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지금 감히, 다름 아닌 바로 나에게 바로 이 회사를 대변해서, 다름 아닌 아편에 대한 얘기를 하신 건가요?”
이어 어머니는 분노를 억누른 어조로 조사원에게, 그때쯤에는 나도 이미 잘 알고 있고 또 그 이후 수없이 듣게 되는 사태의 개요를 한바탕 퍼부어 댔다.
요컨대 대체로 영국인들이, 그중에서도 모건브룩 앤드 바이어트 사가 막대한 양의 인도 아편을 중국으로 수입해서 한 나라 전체를 이루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비참과 타락으로 몰아넣었다는 말이었다.
말하는 동안 어머니의 어조가 종종 날카롭게 곤두서곤 했으나 말투가 흐트러진 적은 없었다.
이윽고 여전히 적수를 노려보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어머니가 물었다.
"선생은 부끄럽지도 않은가요?
기독교인으로서, 영국인으로서, 도덕관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말이에요.
그런 사람이 이런 회사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아요?
이런 사악한 부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어떻게 양심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지 말씀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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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설명했던 어머니와 보건 조사원에 관련된 일화를 예로 들어 보자.
나는 그 일화의 핵심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한다고 확신했지만, 머릿속에서 그 일을 몇 번 굴려 보는 사이에 세부적인 사실 몇 가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어졌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그 조사원에게 실제로 했던 말이 정확히 '이런 사악한 부에 빌붙어 생계를 유
지하면서도 어떻게 양심 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지 말씀해 보시죠.'였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지금 내가 보기에, 아무리 무감각한 상태였더라도 어머니는 그것이 생경한 말이라는 것, 그런 말을 했다가는 놀림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을 것 같다.
어머니가 그럴 정도로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을 것 같지는 않다.
반면, 우리가 상하이에서 사는 동안 어머니가 언제나 마음속에 그런 의문을 담아 두고 있었으므로 실제로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우리가, 어머니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악한 존재로 여겼던 바로 그런 회사에 '빌붙어서' 생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어머니가 뼈저리게 겪고 있던 괴로움의 근원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심지어는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게 된 전후 상황을 내가 부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머니가 그 질문을 던진 상대가 보건 조사원이 아니라 아버지였으며, 전혀 다른 날 아침 식당에서 말다툼을 벌이는 도중에 일어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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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있으면 이따금 내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잊어버리곤 해요.
물론 이따금이지만 말이에요.
다른 아이들처럼 방학 때까지 남은 날을 헤아리고 방학이 되면 엄마 아빠를 다시 볼 생각을 하죠."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 애가 자기 부모를 언급하는 소리를 들으니 놀라웠다.
나는 그 애가 무슨 말인가 조금 더 하기를 기다렸으나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방금 내게 질문을 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결국 내 쪽에서 입을 열었다.
"그 일이 종종 아주 어렵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주변 세상이 온통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을 거야.
하지만 이 말만은 해 주고 싶구나, 제니.
너는 흩어진 조각들을 다시 맞추는 놀라운 일을 하고 있어.
정말이란다.
전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네게는 지금 그 일을 계속해서 너 자신을 위한 행복한 미래를 만들 능력이 있어.
그리고 난 언제나 여기서 너를 도울 거야.
네가 그걸 알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고마워요. 그리고 이것들도 고맙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날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우리는 비교적 따스했던 불가를 떠나 외풍이 심한 방을 가로질러 복도로 나왔다.
그곳에서 나는 교실로 돌아가는 그 애를 지켜보았다.
이 년 전 그 겨울날 오후 내가 그 애한테 그런 말을 한 것에 무슨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다음에 작별 인사를 하러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찾아가면 우리는 십중팔구 바람이 새어 들어
오는 그 방, 전과 똑같은 그 벽난로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경우 내가 그 말을 꺼내기는 더욱 힘들 것이다.
제니퍼가 그곳에서 지난번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애는 똑똑한 아이이고, 그 말을 들으며 그 애가 어떤 감정을 갖든 간에 결국은 내가 그 애에게 말한 내용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애가, 간밤에 그 애의 보모가 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사태를 파악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애가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이일이 영광스러운 기억이 되었을 때,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기 위해 떨치고 일어난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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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단지 그들이 암 울하게도 지난 몇 년 동안 이 사건에 제대로 도전해 보지 못했다는 것, 여러 문제들이 현재와 같은 섬뜩한 수준에 이르도록 방치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도착한 이후 내심 충격을 받은 것은 이곳에 사는 모든 이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치명적인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곳에 도착해 이 주 동안 지위가 높든 낮든 이들 시민들과 나눈 교제를 통틀어 정직한 태도로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문명 세계 전체를 집어삼키려 위협하는 큰 소용돌이의 중심부인 이곳에서 사람들이 딱하게도 공모해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자주 목격한 젠체하는 변명으로 책임 회피 그 자체에만 골몰해 사태를 엉망으로 만들어 왔다.
그리고 지금 그런 그들, 이른바 상하이의 엘리트들이 여기에 모여, 운하 저편의 중국인 이웃들이 겪는 고초를 경멸 어린 어조로 논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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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만 작별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그녀가 내 쪽으로 한 발 다가서더니 멍하니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손을 잡았지만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웅얼대는 소리로 작별 인사를 한 다음 복도로 나섰다.
"제 걱정은 마세요, 크리스토퍼." 그녀가 문가에서 속삭였다.
"전 정말 괜찮으니까요.”
그것이 간밤에 그녀가 내게 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 일과 특별히 관련된 것으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앞서 삼 주 전 팰리스 호텔 무도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다.
"어디를 가든 서두를 필요도 없구요. 누군가 구해 주러 오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날 밤 그녀는 대체 무슨 뜻에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도 나는 어리둥절했는데, 바로 그 순간 그레이슨이 나를 찾아 군중 속에서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십중팔구 그녀에게 그 의미를 물어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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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정적을 깨는 것은 우리의 숨소리뿐이었다.
얼마 후 갑자기 다시금 총격이 시작되어 일이 분 정도 격렬하게 지속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총소리가 뚝 그치면서 다시 조용해지나 싶더니, 다음 순간 벽 저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황야에서 짐승이 우는 것 같은 길고도 가느다란 소리였는데, 목청껏 내지르는 비명 소리로 끝났다.
그다음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흐느껴 우는 소리가 이어 지더니, 그 부상자가 실제 문장으로 무어라 외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내가 이전에 들었던 죽어 가는 일본군 병사가 내는 소리와 놀랍도록 흡사해서, 기진맥
진한 상태에서도 나는 이 사람이 바로 그 군인임에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아키라에게 이 군인이 유독 운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그가 일본어가 아니라 만다린어로 소리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걸 깨닫자 나는 소름이 끼쳤다.
비명에서 간절한 애원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비명으로 바뀌는 두 사람의 애처로운 흐느낌이 너무나 똑같아서, 이것이 우리들 각자가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이 무시무시한 소리가 신생아의 울 음소리처럼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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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은 일본에 있어."
"아, 네가 그 애를 일본에 보냈군? 의외인걸."
"내 아들이 일본에 있어. 내가 죽으면 그 애한테 꼭 말해 줘."
"네가 죽었다는 말을 하라고?
미안하지만 그건 못 해. 넌 죽지 않을 테니까.
어쨌든 아직은 안 죽는다고."
"그 애한테 말해 줘. 내가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엄마 말씀 잘 들으라고. 지켜 주라고.
그리고 좋은 세상을 만들라고."
적당한 영어 단어를 찾느라 애쓰는 한편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소곤거림에 가까웠다.
"좋은 세상을 만들라 고 말이야."
그가 벽을 매끄럽게 다듬는 미장이처럼 손으로 허공을 다듬듯 움직이면서 다시 한 번 그 말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눈으로 의아한 듯 자기 손이 움직이는 모습을 응시했다.
"그래, 좋은 세상을 만들라고 해 줘."
"어렸을 때 우리는 좋은 세상에 살았어."
이번에는 내가 말했다.
그런데 이 아이들, 우리가 지금까지 우연히 마주친 이 아이들은 어떤가.
“그들이 세상의 실제 모습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 인지를 그토록 일찍 알게 되다니 정말 끔찍해."
"내 아들은 다섯 살이야. 일본에 있어. 그 애는 아무것도 몰라.
그 애는 세상이 좋은 곳인 줄 알고 있어.
친절한 사람. 장난감. 엄마와 아빠가 있는 그런 곳 말이야."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게 나빠지기만 하진 않을 거야."
나는 이제 내 친구를 위험한 의기 소침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려 애쓰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가 어렸을 때는 사태가 나빠져도 바로잡을 능력이 없었지.
하지만 이제 어른이 됐으니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어. 그게 중요해.
우리를 좀 봐, 아키라. 이 모든 일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결국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
떠올려 봐, 올드 챕. 우리가 했던 그 놀이들을 말이야. 우리가 수없이 했던 놀이들을 기억해 봐.
내 아버지를 찾는 형사 역할도 했었잖아.
이제 어른이 됐으니 우리는 결국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
아키라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내 아들이 세상이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그는 고통 때문이거나 적절한 영어가 떠오르지 않아서거나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말을 멈췄다. 그가 일본어로 무슨 말인가를 하다가 다시 영어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애와 함께 있고 싶어. 그 애를 돕고 싶어. 그 애가 세상의 실상을 알 게 될 때 말이야."
"이것 봐, 넌 정말 바보 같아. 그건 지나치게 침울한 얘기잖아.
넌 아들을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해 줄게.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 세상이 얼마나 좋아 보였는가 하는 얘기 말이야.
어떤 점에서는 말도 안 돼. 그저 어른들이 우리에게 그런 생각을 주입시킨 것뿐이야.
어린 시절을 지나치게 그리워해 서는 안 돼.”
“그…리워한다고…”
아키라는 마치 그것이 자신이 찾으려 애썼던 말이었던 것처럼 되뇌었다.
그런 다음 그는 일본어로 무슨 단어인가를 말했는데 아마 '그립다'의 일본어일 것이다.
"그립다라. 그립다는 건 좋은 일이야. 아주 중요한 일이지."
"정말 그럴까, 친구?"
"중요한 일이야. 아주 중요해. 그리워한다는 것 말이야. 그리워하면 기억하게 되거든.
우리가 어른이 되면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걸 말이야.
우리는 그 기억을 가지고 좋은 세상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거지.
아주 중요하지. 조금 전 나는 꿈을 꾸었어.
꿈속에서 나는 어린아이였어. 엄마 아빠가 내 곁에 계셨지. 우리 집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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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나를 데리러 사람이 온 것은 그로부터 다시 삼십 분쯤 지나서였다.
나는 호위를 받으며 다시 층계를 하나 더 올라간 다음 더 많은 경비원이 지키고 있는 복도를 지났다.
그곳에서 나를 호위하는 자들이 걸음을 멈추더니 그 가운데 한 명이 우리 앞 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그 마지막 여정은 나 혼자였다.
내가 들어선 곳은 커다란 서재처럼 보이는 방이었다.
발밑에는 두꺼운 양탄자가 깔려 있고 벽면 거의 전체가 책으로 덮여 있었다.
맨 안쪽, 무거운 휘장이 쳐진 퇴창 근처에 양쪽으로 의자가 하나씩 놓인 책상이 있었다.
책상에 놓인 독서 등이 따스한 불빛 웅덩이를 만들었으나, 방 안의 다른 곳은 어둡게 그늘져 있었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서 있는 동안 책상 뒤편에서 누군가 일어서더니 조심스럽게 책상을 돌아와 방금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가리켜 보였다.
"자리에 앉지 그러니, 퍼핀?" 필립 삼촌이 말했다.
"기억나니? 너는 언제나 내 책상 앞 의자에 앉는 걸 좋아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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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버지 입장에서 말하게 해 주렴.
그건 그에게도 힘든 일이었을 거야. 그는 언제나 네 어머니를 사랑했지.
꽤 깊이 말이다. 나는 네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네 어머니를 사랑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말이다, 퍼핀, 그게 문제란다.
그는 네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녀를 이상화했어.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그녀의 수준에 다가가기 위해 애썼지.
그게 그에게는 너무 힘들었어. 그는 노력했어.
아, 그래, 무진 애를 썼지.
그리고 그 때문에 거의 부서질 지경이었어.
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어.
'이것 봐, 나는 이 정도까지밖에 못해.
이게 전부야. 이게 나라고.'
하지만 네 아버지는 네 어머니를 숭배했어.
그녀에게 어울리는 존재가 되기를 절박하게 원했지.
그러다가 자신이 그런 존재가 못 된다는 걸 깨닫자 그냥 떠나버린 거지.
자기가 어떤 사람이든 개의치 않는 누군가와 말이야.
내 생각에 네 아버지는 그저 쉬고 싶었던 것 같아.
오랜 세월 너무나 애를 써서 그저 좀 쉬고 싶었을 거야.
네 아버지를 너무 나쁘게 생각지 말거라, 퍼핀.
나는 네 아버지가 너나 네 어머니를 줄곧 사랑했다고 믿는다.”
"그러면 어머니는요? 어머니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필립 삼촌은 팔꿈치를 괴고 몸을 앞으로 숙인 채 고개를 한쪽 으로 살짝 기울였다.
"네가 네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것은 뭐지?"
그가 조금 전까지 그의 음성에 애써 담으려 했던 경쾌함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는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무언가에 홀린 노인처럼 보였다.
그는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음에도 그 자세 그대로 나를 주의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
책상 스탠드의 노란 불빛에 하얗게 센 그의 코털이 보였다.
아래층 어디에선가 축음기에서 중국 군악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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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메트로폴 호텔로 왕 쿠를 만나러 갔지.
나는 어김 없이 닥쳐올 재앙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소용 없었단다.
그날 오후 그가 내게 말한 것은, 네 어머니로 인해 분노했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었어.
그는 네 어머니의 기가 몹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했어.
바로 그 '기'라는 단어를 썼단다.
어찌나 매력적이었던지 네 어머니를 후난으로 데려가 첩으로 삼고 싶다는 거야.
그는 ‘야생 암말을 길들이는 것처럼 네 어머니도 길들이겠다'고 했어.
이제는 너도 이해하겠지만, 퍼핀, 당시 상하이에서든 다른 지역에서든 중국에서 왕 쿠 같은 사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를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단다.
넌 그걸 이해해야 해.
경찰이나 다른 누구에게 네 어머니를 보호해 달라고 해 보았자 소용없는 일이 었을거다.
그 경우 일의 진행을 조금 늦출 수 있을지는 모르지 만 그뿐이야.
그런 사내의 의지로부터 네 어머니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하지만 퍼핀, 내가 무엇보다 두려 워했던 것은 너 때문이었지.
나는 그자가 너를 어떻게 할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그것이 바로 내가 간청했던 일이었어.
결국 우리는 합의를 보았지.
나는 네 어머니를 무방비 상태로 홀로 있도록 하고 그사이에 그곳에서 너를 데리고 나오도록 사전 준비를 했단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일 전부였지.
나는 그자가 너까지 데려가도록 하고 싶지 않았어.
네 어머니의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
하지만 너라면 간청해 볼 여지가 있었지.
그래서 내가 그렇게 했던 거야."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런 편의를 봐 준 후 왕 쿠는 당신 계획에 계속 협력했겠군요?"
"그렇게 빈정거리지 말거라, 퍼핀."
"어쨌든 그자가 협력했죠?"
"실제로 그랬다. 네 어머니를 데려간 것으로 만족했지.
그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했고, 아마도 그자의 기여가 궁극적으로 이들 회사들이 아편 무역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하는 데 한몫을 했다고 본다.”
==
그는 이제 아주 신중한 눈길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그에게, 그가 기다리는 질문을 던졌다.
"필립 삼촌, 금전적인 처리라는 것이 뭐죠?"
그는 자신의 손등을 한참 동안 살펴보듯 내려다보았다.
"네가 없었다면, 너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퍼핀, 네 어머니는 그 악당이 자기 몸에 손가락 하나 대기 전에 단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을 거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서 그렇게 했을 거야.
하지만 너를 고려해야 했지.
그래서 결국 그녀 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파악하고 협상을 한 거야.
그녀 자신이….순종하는 대가로 네가 재정적인 뒷받침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야.
그 많은 부분을 내가 직접 회사를 통해서 처리했단다.
바이어트 사의 직원은 이런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
그는 회사의 아편이 안전하게 통과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거라고 생각했단다.
하하! 그자는 정말 멍청이였어!"
필립 삼촌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음 순간 마치 이제 우리의 대화가 나아가게 될 방향을 따르기로 체념한 듯 그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내가 받은 돈이.…” 내가 조용히 말했다.
"내 유산이…..”
"영국에 있는 네 이모 말이다. 그녀는 부자가 아니었어.
오랜 세월 동안 실질적인 네 후원자는 왕 쿠였지."
"그러면 그동안 나는….내가 먹고 살아온 게…내가 먹고 살아온 게…”
차마 말을 잇지 못한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필립 삼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학비. 런던에 있는 너의 집. 네가 지금 성취한 것 모두가 왕 쿠에게 빚진 거야.
아니, 네 어머니의 희생에 빚진 거지."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거의 증오심이라고 할 만한 것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몸을 돌려 그늘진 곳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 표정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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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어머니를 만났을 때 말이다.
그 요새에서 그녀는 아편과 관련된 운동에 대해서는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렸어.
그녀는 오직 너를 위해, 네 걱정만 하며 살았지.
그 무렵에는 아편무역이 불법이 되었어.
하지만 그 소식조차 그녀에게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었지.
그 사실이 내게는 물론 뼈아프게 느껴졌단다.
오랜 세월 그 캠페인에 종사해 온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우리는 마침내 목표를 달성했다고 여겼다.
아편 무역이 근절되었으니까.
그 근절의 실상을 확인하는 데는 일이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편 무역을 맡은 자가 바뀐 것뿐이었어.
이제는 장제스 정부가 그 일을 도맡았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중독자가 나왔지만 이제 마약 밀매는 장제스 군에게 돈을 대주는 결과가 됐어. 그의 권력을 위해서 말이다.
그때 나는 홍군에 가담했단다, 퍼핀.
나는 네 어머니가 우리 캠페인의 결과가 그렇다는 사실을 알면 경악할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녀는 더는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단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오로지 네가 제대로 보살핌을 받는 것뿐이었어.
그녀는 네 소식만 듣고 싶어 했지. 그런데, 퍼핀."
그의 음성이 갑자기 이상하게 바뀌었다.
그때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주 좋아 보였단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있는 동안 그 집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어.
알만한 사람들에게 말이야.
나는 진실을 알고 싶었지.
네 어머니가 실제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었단다.
왜냐하면…왜냐하면 언젠가는 이 순간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만남이 이루어질 날이 올 것임을 알았거든.
그리고 나는 실상을 알아냈어. 그래, 모든 것을 다 알아냈단다."
"당신은 지금 고의적으로 나를 고문하려는 겁니까?"
“그저…침대에서 그에게 굴복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단다.
그자는 만찬 손님들 앞에서 자주 그녀에게 채찍질을 하곤 했어.
그자는 그걸 백인 여자 길들이기라고 불렀지. 그뿐만 아니라.…”
나는 이미 귀를 막고 있었으나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만해요! 어째서 나를 이렇게 고문하는 거죠?”
==
“어째서냐고?,"
이제 그의 음성은 성난 기미를 띠었다.
"어째서냐고? 그건 네가 진실을 알기를 바라기 때문이지!
이 모든 세월 동안 너는 나를 비열한 인간이라고 여겨 왔어.
아마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세상이 너한테 하는 짓이야.
내가 진심에서 이런 짓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이 세상에 좋은 일을 할 생각이었어.
나 나름의 방식으로 한때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린 적도 있지.
그런데 지금 내 꼴을 보거라.
너는 나를 경멸하고 있잖아.
너는 그동안 내내 나를 경멸해 왔어.
퍼핀, 내 아들처럼 여겨 왔던 바로 네가. 그리고 지금도 나를 경멸하고 있어.
하지만 이제 세상의 실상을 알겠니?
너로 하여금 영국에서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고?
네가 어떻게 유명한 탐정이 될 수 있었을까?
탐정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겠니?
도둑맞은 보석, 유산 때문에 피살된 귀족 나부랭이들.
너는 우리가 맞서 싸울 게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냐?
네 어머니는 네가 영원히 그 마술 같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랐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결국 그런 세상은 산산조각 나게 마련이다.
네게 있어서 그 세상이 그토록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건 기적이야.
자, 퍼핀, 내가 너에게 기회를 주마. 자.”
그는 다시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는 어두운 곳에서 내 쪽으로 나왔다.
내 자리에서 올려다보니 어렸을 때 그랬던 것만큼이나 거대한 모습을 하고 다가오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는 웃옷 앞 자락을 젖히고는 권총을 심장 가까운 곳에 대고 눌렀다.
"자." 그가 텁텁한 입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로 허리를 구부리며 내게 속삭였다.
"자, 넌 나를 죽일 수 있어. 네가 늘 원했던 대로 말이야.
그 때문에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 있었어.
다른 어느 누구도 그런 특권을 가져서는 안 돼.
나는 바로 너를 위해서 내 목숨을 아껴 두었던 거야.
방아쇠를 당겨라. 자, 이것 봐, 내가 네게 달려든 것처럼 꾸밀 수 있어.
나는 총을 잡고 있고, 네 몸 위로 쓰러질 거야.
그들이 들어오면 네 몸 위에 엎어진 내 시신을 보게 되겠지.
정당방위처럼 보일 거다.
자, 내가 총을 잡고 있잖니. 넌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돼, 퍼핀.”
==
내 얼굴을 누르고 있는 그의 조끼가 가슴팍이 오르내림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였다.
내가 혐오감을 느끼고 몸을 빼려 했으나, 삼촌은 자유로운 한 손으로 - 그 손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바싹 마른 느낌이었다 - 내 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문득 내 손이 권총에 닿기만 하면 삼촌이 직접 방아쇠를 당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뒤로 빼는 바람에 의자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한순간 우리 두 사람은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문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 소동 때문에 경비원들이 뛰어들어 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윽고 필립 삼촌이 웃음을 터뜨리더니 의자를 바로 세워 조심스럽게 책상 앞에 갖다 놓았다.
그러고는 그 의자에 앉아 권총을 책상에 내려 놓은 다음 얼마간 숨을 가다듬었다.
나는 책상으로부터 몇 발짝 더 떨어졌지만 그 동굴 같은 방에는 책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삼촌에게서 등을 돌린 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 좋아." 그는 몇 차례 더 심호흡을 했다.
"그러면 이제 말해 주지. 네게 나의 가장 어두운 고백을 들려주마."
그러나 그 다음 일 분 동안 내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등 뒤에서 삼촌이 낸, 숨이 차서 헐떡이는 소리뿐이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좋아, 네게 진실을 털어놓겠다.
그날 내가 왕 쿠에게 네 어머니를 납치하도록 허용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아까 한말은 사실이야. 나는 너를 보호해야만 했지.
그래, 그래, 내가 아까 한 말은 모두 어느 정도는 사실이란다.
하지만 내가 정말 그러려고 했다면, 내가 정말 네 어머니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어떻게든 그렇게 할 방도를 마련했을 거야.
이제 네게 하지 않은 말을 해 주마, 퍼핀.
오랜 세월 동안 나 자신에게조차 털어 놓을 수 없었던 얘기를 말이다.
내가 왕이 네 어머니를 데려가도록 방조했던 것은 그녀가 그의 노예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밤마다 노예처럼 당하는 일에 익숙해 졌으면 했어.
나는 네 집에 머물기 시작한 첫날부터 줄곧 네 어머니에게 욕망을 느꼈다.
아, 그래, 나는 그녀를 원했어.
그래서 네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집을 나가 버리자 나는 마침내 기회가 왔다고, 내가 자연스럽게 네 아버지 자리를 이어받게 될 거라고 여겼지.
하지만…하지만 네 어머니는 한 번도 나를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어.
네 아버지가 집을 나간 후에야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지.
그녀는 나를 점잖은 사람으로 존중했어….
그래, 그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지.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나는 그녀 앞에 나설 수 없었던 거야. 그런 식으로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났지. 몹시 화가 났단다.
그리고 왕 쿠와의 그 사건이 벌어지자 그 일이 나를 흥분시켰어.
내 말 듣고 있니, 퍼핀? 그 일이 나를 흥분시켰단 말이다!
그자가 그녀를 데려간 그날 한밤중에 그 일을 생각하자 흥분이 되었지.
그 모든 세월 동안 나는 왕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며 살아왔다.
마치 내가 그녀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 같았어.
그녀에게 일어난 일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상상하며 수없이 자위를 했지.
자, 이제 나를 죽여라! 어째서 나 같은 인간을 살려 두는 거냐?
이제 다 들었잖아! 어서, 쥐새끼를 쏘듯 나를 쏴 버리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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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뒤로 조금 더 물러났다.
어머니는 다시 카드로 고개를 돌렸고, 그다음에 시선을 들었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니." 내가 천천히 말했다.
"저예요. 제가 영국에서 왔어요. 이렇게 늦게 와서 정말 죄송해요.
제가 어머니를 실망시킨 것 같군요. 그것도 크게 말이에요.
저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제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정말이지 너무 늦었네요."
아마 내가 울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고개를 들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다 이렇게 말했다.
"이가 아프세요, 선생님? 그러면 아그네스 자매님을 만나 보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 말을 알아들으셨어요? 저예요, 크리스토퍼.”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뤄 봤자 소용없어요.
아그네스 자매님이 낫게 해 주실 거예요."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머니, 퍼핀이에요. 제가 퍼핀이라고요."
"퍼핀." 어머니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
"퍼핀이라고?" 한동안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이제 표정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머니는 다시 고개를 들었는데, 두 눈은 내 어깨 너머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느라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퍼핀."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그 말을 되풀이했는데, 한순간 행복감에 빠진 듯이 보였다.
다음 순간 어머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아이는 정말 걱정 덩어리예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내가 말했다.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의 아들, 이 퍼핀을요. 그 애가 최선을 다했다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 주세요.
비록 그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해도요. 그걸 아신다면…
그러면 어머니도 그 아이를 용서해 주실 수 있지 않겠어요?”
어머니는 계속 내 어깨 너머를 응시했지만, 얼굴에는 이제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퍼핀을 용서하라고요? 퍼핀을 용서하라고 하셨나요? 왜죠?"
그러더니 다시 행복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 아이. 그 아이가 잘하고 있다고들 하더군요. 하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에요.
아, 그 아이가 얼마나 내게 걱정 덩어리인지 몰라요.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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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는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달 그 여행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하던 중에 내가 제니퍼에게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 말을 들은 다음에야 나는 깨달았지.
내 말은, 어머니가 나를 줄곧 사랑하셨다는 거야.
그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말이야.
그녀가 원했던 것은 단 하나, 내가 좋은 삶을 누리는 거였어.
그 나머지 모든 것, 내가 어머니를 찾으려 노력했든, 이 세상을 파멸로부터 구하려 노력했든 어느 쪽이든 어머니께는 아무 차이가 없었던 거야.
나에 대한 어머니의 감정은 언제나 그저 거기 있는 것으로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어. 그건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나로서는 그 사실을 깨닫는 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렸어.”
"그분이 정말 삼촌이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셨나요?" 하고 제니퍼가 물었다.
"알아보지 못하셨을 거라고 확신해.
하지만 어머니가 한 말은 진심이었고,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계신지 분명 알고 계셨어.
어머니는 용서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고,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암시에 정말 어리둥절해 하셨지.
내가 처음 그 이름을 말했을 때 네가 그분의 얼굴을 보았다면 너 역시 그 사실을 확신했을 거야.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크리스토퍼 삼촌, 어째서 수녀들에게 삼촌의 진짜 신분을 밝히지 않으셨어요?”
"나도 확실히 모르겠구나. 그래, 좀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냥 그랬을 뿐이야.
게다가 어머니를 그곳에서 모시고 나와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단다.
어머니는 왠지 만족한 듯이 보였어.
꼭 행복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고통의 순간이 지나간 것처럼 보였어.
어머니가 영국의 집으로 오신다 해도 그보다 더 잘 지내시지는 못했을 거야.
내 생각에 그것은 어머니가 어디에 묻히느냐 하는 문제 같기도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나는 어머니를 이곳에 매장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역시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듯해.
어머니는 평생을 동양에서 사셨어. 그곳에서 영면하시는 쪽을 더 좋아하실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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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크리스토퍼, 이제 개의치 않고 말할게요.
그 당시 제가 우리 사이의 일이 그런 식으로 증발해 버린 것에 아무리 좋게 말해도 실망했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당신에 대한 화는 이미 오래전에 풀렸으니까요.
운명의 여신이 최후에 제게 이처럼 자비로운 미소를 짓기로 한 마당에 어떻게 제가 화를 풀지 않을 수 있겠어요?
게다가 지금 저는, 그날 당신이 저와 함께 가지 않기로 한 것이 옳은 결정이라고 믿어요.
당신은 언제나 완수해야 할 임무가 있다고 느꼈죠.
그러니 그 일을 다하기 전까지는 누구든 어떤 것에든 마음을 줄 수 없었을 거예요.
다만, 이제는 당신도 일에서 풀려났기를, 당신 역시 제가 최근에 허락받은 것 같은 행복과 우정을 발견했기를 바랄 뿐이에요.”
편지의 이 부분, 특히 맨 마지막 한 문장에서는 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편지 전체를 관통하는 미묘한 어조, 그리고 사실상 그 시점에서 내게 편지를 쓰는 그 행동은 ‘행복과 우정'으로 가득한 날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프랑스 백작과의 그 삶이 진실로 상하이 선창으로 발을 내디딘 그날 그녀가 꿈꾼 삶이었을까?
왠지 그럴 것 같지 않다.
그녀가 임무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을 회피하려는 시도가 소용없는 것이라고 했을 때 나에 대해서만큼이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리라는 느낌이 든다.
이런 필생의 관심사에 속박당하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의 운명은, 사라진 부모의 그림자를 오랜 세월 뒤쫓으면서 고아로서 세 상과 대면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 임무를 완수하려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러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쭐한 척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곳 런던에서 하루하루를 무심하게 보내면서 나는 진정한 만족을 느끼게 된 것 같다.
나는 공원을 산책하고, 미술관에 들르는 것을 즐긴다.
최근 들어서는 자주 대영 박물관 열람실에 들러 내 사건에 관한 기사가 실린 옛 신문을 들추면서 자그마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이 도시는 어느새 내 고향이 되어서,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야 한다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럼에도 때때로 공허감 같은 것이 내 삶에 찾아든다.
제니퍼의 제안을 앞으로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