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쇼 이야기 (각종 패션쇼 정보) |
패션쇼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화려함의 극치이다. 늘씬한 모델들, 화려한 조명, 아름답기 그지없는 옷들. 그러나, 모델들 몸매 보러 패션쇼 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게 없다. 패션쇼는 모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모델들은 다만, 옷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패션쇼의 주인공은 디자이너다. 첫 번째, 디자이너에 대한 기본지식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옷을 보는 감각을 익혀야 한다. 패션쇼 알고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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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쇼는 살이 있는 모델을 활용한 상품의 연출 방법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 모델의 움직임을 위한 장소 (무대, 통로 등)가 마련되어야 하며, 관객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옷(상품)을 준비한다. 패션쇼는 "테마"를 갖는데, 이 테마는 보여줄 상품의 종류와 대상 관객을 바탕으로 설정한다. 예를 들어 신부를 위한 패션 쇼는 예비 신부와 그의 어머니들을 주된 대상으로 새로운 스타일과 소재를 소개하게 될 것이다. 패션쇼는 상품의 사용 방안에 대한 예를 제시하여 관객의 관심을 끌고 구매의 욕구를 일으키게 한다는 점에서 윈도의 디스플레이와 역할이 같다고 볼 수 있으나 패션 쇼의 무대 배경은 윈도우의 것과는 달리 짧은 시간 동안만 사용되므로 너무 강한 표현의 배경은 쇼의 실제 진행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되도록 개방적이고 보기에 편하며 암시적인 것이 좋다. 패션 쇼의 무대에는 계단, 단, 경사로 등이 사용되는데, 단의 높이와 넓이가 적절해야 효과적이며 램프는 경사가 완만해야 한다. 이들 요소는 안무 계획에 맞추어 준비하도록 한다. |
소품
모델들이 직접 들거나 부착하고 나오는 우산, 신문, 카메라, 모자 등 전체 패션쇼의 분위기를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
조명
패션쇼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조명의 밝기, 색채도 연출되는 상품에 따라 함께 바뀌어야 한다 |
음악
모델들의 움직임을 리드하고 관람객을 집중시킨다. 상품 구성에 따라 음악의 템포를 변화시키면서 진행된다. 쇼의 테마, 컨셉트, 심볼과 로고 등을 포스터, 광고, 프로그램, 우편물 등으로 알려야 하며, 이들 요소를 실제 패션 쇼의 진행 시나리오와 무대 장식 등에도 활용해야 효과를 높일 수 있다. 패션 쇼의 최종적 효과는 모든 계획과 진행이 주최측의 프로모션 활동과 연계되어 이루어질 때 강하게 나타난다. |
세계적인 패션쇼
세계적인 패션쇼(콜렉션)라고 칭함을 받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패션잡지 관계자, 각국의 바이어들이 그야말로 시장 바닥처럼 몰리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한 명성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다. |
1. PARI COLLECTION 2. MILANO COLLECTION 3. LODON COLLECTION 4. NEW YORK COLLECTION (다른 콜렉션에 비해 명성이 떨어지나, 점점 인지도가 높아 가는 추세) 5. S.F.A.A COLEECTION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콜렉션이다.) |
패션 쇼의 종류
1. 업계 패션 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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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감 회사, 의류 제조업체, 의상 디자이너들에 의해 주최되는 쇼로서 관객은 업계 관련자 및 언론 관련자이다. 쇼의 목적은 텍스타일 회사의 경우 새로운 천의 디자인, 기술, 패션 경향을 알리는 것이고, 의류 제조업자나 의상 디자이너의 경우에는 그들의 독창성, 질, 패션 해석을 알리고자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도 열리고는 있지만, IMF 이후 거의 열리지 않고 있고, 개인 디자이너들의 패션쇼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또한, 업계 패션쇼의 경우 일반인들에게는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미리 정보를 알아내어 관계자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다. 요즘은 유료패션쇼도 많아졌다. S.F.A.A의 경우 작년까지 1회당 5,000원이었으나, 올해 1,0000원으로 올랐다. |
2. 소매업자의 패션 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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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업자가 다양한 목적으로 주최하는 패션쇼로서 상점 종업원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것 두 종류가 있다. 상점 종업원들에게 판매 촉진할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기 위해 개최하는 쇼는 종업원에게 새로운 상품의 판매 소개와 판매 방법을 제시하는 쇼이다.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계절별, 부문별, 상점 전체, 디자이너, 제조업자브랜드 별로 상점 고객을 대상으로 정보 제공 목적 하에 실시하는 쇼인데, 상점의 레스토랑, 통로 등에서 개최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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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의 코디네이터 선정
패션쇼 코디네이터는 패션 지식과 인내심을 갖고 있고 쇼 연출 스태프를 구성할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하여야 한다. 코디네이터는 스태프 선정, 테마 개발, 상품 선정, 패션 쇼 스크립트 작성, 리허설 준비, 기타 필요 조절 등의 책임을 진다. |
관객의 선정
쇼의 목적에 맞는 대상 고객의 선정과 알맞은 인원의 확보 |
패션 쇼 진행 계획 수립
쇼의 실시 일자, 장소, 진행 시간, 테마, 모델 수, 고객 선정, 상품 선정 등에 대한 계획을 수립한다.각 항목별로 고려 사항이 있는데 대개 쇼의 진행 시간은 45분을 넘지 않아야 하며 50¡60개의 스타일을 보여줄 수 있다. 상품은 쇼의 테마에 맞는 것을 선정하여야 한다. 모델은 직업 모델을 사용하는 것이 좋으나 예산과 의도에 따라 다양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 모델 수는 의류의 수에 의해 결정된다. 보통 모델 한 명당 세 벌에서 네 벌 정도의 옷을 입는 것이 적당하다. |
무대 계획
무대, 램프, 런어웨이, 음악, 조명, 소품, 배경 디스플레이, 슬라이드 비디오 테이프 쇼 등을 준비한다. 또한, 무대 뒤에 탈의 공간 준비한다. 모델이 화장을 하고 머리를 손질하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공간을 무대에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마련한다 |
기타
해설자 선정과 스크립트 준비/인쇄 프로그램 준비/리허설/광고, 포스터, 초청장, 티켓 등을 활용하는 프로모션-여러 가지 프로모션 활동 중에서 패션 쇼는 자극적이고 극적인 효과 때문에 다른 종류의 프로모션과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하고 강한 효과를 갖고 있다. 연극적 요소를 활용하여 기획, 실시되는 패션쇼는 또 다른 의미의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네킹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을 모델로 사용하는 패션쇼의 필수적인 요소인 움직임과 안무는 연극의 그것과는 다르게 준비되어야 한다. 패션 쇼는 다른 모든 프로모션 활동과 같이 다양한 형태의 계획이 가능하다. 즉, 대상 고객을 세분화할 수 있으며, 특정 목적을 가진 다양한 스폰서에 의한 쇼를 계획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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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enciaga (발렌시아가)
스페인 태생의 디자이너로 파리에서 활약한 20세기 패션계의 거장. 1937년 파리 조르주 상트 거리에 메종 발렌시아가 창설. 57년 심플리시티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슈미즈 드레스(일명 색 드레스)를 발표, 패션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샤넬은 그에 대해 “발렌시아가만이 유일한 꾸뛰리에다. 그의 재단 기술은 완벽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림 그리는 정도의 일러스트레이터에 불과하다”라고 얘기했을 만큼 디자이너로서 그의 능력은 탁월했다. 데생 없이 모델에 천을 걸쳐 직접 재단해 ‘가위의 마술사’란 평을 받고 있다. 디오르가 로맨틱한 스타일에 승부를 걸었다면 그의 스타일은 좀더 심플하고 쉬크하다. 앙드레 꾸레주, 엠마누엘 웅가로, 위베르 드 지방시 등이 모두 그를 거쳐갔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1895년 스페인의 비스크(Basque) 지방의 구타리아(Gutaria)라는 어촌에서 태어났다.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재단기술에 매료되었고 결국 재단과 봉제를 혼자 독학하였다. 어느 여름 마드리드에서 온 부유한 카시토레라는 귀족이 쿠타리아의 한 빌라에서 머물렀을 때 그 가족의 할머니인 카사토레 후작 부인이 그녀의 드레골 슈트(Drecoll suit)를 카피하도록 10대 초반의 발렌시아가에게 허락했을 때 그는 이미 이 수트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에 매료되었다. 그가 그의 모방품을 건네주었을 때 후작부인은 모방품에 놀랐으며 그로부터 발렌시아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마드리아에 있는 샾에 일자리를 얻은 그는 옷 제작기술을 익혔고 후작부인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자신의 테일러링 샾을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자신의 출생지인 산 사바스조, 세 곳에 갖게 되었다,. 샾을 운영하면서 파리에 정기적으로 여행하며 모델을 구입하는 한편 꽤 많은 디자인을 하였으며 1037년에는 파리에와 주위의 도움을 받아 메종을 오픈 하였다. 그가 파리에 오픈한 메종은 30년이 넘게 지난 후에도 가장 창조적인 꾸띄르 센터로 남아 있으며 그의 디자인은 열광적인 환호를 받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는 전후시대의 가장 우아한 여성들을 포함한 고객층을 형성해 왔으며 기존의 방법과는 다르게 젊은 디자이너들을 훈련시켰다. 지방시뿐만 아니라 앙드레 꾸레주와 엠마뉴엘 웅가로도 자신을 이끈 지도자로 발렌시아가를 뽑을 정도로 훌륭한 선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비롭고 완벽하나 디자이너로서의 자리를 굳혀갔다. 그의 디자인은 인체의 직접적인 집착 없이 항상 완만한 곡선으로 오히려 인체와의 관계가 건축적 이었으며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모양의 이브닝 드레스도 많았다. 발렌시아가의 옷은 완벽하게 재단된 패브릭의 차가운 확산과 피부의 따뜻함 사이에서 생기는 매혹적인 분열감으로 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새로운 패션은 그다지 정밀하지 않고 쉽게 만들어진 옷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0년대말에는 대단히 복잡하게 만들어진 옷의 정밀함이 그다지 정밀하지 않고 쉽게 만들어진 옷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발렌시아가는 점차 꾸띄르에 대한 관심을 잃어갔고, 1968년에는 급기야 메종의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그의 은퇴는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그의 고객들에게 매우 큰 놀라움을 주었으며, 4년 뒤에 운명을 달리했다. |
Calvin Klein (캘빈 클라인)
현대 여성을 위한 깔끔하고 기능적인 모드로 유럽과 다른 심플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창조한 미국 디자이너. 여성복과 남성복, 스포츠웨어, 진 캐주얼, 언더웨어, 홈 라인, 향수에 이르는 그의 다양한 라인은 바쁜 현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케이트 모스, 마키 마크, 크리스티 털링턴은 그를 대표하는 모델들. cK Calvin Klein은 그의 세컨드 브랜드이다. |
Chanel (샤넬)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통칭 코코 샤넬. 모자용 소재였던 저지로 드레스를 만든 것이 계기가 되어 1915년 패션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뎠다. 샤넬의 대표작은 샤넬 로고를 새긴 골드 버튼과 브레드 트림을 꼬아서 만든 테이프로 가장자리를 마무리하여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살린 수트. 특히 샤넬의 트위드 수트는 오늘날까지 ‘우아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템이다. 그의 사후 칼 라거펠트가 지금까지 오뜨 꾸뛰르,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을 총괄하고 있다. |
Charles Frederick Worth (찰스 프레데릭 워스)
1825년에 출생한 오뜨 꾸뛰르의 창시자. 소년 시절 런던의 의류점에서 견습생으로 일했고 20세에 파리로 건너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의상실을 열면서 직물 매입, 아틀리에 전속모델, 연 4회의 컬렉션쇼 개최 등 경영과 창작을 통합하는 운영법을 조직화했다. 1860년 나폴레옹 3세의 황후 위제니의 디자이너가 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높였고, 프랑스 모드 산업에 활기와 번영을 가져와 ¡R모드의 왕’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창작에 있어서는 우아하고 화려한 크리놀린 스타일(밑단 쪽으로 가면서 벌어지는 커다란 피라미드형의 스커트)의 전성시대를 개막했고, 1866년에는 프린세스 라인 드레스, 그 다음에는 페티코트를 드러나게 하는 튜닉 모드를 제안했다. |
Claire McCardell (클레어 맥카델)
미국 출신의 여성 디자이너로 미국 프레타 포르테의 창설자. 글래머러스한 느낌이 가미된 실용적인 ‘아메리칸 룩’을 완성한 미국의 대표적인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있다. |
Collection (컬렉션)
패션쇼가 디자이너의 작품 또는 일반 브랜드의 상품을 소개하는 발표회를 총칭한다면 컬렉션은 보다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다. 오뜨 꾸뛰르나 프레타 포르테의 메이커가 시즌에 앞서 발표하는 작품이나 발표회가 컬렉션이다. 컬렉션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정기적으로 1년에 두 번 봄·여름(S/S)과 가을·겨울(F/W) 시즌별로 개최된다는 점과 다가오는 시즌의 유행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또한 일반 관객 위주가 아닌, 패션관계자(바이어, 프레스)를 대상으로 한다. |
Comme des Gar ns (꼼 데 가르송)
검은 색을 애용하면서도 때때로 강렬한 원색류를 멋지게 쓰는 일본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가 이끄는 브랜드. 문화복장학원 출신으로 1981년 파리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에 진출, 새로운 소재와 커팅 기술,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파괴 패션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유럽에 일본 패션 붐을 일으켰다. 형식이란 틀에 얽매이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그녀는 미완성의 헴 라인, 풀어헤쳐진 솔기, 복잡하게 얽힌 꿰매 붙이기, 특이한 주름 처리, 비대칭적인 것, 다양한 찢기와 소재 믹싱 등을 선보였는데 21세기를 맞는 동서양의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콤 데 갸르송에 대해 감탄하고 이것을 연구하고 논의도 하지만 좀처럼 어느 범주로든 분류하기 힘든 브랜드이다. 이 일본 브랜드는 1969년 레이 가와쿠보가 처음 시작했다. 그녀는 그전에는 아사키 카세이라는 디자이너 밑에서 일했다. 그녀의 디자인은 도전적이고 독특하고 드라마틱하다. 여러 해 동안 그녀는 의상에 울룩불룩한 형태를 가하여 여성적인 실루엣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 도전장을 던졌다. 또 솔기를 드러낸다든지 목선을 늘어지게 하여 기술적인 면에 주목을 받았다. 1981년에 가와쿠보는 파리에서 첫 번째 컬렉션을 열었다. 패션 평론가들이‘히로시마 시크 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 컬렉션에서 그녀는 두 가지 시도를 하였다. 하나는 당시까지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던 검정색을 색의 왕좌에 올려놓았던 것이고 또 하나는 비정상적으로 구멍이 나고 뻣뻣한 울을 형태를 잡지 않고 사용하여 실루엣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신체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그후에 가와쿠보는 자신을 상징하는 상복 팔레트와 결별하였지만 ( " 이제는 검정색에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검정은 사용하기가 좀 까다롭다.") 여전히 성과 신체에 대해 재해석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미적인 손상이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실험적인 디자인을 하고 있는 콤 데 갸르송은 궁극적으로 남녀의 구분을 넘어선 옷을 만들기를 열망하며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가와쿠보의 실험정신은 콤 데 갸르송을 패션 무대를 뛰어 넘어 예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다. 그녀의 불룩하고 엉거주춤한 의상은 현재 머스커닝엄(Merce Cunningham)발레 회사의 무희들이 입는다 1987년 테크놀로지 패션 연구소(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선정한 20세기 디자인을 이끌어 가는 여성들 중에 가와쿠보도 들어 있다. |
Dolce& Gabbana (돌체 앤 가바나)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 이탈리아 출신의 이 두 남자 디자이너는 이탈리아인 특유의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그러면서도 섹시한 감성으로 전세계의 패션 마니아들을 감동시켰다. 매 컬렉션마다 매니시한 스타일, 란제리 룩을 매우 관능적으로 제시해온 이들은 돌체 앤 가바나에 이어 D&G로 일약 트렌드 메이커가 되었다. |
Donna Karan (도나 카란)
스마트하고 섹시한 커리어 우먼을 위해 세련된 스타일을 제시한 미국 디자이너. 아메리칸 여성복을 대표하는 앤 클라인의 인턴 사원으로 디자이너로서의 첫 출발을 다졌다. 현대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기능적인 아이템의 중요성을 인식, 편안하면서 매력적인 일상복을 만들어냈다. 베이직 아이템간의 코디네이션을 제시하는 그녀의 ‘시스템 드레싱’은 멋쟁이라면 꼭 알아야 할 패션의 기본 원칙. 세컨드 브랜드 DKNY로 서브 브랜드 붐을 일으켰다. |
ELLE (엘르)
프랑스의 여성 패션 잡지로 1945년 11월에 엘렌 고든 라자레프(He Gordon Lazareff)에 의해 창간되었다. 창간부터 전면을 컬러 사진으로 장식하고, 젊은 사진작가들을 발굴해 패션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1960년대 초기에는 오뜨 꾸뛰르의 하이 패션을 무시하고 적극적으로 기성복 전문 디자이너의 작품을 게재하면서 젊은 여성들의 감각에 부응하는 실용적인 패션에 지면을 할애했는데, 이를 "엘르패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전 세계 30개국에서 발간되고 있으며 한국판은 92년 11월에 첫선을 보였다. |
Elsa Schiaparelli (엘자 스키아파렐리)
1928년 스포츠 웨어 전문숍을 오픈 하면서 패션계에 입문한 스키아파 렐리는 달리, 콕토, 자코메티 등 당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아방가르드 한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를 패션에 도입, 패션계의 초현실주의자로 불렸다. 신체의 곡선을 무시한 당시의 모드와는 달리 어깨를 패드로 강조하고 가슴선을 살린 라인을 확립하면서 당시의 모드를 리드했다. 또 드레스에 곁들인 기상천외한 모티프로 유명한데, 해골 스웨터, 하이힐을 거꾸로 쓴 듯한 모자, 서커스의 익살꾼이나 곡마단 댄서를 본뜬 단 추 등이 유명하다. 또 그녀가 내놓은 로즈 바이올렛 컬러는 ‘쇼킹 핑크’로 불리었으며, 처음으로 지퍼를 패션에 도입하기도 했다. |
G&G (지앤지)
Green & Global의 약자. 그린 앤 글로벌은 개인 숍을 오픈 했거나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신인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패션 그룹. 민선경, 박혜림, 박교돈, 서상호, 여은호, 이윤정, 이정선, 이정은, 정재엽, 홍은경 등이 지앤지의 회원들이다. |
Gap (갭)
창업주 도날드 피셔는 갭을 통해 아메리칸 캐주얼 웨어가 우리 생활에 얼마만큼 편하게 다가오는지를 실감케 해준 인물이다. "속옷처럼 편안히 입는다’는 철학은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영국, 독일, 일본 심지어는 미국 문화에 폐쇄적인 프랑스에서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현재는 그의 아들 윌리엄 피셔가 기업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아이템을 즐겨 입는 사람이라면 주저 없이 갭을 선호할 것이다. 남성복, 여성복, 아동복, 유아복을 생산하고 있다. 가격대가 저렴하며 무엇보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디자인이 구비되어 있어 폭넓은 고객층을 전세계에 확보하고 있다. |
Gaultier J.P. (고티에)
패션계의 악동으로 불리는 프랑스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 마돈나의 뾰족한 콘 브래지어를 디자인해 유명하다. 프랑스 디자이너들 가운데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인물로 꼽힌다. 여성복과 남성복을 믹스한다거나 언더웨어를 아우터 웨어화한 점 등 패션사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언뜻 보면 파격적으로 비치는 게 그의 패션이지만 아이템 하나 하나를 자세히 뜯어 살펴보면 의외로 그 트렌디한 성격이 내포하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되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
Gianni Versace (지아니 베르사체)
메두사 심볼의 주인공. 1948년 이탈리아 태생. 78년 자신의 이름으로 첫 컬렉션을 발표한 이래 성공 대로를 달렸다. 베르사체 의상의 특징은 심플한 라인에서 더욱 돋보이는 호화로운 컬러와 화려한 프린트에서 찾을 수 있다. 엘튼 존, 고 다이애나 비, 엘리자베스 헐리, 나오미 캠벨, 실베스터 스텔론 등 수많은 유명 인사가 그의 고객이며 세계의 톱 스타들과 각별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난해 7월 마이애미 자신의 집 앞에서 피살되어 세계 패션계를 충격 속에 몰아넣었다. |
Giorgio Armani (지오르지오 아르마니)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테일러드 수트의 대가로 그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패션 스타일로 정착됐을 정도. 경직된 남성 재킷에서 어깨 패드를 제거, 부드러운 실루엣의 수트로 전세계 여성들을 매료시켰다. ¡R아르마니 스타일’이란 베이지 빛깔의 차분하면서 고급스러운 느낌을 의미한다. 지오르지오 아르마니는 여성복에 컨셉의 전환을 가져왔고 크리스챤 디올의 ¡°뉴룩¡±°u ¸¶¸R 퀀트의 미니 스커트 이래 패션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잡고있다. 행정 분야에 더 많은 여성들이 진출하게 되면서 여성들은 너풀거리는 타이를 단 브라우스와 충충한 진회색 수트의 룩 대신에 새로운 종류의 파워 드레스를 요구하게 되었다. 상당히 세련된 형태의 디스트럭처드 여성용 수트에 남성복 직물을 사용하고 있던 아르마니는 바야흐로 그의 성공을 보장해 줄 여성군단을 두팔 벌여 맞아들였다. 이제는 수박만 달러의 사업의 헤드가 된 아르마니는 디자이너의 길을 조심스럽게 밟아나갔다. 피아첸짜에서 온 이 진지한 북부인은 고전적인 훤칠한 외모와 마블 블루의 눈매 덕도 보았지만 집요하고 지칠줄 모르는 노력의 대가로 현재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모든 가정마다 의사 한 명과 법률가 한 명"이라는 이탈리아인들의 격언에 따라 아르마니는 의사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의학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군대에서 의무 복무기간을 마친 1957년에 그는 이탈리아 최고의 백화점인 라 리나센테에 가서 일했다. 이곳에서 그가 한 일은 윈도우를 장식하고 바이어를 상대하는 일이었다. 1964년에는 이탈리아의 텍스타일 제조업체로 남성복과 여성복 라인도 제조하는 니노 세루티로 옮겼다. 이곳에서 아르마니는 남성복의 히트만(Hitman) 라인을 디자인했다. 최고의 텍스타일들이 다양하게 가득 찬 곳에서 일한 경험과 사업의 테크닉을 배운 점은 아르마니의 미래의 성공에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의 여성복과 남성복 라인을 보면 사용된 원단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70년에 아르마니는 친한 친구인 서지오 갈레오티의 성화에 용기를 내어 프리랜스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렸다. 새 사업은 대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불레바르드, 몬테오로, 시콘스, 기보 같은 제조업체에 디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1974년에 최초의 지오르지오 아르마니 맨즈컬렉션을 발표했다. 그리고 1975년에 갈레오티와 함께 첫 번째 여성복 라인을 런치시키기에 충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의 재킷은 즉각 히트했다. 그리고 일부의 회의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착실히 아르마니 룩을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상당히 오리지널한 컨셉의 이브닝 드레스는 매년 아카데미 시상식 때마다 찬탄을 받았다. 시상식에는 조디 포스터, 미셸 파이퍼를 비롯한 많은 남녀 수퍼 스타들이 아르마니의 옷을 입었다. 아르마니는 고객의 요구에 매우 민감하다. 그는 때로는 자신의 환상을 맘껏 펼쳐보고 싶은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아르마니 스타일”을 고수하게 된다고 한다. 아르마니는 일에 매달리는 성격이지만 가끔씩은 브로니, 산트로페즈, 포르테데이마르미, 판텔레리아에 있는 그의 집들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 쉬고 싶을 때가 있다 |
Givenchy (지방시)
50-60년대 고전주의의 거장으로 불리는 위베르 드 지방시는 자크 파뜨의 제자로 패션계에 입문, 엘자 스키아파렐리, 크리스토발 발렌시 아가에게 패션을 배워가며 52년에 자신의 첫 숍을 열었다. 이후 53년, 영화 <사브리나>에서 오드리 헵번의 의상을 담당, 이 영화로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하면서 ‘사브리나 룩’을 전세계적으로 유행시켰고, 이후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었던 원피스, 선글라스, 검은 밀짚모자를 히트시켰다. 지금은 패션계에서 은퇴했지만 고전적이고, 기품 있는 스타일을 대변하는 디자이너로 여전히 유명하다. |
Gucci (구찌)
마구 메이커로 출발한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 창업자인 구치오 구찌에 이어 아들 바스코와 로돌포가 뒤를 이으면서 구찌는 가방과 구두 등의 피혁 제품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회사가 되었다. 90년대 들어 구찌의 명성은 퇴조하는 듯했으나 미국 디자이너 톰 포드를 영입하여 전통성에 입각했던 구찌의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변신시키는 데 성공했다. 거리나 나이트 클럽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섹시하고 모던한 실루엣을 ‘구찌화"시킨 톰 포드의 출현으로 구찌는 일약 트렌드 리더가 되었다. |
JDG (제이디지)
중앙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수상한 디자이너 그룹. 김형철, 길연수, 김태각, 양복형, 이우미, 최유경, 이석태 등이 현 제이디지의 디자이너들이다. 김동순, 루비나, 박윤수, 김철웅 등도 모두 제이디지 출신이다. |
Issey Miyake (이세이 미야케)
1938년 히로시마 출생의 이세이 미야케는 기라로쉬와 지방시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71년 미야케 디자인 스튜디오를 오픈 해 도쿄와 뉴욕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컬렉션을 발표했다. 직물에 대한 연구와 창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고, 그의 미래적인 감각은 일본의 전통과 기술을 디자인에 응용, 믹스하여 자신만의 디자인 세계를 이룩했다. 특히 90년대 초에 그가 발표한 주름 의상(플리츠 플리즈)들은 전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
K.F.D.A. (카프다)
1961년 설립된 문체부 산하의 공식 패션 단체. 공식 명칭은 대한 복식디자이너협회. 김연주, 안지히, 안윤정, 주미선, 김해련, 황재복 등 20여 명이 넘는 디자이너로 구성되어 있다. |
Mary Quant (마리 퀀트)
1959년 미니 스커트를 발표해 일약 스타가 되어버린 영국 디자이너. 모즈 룩을 유행시킨 공헌자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컬러 스타킹, 롱부츠, 비닐 가공된 레인 코트, 리브 스웨터, 핫 팬츠 등 당시로는 충격적인 아이디어로 런던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패션 센터"로 발돋움시켰다. 의상뿐만 아니라 화장품에도 모험을 걸어 논룰 메이크업 (non-rule make-up, 자신이 좋아하는 색을 사용하는 화장)이라 는 캠페인을 내세워 성공시켰다. |
Moschino (모스키노)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로 관객을 매료시켜온 이탈리아 디자이너. "밀라노의 반항아’로 불리는 프랑코 모스키노는 하트, 동물, 자연, 기발한 문구 등을 통해 패션의 모순점 들을 유머러스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의 주장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다소 엉뚱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만의 재치와 기지는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애석하게도 1994년 가을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
N.W.S. (엔더블유에스)
New Wave in Seoul. 자기 브랜드를 갖고 있는 중견 디자이너들의 그룹. 박윤정, 박은경, 박춘무, 안혜영, 양성숙, 우영미, 유정덕, 이경원, 이정우 등이 이에 속한다. 최근에는 한승수가 가세했다. |
Gabrielle Chanel
1883년 프랑스 태생. 1920년대 남성 속옷으로만 쓰였던 저지를 여성복에 도입, 화려한 치장이나 장식 없이도 여성이 충분히 우아할 수 있다는 패션철학을 강조하며, 패션뿐만 아니라 액세서리, 향수에서도 큰 성공을 거둠. "코코 샤넬"의 별칭으로도 유명. 현재 칼 라거펠트가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 중. |
Karl Lagerfeld
1938년 독일 함부르크 출생으로 1984년부터 "샤넬"의 오뜨꾸뛰르와 프레타 포르테의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샤넬의 전통과 우아함에 대한 감각, 독창성을 현재에 맞게 재정립하였다. 샤넬의 홍보와 사진까지 직접 제작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
Pierre Gardin(피에르 가르뎅)
자신의 이름과 상표를 넥타이에서 알람시계와 자동차에까지 붙인 피에르 가르댕은 디자이너로서 라이선스와 머천다이징의 귀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본(1985년), 중국(1978) 시장에 지출한 최초의 프랑스 디자이너였고 최근에는 러시아와 루마니아에도 진출을 꾀하고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처에서 1922년 태어나 프랑스에서 성장했다. 14세에 비치(Vichy)에 있는 재단사인 망비(Manby)의 도제로 들어갔다. 후에 건축을 배웠으나 패션계에 몸담기로 결정하고 파퀸(Paquin) 하우스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경험을 쌓고 장 콕토의 "La Belle et la Bote" 의 장중한 의상을 제작했다. 1946년에는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디자인 스튜디오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1950년에 디오르를 떠나 자신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루에 리체팡스에 열었다. 4년 후 그는 첫 번째 부티크인 이브를 루에 뒤 파우부르그 생토노레에 열었다. 그가 1959년에 기성복으로 선회하자 파리 오트쿠튀르를 주도하는 단체인 샹브르 생디칼레가 이것을 문제삼아 그의 오트쿠튀르 조합원 자격을 박탈했다. 가르댕은 패션 비즈니스의 가능성을 간파했고 그 덕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오트쿠튀르 디자이너가 되었다. 1970년 무렵에는 이미 가르댕이라는 이름은 600개 이상의 제품에 붙게 되었다. 당시 그는 테아트르 데상바사되르를 사들여 이것을 “에스파스 가르댕" 으로 개조했다. 이것은 쇼룸, 영화관, 화랑, 레스토랑 등을 갖춘 거대한 문화 공간이 되었다. |
Tommy Hilpiger(토미 힐피거)
1969년 히피 패션을 판매하면서 의류업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후에는 뉴욕의 글램록(glam-rock )의 메카인 막시즈캔자스시티(Max"s KansasCity)에도 드나들었다 한때는 디스코 시대의 쿠튀리에인 조다시(Jordache)에서도 일했으나 1985년에 자신의 이름으로 고지식한 학생 분위기인 프레피 룩의 라인을 시작했다. 다음해에는 아직 무명인 디자이너로서는 엄청나다 싶은 3백만 달러를 들여 광고를 시작했다. 이 광고에서 그는 “미국 남성복에서 4대 디자이너는 R L, P E, C K, T H"라고 선전했다. 이것은 랄프 로렌, 페리 엘리스, 캘빈 클라인, 여기에 타미 힐피거 자신이라는 것이다. 80년대 말에 힐피거의 매출은 연간 2500만 달러가 되었다. 랄프 로렌의 열성팬인 어느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토미는 색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평했다. 1994년 3월에 스눕 도지 독(Snoop Doggy Dogg)이 Saturday Night Live에서 적, 백, 청색의 힐피거 럭비 셔츠를 입고 나옴으로써 힐피거의 스트리트 패션에서의 인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힙합의 극성팬들 사이에서 힐피거의 인기를 부채질했다. 1995년에는 미국 패션디자이너 협회에서 힐피거를 그 해의 남성복 디자이너로 지목했다. 1996년에는 토미 힐피거 회사는 새로운 여성복 라인, 남성 및 여성용 향수를 포함하여 5억달러의 연간 매출을 기록하여 대단한 이익을 냈다. 이중 일부는 아동복 사업과 홈 퍼니싱에 투자될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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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마감을 앞둔 디자이너들은 착하고 여유 로운 마음으로 자연스러움에 집중하며, 지난 20세기의 추억을 되살리는 시간을 많이 가진 듯 하다. 몸에 조이지 않는 여유 로운 실루엣과 흰색을 위주로 한 자연스러운 컬러, 실용적이고 편안한 느낌의 소재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어느 시즌보다도 디자이너마다 이색적인 이벤트를 많이 선보이면서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쇼를 위한 노력을 잔뜩 보이기도 했다. 무대 위에서 옷을 벗어 내던지는 모델들과 그것을 돕는 소년들을 등장시킨 올 시즌 최고의 아이디어를 선보인 요지야마모토, 바캉스용 타월을 둘러 가운처럼 입는 작품을 선보인 샤넬, 금가루를 뿌리며 등장하는 제롬 뤼이에의 모델 등 이번 시즌의 프레타 포르테에는 색다른 아이디어가 잔뜩 선보여졌다. |
CHANEL
(1) 바지 한 쪽에 스카프형태의 랩으로 활동적인 느낌을 강조한 올 시즌의 새로운 디자인 (2) 깔때기 모양의 칼라디자인으로 미래감각 연출. (3) "샤넬의 스포츠 라인" 심플한 탑 레이어드의 모던함과 스포티함. 비구성적 요소를 강조한 칼라거펠트 특유의 디자인 (4) 기존의 골드체인 벨트를 가장 단순화시킨 유일한 샤넬 벨트 (5) 올 시즌 유일한 진주목걸이 장식의 메탈릭얀 소재의 스퀘어 패턴 원피스 |
CELINE
1974년 세워진 좋은 품질이란 뜻의 셀린느. 작은 체인을 단 블라우스와 모카 신을 본 딴 구두, 가죽과 체인벨트를 장식한 플리츠 스커트의 `셀린느 스타일"을 확립. 전통적 클래식과 좋은 품질로 최고의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브랜드. |
MICHEAL KORS
1960년 미국 태생. F.I.T 졸업. 1997년 셀린느의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 `여성에게 친구처럼 느껴지는 옷을 만든다" 라는 철학으로 일상 생활에서 입을 수 있는 세련되고 깨끗한 의상추구. 모던한 감각으로 유행을 뛰어넘는 스타일을 창조하면서 뉴욕을 주무대로 고급스러움과 심플함을 특징으로 하는 미국 실용주의, 미니멀리즘의 기수로 평가. 너무나 실용적이고 단정한 스타일로 편안함과 고급스러움으로 셀린느의 클래식한 전통을 표현하고 있다. |
(1) 올 시즌 CELINE의 대표적인 스타일인 "터틀넥 풀오버". 투박한 느낌의 손뜨개 니트로 만들어져 원피스, 베스트, 풀오버까지 다양한 디자인으로 선보여진다 (2) 편안하고 엘레강스한 느낌을 동시에 주는 죠깅 수트 스타일의 작품. (3) 실크타페타 소재의 스커트와 린넨 보일 소재로 반투명한 느낌을 주는 풀오버 위에 가방을 가로 매어 캐주얼한 느낌을 주면서도 깨끗하고 우아한 셀린느의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4) 앞에서 언급된 올 시즌의 대표적인 스타일인 터틀텍과 롱스커트를 입어 이브닝 드레스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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