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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묵상글 들 ( 용서와 화해의 은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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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키엣대주교님묵상
용서와 화해의 은총
세계는 지금 코로나로 문을 걸어닫고 있습니다. 스승의 죽음을 목격한 주님의 제자들도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걸어닫고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은 것은 오직 기도뿐이었습니다. 코로나 19는 전세계를 덮친 재앙입니다. 코로나는 대상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침범했고 확진자는 격리되었습니다.
어느 날 격리해제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질병에 걸려 격리된 후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삶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앞만 보고 달리면서 잊고 지냈던 가족과 친구, 내 주변의 소중한 인연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 "더 천천히, 작은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격리된 공간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고 서로 격려하며 동질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기치 않은 격리를 통해 삶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 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람들은 나는 물론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 간절히 기도드리는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는 7성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성령의 은사가 7성사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면 삶의 변화는 극히 제한적일 것입니다. 성령은 생명입니다. 생명력은 교회의 원천이며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힘이며 권위입니다. 성령의 힘보다 강렬한 힘은 없습니다. 거센 바람과 불꽃같은 성령께서는 세상의 실패를 겪은 제자들에게 내려앉으시어 세계를 변화시키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성령의 은혜는 행동으로 실천해야하는 사명입니다. 행동과 실천의 근원이 바로 성령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는 또한 너희를 보낸다." 성령께서 나를 보내려는 그 곳으로 가서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용서와 화해는 어렵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사는 세상이기에 불일치와 갈등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갈등이 있을 때마다 친구를 버린다면 내 옆에는 그 어떤 친구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는 ‘용서와 화해’입니다. 화해를 위해서는 ‘사과와 용서’라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사과와 용서’는 말이 아닌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인간이기에 실수를 알면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과할 용기도 내지 못합니다. 이처럼 사과는 어렵습니다. 용서는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화해와 용서’를 위해서는 성령의 은총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용서받기 위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새로움은 영혼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하며 그 새로움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 성령의 은총을 받고 주님의 계획에 함께하십시오.
성령의 하느님, 성령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저희 영혼을 새롭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고 있습니까?
2. 소외된 사람, 싫어하는 사람, 나를 피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고 있습니까?
3. 용서하고 화해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 나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은총을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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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고도미니코 신부님.
-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성령강림 대축일은 예수 부활후 50일째 되는 날 성령이 사도들에게 강림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로써 교회가 설립되었고 선교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얼’, ‘숨결’, 바람’, ‘거룩한 영’ 등으로 표현됩니다. 성령은 생기를 주는 물, 타오르는 불과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무에서 세상을 창조한 힘, ‘하느님의 영’이라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특은이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은혜는 백성들을 일으키는 힘과 예언의 은혜이기도 했습니다. 그후 신약시대의 은혜는 성령이시며 견진성사로 특은을 받습니다.
‘협조자’, ‘보호자’, ‘위로자’의 뜻을 지닌 파라클리토이신 성령은 인간의 마음안에 참 평화와 화목을 불어 넣어 주시고 지혜를 주시어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와 사랑을 주십니다.
성령은 새생활, 즉 사랑의 생활, 평화의 생활, 능력의 생활을 만드는 동력입니다. 마치 전기가 TV화면에 들어가면 그림을, 냉장고에 들어가면 얼음을, 에어컨에 들어가면 찬 바람을, 온풍기에 들어가면 열을, 제습기에 들어가면 건조한 공기를, 용접기에 들어가면 접착을, 형광등에 들어가면 빛을 만들어 내는 여러가지 현상을 조성하는 힘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성령은 생활에 나타내는 하느님의 활동이요, 인간안에 꿈틀거리는 신의 정신작용, 신풍, 신바람입니다.
자신이 성령을 받았다는 확증은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도 사실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성의 도움 없이는 알기 힘든 복잡성을 지닙니다. 사랑만 있고 이성없는 결혼이란 위험한 결합이듯, 단순한 신앙만으로 성령취득된 주장도 위험한 일입니다. 성령을 느낌으로 판단하는 것 또한 위험한 일입니다.
성령을 무당, 박수 신접자등이 내리는 잡된 신령이나 귀신과 혼돈하는 일이 이스라엘에도 많았기에 엄중한 경계를 강조하였습니다.
성령은 사람의 마음, 혹은 사람의 심령에 담겨 있는 마음의 기운, 즉 사람의 주관이나 생각속에 작동하는 모종의 기운을 말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란 그의 사고방식을 하느님으로부터 부음받은 상태입니다.
물이 낮은 계곡에 고이듯 성령의 은총도 겸손한 영혼 안에 고입니다. 그리고 물이 비탈의 경사가 급할수록 더 빨리 쏟아져 내리듯 마음이 진실로 겸손한 사람이 더 쉽사리 주님께 다가가 그분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받습니다.
성령으로 인도되는 사람에게는 세속이 없는 것 같고, 올바른 생각을 하며 자신 안에서 갖가지 행복을 맛보고, 자신이 비천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성령은 우리가 얻어맞아 완전히 부서질 때 우리 스스로를 쌓아올린 담들, 상처들, 업적들이 부서져 무너질 때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아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되새기며 성령의 사람이 되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로 이것을 얻도록 힘쓰십시오: 즉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주님께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박해와 병고에 겸허하고 인내하며 또한 우리를 박해하고 책망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힘쓰십시오”
고 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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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강론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에서는 성령께서 오시는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늘에서 세찬 바람의 소리와 불과 혀의 모양으로, 곧 ‘놀라운 모습’으로 내려오십니다.
<복음>에서는 닫혀 진 문을 뚫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부드러운 숨결의 모양으로, 곧 ‘고요한 모습’으로 들어오십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늘 문을 열거나, 땅의 문을 열거나 모두 ‘닫힌 문’을 열면서 벌어집니다. 곧 성령의 활동은 ‘문을 여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닫혀 진 문을 부수고, 가려진 장막의 휘장을 찢고, 죽음에 갇힌 무덤을 풀며, 우리의 굳은 마음의 문을 여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 문을 열고 땅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묘한 것은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열리고, 닫힌 문은 마음에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늘이 열리는 자리는 바로 우리네 삶의 자리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고, 그러기에 다른 먼 곳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이 베풀어졌고, 우리는 이미 그분 신비체의 몸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신비체’는 지체로 이루어진 ‘한 몸’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몸은 바로 성령에 의해 지탱되고 존속됩니다. 그 지체를 서로 결합시키고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평화”를 주시는 장면과 성령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협력자’이신 ‘성령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새 백성이 탄생되고, 새 시대가 열리고, 그리스도 몸의 신비체인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닫혀 진 문’을 열고 들어 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닫혀 진 문’ 뒤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문을 잠가 놓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닫혀 진 문’을 뚫고 들어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니다. 팔레스티나에서 보통으로 표현하던 이 인사는 이제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인사가 됩니다. 이제 이 평화는 주님의 축복이요, 선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재가 방황이요 두려움이라면, 예수님의 현존이 곧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으로 이제 공포는 기쁨으로 바뀌고, 혼란스러운 무질서는 질서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공포와 두려움에 ‘닫혀 진 마음의 문’을 열고서,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평화의 전령’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요한 20,21-22)
이제 제자들은 평화의 도구,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이 주신 이 평화를 서로 나누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 안에 이 평화를 건설해야 하는 사명을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로운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그런데 이 ‘평화’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우리가 이루는 평화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이루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협조자 성령’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의 원어의 번역은 ‘숨을 건네주었다’는 뜻입니다. 곧 당신의 생명을 건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모두 용서하시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를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용서’를 통해, 평화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할 때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먼저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새롭게 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가 용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십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감격스런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승복하고, 하느님의 현존에 푹 젖는 성령강림절이 되길 바랍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와 평화의 축제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성령이시여!
제 안에 흐르소서!
흐르는 골골에 찌든 떼를 벗기시고, 반역과 죄를 몰아내소서!
아픔과 상처 어루만지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소서!
멍들고 굳어진 마음 문지르시고, 접히고 구겨진 마음 펼치소서!
막히고 닫힌 마음 열치시어, 당신 숨결 흐르게 하소서!
새로워지고, 새롭게 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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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성령께서 내려오시다
⒈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으로 마무리되었던 사순시기의 전례와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제자들이 사도들로 변화되어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부활시기의 전례가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의 전례로 수렴되어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성령 하느님을 성대하게 맞이합니다.
⒉ 바벨탑 이후 하느님께서 언어를 뒤섞어 놓으심으로써
인류는 더 이상 바벨탑을 올리지 못하고 분열되었었습니다.
이 바벨탑은 니므롯이라는 힘센 장사가 펠렉계 노아의 후손들을 선동하여
하느님 대신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서 세우려던 건축물이었고,
이는 이를 중심으로 이룩하려던 나라와 문명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이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스스로 선과 악을
정하며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던 사탄의 계략에 넘어간 우상숭배 소행이었습니다.
⒊ 뒤섞인 언어로 인류가 분열되어 갈라져 나간 후에도 하느님의 뜻을 읽지 못하고
바벨론 지역에서 우상을 숭배하던 펠렉계 노아의 후손들 가운데에서
테라의 아들 아브람에게 하느님께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 12,1-2).
⒋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가나안 땅에 자리잡은 아브람의 이름을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소통하는 새 민족을 이루라는 뜻으로 새 이름을 지어주셨으니,
이로써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이 겪은 역사는 일직선으로 곧장 나아가지
못하고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가다서다를 반복했으며, 민족의 시조 아브라함도
알아들었던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 말씀을 전해주던 예언자들을
하나같이 박해하여 죽이는 시행착오를 되풀이했습니다.
이 같은 어두운 역사는 하느님께서 직접 보내신 아드님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삼아서
비로소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으며, 그 돌파구란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강림 덕분에 본시 이스라엘 출신이었던 사도들이
서방 세계로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일이었습니다.
⒌ 지난 1986년에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하느님을 새롭게 발견하고자 열망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에 대한 신앙으로 인류가
회개하고 화해할 것을 촉구하는 취지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회칙을 반포하였습니다. 이 회칙은 모든 가톨릭 신자들로 하여금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계획을 온전히 실현하도록 온 교회를 이끄시는 성령께 대해
협조하게 하시려고 교회와 세상의 삶에서 성령에 관하여 가르친 문서입니다.
⒍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께서 내려오신
오순절을 교회의 탄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회의 시대는 성령께서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성모 마리아와 함께 모여 있던
사도들 위에 내려오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 25항).
구세주께서 강생하신 지 2000년이 지난 지금, 20세기 중반에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21세기의 교회에 성령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을 대변하였습니다.
이로써 강림하시는 성령을 현존하게 하였습니다(26항).
⒎ 전례헌장은 말합니다. “전례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 나오는 원천이다. 왜냐하면 사도적 활동의 목표는 모든 이가 신앙과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한데 모이고, 교회 가운데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거룩한
제사에 참여하고, 또한 주님의 만찬을 먹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전례헌장, 10항).
⒏ 교회헌장은 말합니다. “유일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공동체인 당신 교회를 이 땅 위에 볼 수 있게 조직하시고 끊임없이 지탱하시며,
이 교회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진리와 은총을 널리 전해주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로서, 신경에서 우리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하며,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일치하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 이 조직 밖에서도 성화와 진리의 요소가
많이 발견되지만, 그것은 본래 그리스도의 교회에 고유한 은혜로서 가톨릭적 일치를
촉구하는 것이다”(교회헌장, 8항).
⒐ 계시헌장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며(2코린 1,20; 3,16-4,6),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로 사도들은
성전과 신구약성경을 마치 거울과 같이 비추이는 하느님을 관상하며 모든 것을
받아 가르친다”(계시헌장, 7항).
⒑ 사목헌장은 말합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사목헌장, 1항).
⒒ 간추린 사회교리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사회 분야에 대한 투신에 더욱 큰 힘을 쏟게 한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기 때문이다.
교회는 평신도들에게 가정과 사회의 일상생활에서
복음의 힘이 빛나게 행동하도록 촉구한다.
이렇듯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된 도덕적 확신은
그리스도인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장이 된다.
이렇게 하여 더욱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려면 정치 경제 문화 분야의
사회생활에서 사회적 애덕이 모든 활동의 최고 규범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애덕은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 활력을 주고,
국제 질서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문명이며 이 문명이 다스릴 때에만
인류는 참되고 지속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579, 581,582항).
⒓ 이렇게, 달랐던 언어로 분열되었던 인류 역사가
사랑이 통하면 다른 언어조차도 의사소통의 도구로 바뀝니다.
인간적이고 외적인 조건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운으로 인간의 언어와 사람들의 공동체는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는 혼으로써
의식을 변화시키고 관계를 변화시키며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의 특권은 내려오시는 성령의 힘을 받아서, 아직 충분히 변화되지
못한 현실 속에서도 온전히 변화된 현실을 미리 내다보며 먼저
이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⒔ 성령 회칙을 반포한 후 10여 년만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을 코앞에 둔 1999년에 아시아 대륙의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시아 복음화의 주역이 되라고 권고하면서, 서방세계로 향했던 복음화의 바람이
이제 바야흐로 동방으로 향하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성령을 받으십시오! 우리가 수행하는 사도직 활동이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사회적 애덕을 증거할 수 있으며, 이 애덕의 힘으로
갈라진 사람들을 ‘우리’라는 공동체로 묶어서 일치시킬 수도 있고,
이 공동체가 사랑의 문명을 앞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날개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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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이다. 성령은 주님 부활의 가장 완성된 열매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성령께서 우리의 생활과 교회의 생활 가운데서 활동하시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의 불길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상징하는 사도들에게 변화의 능력을 직접 주신다. 이제는 사랑과 구원의 은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열렸다. 즉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마련해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구원적 개입이 근본적으로 '새로움'을 갖게 되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구원계획의 결실이기 때문에 종족과 언어와 문화 그리고 외적 풍습 등의 장벽에 구애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의 특별한 사랑의 관계에 이끌어 들이신다. 신비스러운 언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인간들의 정신과 마음을 내적으로 비추어 서로 일치시키는 힘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당신의 변화와 정화의 불로 세례를 받고 그 타오르는 연기와 불꽃을 직접적으로 전달할 만한 증거자들과 중개자들을 필요로 하신다. 이래서 교회는 항상 새로운 성령강림이 필요하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며,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복음: 요한 20,19-23: 성령을 받아라
오늘 복음은 파스카 당일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장면과 성령에 관한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의 발하심과 파스카 축일과 같은 날에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보내주시는 분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스카는 곧 성령강림의 근원이다. 제1독서와 같이 복음에서도 선교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사도들에게 성령이 주어진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즉 성령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는 빛과 힘을 주고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갖게 한다는 의미에서 복음선포를 지향하고 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신다. 마치 하느님께서 아담의 얼굴에 생명의 숨을 부어주시어 생명체가 되게 하신 것처럼(창세 2,7). 이것은 성령의 창조활동으로 선교사명에 따라 사도들만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성령의 입김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성령의 힘은 죄의 용서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2-23절). 다시 말해서 성령의 쇄신활동은 성령께서 어느 곳에 머무르시게 되든지 간에 죄에 대한 승리로부터 시작됨을 의미한다. 교회가 죄를 비난하고 고발하며 복음의 빛을 통하여 사랑의 행위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곳에 성령의 창조적 능력이 실현될 공간이 마련된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몸인(1코린 12,12) 교회의 단일성의 원리로서뿐만 아니라, 그 지체들이 맡는 역할 또는 은총의 선물의 다양성을 이루는 원리로 제시하고 있다. 교회가 분열되지 않기 위해서는 단일성 안에서 다양성이 넘쳐흐르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13).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무분별하게 다원론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단일성과 공동체성을 해치고 있는 현세대에 적절한 가르침이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변화의 은총을 주신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며, 이 은총을 통하여 한 몸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신다. 성령은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분이시다. 우리는 모두 성령을 가득히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초대교회가 체험했던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령께 우리 마음을 굳게 닫아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려고 노력한다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를 지내면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실 수 있도록, 우리 항상 깨어있으면서 그분께 우리 마음을 항상 개방해 놓을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여야 한다. "얼을 거두시면 그들은 숨져버려 드디어 티끌로 돌아가고 마나이다. 보내시는 당신 얼에 그들은 창조되어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시편 103,29-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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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19).”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1-23)”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4).”
1) 요한복음의 내용과 사도행전의 내용을 합해서 생각하면,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았고,
오순절 때 ‘성령의 은사’를 충만히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은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고,
견진을 받을 때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고,
성령과 성령의 은사가 따로 구분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때와 성령의 은사를 받은 때 사이의 기간은
‘준비 기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복음 선포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각자 자기 자신을 성령의 힘으로 가득 채우는 준비 기간.
예수님 말씀과 행적을 복습하는 일과 교리를 공부하는 일도
그 준비에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준비는 역시 ‘기도’였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내릴 때 사도들과 신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기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사도 1,14).
2)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도 잃고 평화도 잃은 모습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도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평화를 함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면서
‘참 평화’를 얻어 누리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믿음’에서 ‘용기’가 생기고, 그 ‘용기’를 통해서 ‘평화’를 얻게 됩니다.
(평화를 물건처럼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 자체가 평화의 원인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말씀’의 은사만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 용기, 평화라는 은사도 함께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그들에게 복음 선포의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의 첫 번째 목적은 복음 선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이라는 말씀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것도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였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도
복음 선포 임무를 맡기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을 받는다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너희가 복음 선포 활동을 제대로 하면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될 것이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복음 선포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길을 막는 것과 같다.”로 해석됩니다.
(구원받을 길을 막아 놓은 채로 방치하는 것은 죄입니다.)
<용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사도들에게 고해성사의 권한을 주신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해성사도 회개와 용서와 구원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복음 선포 활동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일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 선포 임무를 맡기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성령이라는(또는 성령의 은사라는) 강력한 무기를 주셨습니다.
루카복음에서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어 있습니다(루카 24,49).
성령은 ‘하느님(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우리는 그 힘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고, 복음 선포 활동을 합니다.
그 힘은 ‘저승의 세력’을 제압하는 힘입니다(마태 16,18).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의 신앙생활과 복음 선포 활동을 막지 못합니다.
5) 사도들이 오순절 때 성령의 은사를 받고 나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표현만 보면,
그들이 배운 적도 없는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떻든 중요한 점은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알아들었다는 점입니다(사도 2,5-12).
성령의 은사는 사도들에게 내렸지만, 그 은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는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모두에게 내렸습니다.
그날 내린 성령의 은사는 바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위한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해서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는데,
사실 어떤 변화가 있는지 실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가 내릴 때의 초자연적 현상을 보게 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가 기도를 덜 해서 그럴 수도 있고,
초자연적 현상을 크게 필요로 하는 시대가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고, 성령의 힘도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그 힘을 믿으면서 더욱 더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복음 선포 활동을 해야 합니다.
만일에 신앙인이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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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휴학하는 신학생들과 면담을 하였습니다. 휴학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본인이 결정하는 경우입니다. 건강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사제가 되는 것을 다시 한 번 고민하기 위해 휴학을 신청하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결정하는 경우입니다. 공동체 생활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학업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휴학생들이 머물 곳을 지정해주곤 합니다. 휴학 중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저는 휴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지금 가슴에는 돌이 하나 있을 겁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돌을 바라보면 그 돌은 하느님께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겁니다. 그러나 감사와 기도로 돌을 바라보면 그 돌은 영적으로 성장하는 디딤돌이 될 겁니다.” 휴학기간을 디딤돌로 여긴 학생들은 모두 복학하여 사제가 되었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습니다.
돌아보면 제 삶에도 몇 번의 변곡점이 있었습니다. 1986년입니다. 군에 입대해서 훈련을 마치고 성당의 군종병으로 업무를 시작하였습니다. 매일 성당에서 기도할 수 있었고, 주일 미사를 빠짐없이 드릴 수 있었고, 성당이 부대 밖에 있었기에 매일 외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당 군종병으로 3개월만 있었고, 다른 부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저의 부족함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잔디밭에 비료를 뿌리라고 했는데 저는 귀찮아서 대충 뿌리고 말았습니다. 일주일 뒤에 비료를 많이 준 곳은 노랗게 변하였습니다. 성당의 의자를 닦아야 하는데 그것도 귀찮아서 대충 닦고 말았습니다. 미사시작 전에 의자를 보니 의자에 얼룩이 남아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서울로 회의를 가시면서 부대로 복귀하라고 하였는데 저는 부대에 들어가기 싫어서 성당에 남았습니다. 회의가 취소되어서 신부님은 성당으로 왔고, 저는 명령불복종으로 짧은 군종병 생활을 마치고 다른 부대로 가야 했습니다. 신부님의 엄한 가르침이 제게는 남은 군 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1991년 사제서품을 받고 첫 본당의 보좌신부로 갔습니다. 본당에 간지 3일 만에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나중에 병명을 알았는데 ‘유행성출혈열’이라고 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오셔서 기도해 주셨다고 합니다. 동창신부들도 와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분들의 도움으로 보름 만에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고마운 분은 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입원한 날부터 퇴원하는 날까지 병원에서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열이 나면 이마에 수건을 올려주셨습니다. 저는 퇴원하면 어머니께 효도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매달 찾아가서 함께 식사하고, 용돈도 드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매달은 가지 못하였고, 시간이 나면 가끔 찾아가곤 했습니다. 역시 사랑은 내리사랑인 것 같습니다. 시장에서 콩나물을 사면 덤으로 더 주시곤 합니다. 보름간 병원에 있으면서 하느님께서 제게 덤으로 시간을 더 주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덤으로 주신 시간이 30년이 되었습니다. 덤으로 주어진 시간이니 감사하고 고마울 뿐입니다.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3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꾸짖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겁니다. 도망쳤던 제자들에게 야단을 치셔도 할 말이 없었을 겁니다. 새로운 제자들을 뽑으셔도 제자들은 할 말이 없었을 겁니다. 오히려 벌을 받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용감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땀과 눈물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 성녀처럼 이웃의 눈물과 고통에 함께 하였습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시작된 날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무엇을 위해서 있을까요? 제1독서에서 성령의 은사는 소통을 위해서 필요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면 피부색이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생각이 달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공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함께하면 이념이 달라도, 계층이 달라도, 세대가 달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 교회는 성령의 은사와 함께하고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성령의 은사는 평화와 용서를 위해서 필요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에서 시작될 수도 있지만 평화는 용서하면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루가 복음 15장은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돌아온 동생을 용서하지 못했던 큰 아들처럼 생활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이웃을 위해서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정, 교회는 성령의 은사와 함께 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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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입김이며, 하느님의 현존을 표시합니다(창세 2,7; 욥 33,4 참조). 또한 신약 성경에서 성령께서는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시고(마태 3,13-17 참조), 오늘 제1독서에서는 ‘불꽃 모양의 혀’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령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고(로마 5,5 참조),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하시며(로마 7,6 참조),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고(갈라 3,29 참조), 죄로 죽은 인간을 다시 살리시는 분(로마 8,10-11 참조)이십니다. 또한 한 세례를 통하여 한 성령을 받아 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에페 4,3-6 참조). 성령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숨을 쉬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보다 평화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려움에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에 서시며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곧 용서입니다. 스승을 버리고 떠난 죄책감 속에 있는 제자들에 대한 용서, 두려움에 서로를 의심하고 이웃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용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데 대한 용서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용서를 청하고 서로 용서한다면,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의 평화가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는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 봅시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덕을 완성하여 주님께 가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 칠은은 지혜, 통찰, 식견, 용기, 지식, 공경 그리고 경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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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령의 선물, 성령의 사람
- 주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 -
새벽 인터넷을 여는 순간 오래만에 반가운 뉴스였으니 이 또한 성령 강림 대축일에 앞선 성령의 선물입니다. “한-미 관계 중요성은 한반도를 넘어선다. 한-미 동맹 ‘글로벌 동맹’으로 재탄생”이란 말마디가 한눈에 들어 왔습니다. 한-미가 21일(현지시각)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장을 연다”라는 선언으로 두 나라의 동맹 관계를 한반도를 넘어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글로벌 동맹’으로 위상을 끌어 올렸으니 새삼 우리 대한민국의 변화된 위상을 실감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바이든 요셉 미대통과 문재인 디모테오 두분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니 느낌도 좋습니다.
새벽 교황님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참신한 말마디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 또한 교황님을 통해 주신 성령의 선물입니다. 코로나 펜데믹 시대, 디지털 세대 학생들에게 주신 친절하고 자상한 충고였습니다.
“학생들이여! 디지털 시대 고립되는 것을 피하고, ‘머리(head)’와 ‘손(hands)’과 ‘마음(heart)을 사용하여 진정한 관계를 건설하십시오.”
‘삼h(head, hands, heart)’를 사용하여 참된 관계의 삶을 건설하라는 교황님의 충고는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지난 스승의 날에 찾지 못한 40년전 초등학교 제자들 여러명이 오늘 축하인사차 온다 했으니 이 또한 성령 강림 대축일 주님께서 보내 주시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선물들인 제자들을 잘 환대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꼭 받고 싶은 선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저에겐 소원이 있다면, 받고 싶은 선물이 있다면 단 하나 성령뿐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소원이, 선물이 그대로 성령 하나로 모아집니다.
성령외에는 모두가 짐일 뿐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밥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성령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마음의 허기에도 근본처방은 성령뿐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근본적 치유도 사랑의 성령, 생명의 성령뿐입니다. 텅빈 공허를 텅빈 충만으로 바꿔주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늘은 참 좋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제단의 꽃꽂이도 참 아름답고 풍요롭습니다. 해마다 불렀던 화답송 후렴의 흥겨웠던 추억이 새롭습니다.
“하느님, 당신 얼을 보내시-고,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오늘 복음전 긴 성령송가 부속가는 얼마나 풍부하고 깊고 아름다운지요. 마음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예수회가 올해 2021년 5월부터 2022년 7월까지 ‘이냐시오해(Ignatian year)’를 맞이하여 택한 주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이니, 이 또한 성령의 선물입니다. 참으로 성령이 매사 모두를 ‘새롭게’ 보게합니다. 성령의 은총이 누구나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고전적(古典的) 삶을 살게 합니다. 새벽 성무일도 초대송 후렴과 독서의 기도 찬미가가 참 은혜로워 나눕니다.
“알렐루야, 주의 얼이 우주에 충만했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1.“맑은 빛, 밝은 빛이 옥좌서 내려 그불꽃 주님 제자 밝혀주나니
마음에 가득차고 말솜씨 주어 화목해 말하도록 불러 주시네.
2.“위로자 성령이여 어서 오시어 우리의 혀와 마음 다스리소서
당신이 우리 함께 계셔 주시면 아픔도 해로움도 없으리이다.”-
어제 고마운 분과 주고 받은 ‘하늘길’ 시와 사진 그리고 댓글도 참 좋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집무실옆 야자매트길
걸을 때 마다 바치는 기도
치유와 평화, 일치의 하늘길이 되게 하소서
주님 천사, 세례자 요한 형제가 선물한
치유와 평화, 일치의 야자매트 하늘길”-
이어 받은 형제의 답글 또한 형제의 선물이자 성령의 선물이었습니다.
“신부님, 하늘 길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길 좌우로 꽃잔디 심을 날을 기대해 봅니다.”
눈이 열리면 온통 성령의 선물입니다. 주님을 찾아 어디로 가겠는지요. 새삼 무엇을 청하겠는지요. 오늘 지금 여기가 구원의 꽃자리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성령의 선물을 받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정말 무지로 인해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십니다. 말그대로 성령의 선물을 통한 새로운 창조와 구원이 일어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의 선물이 우리를 용서할 수 있게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저절로 용서이니 순전히 성령의 선물이요 성령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성령입니다. 성령 선물에 앞서 두려움의 벽에 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임하시어 평화를 선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벽이 변하여 문으로!’, 주님의 성령이 임할 때 두려움의 벽은 활짝 열린 평화와 기쁨의 문으로 변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주님은 당신을 만나 평화를 선물받고 기뻐하는 제자들을 평화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오늘의 복음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성령만이 줄 수 있는 참 평화입니다. 세상에 평화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결코 쟁취할 수 있는 평화와 기쁨이 아닙니다. 참으로 성령의 사람이 될 때 저절로 평화의 기쁨의 삶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참 좋은 선물도 평화와 기쁨일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성령의 사람은 평화의 사람이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보다 더 바람직한 참 사람은 없습니다. 성령의 선물은 끝이없습니다. 평화와 기쁨에 이어 일치의 선물, 은사의 선물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바벨탑을 쌓다가 심판받은 교만과 분열과 불통의 사람들이 성령강림을 통해 완전히 소통의 일치를 이루고 있으니 말 그대로 성령의 기적이자 성령의 선물입니다. 갈릴래아 출신 제자들의 하는 말을 제각기 자기들의 말로 알아들었다 하니 완전히 소통과 일치의 상태를 말해 줍니다. 같은 말을 써서 일치와 소통이 아니라 성령이 마음을 열어 하나되게 할 때 저절로 일치와 소통입니다. 순수한 열린 마음은 누구나 통하는 보편언어로 산티아고 순례때 체험한 진리이기도 합니다.
참 좋은 성령의 선물이 각자 받은 고유의 은사입니다. 이런 성령의 선물인 다양한 은사가 공동체의 조화와 균형, 일치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줍니다. 코린코 1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 시켜 주는, 참 자유인이 되게 하는 성령 은총입니다. 각자 받은 은사가 서로 보완하여 아름다운 형제애의 공동체를 건설하게 되니 저절로 감사한 마음, 겸손한 마음이 됩니다. 모두가 은총이요 성령의 선물이니 자랑할 분은 성령이신 주님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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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 -
복음(요한 20,19-23)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평화와 성령을 주십니다.
안식일 저녁(“주간 첫날”: 묵시 1,10)에 열한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기도(성체성사: 루카 22,12)에 전념하고 있을 때(사도 1,13-14)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계셨습니다(시신이 아니다: 요한 20,12).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28)는 약속을 기다리는 답답하고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나타나심과 평화의 선물은 기쁨과 놀라움을 증폭시킵니다. 어떻게 들오셨는지 말이 없는 것은 부활하신 분께서 원하신다면 언제, 어디서나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말합니다. 살아계신 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마디는 “평화가 너희에게!”인데, 이 평화는 성령께 의탁하면서 자기와의 싸움, 게으름과의 싸움, 사랑을 위한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요한 14,27).
영적인 몸을 지니신(1코린 15,4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은 죽으셨다가 살아나셨음(요한 14,19)을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할까봐(루카 24,37) 피와 물이 흘러나온(성체성사) 옆구리(요한 19,34)를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고 하는데, 두 가지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첫째,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9)라는 말씀의 실현이며, 둘째,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라는 말씀의 실현입니다. 근심에 싸여있던 제자들이 살아계신 분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또 그분께서 제자들 안에 계심을 깨달으면서(요한 14,20) “기쁨이 충만해진”(요한 16,24) 것입니다.
부활하신 분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평화가 너희와 함께!”)를 선물로 주시면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새로운 시대(교회)가 열렸으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도록(요한 14,12; 17,18) 파견하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고”(요한 17,6)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제자들 안에 있고, 예수님도 제자들 안에 계시다는 것”(요한 17,26; 1요한 3,24; 4,13)을 증언하라는(요한 15,26-27)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께서(요한 7,39)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새로 태어나라고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성령(생명)을 주신 것입니다(요한 3,3-8; 5,21.26). 이제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요한 14,26).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요한 6,63) 말미암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새로 태어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요한 3,5-6), 진실한 예배자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요한 4,23).
예수님께서 파견하시는 이들을 맞아들이는 이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므로(요한 13,20) 그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면서(요한 1,33) 하느님의 아드님에게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도록(요한 7,37-39; 19,34)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주십니다(에제 36,25-27). 죄란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전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적대 세력이며(요한 8,40-41), 어둠이라서 빛을 미워하고,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요한 3,19-21)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고(요한 8,44),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사랑하게 만듭니다(요한 12,42-43). 결국 죄는 그리스도(말씀)를 미워하고 죽이려 합니다(요한 7,19; 15,18-25). 그러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요한 1,29)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것입니다(요한 5,24; 8,51; 12,47). 그래서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서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있도록(요한 3,3) 믿는 이들에게 죄를 용서하는(세례를 주는)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제1독서(사도 2,1-11)는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입니다.
유다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축제인(신명 16,9-12) 오순절(파스카 축제가 지난 뒤 50일째 되는 날)이 되었을 때 한자리에 모여 있던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마치 시나이의 계약처럼(탈출 19,16-25),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제자들 위에 내려앉았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즉시 성령으로 가득 차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표현의 능력대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높은 데에서 오는 힘”(루카 24,49)이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어”(1코린 12,13) 여러 가지 말로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여러 나라의 유다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사도들”(사도 13,31)이 증거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 말로 알아들으면서도 어리둥절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위업”이 계속해서 성령에 의해 여러 가지 언어로 선포되고, 구원의 복음을 저마다 자기 삶의 방식으로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문화에 동시에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항상 성령께서 먼저 시작하심을 보여줍니다. 소개되는 15개 지방들은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남과 북, 그리고 서쪽으로 이어지는 순서인데, 복음이 서서히 유럽으로 선포되었다고 말해줍니다.
제2독서(1코린 12,3ㄷ-7.12-13)는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풍요로워졌고,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튼튼히 자리 잡았고, 은사도 부족함이 없었지만(1코린 1,5-7) 바로 이것이 코린토 공동체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여러 집에서 모이던 전례 공동체들끼리 대립과 시기질투로 혼란해진 코린토 공동체에게 바오로는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은사와 직분과 활동에 대해서 자세하게 가르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에페 1,22)의 몸인 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게 해주시고, 그 열린 마음에 말씀이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 은사와 직분과 활동이 있지만 모두 “같은 성령”에 의한 것인데,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내적인 친교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에”(로마 5,5) 바오로 사도는 “성령은 같은 성령”, “주님은 같은 주님”,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라면서 아주 일찍부터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합니다(마태 28,19). 성령께서 주시는 여러 가지 은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나누시는 사랑이므로 자기자랑이나 자기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교회와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 다른 은사와 직분과 활동을 통하여 일치하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열광주의적인 태도와 자기주장만 일삼는 독단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령을 보내시어 교회를 태동시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담대하게 증거하도록 평화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사도들이 온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성령의 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들 안에 오시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기억하게 해주시면서, 비록 우리가 세상 가운데 살지만 세속에 찌들어 살지 않도록,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이 되도록(요한 17,16-17) 격려해주십니다. 특히 인간은 주님의 숨결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이며, 성령 안에서 모두 새롭게 된 한 형제임을 되새기라고 하십니다(시편 104,29-30).
성령은 말씀하시는 분(성부)의 소리(성자)가 우리에게 의미와 효과를 부여하는 사랑이십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젖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사랑으로 삶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령을 말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삶으로 증거되지 않는다면,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자 애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증거하는 성령이 아닙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용기와 평화를 갖추었기 때문에 내적인 삶에 충실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이 드러나게 하듯이, 성령께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말씀의 뜻이 드러나기를 바라십니다. 성령께서는 높은 데서 오는 힘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의 의미와 효과를 찾으면서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사람을 통하여 거룩함을 드러내십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들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에 젖어 교회 안에서 싱그럽게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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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영국의 외과 의사 알렉산더 리딩은 인공 고관절 이식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명성이 자자했고 그 공로로 인해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2011년 6월, 그는 자신의 집 차고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작은 실수로 환자 한 명의 상태가 안 좋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 사회에 큰 파문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수술 성공률은 자그마치 99%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성공한 수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1%의 수술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극도와 자괴감, 수치심, 죄책감을 견디어 낼 수 없어서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의사는 완벽주의를 지향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100% 완벽할 수가 있을까요? 하느님만이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완벽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겸손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부족함을 인정 못 하면 주님에게서 벗어나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 인물이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겼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다 이스카리옷이었습니다.
부족함을 인정해야 주님 앞에 서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가 있게 됩니다. 주님에게서 벗어나면 불평불만과 절망 좌절뿐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으므로, 그 성령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도움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면 과연 도움을 받겠습니까? 자신은 완벽해서 다른 이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겸손하지 못한 사람, 스스로 완벽하다면서 다른 이를 무시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으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을 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욕심과 이기심을 간직하면서 성령의 자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각자에게도 주님께서는 “성령을 받아라!”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제1독서에 나오듯이 언어라는 장벽이 무너져 진정으로 하나 되는 관계를 만들어주는 성령입니다. 유다인들이 무서워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용기를 줘서 세상 밖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줬던 성령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게 하며, 참 행복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받아야 할 성령입니다.
이 성령을 받기 위해 자신을 낮추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만이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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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편견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마음을 열고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바람의 변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똑같이 항해하는 선장은 결코 항구에 들어가지 못하는 법이다(헨리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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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는 죄악이 아니다
책을 읽다가 1940~50년대에 활동했던 프리츠 펄스(Fritz Perls, 1893~1970)라는 정신과 의사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상담을 하면서 쓴 글입니다. 완벽함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인 것 같아 옮겨 봅니다.
나는 실패한 시도들을 사랑한다.
비록 과녁의 중심은 하나뿐이지만,
실수했다는 것은 수많은 좋은 시도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친구여, 완벽주의자가 되지 마라. 완벽주의는 긴장이다.
당신은 하나뿐인 과녁의 중심을 맞추지 못할까봐 두려워 떨고 있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완전하다.
친구여,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실수는 죄악이 아니다.
실수로 말미암아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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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교회의 탄일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령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겁에 질려 스스로를 닫힌 문 안쪽으로 가둬버린 제자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스승이 잡혀가시면서 깨지기 시작했던 그들의 평화는 지금 폐허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폐허 위에 다시 평화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버리고 흩어졌던 제자들이 이미 용서받았음을 평화로 증명하십니다. 또 환난 중에 서로에게 실망했던 제자들에게도 서로를 용서하라고, 더 나아가 스승을 죽이고 자신들마저 위협하는 이들도 용서하여 평화를 얻으라고 초대하십니다. 평화는 용서와 화해의 증거이고 열매입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을 것이다.'"(요한 20,22-23)
하느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숨을 불어넣으시어 창조를 완성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절망으로 무너진 제자들에게 새 창조의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숨결이 들어옴을 관상합니다. 얼마나 친밀하고 부드럽고 뜨거운 사랑인지요! 이 숨이 우리 영혼과 육신 곳곳에 퍼져 우리를 새롭게 하고 주님과 연결된 일치의 존재로 만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숨, 성령께서 주님과 우리를 하나로 이어 결속시키지요. 주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끝까지, 죽기까지 사랑하고 용서하셨던 예수님의 그 숨이 우리를 사랑의 존재, 용서의 존재로 바꿉니다. 예수님과 하나의 호흡을 공유하는 이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1독서는 초세기 성령 강림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4)
각 사람에게 내리신 성령을 굳이 감각을 통해 묘사하자면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불꽃 모양의 혀"입니다. 그리고 그 효과는 경계와 장벽을 깨어 부수는 초월의 힘입니다.
다른 언어로 말한다는 것은 언어적 이해와 구사 능력을 넘는, 서로를 구분짓고 경계하며 차별과 혐오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다른 민족, 문화, 가치관을 지닌 이들에게 길을 내고 문을 뜷고 다리를 놓는 지난한 작업입니다.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사도 2,11)
성령을 받은 이들이 전하는 내용은 "하느님의 위업"입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의 선포는 자신의 교리를 단순히 통역하는 차원을 넘어, 다른 언어와 문화와 민족 안에서 활동하시는 한 분 하느님의 위업을 깨닫도록 그들을 일깨우는 거룩한 행위가 됩니다.
제2독서에서는 성령께서 오시는 목적을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7)
성령은 공동선을 추구하라고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령을 받은 이는 그 은사와 선물을 자기 이익이나 영광을 위해 쓸 수 없습니다. 공동선을 자기 자신이나 가족, 소속 공동체와 제도만의 이익과 영달을 위한 자원으로 축소할 수 없고 그렇게 사유화해서도 안 되지요.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라면 그저 자신과 가족, 소속 공동체의 풍요와 안위, 발전이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은 모두의 평화를 위해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시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과 숨을 공유하는 우리는 하나의 숨, 하나의 성령을 공유하는 형제들입니다. 주님과 우리가 그 숨으로 엮여 있듯, 우리 모두 역시 그 숨으로, 그 성령으로 엮여 있습니다. 한 성령을 받아 우리는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한 몸 안에서 서로 연민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면, 몸 전체는 평화를 이룹니다. 이 평화가 바로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한 성령을 받아 마신 우리 모두의 평화를 빕니다. 이웃들, 특히 병들고 가난하고 힘들고 슬프고 지친 이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다가가 평화를 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성령께서 더 큰 평화의 축복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온 누리와 모든 이에게 성령의 은총이 충만하길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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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숨 안에서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 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영은 하느님의 얼, 숨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이 특별히 뽑힌 이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람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이나 예언자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하느님의 영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장1절에 보면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 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만 특별히 임했던 성령이 장차 누구든지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은 먼저 예수님의 일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첫 설교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며…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14,17-19).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카5,17).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이하). 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끌리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거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인하여 베드로와 바오로도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절름발이를 낫게 하였고, 죽은 이를 살려내고 악령을 몰아냈으며 열정적으로 설교하게 하였고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가진 것 모두를 공동 소유로 내놓고 나눔의 생활을 하였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공동체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8).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손길이 더욱 요청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내 선입견과 욕심, 세상 걱정 때문에 그분의 숨결을 내가 놓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가오시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까닭으로 역사하지 못하십니다. 아니 우리가 역사하심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성령세미나를 참여해 보면, 성령의 역사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는데 보통 5일째 되는 날 ‘성령 안수식’이 있습니다. 이때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웃음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뜨거운 열기를, 어떤 사람은 시원한 바람으로, 어떤 사람은 온몸에 기운이 빠져 안식을 갖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언어를 하고 어떤 이는 마음의 어두움을 씻어내어 평화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어떤 이는 친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채워 주심으로, 어떤 이는 용서의 마음으로, 그렇게 미웠던 배우자가 사랑스럽고 더 잘해주지 못했던 동안의 부족함을 볼 수 있게 해 줌으로써 ……그야말로 오만가지 방법으로 알맞게 오십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자매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그리웠고 그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성장하면서 상처를 받았는지 자기 안에 하느님을 무서운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 벌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제발 한 번만이라도 사랑의 하느님으로 만나고 싶다고, 기쁨을 회복하고 환히 웃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자기도 모르게 너무도 평화롭게 한없이 웃을 수밖에 없게 해 주셨습니다. 남들은 울고불고 하는데 그 와중에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모르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 그 자매의 웃는 얼굴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성경을 쳐다보면 졸음이 쏟아졌는데 한 시간을 읽고 두 시간을 읽어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고 하신 분도 계시고…….늘 만나던 사람이지만 유난히 사랑스럽게 보이고 그야말로 사물까지도 다르게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은총의 역사를 이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불은 또한 어둠을 비추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어 죄를 알게 해 주고, 고해성사에로 인도하여 자비를 입게 합니다. 마음을 비추어 진리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말씀에 맛들이게 해주십니다. 불로 표상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숨, 입김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입김은 곧 바람(히브리어 ‘루아흐’)입니다. 이 바람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창조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감으로써 힘과 능력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쉬게 하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하소서.
성령, 우리 생명의 의미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교회란 한낱 조직에 불과하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에 불과하고,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령 안에 우주는 온통 잠을 깨고
왕국을 낳는 산고로 신음하고 있다.
성령이 계시면 부활하신 그리스도 여기 계시고
복음은 찬란한 생명력을 내뿜고
교회는 성삼위와의 통교를 의미하고
권위는 해방자의 섬김이 되며
선교는 성령 강림의 축제가,
전례는 기념이자 왕국에 미리 참여함이 되고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으로 가득 차리라.
- 이냐시오 드 라타뀨이에 대주교-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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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요한20,22)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보호자 성령께서 임하신 것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교회의 큰 축일인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인 제1독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 째 되는 날인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신 모습을 전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인 제2독서는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것과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시고,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공동이익)을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는 것을 전합니다.
성령은 교회와 교회의 구성원들인 우리를 지탱해 주는 힘이며 원천입니다. 1코린12,3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성령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결코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성령'은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이 성령을 받기 위해 영적인 노력을 합니다. 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 온 마음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하고, 말씀 안에 머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때문에 성령을 받으려면 낮아져야 합니다.
성령을 받기 위한 영적인 노력을 다하고 나서,
지극한 겸손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도들은, 성령의 힘으로 세상에 나아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믿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래서 '성령강림일'을 '교회의 창립일'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고,
이 성령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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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
창조(創造)와
강생(降生)
강림(降臨) 으로
영원하신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이
되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다.
하느님에게서
받아야 할 것은
바로
가장 좋으신
성령이시다.
성령으로
우리는 새로
태어나게 된다.
삶을 뜨겁게
변화시키시는
성령이시다.
성령의 활동은
하느님의
활동이며
교회의
활동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다.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백성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
자신의 삶을
의탁한다.
성령께서는
진리로
우리모두를
이끄신다.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말씀으로
인도하신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면
영적 생명인
참된 사랑과
참된 용서도
일어날 수 없다.
성령은
우리 삶을
거룩하게 하시는
거룩함의 열매이다.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서
구해야 할 것은
바로 모든 것이
되시는
성령이시다.
용서의
영이시며
기쁨과 일치의
영이시다.
성령과
함께하는 삶이
가장 기쁜
복음의 삶이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시작하는
회개의 삶이다.
죄인들을
비추시고
죄인들을
변화시키시는
성령께서는
새 사람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생명의 기쁨은
새로워지는
새로움의
기쁨이다.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을
받는 것은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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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 다시 한번 새출발해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의 음성에 진지하게 귀기울여보십시오!
제조업 현장에서 근무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잠시나마 수출역군으로서 국가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뿌듯함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정겨웠던 동료들 얼굴도 그립습니다. 그러나 개미처럼 일만 하던 기억이 더욱 선명합니다.
한 몇년 밥 먹듯이 잔업과 특근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과연 이게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커다란 기계 속에 고정된 하나의 부품과도 같은 생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저 매일 똑같은 일과가 반복되던 '미칠 것만 같던' 나날이었습니다. 신앙생활도 그저 그랬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저는 본당 주보에 실린 '성령쇄신세미나'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래! 바로 이거야!' 하는 내면으로부터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미사가 끝난 즉시 참가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세미나 과정이 전개될수록 저는 점차 '그분께서 제 안에 계셨건만, 너무도 멀리서 그분을 찾아 헤맸던' 제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성령과는 담을 쌓고 살았기에, 철저하게도 무미건조했던 제 신앙생활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한 사려 깊은 봉사자와의 면담을 통해 제가 그간 옳다고 생각해왔던 ‘그 모든 것이 다 틀린 것이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미나의 대미(大尾)를 장식한 ‘안수’의 순간에 제가 느꼈던 은총의 체험은 지금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봉사자들의 정성스런 기도가 시작되었고, 안수예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세파에 지칠 대로 지친 한 가련한 영혼, 방황을 끝내고 아버지께 돌아온 한 부끄러운 영혼을 성령께서는 포근하게 감싸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힘차게 제 안에서 활동을 시작한 성령의 손길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 출발을 촉구하시는 하느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순전히 제 개인적 체험임을 밝힙니다. 그렇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성령께서는 세례를 통해 이미 우리 안에 항상 현존해 계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우리의 둔감함으로 인해, 우리의 지나치게 세속적인 사고방식, 육적인 삶의 양식으로 인해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진정 다시 한번 새출발해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시는 성령의 음성에 진지하게 귀기울여보십시오. 그분의 현존과 협조, 활동을 자각하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보십시오.
무미건조한 신앙생활, 형식적인 미사참례, 하느님 체험의 부족으로 인해 신앙생활의 권태기에 접어든 분들을 위해 저는 지체없이 우리 안에 이미 현존해 계시는 성령을 다시 한번 의식하는데 보다 노력해보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성령 안에서의 새 생활'을 통해 우리는 신앙생활의 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매일의 나날을 새롭게 하시는 분,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감미로운 바람같은 분이 성령이십니다.
오늘도 진리의 성령께서는 척박한 우리 영혼의 회심을 촉구하시며 사랑의 기적을 계속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영원한 길잡이이자 진리이신 성령께서 다시 한번 우리 인생에 굳건히 닻을 내리도록 우리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우는 성령강림대축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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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령을 받을 준비 : “악에서 구하소서!”의 “악”은 무엇인가?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유는 성령을 보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녀들을 먹이기 위해 돈을 벌러 나가신 것과 같습니다. 교회라는 어머니는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받아 자녀들을 먹이고 키웁니다.
자녀들은 이런 부모의 사랑으로 하늘 나라에서 살 자격을 갖춥니다. 그 자격이란 “죄를 용서해 주는 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나가서 죄를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성령 없이는 죄의 용서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고 싶은 사람은 목이 마른 사람입니다. 목마른 사람만이 물을 청합니다.
우리는 목이 마른가요? 죄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있나요? 그러면 성령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것에 목이 더 마르면 성령에 목이 마르는 것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성령에 목이 마른 것인데 성령을 청하면서도 결국 성령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성령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란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인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악’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이 악이 무엇인지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에 목마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악에서 구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까?
10년 동안 미국에서 방영된 역대 가장 인기 있었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바로 ‘왕좌의 게임’입니다. 지극히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 우리가 보아서 이익될 것은 없는 세속적인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큰 주인공은 ‘대너리스’란 여자와 ‘존 스노우’란 남자입니다.
7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합체에서 철의 왕좌에 앉겠다고 서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대너리스는 그 왕좌에 가장 정당한 혈통이지만 반란으로 쫓겨난 상태입니다. 존 스노우도 대너리스와 함께 왕좌에 정당한 혈통이지만 다른 가문에서 서자로 키워져서 핍박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왕좌에 가장 정당한 혈통의 증거는 용을 타고 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너리스는 점차 자신이 용의 어머니임을 깨달아갑니다. 오빠에게 핍박을 당하며 팔려가서 정략적으로 혼인하고 혼자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하는 사람이지만 점차 자신이 그 철의 왕좌에 가장 적합한 인물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용의 알 3개를 지니고 있고 불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위기 때마다 자신이 왕좌를 되찾으려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으로부터 용의 도움으로 이겨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노예들을 해방하여 백성의 사랑을 받는 여왕으로 성장해 갑니다.
하지만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세르세이’는 아무리 용이 있어도 혼자 힘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어 대너리스는 북부지방을 점령한 존 스노우와 동맹을 맺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존 스노우가 용을 탈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사람들이 그를 더 좋아하고 있음에 질투합니다. 사실 그가 자신과 같은 혈통이면서 왕좌에 더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둘이 협력하여 세르세이를 몰아내고 항복을 받아냅니다. 그러나 대너리스는 이미 용을 두 마리나 잃은 상태이고 백성들이 자신보다 존 스노우를 더 좋아하는 것에 분노하게 됩니다. 용은 분명히 자신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세르세이를 따르고 또 존 스노우를 더 좋아하는 백성들을 용의 불로 쓸어버립니다.
존 스노우는 깨닫습니다. 대너리스는 결국 세르세이보다 더 무섭게 백성을 통치할 것임을. 그래서 자신도 왕비를 죽인 댓가를 치러야 함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여인 대너리스를 죽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추방당합니다.
10년에 걸쳐 시즌 8로 되어 있는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대너리스가 그 왕좌에 합당한 유일한 사람이라 믿게 만듭니다. 용을 부릴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용이 자신의 백성들을 몰살하는 분노로 변하게 되면서 대반전을 가져옵니다.
대너리스에게 도움은 존 스노우였습니다. 존 스노우는 그녀가 힘을 절제할 수 있도록 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대너리스는 그보다는 자신의 용을 더 믿었습니다.
세 마리 용은 재물에 대한 욕심, 육체의 쾌락, 권력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존 로크를 만나며 그 힘이 줄어들 것을 걱정한 대너리스는 존 로크보다는 용의 힘을 믿고 용의 힘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녀에게 가장 큰 적은 바로 용을 잃기 싫어하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용은 왕좌를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언정 백성들에게는 두려움밖에 주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존 로크는 성령님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그 사람의 힘을 약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분노를 쏟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분노와 미움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을 믿는 대너리스는 성령보다는 자기를 믿기로 합니다. 대너리스는 성령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악에서 구하소서.”에서의 “악”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더 믿을수록 세 마리 용의 힘은 더 커집니다. 성령께서 그 힘을 꺼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예, 혹은 아니오가 아니면 다 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자신을 태워서 세속, 육신, 마귀의 욕구가 일정 한계를 넘지 않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러나 돈을 좋아하고 육체의 즐거움을 찾으며 명예와 교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성령을 거부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제단에 소를 얹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불이 떨어져 자아를 상징하는 소와 그것이 자아내는 욕구들을 다 불살라버립니다. 그러자 우상을 섬기게 만드는 예언자들도 다 죽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들일 자유도 있고, 거부할 자유도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원하는 모든 이에게 성령을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기도’라 합니다. 자기를 죽이기를 원하는 이는 기도를 하겠고, 자기 힘으로 살려는 이는 기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 강림은 결국 자기 자신이 원수이고 용이고 뱀임을 알고 그 뱀을 밟으려는 힘을 청하는 이들에게만 이뤄집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기도를 할 때마다 악에서 구해 달라고 할 때, 그 악이 자기 자신임을 항상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악이 사탄의 악에 동의하지 않을 때 어떤 악도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교리서는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라고 말하며, 그 자아를 죽이기 위해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같은 사랑의 문제이며, 그 사랑에 따른 자아 부정과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2745)라고 가르칩니다.
성령은 우리 자아를 죽이러 오십니다. 예수님도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에 나를 박는 그 세 개의 못이 곧 성령이신 것입니다. 성령이 무엇하러 내 안에 오시는지 명확히 알지 못하면 언젠가는 나도 성령을 거부하게 되고 그러면 멸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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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셔서 두려움에 가득 찼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평화를
주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손과 옆구리의 당신 상처를 보여주시고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베푸십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죄를 사해주시는 권한까지 주십니다.
오순절은1) 교회 출발을 알리는 날입니다. 말하자면 교회의 생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바벨탑을 쌓는 인간의 교만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서로 다른 언어로 인류가 흩어지게
하십니다.2)
이제 성령께서는 서로 다른 민족들의 말을 자기 언어대로 알아듣게 하십니다.3)
사도 바오로는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사, 직분, 활동은 여러 가지이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1코린 12,4-6)라고 말하며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
한 몸에 여러 지체’로 이루어지며 서로 일치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전합니다.4)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성령과 함께 전능하시고 강하십니다.
그러기에는 우리는 약해빠지고 한탄에 젖은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우리가 어떠한
고통과 어떠한 상처, 어떠한 죄에도 머무르지 않고 다시 회복되어 주님의 사도로 우뚝 설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표현되는 성령께서는 새로운 분이 아니시며 이미 구약에서 ‘하느님의 영’, ‘입김’. ‘바람’으로
나타나십니다.5)
신약에 와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삼위일체 신비가 분명해졌습니다.
두려움으로 움츠렸던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 용기를 갖고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공동체를 이끌어 가시지만 신약에서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라고 전하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성령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한계가 있고 부족한 우리이지만 복음을 믿고 구원의 길을 걸으며 하느님 나라로
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시는 것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죄는 죽음과 같아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구원을 막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께서는 주셨기에 우리는 죄와 죽음에 억매지 않고 진리와 자유를
가지고 세상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속대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우리도 그 성령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생명은 우리를 매일 새롭게 성장하게 하며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역동적으로 구원과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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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대인들의 축제인 오순절 (펜테고스테 헤메라 Πεντηκοστή ἡμέρα)은 ‘오십일’이라는 뜻으로, 곡식 수확을 시작한지 7주간이 되는 그러니까 사십구일 다음날을 가리키는 축절을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날을 ‘주간절’(학그 하 샤브옽 חג השבועות, 탈출 34,22, 신명 16,10)라고 부르는데 ‘기쁜 주간축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날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 고아와 과부들까지 다함께 추수의 기쁨을 나누며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 날이다. 오순절은 유월절, 초막절과 함께 구약의 3대 명절 중에 하나로 꼽는다.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출발을 기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 두었다.”(창세 11,7-8)
3)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사도 2.9-11)
4)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12-13)
5) 창세기 첫 장에서 심연 위로 하느님의 영이 감도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유일하신 하느님이라는 표현 대신에 '루악 rū·aḥ רוח'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이 말을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의 '영' (창세 1,2; 판관 6,34; 1사무 16,143; 1열왕 18,12; 욥 4,15; 20,3; 27,3; 시편 51,10.11.12; 에제 37,1; 18,31), 또는 '바람'(탈출 10,13; 신명 11,31; 1열왕 18,45; 1열왕 19,11; 욥 8,2; 37,21; 시편 11,6; 에제 13,11; 19,12; 즈카 5,9), 다르게는 '공기'(1역대 12,19; 욥 41,16; 시편 51,10; 51,12)로 또 '입김'(에제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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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복음도 성령에 대한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이 무엇인지는 대충의 개념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본당에 어떤 형제님은 만약 개인적인 친목 목적으로 하는 모임에서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항상 성령을 언급하십니다. 그러시면서 항상 같이 모이는 형제님에게 성령에 대해 항상 질문을 하십니다. 이분을 무시하는 게 아니고 누구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단순히 그 개념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서 성령을 다 알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조금은 역설적인지는 모르지만 성령은 곧 하느님이십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느님을 아십니까?”라는 질문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그분의 질문이 어떤가요? 조금 색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말은 성령의 개념이 단순히 그렇게 만만하게 볼 게 아니라는 말씀을 제가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신부님이나 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성령의 개념을 잘 알기는 힘들 것입니다. 보통은 수박 겉 핥기 식일 겁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도 겉 핥기 식도 안 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개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이점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일복음을 성령, 평화, 용서라는 삼종 세트를 축으로 해서 한번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인사를 전하신 후에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이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면서 “성령을 받아라” 고 하십니다. 그럼 그 숨이 성령이라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일 것입니다. 그 숨은 날숨, 들숨 하는 그런 숨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CPR 심폐소생술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다른 모습의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의미할 것입니다.
성령 즉, 하느님 영의 또 다른 모습을 받게 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는 어떤 특권이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용서’의 특권입니다. 단순한 용서가 아니고 죄의 용서입니다. 여기서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잘못인 죄를 말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님께 저지른 죄가 될 것입니다. 이 죄는 직접적으로도 지을 수가 있고, 또 간접적으로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같은 형제자매 사이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든지 하는 것도 단순히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치부할 수가 있지만, 실제는 그렇게 하는 게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인 사람도 자식들이 우애 있게 지내지 못하면 부모의 마음이 아픈데 하물며 하느님과 예수님의 마음은 오죽하시겠습니까? 직접이든, 간접이든 이게 발전해서 오늘날 ‘고백성사’가 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부님의 사죄경을 듣게 되면 실제 신부님께서 용서를 하신다고 말씀은 하시지만, 실제 용서는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이렇게 이해를 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성령이 좋다고 해도 성령이 임하는 조건이 제일 먼저 평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연할 것 같습니다. 무력과 불평 속에 하느님이 임재하신다고 한다면 그건 설득력이 없습니다. 어불성설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간에 불목이 있고 화평하지 않다면 서로 화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화해의 전제조건이 될 수가 있는 게 용서입니다.
용서는 경중을 떠나서 물론 가벼운 것은 인간적인 차원에서도 가능할 수도 있지만 이런 차원을 넘어서는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도 가능한 방법이 있을 겁니다. 바로 성령이 임하기만 하면 성령의 힘으로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성령의 힘이, 금이 간 평화에서 화해 무드로 회복된 평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엔 하느님이 부재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경각심을 가지게끔 묵상하게 하는 복음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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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령 강림 대축일 묵상글 모음.
20년 성령 강림 대축일
(은사가 똥이 되지 않고 독이 되지 않게)
http://www.ofmkorea.org/355843
19년 성령 강림 대축일
(정신을 차리자!)
http://www.ofmkorea.org/226490
18년 성령 강림 대축일
(영의 식별)
http://www.ofmkorea.org/123132
17년 성령 강림 대축일
(소통과 일치의 성령)
http://www.ofmkorea.org/105041
16년 성령 강림 대축일
(영적인 열등감)
15년 성령 강림 대축일
(우리가 바로 성령들이 됩시다.)
14년 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을 받으려면)
13년 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은 빗소리와 함께)
12년 성령 강림 대축일
(공든 탑이 무너지다)
11년 성령 강림 대축일
(내쉼과 들이쉼)
10년 성령 강림 대축일
(얼[정신] 차리십시오!)
09년 성령 강림 대축일
08년 성령 강림 대축일
(채움과 소통이신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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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3. 성령 강림 대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사도2,1~11)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2~3)
1) 상징에 대한 분석을 통한 해석
사도행전 2장 2절에서 4절까지 살펴볼 때, 성령이 임함으로써 나타난 결과가 마치 바람과 불과 방 세 가지처럼 보인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초자연적인 어떤 것들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일 뿐이다.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는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지 못했다.
'~듯한(같은)'에 해당하는 '호스페르'(hosper)가 '바람'에 해당하는 '프노에스'(pnoes)가 아니고 '몰아치는'(rushing) 혹은 '으르렁거리는'(roaring)에 해당하는 '페로메네스'(pheromenes)를 수식하고 있다.
'페로메네스'는 속도를 강조하는 '급하고'(부는)가 아니고 상태나 정도를 강조하는 '몰아치는'이나 '으르렁거리는'이 더 적절하고 정확한 뜻이다.
그래서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거센(강한) 바람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라고 해야 한다
새 성경이 '부는 듯한'이라고 번역했는데, '으르렁거리는 듯한' 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즉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고 바람이 내는 것 같은 '소리'(에코스; echos; sound)이다.
사도행전 2장 3절에서 역시 강조하는 것은 '불'이 아니고 혀가 '갈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 4절의 방언의 경우도 '방언'이 아니라 '다른 언어'라고 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상을 종합하면 바람, 불, 방언이란 세 가지 상징의 매체는 성령 강림 때 일어난 특별한 현상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의 비유의 대상으로 삼은 것 뿐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성령 강림으로 인한 초자연적 현상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각 기관들인 귀, 눈, 입에 연계하여 귀(바람~소리), 눈(불~혀가 갈라지는 것), 입(방언~다른 언어)과 관련된 세 가지 자연 현상에 비유한 것이다.
어떤 학자는 성령 강림에 수반되는 이 세가지 현상을 복음 전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거센 바람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는 복음 전파를 위한 힘(능력)이고(사도1,8; 루카24,49),
불처럼 갈라지는 것은 이스라엘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명을 부여하기 전, 예언자 이사야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제단에서 타는 숯을 입술에 댄 것처럼 (이사6, 6-8) 복음 전파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정결을 상징하며,
다른 언어는 여러 나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언어 도구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결국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가장 큰 목적은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다.
2) 이미지를 통한 해석
이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에제키엘 37장에 기록된 마른 뼈 환시에 등장하는 생기의 이미지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이다.
에제키엘 37장 9절에서는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는 에제키엘의 명령에 따라 숨(생기; breath)은 바람(wind)처럼 불어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었다.
또한 요한 복음 3장 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영으로 거듭난 사람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는, 임의로 부는 바람의 속성을 예로 드셨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묘사를 이와 같은 이미지와 연관지어 보면 결국 성령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범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영이 그들에게서 떠남으로써 모든 인간들은 모두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다(창세 2,17; 3,19; 6,3; 에페2,1).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면서 죽은 영혼을 살리는 성령을 보내 주셨다.
3) 출애굽 사건을 통한 해석
이것은 본 단락의 내용을 탈출기 19장 16~18절에 기록된 시나이 산에서의 하느님의 현현(Theophany)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이다.
탈출기 19장 16절의 '우레소리와 나팔소리'와 탈출기 19장 18절의 '산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라는 청각적 이미지를 통한 표현은 본절의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대구를 이루고,
탈출기 19장 16절의 '번개'와 탈출기 19장 18절의 '(주님께서)불속에서 그 위로 내려 오셨기 때문이다'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표현은 사도행전 2장 3절의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와 대구를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오순절이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첫 열매를 얻은 날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라는 의미를 가졌지만, A.D.1세기경에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날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로 이해했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는다.
모세 시대의 오순절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에 율법을 세움으로써 계약의 백성과 그들을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관계로 맺어지는 역사적인 날이라는 사실과 관련지울 수 있는 것이다(탈출19장).
그러나 초대 교회의 시작이 되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예수님의 복음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시는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교회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백성과 왕의 관계보다 훨씬 밀접한 자녀와 아버지와의 관계로 맺어지는 구원사의 큰 획을 긋는 날이다.
즉 구약의 오순절의 특징은 돌판에 율법을 기록한 외적이고 법적인 절기인 반면에 신약의 오순절은 마음에 기록한 내적이고 영적인 절기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은 이러한 신비한 현상들을 접하면서 '아~바로 이때구나'하면서 성령 하느님의 임재를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2)
유다인들은 일반적으로 일어서서 기도했다.
따라서 본절에서 앉아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말이나 설교를 듣고 있을 때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보여 준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위에 내려앉았다.'(3)
'같이'(모양의)에로 번역된 '호세이'(hosei)가 '혀'(글롯사이; glossai)를 수식하지 않고 '불'(퓌로스; pyros)을 수식한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직유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불'이 아니라 '혀'이다.
말하자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라는 뜻이다.
'갈라지면서'로 번역된 '디아메리조메나이'(diamerizomenai)는 '조각조각으로 쪼개다' 혹은 '분배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디아메리죠'(diamerizo)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서 '그들 자신을 분배하는'(distributing themselves)이란 뜻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들 자신을 분배하는 불과 같은 혀들이' (tongues as of fire distributing themselves)이다.
혀는 언어와 복음 전파를 상징하므로 본절은 성령께서 방언을 통한 복음 전파를 위해 각 사람들 위에 임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도행전 2장 3절의 '혀'에 해당하는 원어(글롯사이; glossai)와 사도행전 2장 4절의 '방언'(다른 언어들; 글롯사이스; glossais)에 해당하는 단어가 같다는 사실도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러한 본문은 마치 솟아 오르는 불길과 같이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언어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발설되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때가 3시(사도2,15)이전, 즉 오전 9시가 되기 이전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방식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그 장소에 아침 햇살이 강하게 그들 위에 내리비치는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한편 '불'(퓌로스; pyros)은 성경에서 종종 하느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탈출기 3장 2절 이하를 보면 모세가 호렙산에서 만난 하느님의 임재는 떨기나무 불꽃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루카 복음 3장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세례는세례자 요한의 물 세례와 달리 불 세례라고도 하는 성령 세례였다. 이 구절에서도 불은 성령님을 표현하는 하나의 이미지인 것이다.
성령강림대축일 복음(요한20,19~23)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2)
'숨을 불어넣으며'에 해당하는 '에네퓌세센'(enephysesen; he breathed on them)은 '엠퓌사오'(emphysao)의 부정(不定) 과거 능동형 3인칭 단수이며,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나온다.
구약 성경 희랍어 번역본인 70인역(LXX)에서는 창세기 2장 7절의 창조사업을 위한 문맥에서, 그리고 에제키엘서 37장 9절의 민족의 회복을 위한 문맥에서 사용된 단어가 요한 복음 20장 22절의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역할을 위한 문맥에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차이점에 있다면, 구약 성경의 두 구절은 생명이 없었던 자나 생명을 잃은 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일과 관련되어 사용되었고, 요한 복음 20장 22절에서는 육적인 생명과 전혀 관계가 없고 오로지 영적인 생명을 상징하는 성령을 부여하는 문맥에서 사용된 점이다.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아포스톨로스'; apostolos)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영적인 능력으로서의 생명을 부여하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다.
특히 본문에는 복음 전파 사명을 수행해야 할 사도들에게 '죄사함의 권한' 위임을 위한 성령 수용의 명령이 내려진다.
여기서 '성령을 받아라'에 해당하는 '라베테 프뉴마 하기온'(Labete pneuma hagion; Receive the Holy Spirit)에서 명령형이 사용된 것은 성령을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여기서 '성령'에 해당하는 '프뉴마 하기온'(pneuma hagion; the Holy Spirit)에 원문에는 관사가 붙어 있지 않은 사실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격적인 측면보다는 성령의 은사, 즉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필요한 능력을 받는 부분을 강조한 것으로서, 바로 위의 요한 복음 20장 23절의 '죄사함의 권한'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받아라'에 해당하는 '라베테'(labate; receive)는 '람바노'(lambano)의 명령형 과거 2인칭 능동 복수이다.
그런데 번역에 있어서는, 인격적인 존재인 성령을 '받아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받아들이라' 또는 '머물게 하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신약 성경에서 '성령'과 관련된 기록들을 정리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당신 자신의 죽음이 성령을 오시게 하기 위함임을 밝히셨고 (요한14,16~19), 요한 복음 20장 22절을 보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에 사죄권 위임을 통해 그 약속을 다시 확인시키셨으며,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때에 성령을 실제로 본격적으로 보내셨다(사도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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