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게 주님을 인정해야합니다.(행7:54-60)
2020, 5/17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행7:54-60절 말씀으로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게 주님을 인정해야합니다.” 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함께하길 원합니다.
우한폐렴이 좀 잠잠해지나 싶더니 지난주에는 이태원 게이클럽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곤욕을 치루고 있습니다. 그래도 인천 온누리교회와 팔복교회에 과외학생들 외에 더 이상 확진 자가 나오지 않아 그나마 다행입니다. 교회서 2차 3차 감염자가 나왔다면 메스컴에서 얼마나 또 교회를 매도했겠습니까?
아무튼 성도는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개인 건강관리 잘하시고 잘 이겨냅시다.
오늘 본문말씀은 스데반집사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성령을 거스려 너희조상과 같이 너희도(예수님을 핍박하고 전도자들을 핍박)하는 도다.”이렇게 책망하자 그 소리가 듣기 싫었던 저들이 스데반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내용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본문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주님의 책망을 거부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54절)
둘째로, 신자는 위기 때에 그 신앙의 깊이가 드러납니다.(59-60절)
셋째로, 위기를 만나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담대해야합니다.(55절)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전하다 잡혀온 스데반이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이 재판은 스데반의 잘 잘못을 따지겠다는 공정한 재판이 아니라 초대교회를 박해할 목적으로 구실을 찾기 위한 재판이었기 때문에 공정하게 진행될 수가 없습니다.
스데반이 논리정연하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역사 속에 나타난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조상들의 위선과 악행을 지적하며 지금 너희들도 그때 조상들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자, 유대인들이 시기와 분노가 가득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나가 결국 돌로 쳐 죽이기에 이릅니다.
그들이 스데반에게 적용한 혐의는 신성모독과 율법파괴자였는데(행6:13-14) 그러나 그를 죽인 진짜이유는 하찮은 일개 기독도가 최고 종교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했기 때문이며, 또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심과 탐욕, 시기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책망이 얼마나 듣기 싫었으면, 또 전하는 복음이 얼마나 싫었으면 당시 산헤드린에 사형집행권이 없었음에도 명백히 로마법까지 어겨가며 그를 돌로 쳐 죽였을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스데반이 죽음 앞에서도 시종일관 차분한 모습이었고(55-56절) 심지어 악랄하게 돌팔매질을 하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59-60절) 스데반의 이런 모습은 실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그대로 보여주었고, 신앙인들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것입니다.
어쨌든 기독교회는 이렇게 첫 순교자를 냈고, 이로써 세상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기독교인들, 복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피의 역사라고 할 만큼 순교자의 피위에 기독교가 세워졌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예루살렘교회에 검거열풍이 불었고, 성도들이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결과적으로 그들을 통해서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된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행8:1-3)
더욱이 죽음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스데반의 순교가 청년사울을 변화시켜(58절) 이방세계의 전도자로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행9:15)
스데반의 순교사건은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한 일이지만,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고, 복음이 온 세계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는 대단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따라가면서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주님의 책망을 거부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54절)
본문5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아멘.
스데반집사님이 유대인들에게 51-53절의 말씀을 설교하자 이를 듣던 유대인들이 이를 가는 격한 분노를 쏟아냈는데, 도대체 저들이 왜 이런 격한 분노를 쏟아냈을까요? 그렇습니다. 저들은 스데반의 설교가 양심을 찔렀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들이 저런 말도 안 되는 격한 분노를 냈던 것입니다. 이를 갈았다는 것은 분노가 극에 이르러 그 분노를 추스를 수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도대체 스집사님설교의 무엇이 저들을 화나게 했을까? 51-5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①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②너희도 너희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③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④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걸 볼 때 화 낼만한 부분이 4가지 정도로 그 중 둘은 저들이 못 알아들었을 것 같고 나머지 할례와 율법인데, 지금까지 저들은 이 할례와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며 살아왔지만 할례를 받지 못했고,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니 이를 가는 반응을 보이겠다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죽일 정도는 아니지요. 우리 스집사님이 이런 책망의 설교를 했다면 왜 이런 설교를 했는지 자신을 돌아보며 지금까지 내 신앙 어디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하나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며 자복하고 회개해야 맞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거짓과 외식과 탐욕으로 가득 찬 본인들은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지적한 스데반에 대해서만 극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갈며 분노한 것은 그들이 스데반의 설교에 양심의 찔림이 왔다는 뜻인데, 양심의 찔림이 오면 보통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아담과 하와처럼 회피입니다. 저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지었다는 것을 깨닫자 하나님이 두려워 나무 뒤에 숨는 것과 같이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도망가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이런 태도는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책망을 받고 양심이 찔렸을 때 두 번째 반응은 사도행전2장처럼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를 죽인 자들이 너희들이라고 책망하자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듣고 양심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회개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인들은 말씀이 내 양심을 찌르면 바로 회개하고 돌이켜야 살길이 열립니다.
문제는 오늘 본문과 같이 양심의 찔림이 왔을 때 회개는커녕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이를 가는 적대적이고 사탄적인 반응입니다.
자녀들도 책망을 하면 잘못했다고 울며 용서를 비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적반하장으로 눈 치켜뜨며 반발하거나, 부모가 내게 해준 게 뭐있냐고 대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는 정말 내가 쟤를 낳고 미역국을 왜 먹었나 싶을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런 걸 본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일까?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혹 설교를 듣는 중에 찔림이 온다면‘나 들으라고 일부러 저런 설교를 한다.’ 뭐 이런 얼토당토 않는 생각일랑 마시고 하나님과 조용히 묵상의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그걸 순종하면 여러분의 신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될 겁니다.
찔림이 올 때 나를 바꾸려는 사람은 정말 사도행전 2장처럼 구원받고 죄 사함 받고 성령까지 선물로 받는 축복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책망하는 자를 적대시하며 악감정을 갖거나, 악감정은 아니어도 불편하게 생각하면 신앙의 퇴보는 물론이고 교회공동체에서도 멀어지기 때문에 절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잠1:25-26절에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처럼 진리의 책망을 받고 찔림이 올 때 회개보다는 기분이 언찮고 미운마음 섭섭한 마음이 든다면 사단에게 잡혔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만식선생이 평양 산정현교회에 장로로 있을 때 그날 일이 있어 예배시간에 조금 늦어 뒷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는데 담임목사님이자 당신의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님이 공개적으로‘조장로님 예배시간에 늦게 와서 어딜 앉으십니까? 서서 예배드리세요.’야단을 칩니다. 그 후 기도할 때 그 일을 떠올리며 회개를 했답니다.
저런 겸손한 신앙의 소유자였으니 하나님께서 민족의 지도자로 사용하셨겠지요.
만약 여러분이 예배시간에 늦었다고 제가 공개적으로 책망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은지요? 회피일까요? 회개일까요? 사탄적 반응일까요?
모두 겸손하게 하나님께 회개하실 거라 믿습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신자는 위기 때에 그 신앙의 깊이가 드러납니다.(59-60절)
본문59-6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아멘.
스집사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는데, 그때 얼마나 황홀하고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을까요?
가슴이 벅차올라 자연히 그 본 것을 말했고, 그걸 들은 유대인들이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면서 스데반에게 달려들었는데, 지금 저들은 사단에게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마도 눈까지 뒤집어지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러니 로마법이고 뭐고 스데반을 죽이려는 일념으로 돌로 쳐 죽이는 무리수를 둔 것입니다.
그런데 스집사님을 보십시오. 어찌 그리 그의 신앙이 아름다운지요.
사람이 죽음을 앞두면 두려움과 공포 속에 위축되어 본능적으로 살길을 찾기 때문에 비굴해지고, 몇 십 년을 믿었던 주님도 배신하는데, 우리 스집사님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아니 육신의 게으름과 돈 몇 푼 때문에 교회도 안 나오고 주님을 배신하는 세상인데, 죽음 때문에 배신하는 것은 요즘 기준으로는 죄도 아니고 당연한 거라고 할지 모르겠네요.ㅠㅠ. 요즘은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하나님은 각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단번에 아시지만, 우리는 쉽지가 않죠. 그래서 교회도 평소의 삶과 또 예배와 헌금을 포함한 공동체생활을 보면서 신앙의 깊이를 가늠합니다. 전에 우리교회에 공동체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엉망인데, 그 사람 말을 듣고 있으면 신앙이 참 좋은 것으로 착각케 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말로써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케이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신앙의 깊이를 언제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입니다. 평소에는 알 수 없지만 위기를 만나면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갈 때 마치 주님을 연상시킬 만큼 신앙적이었는데, 주님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했듯이 스데반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또 주님이“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한 것처럼 스데반도“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이렇게 기도하고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정말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닮은 기도를 했습니다.
유다왕 여호사밧도 같은 경우입니다.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며 북쪽정권과 손잡고 아람과 싸우다 대패하고 겨우 목숨만 건져 돌아왔을 때 사해바다 동쪽3개 나라가 연합하여 유다를 쳐들어와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빠집니다. 이 국가적위기 앞에 여호사밧은 최전방에 가장 강한군사력 대신 성가대를 배치하고, 무기대신 찬양하며 전쟁에 임했는데, 이걸 볼 때 여호사밧은 위기 앞에서 신앙이 빛을 낸 경우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인생에 크고 작은 문제들을 만났을 때 여러분들의 신앙이 어떤 모습이었는지요? 신앙이 더 신실해졌는지 아니면 퇴보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에 위기를 만나면 여러분의 신앙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주님께 보여드림으로 여러분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셋째로, 위기를 만나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담대해야합니다.(55절)
본문5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아멘.
유대인들이 이를 갈며 극한 분노를 표출할 때 보통 사람이었다면 두려움과 공포 속에 위축되고 절망하여 어떻게든지 살길을 찾느라 별 방법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아부도 하고 변명도 하고 다시는 교회 안 다니겠다고 사정도 하고 그랬을법한데 이때 우리 스집사님은 하늘을 쳐다봅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왜 하늘을 쳐다보았을까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 위기를 넘길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을 쳐다볼 때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는데, 이건 스집사님이 감당키 어려운 감동과 황홀함이었습니다. 마치 변화산에 오른 3명의 제자가 산위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고 너무 황홀해서 산위에 집짓고 아예 그곳에 살겠다고 한 것과 같은 감동일 것입니다.
그걸 본 스집사님 맘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개똥밭에 굴러도 이 땅이 더 좋다.’이런 생각일까요? 아니면‘주님계신 저 아름다운 천국에 빨리 가고 싶다. 이런 생각이었을까요? 저는 후자라고 봅니다.
어떻게 저런 광경을 보면서 미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이를 가는 유대인들도,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돌에 맞는 아픔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저 영혼들, 사단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저 불쌍할 영혼들만 보일뿐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주여 이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런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스데반에게 이런 긍휼한 마음이 들었던 시점이 언제라고요? 그렇습니다. 스데반이‘하늘을 우러러 주목’하고 나서부터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은혜를 받고 위기를 이길 힘과 능력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스집사님은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려는 저 무지몽매한 인생들이 불쌍했고, 잠깐 동안만 있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이 세상 부귀영화보다 영원한 위로자되시는 우리주님을 더욱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스집사님처럼 위기를 만나면 먼저 눈을 하늘로 돌리고 영원한 통치자요 심판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보고 의지해야합니다.
시56:3절에“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나이다.”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시편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도움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삶에 위기를 맞을 때 낙심하지 말고, 불의와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마십시오.
오직 눈을 하늘로 돌리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만을 의지하셔야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런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날마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