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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시 모음 21편
《1》
꽃의 통곡을 듣다
고형렬
꽃의 통곡을 듣다
밖에서 누가 부르니까 꽃이 피는 겁니까
누가 찾아왔다 간다 나를 찾아올 사람들은 죽었는데
주먹을 자기 얼굴 앞에 가만히 울리고
가운뎃손가락 마디로 현관문을 똑똑똑 노크한다
먼 곳이다 작년의 그루터기와 얼음을 밟고 오는
그 신의 증인들일까
나는 대답을 놓쳤다 안에 주인 분 아니 계십니까
혀는 있는데 언어가 없어 대답할 수 없었다
물은 고야 침묵한다
방문이 실례가 된 적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나는 오늘 안에 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다
안에서 부름켜가 인간의 마음을 듣고 있었다
숨어 있는 것이 있다면 대답 않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래서 꽃이 오는 길이 매우 춥고 그 시간은
우리가 태어나던 침묵의 흐름입니까
그림 밖에서 누가 부르지 않아도 꽃은 피는 것입니까
하지만 가지에 저렇게 많은 꽃이 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표시가 아니겠습니까
등뒤에 그리고 뇌 속에
그들이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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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부의 나뭇가지
고형렬
새 한 마리가 내부의 나뭇가지에서 탈출을 시작했다
나뭇가지는 자라면서 새의 탈출을 방해한다
나뭇가지에 앉기를 가지들은 바란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날카로운 가지들은
새의 발에 딱 맞게 자랐다
그 어디에도 앉을 수 있는 나뭇가지들이 퍼져 있었다
아침마다 햇살까지 들어왔다
퍼지지 않고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도 새는 그 나뭇가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이 나뭇가지 속에서 눈을 맞고 비를 맞고 살았으면서
그 나뭇가지를 탈출하고 있었다 오늘까지
몸부림은 저놈의 구조와 질서 안에서 벗어나려는
하나의 죽음 충동 같았다
나뭇가지에서 벗어난 새는 다시 생을 받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는 새가 호루라기처럼 울고 있다
아마도 그가 떠난 뒤, 그 나무는 죽었을 것이다
아직도 그 흔적이 인간의 내부에 남아 있다
그대의 나여, 검수(劍樹)의 나뭇가지에서 벗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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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달개비들의 여름 청각
고형렬
낮달 아래 손 잘려 도회로 팔려 나간
둑 아래 청미나리 자랐던 무논 둑에 무리지 었다
여름을 건너가던 달개비들이 물소리를 듣고 있다, 덩굴져
먼 저수지에서 해갈 방류를 하면
달개비들이 눈을 뜨고 꽃도 피우지 않고 물을 기다린다
차르르 차르르 한 번씩 꿀꺽, 물을 끊는 소리
온통 달개비들이 넌출거리는 물 마시는 물소리 듣는다
푸르르 푸르르 진저리치고 온 머리를 흔들어대며
헉, 헉 저 물달개비들이 얼굴을 묻는 여름 개울둑 아래
자신들의 날갯죽지 속으로 숨어든다 부끄러운 듯
물을 튀기며 물속 흰 자갈들 밟고 튀는 햇살들
떨어질 듯 고개 깊이 숙이고, 해갈 속에 일제히 주먹을 쥐듯
그만 보라색도 아니고 백색도 아닌 큰 화개 위의
연하늘 색 꽃총상들 눈감고 꽃잎을 묶는다
조용히 있어야 집중되고 물이 올라온다는 걸 안 풀줄기들
물소리, 아 물달개비들 날갯소리, 여름의 물 아우성
고무판 노란 오리발갈퀴가 뒤로 회똑 뒤집히면서 앗
몸이 출렁여, 온 태양의 들판엔 물질이 한창이다
햇살 속에 입맛을 돋우는 푸른 혓바닥 달개비 발바닥
청각에 풀을 들이고 마디 푸릇한 달개비 생을 추억할 적에
달개비들 청각은 녹색 시각에서 피어난다
물마디 굵도록 기갈 속에서만 네 동그란 입술은 통통해져
달개비들 넋 놓고 물을 먹는다, 독한 초록의 뿌리들
양가죽 빛의 목덜미를 하얗게 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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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물고기의 신화
고형렬
새는 노출되어 있고 물고기는 숨어 있다
새는 불안하고 물고기는 은자이다
그래서 새는 흰 구름이 되어도 좋다고 했고
물고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세상이 끝난 뒤
물고기는 흰 구름이 될 수 없었다
새가 흰 구름이 될 때 물고기들은 새가 되었다
사람이 없는 어느 세상에서인가
흰 구름이 물이 될 때 물고기들은 새가 되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은
저 미래의 끝을 향해 노래하며 죽고 살며
흘러갔고
나 외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 당도했다
불안한 곳에 살았던 새들이 구름이 될 때까지
흰 구름이 망각하고 물고기가 될 때까지
출처 시집 :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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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늘구멍 속의 낙타
고형렬
나는 지금 바늘구멍 속을 지나가고 있다
지겨운 머리통은 겨우 빠져나왔는데
어깨가 통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쌍봉낙타는 바늘구멍 속에 걸려 있다
지독한 비극은 해학이 되고 말았다
이 바늘은 이번에 운이 좋지 않은 것 같다
내 운명처럼 내 몸을 통과시키지 못할 것 같다
나는 바늘을 질질 끌고 간다
바늘이 목과 허리를 마구 찔러댄다
밖을 내다본다 구름이 한가롭다 지구가
이처럼 맑은 가을을 만들 때가 있다
한글이 만들어지던 조선 초기나 당대나 마찬가지
바늘구멍을 빠져가난 바람들이
신들의 양식이던 화강암 흰돌을 우물우물 먹고 있다
또 한쪽 어깨가 빠지지 않는다
눈알도 귀도 입도 손도 다 빠져나왔는데
내 뒤에 있는 이 어깨가 나오지 않는다
울불퉁한 쌍봉낙타가 더럽게 바늘에 걸려 있다
처음 나의 목표는 전방 일 킬로미터가 아니었다
결국 나는 이렇게 바늘에 걸려 살 것이다
다 살고 나면 바늘만 그 자리에 남을 것
이 바늘구멍이 내 몸이 걸렸던 곳
이 사실을 누구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죽음도 생각하며 생생하게 살아있을 때
나는 목걸이처럼 바늘을 목에 걸고 저 길을 걸었다
보게 나의 이 기막힌 바늘 목걸이를
엉거주춤 바늘구멍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를
나는 지금 바늘구멍에 걸려 있다
출처 : 계간 《시인세계》 (2007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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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배구
고형렬
허공으로 공을 올린다, 두 팔을 벌려 하늘로 올린다
흰 공이 아름답게, 공중으로 올라간다
바느질 자국이 보였다
타지지 않도록, 아프게 꼬매져 있었다
파란 하늘에 하얀 공
공은 화려하다
공은 다시 내려간다, 하얀 네트를 넘어 상대방으로
상대방은 공을 받는다, 토스를 한다
가슴을 활짝 펴고, 하늘로 공을 올린다
아, 아름다운 여자여
그때 그녀는, 공을 보내고 쓰러졌다
그때 내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튤립이 하늘에 활짝, 피었다 졌다
번쩍번쩍, 하더니 꽃은 사라졌다
한 시대가 갔다, 아름다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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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버스에서 자는 어머니
고형렬
흰 양말에 남자 고무신을 신었다.
통치마 아래 반들거리는 정강이
항포돛색 보자기로 네 귀를 묶고
풀다라를 안고 졸고 있었다.
엷은 구름에 바다는 훤한 새벽
불켜고 버스는 북쪽으로 간다.
자식들의 늦은 등교 찻간에서
나는 동해안 어머니를 자주 보게 된다.
옆구리에 혹마냥 불거진
흔들리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보고
나는 해송 달아나는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관광 여름 한철을 따라서
어머니는 주문진으로 나가시는가 보다.
언덕바지나 동구에 삑 설 때마다
찰싹찰싹 어린 파도 소리 들린다.
저러고 눈만 감은 어머니를
나는 바람결에 알고 있다,
어머니는 해변가 여자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 조으는 6척 어머니
짚또아리 드신 장사 같은 어머니는
아무 표정도 없이 자고 계신다.
더 위로 위로 오늘은 가시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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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고형렬
고성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 북천에게 편지 쓰지 않는다 눈이 내려도
찾아가지 않고 멀리서 살아간다
아무리 비가 내려도 바다가 넘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 바다에게 편지 쓰지 않는다
나는 그 북천과 바다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더는
멀어질 수 없을 때까지
나와 북천과 바다는 만날 수 없다
오늘도
그 만날 수 없음에 대해 한없이 생각하며 길을 간다
너무 오래된 것들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너무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나의 영혼 속에 깊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성 북천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길을 가다가도
나는 몇날 며칠 그 북천의 가을 물이 되어 흘러간다
다섯 살 때의 바다로
기억도 나지 않는 서른다섯 때의 아침 바다로
다 말하지 못한 것들만 거울처럼 앞에 나타난다
출처 시집 :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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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비정치적 남양주시
고형렬
나는 가끔 남양주시 이 메인도로를 통과했다
남양주시는 모른다, 이런 문장은 맞는 문장이 아니다
나는 이 안 되는 문장을 계속 만들려고 한다
나는 남양주시가 남양주시청과 남양주경찰서를
결코 모른다는 생각, 나는 이 이상한 생각에 막힌다
어느 시민도 이 모름을 눈치 채지 못한다
나는 오늘 정오의 햇살의 남양주시가 되고 싶었다
아니 남양주시의 정오의 햇살을 밀치고 장님의
남양주시가 되려 한다 마른 햇살의 남양주시 정오!
생각만 해도 개체의 죽음과 삶을 훌쩍 뛰어넘는 듯
시청 앞에 국화, 눈구름 냉기 알알한 늦가을
슬픔과 기다림의 감정이 삭은 남양주시의 가을 정오
하지만 남양주시의 가을은 남양주시를 알지 못해
자신이 어디 가고 있는지 모르고 통과하고 있다
나와 말은 절망 속에 햇살을 잡고 의문을 시작한다
남양주시를 방문한 나를 모르는 장님의 남양주시
남양주시가 남양주시에 있음을 나는 아슬아슬하게 믿어
그 소란한 가을빛과 언어의 남양주 시를 빠져나간다
이 통과는 너무나 눈부셔, 차를 노변에 세우지만
남양주시는 가을 하늘 밑에 혼자 불타고 있다
할 말도 아주 없는, 가을도 모르는 나의 가을 남양주시
나도 남양주시가 되어 가는 가을의 남쪽 남양주시
그대여 아는가 알 길 없는 내 마음의 이 가을의 언어가
오늘도 남양주시가 모르는 남양주시를 통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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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람 꽃
고형렬
복숭아 꽃빛이 너무 아름답기로서니
사람꽃 아이만큼은 아름답지 않다네
모란꽃이 그토록 아름답다고는 해도
사람꽃 처녀만큼은 아름답지가 못하네
모두 할아버지들이 되어서 바라보게,
저 사람꽃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는가
뭇 나비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여도
잉어가 아름답다고 암만 쳐다보아도
아무런들 사람만큼은 되지 않는다네
사람만큼은 갖고 싶어지진 않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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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어디서 사슴의 눈도 늙어가나
고산지대
고형렬
파란 고산지대엔 벌써 가을
처연함에 반소매는 아무래도 짧은 것 같죠
또 언제 이렇게 되었나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첫가을이 온 것은
아침 해도 스치면 떨어지는 이슬을 먹으려고
산마루에 떠올랐다 그 해 있는 곳은
시의 나라에선 천공 속의 바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파도와 흰 구름과 새벽과 함께
이렇게 파란 배추와 무는 처음 보았네
한번쯤 팔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게 되는 것은
다시 거둘 수 없는 생의 높이 때문일지
어른보다 먼저 아이들 얼굴에
가을이 와 있었다
아이들이 늘 세상과 아버지를 걱정하죠
가을은 그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또 지나가고
생채기 하나 유리금 긋는 저 고산지대
어디서 사슴의 눈도 늙어가나
출처 시집 :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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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어떤 새에 대한 공포
고형렬
나뭇가지에 앉아 심장을 꿰맨다
새벽 한시의 대낮, 머리에 도끼가 솟은 검은 새
반고리관의 공명은 미명 속으로 사라졌을 뿐
일할의 빛이 구십구할의 어둠을 지운다
기구한 형상의 유전자를 남기고 결국 노숙(露宿)이 된 꿈들
다시 소통되지 않는 빛과 말
치실은 그들의 이빨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새는 너덜대던 도시와 자기 생을 기억하지 않고
발톱과 날개는 서로 상상하지 못한다
한점을 친다, 밤을 색칠한 필름 속 나뭇가지
혼돈을 향한 아침 길을 다시 잃고, 하늘옥상에
새의 집을 지은 유역의 오랜 기숙자들
손거울 들고 심장을 깨 영혼을 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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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음악을 죽인 거리
고형렬
오래된 순간이었다.
음악상자가 길바닥에 떨어진 것은
치아교정이 부서지고 옷이 찢어졌다 하체가 해체됐다
보청기 모양의 아기, 고무타이어에 으깨지고
모든 기능은 멈추었다
그녀의 귓구멍만한 레시버, 생의 거짓이 도로에 누웠다
바리케이트 너머 사이렌을 울어도
환한 열 손가락은 하늘을 향해 보두 폈다 마디에 그녀의
힘이 빠져나가는 도심
흩어진 머릿결 속에서 빨간 피가 천천히 흘러나왔고
한 마리, 피의 줄기 같은 우스꽝스런
음악이 죽은 거리는 갑자기 어느 생의
아침이 딱 멈춘 텅빈, 비현실도로
나는 매일 그녀가 죽은 그 자리를 피해 건넌다
마치 펭귄이 남극에서 달로 건너듯
왼쪽 빰과 오른쪽 귀에 음악이 파닥이는 오전 8시
한 여자가 아스팔트에 작은 코를 박고
쓰러져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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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입맞춤의 난해성
고형렬
입술은 아주 작은 부위를 덮었다
가장 취약한 부분에 붙어 있는 살이다
물고기 입술처럼
부드러운 것에 감싸여 무척 예민하다
물체가 못 된 분자들의 알레고리가
턱뼈와 광대뼈를 치켜세운 곳
어느 미장공의 미숙한 약술이었다
잇몸에 임플란트를 박고 인공치아를 세운
떡 벌어져 있는 곳
웃으면서 심장을 엿보는 그곳에서
아직 나의 친구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이빨 뒤에 숨었지만
입맞춤은 그러나 입술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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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창가
고형렬
그 눈웃음을 본 지가 얼마나 되았는가
눈물이 언제나 흐르고 있는
그리하여 언제나 굴러떨어질
마음을 가진 그대 눈을 본 지
얼마나 되았는가 굳은 가슴 서러워,
서글서글한, 물기 머금은
그대 깊은 눈,
그 눈빛 다시 만나 길을 가고 싶다
그대 어깨도 그대 팔도 그대 손도
그대 조용조용한 발걸음도
아 나 그대 잊은 지 참 오래 되았다
세월이 다 지나고 나서야
오늘 그대 눈웃음 떠오른다
모든 것 바쳐 다시 그대 눈 보러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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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처자
고형렬
주방 옆 화장실에서
아내가 아들을 목욕시킨다
엄마는 젖이 작아 하는 소리가
가만히 들린다
엄마는 젖이 작아
백열등 켜진 욕실에서 아내는
발가벗었을 것이다
물소리가 쏴아 하다 그치고
아내가 이런다 얘, 너 엄마 젖 만져봐
만져도 돼? 그러엄. 그러고 조용하다
아들이 아내의 젖을 만지는 모양이다
곧장 웃음소리가 터진다
아파 이놈아!
그렇게 아프게 만지면 어떡해!
욕실에 들어가고 싶다
셋이 놀고 싶다
우리가 떠난 먼 훗날에도
아이는 사랑을 기억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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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파산자
고형렬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나는 불행해져 있었다
자정 무렵 화장을 지운 아내는 아직도
침대 속에 다리를 걸친 채 늦잠을 즐기고
아이들은 고수부지로 나가고 없었다
냉장고와 세탁기, 텔레비젼, 초현실주의 그림
그러고 보니 내가 축적한 재산이란 것이 고작
이런 것밖에 없었던 것 같다 파산법원의
명령이 다 끝난 날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의 모든 프로페스와 학업과 결혼한 출산들이
여기서 이렇게 멈추어 버리고 말았던 것
나의 아침은 너무나 무겁고 어두웠다
나의 이 서울의 마지막 아침은 처참하였다
참구할 수가 없다 나의 모든 관계의 당사자들을
나는 내가 얼마나 숨 가쁘게 살아왔는지
갑자기 오물을 토할 것 같은 울음이 울렁였다
기억할 수 없는, 복원할 수 없는 나의 파산
나는 그 이후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아무에게도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나는
오늘부터 이 도시와 무관한 한 부재로 남는다
어디선가 해조음이 들려오다 조용해졌다
나는 저 지상의 내가 없어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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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편집위원회
고형렬
나는 시인이면서 위원이었죠
당신은 절대 위원회에 들어가지 마세요
나는 위원회에서 간신히 떠나왔어요
부끄러워요, 정말
내가 그들의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별하는
위원회 위원이었다는 사실이.
아무튼 당신은 위원회 일을 하지 마세요
위원회 일은 위험해요
당신을 착각과 함정으로 빠트리죠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위원회란 근본적으로 좋은 일은 아니에요
그런곳에 오래 있지 마세요
지혜를 내요, 당신이.
위원회에서 나올 길은 얼마든지 있어요
비가 그치면 다시 찾아가보세요
그가 혼자 뭘 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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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현관을 들여다보다
고형렬
인간은 벽을 만드는 존재
벽을 만들지 않고 침대를 놓을 수 없는 존재
벽 안 바닥에 식탁을 준비해야 하는 존재
어떻게 저 벽을 넘어갈 수 있었을까
직각의 벽을 타고 오르면 거기
지붕이 있는 저 미로를 인간은 어떻게 발견하고
설계했을까 내가 이 벽을 타고 그대에게
갈 수 없다는 걸 언제 알았을까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존재이유는
오직 방 만드는 일뿐이었을 테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한 상상이 벽의 한계를
새롭게 열어준다, 몽골의 아침 첫추위 속에서
나는 인간의 벽을 보고 서 있다
벽 앞에서 나는 앞뒤로 열리는 두 짝의
투명한 출입문을 들여다보자
낯선 인간이 그 유리문을 밀치고 빠져나온다
아주 오래된, 피곤한 짜증스런 얼굴
저 안에 대체 어떤 통로와 방이 있는 걸까
벽 안쪽 벽에는 인간의 무엇들이 걸려 있을까
나는 지금 이 의문에 사로잡혀
영원히 그 문 앞에 서 있는 다른 한 존재
아직 돌아오지 않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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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화살
고형렬
세상은 조용한데 누가 쏘았는지 모를 화살 하나가
책상 위에 떨어져 있다
누가 나에게 화살을 쏜 것일까.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화살은 단단하고 검고 작았다.
새 깃털 끝에 촉은 검은 쇠.
인간의 몸엔 얼마든지 박힐 것 같다
나는 화살을 들고 서서
어떤 알지 못할 슬픔에 잠긴다.
심장에 박히는 닭똥만 한 촉이 무서워진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아파 왔다
혹 이것은 사람들이 대개, 장난삼아 하늘로 쏘는 화살이,
내 책상에 잘못 떨어진 것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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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흰 비둘기 아파트
고형렬
오랜만에 찾아온 그 아파트는 따뜻하였다
양평에선 광열비가 무서워
이불 속에서 장자를 읽고 여행을 간다
십 년
파란 하늘 아래
어느 낯선 이의 한 구절이 지나가는 아파트는
언니 집 근처에서 구름과 사는 칠층 하늘
바라보고 누워서 늘 눈 감던
그 창과 그 발코니와 그 거실들
남의 아파트 사이로 김포 강안이 내다보이는
서울 서쪽은
늘 불안하게 해가 떨어지던 곳
흰 페인트칠한 한낮의 아파트 너머로
정오는 몇 마리 흰 비둘기를 넘겨주고 있다
다치지 않은
머리 위 높은 옥상 끝에서 그 날의 햇살들은
여전히 쪽쪽, 쪽쪽거리며
작은 젖니로 고드름을 빨며 놀고 있는
오늘 오전 11시 14분, 시간은 소리가 없다
실내는 하얗고 추억은 파랗게 물든다
삼십대는 육십대가 되었고
학교에 가 있는 여학생은 삼십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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