 나뉘고 또한, 적록색맹은 적색맹과 녹색맹으로 세분된다.
1) 전색맹
: 매우 드물며, 전혀 색을 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계의 사물을 흑백사진과 같이 다만 명암이나 농담(濃淡)을 느낄 정도이다. 녹색(정상자는 황색)을 가장 밝게 느끼고, 적색을 어둡게 느낀다. 대개는 약시(弱視)를 동반하고 시력은 보통 0.1 이하이다. 이것은 추상체의 기능이 없고 간상체의 기능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2)부분색맹
: 적록색맹이 색맹 중에서 가장 많다. 적록색맹은 적색과 녹색그리고 회색, 청황색맹은 청색과 황색그리고 회색의 구별이 곤란하다. 적록색맹은 적색맹과 녹색맹으로 나뉘고, 적색맹은 적색과 그 보색(補色)인 청록색이 무색으로 보이며, 녹색맹은 녹색과 그 보색인 적자색이 무색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신호등의 교통신호를 잘못 보는 수가 있다. 적록 색각 이상자는 한국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1/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반성열성유전(伴性劣性遺傳)이 행하여지기 때문이다. 그 유전자는 성염색체(性染色體)에 있는데, 여성에서는 성염색체가 1쌍 있으므로 두 성염색체가 함께 그 유전질을 갖지 않는 한 증상으로서는 발현하지 못하며, 남성에서는 1개뿐이므로 유전질이 있으면 증상이 발현한다.
따라서, 여자에게는 이 증상의 출현율이 낮고, 흔히 건강하고 정상으로 보이는 여자를 통하여 그 자녀에게 유전된다. 양친이 혈족결혼을 할 경우는 발현율이 높아진다. 색맹환자의 대부분은 선천적이므로 그 결함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녹색 또는 적색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는 별 지장이 없지만, 직업의 선택에 있어서 특히 교통, 운수 관계나, 여러 가지 미묘한 색을 분별해야 하는 직종(디자이너, 화가, 과학자, 의사 등)에는 부적당하다.
현재 선천성의 색각 이상에 대한 치료법에는 약물요법·필터 사용(최근에는 콘택트렌즈에도 사용)·보정연습(補正練習) 등이 있지만 어느 것이나 아직 확립되어 있지는 않아 치료법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색약(色弱)이란 색맹의 정도가 가벼운 것을 말하지만 그 구별은 확실하지 못하다. 건상자(健常者)와 마찬가지로 색조를 느끼기는 하지만 그 감수능력이 낮고 색에 대한 자극역치가 건상자보다 높다. 거의가 적색약과 녹색약이다.
색맹을 최초로 연구한 사람, 사실은 그도 색맹?
최초의 색맹 연구자는 색맹
근대적 '원자론’의 창시자인 영국 과학자 존 돌턴(John Dalton)은 색맹(色盲)’
연구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심한 적록색맹이었던 돌턴은 어느날 어머니에
게 드릴 선물로 회색 양말을 고른 것이 뒤늦게 회색이 아닌 빨간색이었음을 알고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고한다.
그 뒤로 색맹 연구에 매달린 돌턴은 색맹의 원인이 눈 내부에 있는 액체가 빛의 빨
간 부분을 흡수해 버리는 데 있다고 믿었다. 1794년 색맹에 관한 최초의 논문이 발
표되기도 했다. 그는 죽은 뒤 자신의 안구를 꺼내 색맹 연구에 써 달라는 유언을 남
기기까지 했다. 훗날 색맹에 관한 그의 생각이 틀린 것으로 판명났지만, 그의 연구
를 기리기 위해 지금도 '적록색맹’을 그의 이름을 따 '돌터니즘(Daltonism)’이라
고 부르고 있다. 1766년 영국 컴벌랜드주의 작은 촌락인 이글스필드에서 가난한 직
물공의 아들로 태어난 돌턴은 초등학교만 다녔지만 독학으로 수학과 라틴어를 깨우
칠 만큼 똑똑했다. 그는 12살 때 천재성을 인정받아 마을 국민학교 교장이 되기도
했으며, 26살이 되던 1792년에는 맨체스터의 뉴칼리지의 교수로서 수학과 자연철학
을 강의하기도 했다.
돌턴은 화학이나 물리학은 물론 식물학, 곤충학, 수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많
은 연구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돌턴이 자신의 과학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기상 연구였다. 그는 1878년부터 1844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날마다 기
상을 관측해 무려 2만장의 데이터를 남겼다.
기상 관측을 얼마나 규칙적으로 했는 지 연구실 부근 부인들이 돌컨이 기상 관측을
할 때 시계를 맞추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돌턴은 무역풍의 발생 원인을 규
명했으며 비의 원인이 기압이 아니라 온도 변화에 의한 것이란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하지만 과학 발전에 있어 돌턴의 가장 큰 공로는 근대적 '원자론’의 정립이
다. 원자론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데모크리토스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주창되었으
나, 이는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인 가설에 불과했다. 돌턴은 정비례의 법칙, 배수비
례의 법칙, 상호비례의 법칙 등 과학적 근거에 입각해 원자론을 정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