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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조선 궁궐 탐방 후기[경복궁과 청와대] <1>
<2024년 4월 13일>
2023년 정월부터 시작한 조선 왕릉 40기 탐방을 지난 3월 마치고,
이젠 조선 궁궐 탐방이다. 조선의 5대 궁궐이 서울 도심에 모여 있어
탐방이 한결 수월하다. 첫 번째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으로 간다.
경복궁(景福宮)은 1395년에 창건된 조선의 법궁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270여 년간 방치,
1867년(고종4)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어렵사리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거의 훼손, 1990년부터 복원 중이다.
청와대는 경복궁의 후원, 고종 때는 수궁(守宮)이 있었고,
일제 때 총독관저, 해방 후 경무대를 거쳐 청와대로 ~~~,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으로 "청와대는 국민 품으로!!!"
첫 번째 태조가 지은 경복궁 그리고 청와대(4월 13일)
두 번째 태종이 지은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5월 11일)
세 번째 경희궁과 덕수궁 그리고 종묘까지. (6월 8일)
♣ 청와대 자리는 고려의 이궁(離宮)이 있었던 자리였다. [고려 숙종 9년(1104년) 창건]
개성을 도읍지로 정한 고려는 경주에 동경, 평양에 서경, 한양에 남경 등 이궁을 두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 소개 글의 얼굴 사진, 멋지게 보여 퍼왔다.
[경복궁{景福宮)]은 1392년 개국한 조선이 1395년에 처음으로 세운 으뜸 궁궐로, 경복은 '하늘이 내린 큰 복'이란 뜻이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목멱산을 안산으로 삼아, 정문인 광화문 남쪽으로 육조거리를 조성,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
주요 건물을 일직선으로 배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이궁인 창덕궁, 창경궁 등 모두 불타 없어진 후,
1610년 창덕궁을 재건, 경복궁은 270여 년 방치, 고종 2년(1865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추진하여 1867년 중건하였다.
당시 재정 부족으로 원납전, 당백전 등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밀어부친 것은 세도정치 청산, 왕권강화의 강한 결기가 옅보인다.
근정전 천장에 황제국 전유물인 7조룡(제후국은 5조룡)을 그려 넣은 것이나, 500여 동의 건물을 건립한 것도 그러하고 ~~~.
그러나 1910년 일제강점기에 주요 전각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철거 내지 매각 등으로 훼철되는 수모를 겪는다.
1990년부터 복원사업을 꾸준히 진행 중에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 흥선대원군 주도로 경복궁 중건 때 양반들은 원해서 내는 '願납전'이 아니라, 원망하면서 내는 '怨납전'이란 말도 있었답니다.
경복궁의 궁궐 조성에 있어 음양오행, 오상 등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참고로, 한양도성 대문이나, 궁궐의 전각, 문(門) 등의 명칭만 보아도 방위를 짐작할 수 있다.
東(仁, 봄, 나무, 청색, 청룡), 西(義, 가을, 쇠, 백색, 백호), 南(禮, 여름, 불, 적색, 주작), 北(智, 겨울, 물, 흑색, 현무)
중앙(信, 환절기, 흙, 황색, 황룡)
우리가 통상 '궁궐(宮闕)', '궁(宮)' 또는 '궐(闕)'로 얘기하지만, '궁궐'은 임금이 기거하는 집으로 통치 기능까지를 포함하여,
출입문에 망루까지 제대로 갖춘 대궐을 의미한다. 용도 등의 기준에 따라 法宮, 離宮, 그리고 行宮, 別宮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궁궐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 등 왕족이 기거하는 집을 '宮'이라 부르기도 한다.
만남의 장소 : 매표소 옆 협생문 부근.
수문장 교대의식
흥례문 방향
수문장 교대의식 15분 남짓 거행, 10분 쯤 자유관람 후 입장하기로 ~~~.
10시 10분 흥례문 입장
흥례문 안쪽 안내도 앞에서 경복궁 탐방 일정 안내
흥례문 ~ 근정문 ~ 사정전 ~ <휴식> ~ 수정전 ~ 경회루 ~ 강녕전 ~ 교태전 ~ 자경전 ~ 향원정 ~ 건청궁 ~ 집옥재 ~ 신무문
이 대목에서 팁 하나!
궁궐 건물의 품격은 전, 당, 합, 각, 재, 헌 루, 정의 順이다. 물론 크기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그 건물의 용도 등이 감안된다.
흔히 임금에게 전하(전 아래), 황제에게 폐하(섬돌 아래), 그리고 합하, 각하 등 상대를 적절히 높여 부르는 호칭 또한 연관이 있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8층 옥상공원에서 경복궁 조망.
'3문3조', 3문(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을 거쳐 근정전에 오른다. 3조는 외조, 치조 내조를 말한다.
경복궁 금천인 영제천을 밤낮없이 지키는 상상의 동물 서수(瑞獸), 천록(天祿)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영제교 양쪽에 있는 네 마리 중 서북쪽에 있는 이 서수만 혀를 내밀고 있어 흔히들 '매롱 서수'라고 재미 있어 한다.
[근정문] 일제강점기 때, 이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건립(1926), 아픈 역사에 새삼 가슴이 아려온다. 언제든 국력이 쇠하면 ~~~.
♣ 광화문을 건춘문 북쪽(현 국립민속박물관 부근)으로 옮기고, 흥례문과 영제천 영제교 철거 후 '日' 字모양의 총독부 건물 신축
*** 1945 미 군정청 청사, 1948 정부 수립 후 중앙청 청사, 1986 국립중앙박물관, 1995~1996 건물 철거.
(철거 잔해 부재 일부를 독립기념관 서편 구석 자리에 전시하고 있다)
*** 흥례문과 영제교는 2001년에 복원.
옛날 사진 하나 소환합니다.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 행랑
경복궁 조정의 바닥재, 박석의 고마움에 새삼 감사.
*** 강화도(주로 석모도) 박석은 햇살이 아무리 강해도 난반사로 눈부심이 거의 없으며, 또한 미끄럽지도 않다.
*** 품계석은 1품에서 3품까지는 正, 從을 각각, 4품부터는 구분없이, 총 12개를 세우며,
문관은 동쪽(동반), 무관은 서쪽(서반)에 서며, 동반, 서반을 합하여 양반(兩班)이라 한다.
*** 배수를 위하여 북쪽에서 남쪽으로 70 ~ 100cm 정도의 높이 差를 두고 있다. 엄청난 소낙비에도 침수 피해가 없다.
1394년 9월 한양 천도 확정 후 12월에 설계를 마치고 1395년에 준공했다는 경복궁, 정도전의 지혜와 능력이 놀랍다.
경복궁에는 국보로 지정된 근정전과 경회루가 있으며 다수의 보물들이 있다.
모퉁이에 사자를 닮은 석수 품에 새끼 한 마리, 언제 보아도 귀엽다. 선조들의 해학적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짐작하기 어렵다.
가운데 임금의 가마가 지나는 '답도', 두 마리의 봉황이 새겨져 있다.
2개 층의 월대를 두고 사신과 12지신을 배치. '말'의 모양새도 재미가 넘친다.
근정전의 용상, 외국 사신 접견 등 행사용 정전으로 일월오봉도 앞 높은 위치에 어좌를 두고, 위에는 닫집(당가)을 설치.
어좌에는 반드시 세워두는 [일월오봉도]는 해(임금), 달(왕비), 다섯개의 봉우리(조선의 국토), 소나무와 물(충신과 백성)을 상징.
*** 탁자는 기록 담당 사관 용으로 한 사람은 말씀, 다른 한 사람은 행동을 빠짐없이 소상히 기록한다.
외관은 2층이나 실제 내부는 1층이다. 천장에는 7조룡(七爪龍), 즉 일곱 개의 발톱을 가진 두 마리의 황룡을 새겨 넣었다.
[정(鼎)] 청동으로 만든 세 발의 향로 모양으로 왕권을 상징.
[드므] 물을 담은 항아리, 화마(불귀신)이 드므에 비친 자기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함으로써 화재예방.
사정전 구역으로 넘어 가는 근정전 뒤편 가운데의 12지신상은 '쥐'.
사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정전이다. 사정전은 임금의 집무실, 신하들과 정사 논의하는 업무 공간으로 흔히 편전이라 한다.
*** 자세히 보면 궁궐 건물의 처마에는 그물망, 즉 '부시'를 설치하여 새나 뱀 등의 접근을 차단.
(예전엔 명주실을 꼬아 그물망을 만들었으나 요즈음은 쇠 그물망을 쓴다.)
부시 설치가 적당하지 않은 경우는 오지창을 설치하여 새가 앉지 못하도록 원천 차단.
편전의 어좌, 지난 3월 사전 답사 때는 분명 이러했는데 지금은 치워지고 없는 것 같다. 보수 작업에 들어갔나?!
*** 운룡도(雲龍圖), '용(임금)은 구름(신하)가 있어야 승천한다'
*** 바닥에 마루만 깔려 있고 온돌이 없어, 추울 때는 좌우에 있는 만춘전(東쪽)과 천추전(西쪽)을 이용.
[천추전]에는 온돌방을 위한 아궁이가 보인다.
사정전의 특징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창문을 모두 열 수 있어 여름엔 기막히게 시원할 거 같다.
행각의 이름표가 재미 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天字庫, 地字庫, 玄字庫., ~~~. 천자문 순서대로네.
기념품 가게 [사랑] 앞 쉼터에서 휴식. 뒤편으로 화장실도 있고 ~~~.
근육질의 밑동을 가진 [서어나무] 꽃을 피웠네.
서어나무 꽃
[휴식 끝]
[수정전] 한글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 자리에 들어선 건물로, 1867년 지어진 궐내각사 중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다.
*** 수정전은 왕이 자주 출입하던 관청이라 정면에 월대(月臺)를 두었다.
*** 집현전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는데, 본 기억은 없다.
*** 수정전 현판 대신 집현전 현판을 걸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세조 때 이미 집현전을 아예 없애버린 관청인데 ~~~.
[경회루(慶會樓)]
왕실의 큰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건물로 1867년 재건. 48개의 돌기둥 위에 높이 위치한 2층 마루는 3겹으로,
중심 3칸은 天地人, 그 바깥 12칸은 12달, 가장 바깥 24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하며,
누각을 받치는 돌기둥 또한 바깥 24개 사각기둥은 땅을, 안쪽 24개 원형기둥은 하늘을 의미하며 각각 24절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 궁궐 건물 중 경회루의 잡상이 11개로 가장 많다.(참고로 중국 자금성의 중심 건물로서 정전인 태화전 잡상이 11개)
*** 좌측 작은 정자는 이승만 대통령 때 국사가 어려울 때 낚시줄을 드리우고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 태종 때 이 경회루 건축을 주도했던 박자청은 천민 출신으로 공조판서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조선 전기 최고의 건축가.
주요 업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의 구성 및 주요 건물 설계, 국보 경회루를 8개월만에 신축, 청계천 조성 등등.
[향오문]
[강녕전] 왕의 일상적인 생활공간으로 독서와 휴식, 면담 등을 하던 곳으로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지붕이다.
*** 용마루가 없는 이유를 흔히들 '왕이 용이므로 한 침실에 두마리의 용이 있을 수 없다'라고들 얘기는 한다. 교태전 또한 같다.
*** 1917년 창덕궁 화재로 이곳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 옮겨 창덕궁 휘정당과 대조전을 재건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5년 복원하였다.
[양의문]
양의문 좌우 행각에 붙어 있는 강녕전 굴뚝,
*** 새겨진 글씨는 우측에 천세만세, 좌측에 만수무강(두 번째 사진) , 전서체라 눈에 익숙하진 않다.
[교태전]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궁 안 생활을 총지휘하던 곳. 뒤편에는 왕비를 위한 계단식 화단(아미산)을 조성.
***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교태전을 뜯어 창덕궁 대조전 재건에 사용되었고, 이 건물은 1995년 복원.
[아미산 굴뚝] 태종 때 경회루 연못을 크게 조성하면서 나온 흙으로 계단식 화단을 쌓아 아미산을 조성하고,
장식적인 6각 굴뚝(4기)과 관상용 수석(괴석)을 배치한 정원으로 뒷산인 백악의 정기가 침전까지 이어지기를 염원!!!
*** 강녕전과 교태전 건물은 1995년 복원한 것이지만 굴뚝은 1867년 중건 당시의 것으로 미적 감각도 뛰어나 보물로 지정.
*** 경회루 연못 조성과 상관없이 원래 여기가 높은 지역이었다는 설도 있긴 하다.
흰꽃은 '옥매', 다양한 꽃에 연못이 두 곳. 낙화담(落霞潭)과 함월지(涵月池), '저녁 노을이 내려 앉은 연못'과 '달빛에 젖은 연못'.
*** '아미(蛾眉)'는 아름다운 미인의 눈썹을 의미, 중국 쓰촨성의 아미산(峨嵋山)은 해발 3.099m의 중국의 4대 불교 명산이다.
황토색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6각 굴뚝은 위에 점토로 만든 연가(煙家 - 집처럼 생긴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 4개씩 올렸다.
*** 굴뚝의 각 면마다 봉황 학 박쥐 해치 사슴 대나무 소나무 국화 매화 불로초 등의 벽화를 설치.
[자경전(慈慶殿)] 헌종(24대 왕)의 어머니 신정왕후 조대비를 위한 거처로 1867년 중건 당시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성.
고종 즉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조대비에게 흥선대원군의 보답이라 볼 수도 있다.중건 후 화재로 소실되어 1888년 재건.
*** 여름용 거실을 위해 돌출 건물에 누마루를 설치한 청연루(淸讌樓)를 비롯하여 여러 부속 건물과 시설을 두었다.
뒤편 담장의 굴뚝은 여러 온돌방의 굴뚝들을 하나로 합친 집합굴뚝으로 무병장수를 기원, 십장생을 비롯한 여러 동식물을
조각하여 예술품으로 승화, 그 덕분인지 왕비 중 가장 장수하였으며 83세에 승하.
*** 효명세자가 일찍 승하하여 실제적인 중전 생활은 없었으며 아들 헌종 즉위로 왕대비가 되었다.
[청연루]
[자경전 십장생 굴뚝]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해·산·구름·바위·소나무·대나무·거북·사슴·학·연꽃·불로초 등과 자손 번영을 위해 포도 등도 그려져 있다.
위쪽에는 불로초를 물고 있는 학이 따로 그려져 있으며 아래쪽에는 쇠와 불을 먹었다는 상상의 동물 불가사리가 새겨져 있다.
[자경전 꽃담] 또한 연한 황토색 벽돌로 만자무늬, 귀갑무늬 등이 이어지며, 그림은 꽃과 나비, 대나무, 국화, 석류, 모란 등,
글씨는 '樂疆( ) 萬年張春'이 새겨져 있는데, '즐거움과 정정함을 오래오래 누리소서' 워 그런 뜻이겠지.
*** 이 꽃담은 복원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많고 문화재청도 인정을 하는 것 같다.(다만 다시 복원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듯)
예전 사진과 비교해 보면 그림이 9개인데 현재는 8개, 글씨는 낙강 다음에 '만세(萬世)'가 빠졌다는 주장이다.
담장 밖 병아리꽃이 제철이다.
복사꽃의 마력
까치도 님 생각에 젖었나. 별 움직임이 없다.
[향원정(香遠亭)]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사각형 향원지 가운데에 동그란 섬을 만들어 지은 육각 2층 정자
'향원'(香遠)은 중국 학자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愛蓮說) 에서 따온 말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라는 뜻.
취향교는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58년 남쪽에서 진입하는 취향교를 설치, 후에 밝혀진 원래의 모습으로 2021년 제대로 복원.
※ 경복궁 중건 의궤는 발견된 게 없으며, 2018년 [경복궁영건일기](총 9책)가 일본 와세다대학 중앙도서관에 있음이 확인되어,
비록 그림은 없지만 1865년 4월 2일부터 1868년 7월 4일까지의 경복궁 중건 기록을 파악할 수 있는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취향교는 목재 다리
2021년 현재의 취향교를 복원하기 전에 있었던 취향교(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58년 복원한 다리) <퍼온 사진>
[건청궁]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1873년 고종의 주도로 건청궁을 짓고 명성왕후와 기거,
궁궐양식에서 벗어나 양반가옥 살림집처럼 사랑채(장안당), 안채(곤녕합), 복수당 등 부속건물과 행각으로 구성.
규모는 양반가옥의 상한선 99칸에 비해 250칸이나 되니 그리 작은 규모는 아니다.
신하들의 건립 반대에 부딪히자 국고가 아닌 내탕금으로 충당하기도 했다는데, 1876년 경복궁 화재로 창덕궁으로 이어한다,
1885년 되돌아왔으며, 1887년 미국 에디슨회사의 발전기를 설치,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다(일본, 중국 보다 빠르다)
*** 향원지의 물을 끌어다 증기로 발전하는 발전소로, 키우던 잉어도 죽고, 소리도 요란하고, 전등도 켜졌다 꺼졌다 제멋대로,
하여 '건달불'로 불리기도 했다고들 한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곤녕합에서 일본에 의해 시해, 이웃 녹산자락에 한 줌의 재로 ~~~,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건청궁은 빈집이 되고,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헐고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짓는다. 해방 후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 1998년 철거하였다.
2007년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여긴 올 때마다 가슴이 아려온다.
*** 건청궁의 모든 건물들에는 단청을 하지 않았다.
안채, 곤녕합
수수꽃다리 향기에 취하다.
돌배나무 꽃도 만발
사랑채, 장안당
[집옥재 권역]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되돌아온 고종은 창덕궁에 있엇던 집옥재, 협길당 등을
1891년에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 와 자신의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
집옥재 서편의 팔우정은 2층 정자로 세 건물 모두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집옥재와 팔우정은 도서관으로 관람객에게 공개 중.
4월 중순 날씨가 여름보다 더 덥다. 아니 느낌이 그렇다. 청와대 입장 전에 충분한 휴식.
[신무문]
[청와대] 입구에서 뒤돌아본 [신무문]
첫 번째 조선의 궁궐 경복궁 탐방을 마치며,
정도전이 얘기했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는
조선의 아름다움, 거기에 깃든 애민정신까지 함께 느끼며,
한때 경복궁의 후원이기도 했던, [청와대]로 향한다.
이후 일정의 사진 기록은 2편에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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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봤습니다 많은 지식을 얻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길, 자주 함께 걷기를 고대합니다.
궁안을 구석구석 다~찾아본 의미 있는
답사였어요 .
자세한 설명에 감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하나씩 전각들이 복원되면서
관람코스가 자꾸 길어지겠지요.
아무튼 좋은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