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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 3,1-13
사랑하는 그대여,
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훌륭한 직무를 바라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3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4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5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6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는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7 또한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방을 받거나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습니다.
8 봉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 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 됩니다.
9 그리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10 또 그들을 먼저 시험해 보고 나서 흠잡을 데가 없는 경우에만 봉사직을 수행하게 해야 합니다.
11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알고 모든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12 봉사자들은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과 자기 집안을 잘 이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3 사실 봉사직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들은 좋은 명성을 얻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더욱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오늘 복음인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루가 8,40-56)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요한 11,17-44)와 함께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물론 죽은 이를 살리신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1열왕 17,17-24)라든지,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2열왕 4,32-37),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린 이야기(사도 9,36-43)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그들이 하느님께 간청해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직접 “일어나라”는 한 마디의 말씀으로 죽은 이를 손수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누구의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아들을 잃은 과부에 대한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서 베풀어집니다.
이는 당신 자신이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이심을, 곧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당신의 큰 자비를 드러내줍니다.
곧 율법에 따르면, 시체에 손을 대는 것은 부정을 타는 행위이지만, 율법을 너머서는 그 자비의 힘으로 죽은 젊은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오늘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보고 싶은 것은 이 광경을 ‘목격한 자들의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반응은 바로 지금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들 자신의 반응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7,16)
우리는 여기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일'이 어떻게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는지 보고자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체험에서 오는 '두려움'은 성서 안에서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히자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루카 5,8)라고 했던 것처럼, 무서움과 공포, 거부와 배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요, 또 다른 한 가지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께 대한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단지 무서움이나 공포의 감정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내 감사와 찬양, 사랑과 예배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의 체험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전능함, 그리고 위대하심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왜소함과 무능함, 그리고 죄를 발견하면서 오게 되는 회개와 바로 그분이 자신의 주님임을 깨닫고 믿게 되면서 감사와 찬양, 예배와 사랑이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두려움은 사랑이 머물 자리를 준비합니다.
~ 두려움이 없다면 사랑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 두려움은 사랑이 들어오게 하는 입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이끌고 들어갈 수 있도록 두려움이 그대 마음 안에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지혜 1,28)”
(요한서간 강해 9,4)
이처럼 '두려움'이라는 바늘을 통해 '사랑'이라는 실이 꿰매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베네딕도는 <규칙서>에서 다른 어떤 것 때문에가 아닌, “하느님을 사랑으로 두려워할 것”(규칙서 72,9)을 말합니다.
곧 '두려움'과 '사랑'이 동일한 것으로 다루어집니다.
또한 그는 <규칙서>의 머리말에서 시편 32편 12절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아이들아 와서 듣거라.
하느님 두려워함을 가르쳐 주겠노라.”
(머리말 12)
오늘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배우고,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루카 7,16)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젊은이야, 일어나라.”
(루카 7,14)
주님!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이를 일으켜 세우시듯,
당신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누워 잠들어 있는 저를 일으켜 세우소서!
죽음의 길 벗어나 생명의 길 걷게 하소서!
쪼개어 나누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상처도 축복이 되게 하시고, 아픔도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지혜 빌려주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빠지는 것도 있지만 좋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복잡한 것이 별로 없고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중요한 것 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비슷하게라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중요하지만, 돈과 사람, 돈과 사랑, 일과 사랑을 선택해야 할 경우, 헷갈림이나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사람과 사랑을 선택하고 하느님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 건강이 많이 나빠지면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여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저는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사랑하기에 제일 좋은 황금기이고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황금기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기에 딱 좋은 이 시기를 허비하거나 낭비하면 안 되는데, 어떻게 이 시기를 보낼 것인가?
오늘은 이 점을 독서와 복음에 비춰 나눠볼까 합니다.
지금 제가 해야 할 것은 오늘 주님께서 하시듯 젊은이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죽은 과부의 외아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육체의 힘으로 치면 젊은이가 저를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젊은이들이 기가 더 많이 꺾여 있습니다.
나이로 치면 젊은이들이 더 팔팔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젊은이들이 더 많이 지쳐 있습니다.
길을 못 찾고 헤매다가 곧 방황하다가 지친 것입니다.
성숙한 인간의 첫 번째 요건이 인생의 확고한 목표를 갖는 것인데, 젊은이의 특징 중 하나가 아직 목표가 뚜렷하지 않고 확고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길인가 하고 가고 저 길인가 하고 가다 보니 지치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헤맸는데도 아직 길이 보이지 않아 주저앉은 거지요.
그러므로 이런 그들에게 저도 그 나이에 그랬던 경험을, 그러다가 마침내 길을 찾은 경험을 들려주고, 더 나아가 가야 할 곳을 찾도록 도와줘 일어나 길을 가게 해야겠지요.
그런데 젊은이는 방황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실패하는 것이 젊은이이고, 실패가 거듭되다 보니 좌절하는 존재가 또한 젊은입니다.
이렇게 좌절감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젊은이에게 다가가, 한 번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 인생 실패가 진짜 실패이고, 넘어진 것이 실패가 아니라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 진짜 인생 실패임을 일깨우며, 다시 일어나도록 손잡아 일으켜 세워주며 걸림돌을 디딤돌 삼도록 도와야겠지요.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제자요 아들인 디모테오에게 주는 가르침들입니다.
이제 제가 참으로 해야 할 것도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형제들이 하도록 디모테오에게 사도 바오로가 하듯이 지혜를 빌려주는 것임을 묵상하는 접니다.
그런데 지혜 빌려주는 것은 저 뿐 아니라 여러분도 그러해야겠지요?!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때때로 하느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좀 더 확실히 보여주면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또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 생활을 하지 않을까?'
'그와 반대로 오히려 두려움을 가질까?'
어찌 되었든 당장 내가 요구하는 기적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기적을 행하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지니셨지만, 그분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어디에서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면 기어이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현상을 보고 믿음이 성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때뿐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기적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기이한 현상에만 눈길이 머물러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실천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먼저 청원한 것도 아닌데 괴로움을 겪고 있는 백성을 차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젊은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능력에 찬 말씀으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면 그분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4),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에페 3,7) 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힘입어 주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믿음으로 그들을 챙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비한 현상은 어디에나 있어도 믿음은 어디에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길이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께로 집중하길 바랍니다.
은총의 결과물보다 은총의 주관자를 만나는 기쁨에 감사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은 영원한 하느님.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이사 40,28.31)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나쁜 재료를 주며 좋은 물건으로 돌려받기를 바란다면?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인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복음만 읽어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과부와 그 죽은 아들이 불쌍해서 과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살려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왜 불쌍하게 죽는 이들은 모두 살려주시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도 보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디에서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받을 마음이 없는데 선물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어머니의 믿음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이 말에 어머니의 큰 믿음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돌려주셨다'라는 말 안에는 어머니가 예수님께 먼저 “맡겨드렸다”, 혹은 “봉헌하였다”라는 말이 전제됩니다.
맡겨드렸다는 말은 어머니의 능력으로는 안 되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나인의 과부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맡길 줄 압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어서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맡긴다는 말은 ‘죽여서 봉헌한다’라는 뜻과 같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이유는 자기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죽여서 맡기지 않고 살려서 맡기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지고 변화될 수 있을까요?
요즘 선생님 신자들에게 엄마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학교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사연도 있습니다.
어떤 엄마가 선생님에게 보낸 문자입니다.
“선생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제가 곰곰이 생각 좀 하다가 말씀드리는 건데요.
‘도덕책을 안 가져온 사람은 수업 시간 내내 서 있게 한다’라고 아이가 말하더라고요.
‘엄마 근데 나 도덕책을 잃어버렸어.’
그날 밤 아이는 경기를 일으켰는데, 경찰서에 문의해보니 아동학대라고 하는데, 편법으로 아이들을 조지시면 편법으로 선생님을 조질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시겠어요 ^^”
선생님은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어머님 제가 오늘 아이들에게 확인해 보았는데요.
제가 도덕책을 안 가져온 사람은 수업 시간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런 엄마들은 아이들이 이상해지는 것을 선생님 탓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맡기지 않는데 어떻게 좋은 교육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20대 교사가 안타까운 선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구타당해도 선생님은 저항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 편이 없어? 교사가 죽었는데!”라고 울부짖는 동료 교사의 말은 ‘이게 제대로 된 교육일까?’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심지어 동료 교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프로필 사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학부모도 있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선생님의 프로필 사진이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이들 어린데 선생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큰 영향을 준다는 거 아시죠?
아직 사실관계도 판명 나지 않은 일로 이렇게 추모한다는 걸 드러내는 건 아닌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아이들이 상처받을 수 있으니 언급 자제 부탁드려요.”
이 댓글 때문에 파문이 일자 또 이러한 댓글이 달렸습니다.
“선생님 제 문자를 여기서 볼 줄 몰랐어요. 너무 당황스럽네요.
개인적인 문자 내용을 유포하셨으니 각오는 되신 거죠?
학부모 회의 안건으로 올릴게요. 너무 치욕스럽네요.”
어머니들이 이렇게 교육을 잘할 줄 안다면 왜 학교에 보내는 걸까요?
본인이 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애 아빠가 지금 참고 있어요. 내가 말렸어요!”라는 등으로 협박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선생님들보다 더 잘 안다고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여러 교육 프로그램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들에 대한 어머니와 선생님들을 위한 솔루션에서 “실제의 실천적인 변화가 오는 데에는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라는 질문에 어느 유명 교육 전문가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세요.”
예를 들어 놀이터에서 줄을 서지 않고 먼저 타려다가 다치면 엄마는 왜 자기 아이가 줄을 서지 않게 키웠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들은 선생님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우리 애 마음 얼마나 읽어주셨어요?”
교육은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변화시키게 만들려면 맡겨야 합니다.
맡긴다는 말은 봉헌한다는 말입니다.
봉헌한다는 말은 죽인다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다시 스마트폰도 빼앗을 수 있고 아이를 돌려보낼 수도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주 정상적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을 믿지 못하면서 자녀를 맡긴다는 말은 학교 교육으로 내 자녀가 변화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변화시키고 싶다면 맡겨야 합니다.
『하.사.시.』 5권 25장 ‘코라진의 몸이 굽은 여인’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해 주신 예화를 그대로 옮겨볼까 합니다.
어리석은 어떤 부자가 한 장인(匠人)에게 아주 질이 좋은 꿀과 같은 황금색 재료의 큰 덩어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가공해서 장식된 작은 병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재료는 가공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고 장인이 부자에게 말했습니다.
‘보세요. 이 재료는 무르고 잘 늘어납니다.
제가 어떻게 이것을 조각해서 모양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뭐라고요? 이 재료가 좋지 않다고요?
이것은 값진 수지(樹脂)이고, 내 친구 한 사람은 이것으로 만든 작은 항아리를 하나 가졌는데, 그 항아리에 넣은 포도주는 얻기 어려운 맛을 얻게 되오.
나는 더 큰 항아리 만들어 가져서, 그의 항아리를 자랑하는 내 친구의 자존심을 꺾어 주려고 이 재료를 아주 비싼 값을 주고 샀소.
항아리를 만들어주시오. 그것도 즉시.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능력 없는 장인이라는 말을 하겠소.”
“그러나 손님 친구의 항아리는 황금빛 설화석고(雪花石膏)로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아니오, 이 재료로 만든 거요.”
“질이 좋은 호박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아니오, 이 재료로 만든 거요.”
“혹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이라고 해둡시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결과로나 단단하게 만든 다른 재료들과 섞어서 치밀해지고 단단해졌을 것입니다.
그 친구분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오셔서 그분의 항아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오. 이 재료는 그 친구 자신이 내게 판 것이고, 그렇게 써야 한다고 확실히 말해 준 거요.”
“그러면 그 친구분이 자신의 아름다운 항아리에 대해 손님이 가지시는 욕망을 벌하려고 손님을 속인 것입니다.”
“말조심하시오!
일을 하오. 그렇지 않으면, 이 희귀한 수지(樹脂)의 가치와 비교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이 작업장을 빼앗아서 당신을 벌하겠소.”
“장인은 슬퍼하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반죽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반죽이 그의 손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는 유향(乳香)과 가루를 써서 한 덩어리를 굳게 하려고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수지는 황금빛의 투명성을 잃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열로 단단하게 하기를 바라면서 도가니 가까이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용해(溶解)되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그것을 꺼내야 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헤르몬산 꼭대기에 보내서 얼어붙은 눈을 가져오게 해서 그 물질을 눈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물질은 단단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형(成形)이 되지 않았습니다.
‘끌로 모양을 만들어야지’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끌을 대자마자 수지가 산산조각이 낮습니다.
장인은 완전히 실망하고, 벌써 그 재료를 가공할 수 있게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마지막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그는 조각들을 주워서 화덕의 열기로 다시 액체가 되게 한 다음, 그것을 다시 눈으로 가볍게 얼렸습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말랑말랑해진 재료를 끌과 칼 모양의 주걱으로 가공해 보았습니다.
그 재료가 성형되기는 했습니다.
암! 성형됐지요!
그러나 끌과 혀 모양의 주걱을 떼자마자, 마치 반죽 통에서 부풀어 오른 빵 반죽인 것처럼 처음 형태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쳤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부자의 보복을 피하고 파산을 면하기 위해서 밤사이에 아내와 아이들을 마차에 태우고, 물건들과 일하는 연장들을 싣고, 빈 채로 남겨둔 작업장 한가운데에 수지의 황금 빛나는 재료를 놓아두고, 그 위에는 ‘가공할 수 없음’이라는 쪽지를 남기고, 국경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살아 있는 것을 주면서 변화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맡기려면 완전히 맡기십시오.
완전히 맡겼다는 말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제에게 성당을 맡겼는데 교구가 사제가 아닌 신자들의 목소리에 휘둘리면 어떨까요?
사제는 그 성당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사제가 봉사자를 뽑았다면 그 봉사자가 자신의 범주 안에서는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도록 해야 합니다.
책임은 그 봉사자를 뽑은 사제에게 있습니다.
물론 사고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맡기려면 제대로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봉헌하여 좋은 것으로 돌려받으려면 죽은 제물을 바쳐야 함을 잊지 맙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일어나라.">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마태 4,16)
또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4)
예수님은 죽음의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구세주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신(희망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들은, 죽은 그 사람만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적이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그 일을 목격한 제자들과 군중을 위한 기적이기도 하고, 지금 복음서를 읽고 있는 우리를 위한 기적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흔히 무심코 지나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에게 직접 명령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아이야, 일어나라."
(루카 8,54)
'예수님께서 ......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요한 11,43)
‘나인’이라는 고을에서도 죽은 젊은이에게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4절)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에게 직접 명령하신 것은, 죽은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대로 움직일 수 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은 당사자의 응답하려는 의지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죽음은 ‘긴 잠’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울지들 마라.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루카 8,52)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요한 11,11)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무생물’처럼 되어버린다는 생각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죽어도 ‘무생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살아 있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우리가 바치는 기도도 들을 수 있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연도’는 죽은 사람의 안식과 구원을 주님께 부탁드리는 기도이고, 동시에 유가족을 위로하는 기도이고, 그리고 죽은 사람 들으라고 바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더,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를 읽을 때, 죽었다가 살아난 그 당사자의 심정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분명히 예수님이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그 사람은 어떤 심정일지, 살아난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증언하고 고백할 수 있는 첫 번째 증인은 바로 그 당사자들입니다.
복음서에는 당사자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살아난 체험을 한 당사자의 증언과 고백은 목격자들의 말보다 더 생생한 증언과 고백이 되었을 것입니다.
라자로는 살아난 뒤에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야이로’ 라는 회당장의 딸과 ‘나인’ 고을의 젊은이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데, 살아난 뒤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충실한 신앙인으로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울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묵시 21,3ㄹ-4ㄴ)
“일어나라.” 라는 말씀은 이야기 속에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말씀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어둠 속에서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일어나서 생명을 향해 나아가라.”
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죄입니다.
정말로 사는 것이 힘들더라도, 죽고 싶은 심정으로 겨우겨우 살고 있더라도,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일수록 더욱더 주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살아난 그 젊은이는 무슨 말을 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이 ‘진짜’ 라고 증언하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라는 말은 “죽은 젊은이를 살리심으로써 그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려주셨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라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으로 해석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미(人間味) 넘치는 예수님 닮기 - 인간미 넘치는 사람>
오늘도 밤에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문을 나서며 하늘의 별들을 보고 불암산 정상을 확인한후 집무실에 들어와 십자가의 예수님과 그 아래 태극기를 바라보며 “만세육창” 후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맨먼저 찾는 어머니요, 어머니 앞에서 이런저런일을 털어 놓던 일이 생각납니다.
얼른 일어나 속생각을 주님께 쏟아놓고 싶은 마음에 저절로 잠깨게 됩니다.
끝기도 후는 너무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나면 어머니 앞에 털어 놓는 아이처럼 어제 하루 있었던 모든 일을 하느님께 털어 놓으며 시작하는 하루요,기도하는 마음으로 매일 쓰는 강론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밤마다 외딴곳에서의 시간도 이런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戰士)’이다.”
요즘 새롭게 정의한 제 신원입니다.
“인간미 넘치는 예수님 닮기”-인간미 넘치는 사람-,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인간미 넘치는 사람, 매력 만점입니다.
사전에서 찾아 봤습니다.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정답고 따뜻한 느낌” 이런 이들이 진짜 살아 있는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신적일수록 인간적이고 인간적일수록 신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자 인간이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된다는 역설의 진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배웁니다.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평지설교 끝날 무렵 복음이 두 소주제는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와 “내 말을 실행하여라”였습니다.
참으로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듯이 표정이나 언행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할 때 비로소 좋은나무에 좋은열매의 사람들임을 말해 주는 복음입니다.
요즘 자주 보는 유투버에서 무수한 공직자들의 표정이나 언행을 보면서 너무 실망하게 됩니다.
사제나 수도자뿐 아니라 그 무슨 직위든 “사람이 먼저 되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지식공부는 뛰어나고 권모술수나 처세술이 뛰어나 높은 직위에 올랐을지 몰라도 사람되는 공부는 정말 엉망진창 수준이하들인 경우 너무 많습니다.
인성이나 품성이 말이 아닙니다.
지성, 감성, 영성도 전무하고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 존중심도 없고 상식이하인 경우 너무 많습니다.
도대체 젊은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희망을 주는 어른들이 없기에 20대 자살율이 세계 제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주 가톨릭평화신문 제1면 톱기사, "가족돌봄에 지치는 청년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어요." 제목을 잊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훌륭한 인품의 사람이 되는 것을 첫째 목표로 두고 공부에 전념했으면 좋겠습니다.
새삼 사람되는 공부가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평생공부인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주 하는 말도 생각났습니다.
광야인생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괴물이나 폐인도 많다고 말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비정非情의 야만시대, 사람이라 하지만 괴물, 악마, 폐인같은 사람도 세상 도처에 널려 있고 영육이 아픈 병든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영육의 건강을 위해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 살아야 할 위기의 시대입니다.
지옥은 텅 비어 있고 악마들이 활개치는 세상이라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반면 평지설교 후 예수님의 인간미 넘치는 모습은 얼마나 멋집니까!
어제 예수님은 추호의 망설임 없이 백인대장의 노예를 치유하시며 그의 믿음에 감탄하셨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불쌍한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인간미에 매혹된 사람들은 세상 역사상 얼마나 많았는지요!
교회는 싫어도 예수님은 좋아했다는 간디, 복음의 산상설교와 참행복 선언은 종파를 초월해 대부분 영성가들이 얼마나 많은 영감을 받았는지 찬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불가의 성철 스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얼마전 불교학의 석학碩學이라 할 수 있는 심도학사를 이끌던 개신교 신자인 길희성 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가 지병으로 9월8일 80세에 선종했습니다.
신문에서 읽은 일부 기사를 인용합니다.
'“선생님은 초종교적 영성을 추구하시면서 왜 그리스도교를 떠나지 않으세요?”
“예수님이 너무 좋아.”
어느 햇살 따사로운 오후의 대화였다.
길희성 선생님은 경계없이 종교를 연구하고 불교학자로서 명성을 떨치셨지만, 당신의 영적 뿌리는 언제나 그리스도교였다.
종교학자로서 이웃 종교를 탐구하시면서 당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 깊고 풍요롭게 하셨다고 해도 좋겠고, 그리스도교 영성의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 이웃 종교와 벽없이 소통하셨다고 해도 좋겠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얼마나 아름답고 극적인지요!
그대로 파스카 신비가 펼쳐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일행과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일행 행렬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조우遭遇합니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의 대조입니다.
예수님의 개입으로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외아들을 잃고 울며 가는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이르시고는 관에 손을 대시며 죽은 젊은이에게 명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의 잠든 영혼을 일깨우는 죽비소리와도 같이 은혜롭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화두로 삼아 사시기 바랍니다.
여기 “일어나라.”는 부활을 뜻하는 말마디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파스카의 삶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군중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외치는 다음 고백이 진리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둘의 고백 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참으로 이런 예수님을 만나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인 우리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예수님을 닮은 교회지도자의 자격과 봉사자의 자격을 갖출수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요.
비단 교회뿐 아니라 정치, 사회지도자도 이런 자질을 갖추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지요!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데가 없어야 하고,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하고,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대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사람들입니다.
비단 교회지도자의 자질일뿐 아니라 이런 정치, 사회지도자의 자질이자 우리 인간이 갖춰야 할 자질이요 품성이겠습니다.
이어지는 봉사자의 자격도 우리 자신의 됨됨이를 살펴보게 합니다.
“봉사자들도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되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역시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과 집안을 잘 이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훈련되고 습득된 좋은 인품과 자질의 사람들이 경제, 사회, 교육, 정치 등 모든 각 분야에 배치되어 업무를 수행한다면 얼마나 멋진 사회요 국가가 되겠나 생각해 봅니다.
새삼 가정교육, 교회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이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의 총체적 난국이자 위기의 시대를 개탄하며 지니는 생각입니다.
그나마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은 참사람이 되어 살게 하시니 위로와 힘을 받습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1984년 103위 시성식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주례로 여의도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시성식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많은 과정이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신청을 하면 교회는 '가경자'라는 이름으로 조사를 시작합니다.
교회는 면밀한 검토와 표징을 토대로 ‘가경자’를 복자품에 올리게 됩니다.
이렇게 복자품에 오른 분들에 대해서도 시간을 두고 기도한 후에 비로소 ‘성인품’에 올리게 됩니다.
교회의 시성식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특별한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한번 시성된 성인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 않고 공경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기에 시성식은 면밀히 검토되어야 하고, 증언을 들어야 하고,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2014년에 124위 시복식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주례로 광화문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교황 방한 준비 위원회에서 일하였습니다.
124위의 복자가 성인품에 오를 때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기다립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한 치의 오차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평생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해방이 되기 전인 1943년 먼 타국에서 사망하였습니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은 그분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분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려하였지만 북한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분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였고, 대한민국 공군이 우리의 영공으로 돌아오는 유해를 호위하였습니다.
그분의 유해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그분의 흉상은 다른 독립투사들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설치되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던 독립군들의 정신을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이 따르자는 취지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부는 홍범도 장군이 과거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흉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합니다.
그분이 공산당에 가입했던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이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공산주의인 러시아와 민주주의인 미국은 연합국으로 같은 편이었습니다.
제국주의인 일본, 독일,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때는 대한민국이 아직 해방되기 전이었고, 이념으로 세계가 양분되던 때도 아니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훈장을 바란 적도 없었고, 흉상을 만들어 달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같은 대한민국 정부가 정권에 따라서 훈장을 주었다가 취소한다면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흉상을 만들었다가 철거한다면 이 또한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역사 앞에서 고인을 두 번 죽이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을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례행렬을 보셨습니다.
슬픔에 찬 가족들을 보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둠에 빛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자비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는 나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교만함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많은 죄악들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심을 먼저 생각한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열등감입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등감은 우리를 영성생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제가 된 후, 다른 나라에 참 많이 다녔습니다.
해외 성지순례도 꽤 많이 다녔고, 한인교회에 강의를 위해 다녀온 적도 많습니다.
또 친구와 가족과 여행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이 다닌 것을 아는 어떤 분이 제게 가장 기억나는 나라는 어디였냐고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도 좋았고, 성모 발현지 순례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곳보다도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1등은 안식년 때 신부들과 함께 했던 유럽 여행인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허리가 너무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여행 중에 허리를 삐끗했는데, 함께 하는 열흘 동안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걷기도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이 간 신부들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진통제 먹으면서 버텼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나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잊지 못할 여행이 되었습니다.
허리가 아파도 꾹 참으면서 계획했던 곳을 빠지지 않고 다 다녔고, 그래서인지 그 장소들도 더 기억에 선명하게 남습니다.
사실 우리는 쉽고 편한 것만을 찾습니다.
또 별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지내길 원합니다.
하지만 기억에 남을까요?
오히려 강한 인상이 남았던 때는 어렵고 힘들 때였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날을 바라보며 미소 지으며 지금 더 힘을 내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편하고 쉬운 것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너무나 힘든 고통과 시련도 자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때 주님께 불평불만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 내게 잊지 못할 시간을 또 주시는 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굳은 믿음을 갖는다면, 포기와 좌절이 아닌 희망을 좇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가 장례 일행을 만나게 됩니다.
특히 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어머니를 보시게 되지요.
이때 “울지 마라.”면서 직접 위로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미 죽어서 관 속에 있는 이에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시자, 죽은 이가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과부라고 표현된 것을 보면, 이미 남편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이 슬픔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를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이 상태에 계속 머무르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의 손길을 느끼면서 희망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사랑에 감사하면서 잊지 못할 순간을 마음 깊이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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