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는 오나라의 대들보이자
제갈량의 숙적으로 나왔다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게된
주유...
수려한 용모, 화공의 대가, 천하이분지계, 제갈량으로 인한 수모 등
주유하면 떠올리게 되는 몇가지 것들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삼국지 장수중에 한명인 주유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주유(周瑜, 175년~210년)
자는 공근(公瑾). 노강군 서현 출신. 명문가 출신의 주유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손견의 장자인 손책과 형제처럼 지냈다. 손견이 죽은 후 손책의 수하가 되어 여러 전공을 세운다. 손책의 뒤를 이어 동생 손권(孫權)이 정권을 잡자 그에게도 충성을 다했다. 조조가 강남으로 압박해 왔을 때 노숙과 함께 항전을 결사하였고 손권을 설득한다. 때마침 손권을 찾아온 제갈량과 손잡고 적벽대전을 대승으로 이끌고 오나라의 기반을 닦는다. 이때 자신보다 뛰어난 제갈량을 질투하며 하늘을 원망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후에 삼국 통일을 이루겠다는 꿈을 품고 익주 정벌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중 36세로 요절하고 만다. 당대의 미녀로 꼽히는 소교를 아내로 두었다
청년기
초평 원년(190년), 손견(孫堅)이 동탁(董卓)을 치고자 거병했을 때 집을 서로 옮기면서, 동년배인 손책과 주유는 친교를 맺어‘단금’(斷金), 즉 금속을 끊을 정도로 굳은 정으로 연결되고 있었다.[1] 손견이 죽고 난 뒤, 원술(袁術)은 주유의 종부 주상을 단양태수로 임명했고 주유도 이를 따라갔는데, 원술 휘하에 있던 손책이 강동을 치러 나아가면서 편지를 보내 주유를 불렀고, 주유는 병사를 이끌고 손책을 맞이했다.[1] 이후 손책을 따라 후한의 양주자사 유요(劉繇)의 대 원술 항전의 최전선인 횡강과 당리구에 주둔하고 있던 우미(于糜), 번능(樊能), 장영(張英)을 무찔렀고, 장강을 건너 말릉을 지키고 있던 착융(笮融)과 설례(薛禮)도 깨부쉈으며, 호숙과 강승으로 넘어가 유요의 치소 곡아로 들어가자 유요는 달아났다.[1] 손책은 자신은 회계로 나아가면서, 주유에게는 단양군을 지키게 했다.[1] 이후 원술은 단양태수를 원윤(袁胤)으로 교체하고 주상과 주유를 수춘으로 불러들였으며, 주유를 장군으로 쓰려 했으나, 주유는 원술을 낮게 보고 나중에 동쪽으로 가고자 거소장(여강군 거소국의 현장)을 자청했다.[1] 거소장 시절에 노숙(魯肅)에게 군자와 식량을 청했고, 노숙이 가진 곡식의 절반인 3천곡을 흔쾌히 내어준 것을 계기로 노숙과 친교를 맺었다.[1] 건안 3년(198년)에 오로 달아났다.[1] 손책은 주유를 환영하고 건위중랑장으로 임명했다.[1] 주유는 여강군에서 민심을 얻고 있었으므로, 우저를 지키면서, 나중에는 춘곡장도 겸임했다.[1]
손책은 형주를 노리고, 주유를 중호군 겸 강하태수로 삼았다.[1] 주유는 손책을 따라 양주 북부의 환현을 공격했다.[1] 이때, 교공의 두 명의 딸(이교)의 언니 대교를 손책의, 여동생 소교를 주유가 아내로 삼았다.[1] 《삼국지연의》에서 이교는 교현(橋玄)의 딸로 “강동의 이교”라고 알려져 있어 언니는 대교, 여동생은 소교로 불려 절세의 미녀로 불리고 있었다. 건안 4년(199년), 손책을 따라 원술 사후 독립 세력을 유지하던 여강태수 유훈(劉勳)을 무찔러 여강에서 쫓아냈고, 유훈을 돕는 강하태수 황조(黃祖)도 격파했다.[1] 여강태수 유훈이 손책의 꾐에 빠져 상료로 군을 낸 사이, 손책은 손분(孫賁), 손보(孫輔) 형제에게 팽택에서 유훈을 기다리게 하고, 자신은 주유와 함께 유훈의 본성인 환성을 쳐 이겼다.[2] 돌아오면서 예장과 여릉을 평정했고 파구에 주둔했다.[1]
건안 5년(200년), 손책이 급사해서, 남동생인 손권이 그 뒤를 이었다.[1] 주유는 중호군으로써 장사 장소(張昭)와 함께 온갖 일을 관장했다.[1] 이 무렵에는 손권과 그에게 의탁한 사람들 사이에 군신 관계가 확립되지 않았는데, 장소와 주유 등이 손권을 대업을 이룰 만 하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손권에게 심복하게 되었다.[3] 건안 7년(202년), 조조(曹操)가 전년에 원소(袁紹)를 무찌른 위세를 앞세워, 손권에게 임자(지방관의 아들을 중앙직에 두어 일종의 볼모로 삼는 것, 혹은 그 아들)를 보내도록 꾸짖었다.[4] 장소나 진송(秦松) 등은 우물쭈물하여 결단하지 못했는데, 손권의 뜻은 볼모를 보내지 않는 것이었고, 주유가 나서서 반대 의견을 밝히자 손권의 모친도 찬성하여 결국 볼모를 보내지 않았다.[4]
건안 11년(206년), 마둔과 보둔을 쳐 그 우두머리를 효수하고 포로를 잡아왔으며, 황조가 등룡(鄧龍)을 보내 시상현을 공격하자 이를 쳐 등룡을 사로잡아 오로 압송했다.[1] 건안 13년(208년) 봄에 손권이 황조를 칠 때 전부대독이 되었다.[1]
적벽 대전
이 해 9월, 하북을 통일한 조조가 군대를 인솔해서 남하하고, 형주자사 유종(劉琮)을 항복시켜 그 병사를 흡수하면서, 수병과 보병 아울러서 80만이라고도 하는 대군이 되었다. 이 사태 당시의 손권 진영에서는 조조가 후한의 승상으로써 대의명분을 갖추고 있고, 장강의 지리적 이점도 조조가 형주를 얻고 유표(劉表)의 수군을 얻는 바람에 없어졌으므로 항복하자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1] 주유는 노숙과 함께 의견을 같이 해서 싸움을 주장했다. 주유는 조조를 후한의 적으로 규정하여 조조의 대의명분을 부정했고, 또 조조군에 있는 많은 불리한 점과 대항하는 자군의 이로운 점 등을 설명해서, 이에 뜻을 얻은 손권은 조조에게 대항하는 일을 결단했다.[1]
손권은 3만 군사를[4][5] 주유와 정보(程普) 등에게 주었고 이때 형주로부터 피해 온 유비(劉備)와 협력해 조조를 적벽의 땅에서 대치했다.[1] 조조군은 벌써 군대에 전염병 등을 안고 있어서 단 한 번의 교전에서 조조군은 패배하고, 장강 북안에 주둔했다.[1] 주유는 남안에 포진하고, 황개(黃蓋)의 화공책을 채용하고, 사항계라는 이중의 계책을 고안해내어 황개로 하여금 조조군에 거짓 투항하게 만들어 조조군 함대 내에서 화공을 실행하도록 계획했다.[1] 이후 투항을 위장해 접근에 성공한 황개가 조조군의 선단에 불을 질렀다.[1] 불은 금세 다른 배에 번져서, 거의 모든 배가 타들었다. 피해가 아주 컸기 때문에 조조군은 마침내 패배했고 조조는 도망쳤다.[1] 유비는 주유 등과 함께 조조를 추격했다.[1] 조조는 조인(曹仁)에게 강릉성(江陵城)의 수비를, 악진(樂進)에게는 양양의 수비를 맡겼고 자신은 북쪽으로 도망쳐 갔다. 대군을 인솔한 원정으로 반드시 전염병을 가질 것이라는 것, 수병 선단을 잘 다루지 못하는 조조군을 간파한 일 등 조조군의 약점을 모두 예측한 주유의 승리였다.
강릉 전투
208년 12월에 적벽에서 조조를 격파한 주유는 유비와 함께 남군까지 조조를 추격, 이후 강릉에서 조인과 대치한다. 감녕(甘寧)에게 명하여 이릉을 점령하게 하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조인과 전투를 치르지만 화살에 맞아 부상당한다. 210년 이 사실을 안 조인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주유를 공격했지만, 주유는 부상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을 타고 나타나서 조인은 후퇴해야 했다. 그러나 주유는 이 부상이 원인이 되어 일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후 유비군의 관우(關羽)와 함께 후퇴하는 조인군을 격파, 1년여에 걸친 전투 끝에 강릉을 점령한다.
천하 이분지계
강릉을 점령한 주유는 천하이분지계를 실현하기 위해 손권에게 표를 올리고 행장을 꾸리고 파구를 지나던 도중 병사한다. 향년 36세. 주유의 후손으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저우룬파(주윤발, 周潤發)의 족보에 의하면 주유는 독화살에 맞고 1년간 병상에서 위독 상태로 있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초 계획은, 분위장군과 함께 서천을 취하고 장로(張魯)를 병합, 이후 마초(馬超)와 호응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천은 분위장군에게 수비하게 하고, 양양에서부터 북진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의 분위장군은 손유(孫瑜)라는 것이 대체적인 추측이다.
주유의 천하이분지계가 제갈량(諸葛亮)의 천하삼분지계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제갈량의 삼분지계는 익주와 형주에서 북벌을 한다는 것이었다면, 주유는 익주는 수비하고 형주에서 북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초와 동맹을 맺게 된다면 마초를 통한 서쪽에서의 진군도 기대해볼 수 있어서 제갈량의 삼분지계와 내용 면에서 다를 바가 없다.
일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정통하였다. 술에 많이 취했어도 연주한 음악의 음이 틀리면 그것을 알아채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곡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주랑이 돌아본다.”라고 말을 했다.
손권의 가신 중 정보는 손견이 거병할 때부터 손가를 섬겼던, 황개나 한당(韓當)보다 오래된 가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주유보다 연장자이기에 그를 무시했는데, 주유는 오히려 정보에게 성의를 다한 태도를 보였다. 후에 정보는 감복하고 주유와 친해지고 존중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평하기를 주유의 친화력은 “주공근과의 사귐은 마치 향기나는 맛있는 술과 같아서 스스로 취함을 느끼지 못한다.”라고 했다.
평가
명문가의 자제답게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당초 적벽대전 전에 주유는 손권에게 5만의 군사를 청했는데, 손권은 3만만을 주었을 뿐이다. 이후 유비와 만나고 유비가 “조조를 격파하기에는 모자라다.”라고 말을 하자 오히려 주유는 “격파하기 충분한 숫자이니 유공께서는 지켜보기만 하십시오.”라고 말을 한 것은 그의 성격을 대변해주는 일화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유가 제갈량을 시기하여 거듭 죽이려고 하나 정사에서의 주유는 제갈량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유비에 대해서는 영웅의 기질이 있으므로 경계를 했다.
천하이분지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그러나 오국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고, 또한 오국의 총사령관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무장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각설하자면, 오국의 총사령관은 주유, 노숙, 여몽(呂蒙), 육손(陸遜)으로 이어졌는데, 주유는 천하이분지계를 실행시키기 위해 익주로 이동 중 병사를 했다면 노숙은 익주 정벌을 포기하는 대신에 다른 군략으로 재조정하려다가 병사를 했고, 여몽은 공명심에 눈이 멀어 서주가 아닌 형주를 점령하여 결과적으로 촉과 오 모두에게 손해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육손은 오국의 재상이긴 했으나 명문호족인 육가의 후예였기에 조정과 호족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위국으로의 북진은 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국의 남진에 수성하는 입장에 있어야 했다.
오나라는 본래가 호족연합체 국가로서 그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터이다. 뭐 일종의 지금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판타지 팩션 퓨전 사극 드라마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주몽’에서 보이는 부여의 국가체제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초기 국가집단 형태라고나 할까. 4출도의 부여나, 6가부족의 고대 신라체제나 호족 연합체의 오나라나 뭐 비슷하지 않은가 말이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이해하기 쉽게 하다보니 그렇다는 것이니 너무 분노하지 말고 말이다.
초기의 오나라는 손견이 근간을 이루었지만 손견이야 원술의 제하에서 커왔었던 셈이고, 그러니 손견 사후 손책이 원술의 밑을 벗어나서 오나라 국가기반을 처음부터 새로 다시 쌓아야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오나라의 기초를 위해서 고군분투 뛰어 다니던 손책이 느닷없이 다시 요절을 해버리고 그 뒤를 동생이 자리를 이으니 그가 바로 삼국중 가장 오랜 기간 장수하고 권력을 유지한 손권 되겠다.
이처럼 오나라는 처음부터 ‘무’로 시작되어서 ‘무’로 나라를 일구어 나간 전형적인 ‘무관’의 나라인 셈이다. 고려시대 무인정권 시대, 뭐 그런 것 아닌가. 그럼 장소, 장굉 등은 ‘이규보’와 같은 애들인가? 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동오의 시작은 이처럼 괄괄한 무인들의 시대에서 그 개막의 서장이 열린 것이다. 그런데 이 ‘무’의 세계에서 ‘무’가 아닌 ‘문’으로서 동오를 일구어 낸 사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주유였다.
주유는 나라의 개척시대에는 ‘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시스템에서 절대적으로 중시한 것은 ‘무’가 아닌 ‘문’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체득하고 있던 인물이다. 뭐 전쟁이 완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모사’들도 있었어야 하는 것이지만 주유가 생각한 ‘문’은 내정문관으로서 나라를 이끄는 그런 인물들에 한정되어져 있다. 손오의 무장들은 손견에서부터 손책에까지 2대에 걸쳐 등용된 대다수의 원로들이었다. 따라서 오나라에 그 충성의 기반에서부터 세력의 강성함에까지 어느 누구도 감히 손을 댈 수 없는 이들이었다. 동오의 기반을 이룩한 무의 호족세력들이 피땀흘려 이룩해 놓은 자기네들의 그 전관예우적인 대우를 ‘여기 있습니다’하고 내놓을 리가 없지 않은가. 태종 이방원이가 개국공신들을 피로써 모두 처치한 이유도 왕권의 강화에 있었음은 주지할 필요가 있다.
주유는 손책의 동오 정벌에 함께 합류하면서 두사람을 천거한다. 강동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강동의 이장’을 모셔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바로 이때에서부터 손오의 세력에 ‘문관다운 문관’이 등장을 하게 된다. 더군다나 장굉은 임관하고 나서 꾸준하게 고옹,감택,주환,육적,여몽,육손,서성,정봉등의 인물들을 추거하여 손오를 안으로 밖으로 풍성하게 해주는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니 무의 손오보다 문의 손오를 원했던 주유로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일궈낸 것이다. 더군다나 주유는 노숙까지 불러들이니 손오는 원로 개국공신 ‘무장’파와 신진 문반관료 ‘문관’파로 든든한 손오의 두 주축이 되는 것이었고, 이 두 주축의 굳건한 기둥은 바로 주유였다. 곧 손오의 기둥은 주유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주유는 자신의 계획과 손오의 미래를 위하여 문무 양축의 저울질을 시키기 위해서 분배는 했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강동의 대호족 노숙을 끌어들인 것은 좋았는데 젊고 혈기 왕성한 노숙과 원로 개국 무장공신과의 관계가 어긋나는데다가 같은 문 출신으로서 힘을 합칠 줄 알았던 장소, 장굉과 노숙의 관계 역시도 영 어긋나기만 하는 바람에 주유로서는 노숙과 원로공신 더불어서 문관들과의 관계 조율에 신경을 써야하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바깥일에 신경쓰기도 바쁜 와중에 이 뭔짓이고. 그런데 이러한 찰나에 조조가 적벽대전을 벌린 것이다.
원로 공신과 문관 사이에서 주전, 주화로 나뉘어져있고 이를 보던 주유는 노숙의 ‘주전론’ 주장에 동참을 하면서 노숙과 함께 전장으로 향한다. 이로써 문,무로부터 따돌림을 받던 노숙은 원로의 힘을 등에 업으면서 문관들과는 척을 지게 된다. 본래 주유가 내정치세로써 데리고 왔던 노숙은 ‘외교’라는 본인의 본연의 임무를 ‘궁’이 아닌 악양이라는 곳에서 생을 마감할때까지 있어야 했던 것은 그러한 문관과의 관계에서 파생되어진 것도 한몫함도 있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악양의 노숙의 인기가 손권을 능가함에 손권도 노숙을 불안히 여겼던 점도 훗날 손권이 노숙을 평가함에 마이너스가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주유로서는 조조와도 싸워야하고 더불어서 손오 내에서의 문무 대립을 기지 좋게 조율하기 위한 방편까지 신경쓰느라 심신이 고달파질대로 고달파지고 지쳐버리게 된다. 주유가 원한 방향은 문무의 날개로 손오가 곧추 서는 것이었지만 어찌된 것이 기우뚱 기우뚱 하는 것이 영 주유의 뜻과는 어긋나게 된다. 내부가 어깃장이 날 경우 가장 좋은 방안은 ‘힘을 하나로 합칠 수 있는 전쟁’이 제격이다. 주유는 적벽전이 끝나고 내부의 문무간 알력을 형주쟁탈이라는 전쟁을 벌임으로써 분열된 힘을 하나로 합치려고 했다. 하지만 촉에는 ‘제갈량’이라는 걸출한 지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제갈량과의 형주쟁탈 지모전쟁에서 내리 패하기만 하던 주유는 그만 제갈량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병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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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볼거리
[주유는 무결점 장수였다]
0) 서론
흔히 삼국시대를 두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인재들이 많았던 시기'라고 칭한다.
삼국지에는 무수한 영웅들이 나온다. 그런데, 대부분 장점이 있는 만큼 단점 역시 두드러지는 이들이다. 이를테면 조조, 유비, 관우 같은 삼국지를 대표하는 영웅들은 단점이 없어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도 명백한 단점이 있음에도 그 단점을 상쇄할 수 있는 겉출한 장점들이 있기에 그만한 추종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에는 정말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단점이라고 할 만한 단점을 찾을 수 없는 인물들도 존재한다. 우선 흔히 삼국시대 제일의 기재라 평하는 제갈량이 그렇다. 필자 또한 이전에 '결점을 찾아볼 수 없는 제갈량'이라는 주제로 한두 차례의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글들이 모두 지워지고 말았다.
헌데 다른 의미에서, 어떻게 보면 제갈량 이상으로 단점을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 삼국지에는 또 하나 나온다. 바로 오나라의 영웅 주유 공근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주유의 존재 자체, 그 모든 것이 장점이라 할 수 있고, 단점은 수명이 짧다는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주유는 그런 사람이었다.
1) 패기 있는 대전략관
손오 정부는 이상하리만큼 그 전략에 패기가 약하다. 가령 노숙은 스스로 조조에게 대항하기 어려우니 유비를 성장시켜서 삼국정립을 이루려 했고, 여몽은 다만 형주라는 땅 하나의 가치를 조조라는 주적보다 중요시 여겼다. 육손 같은 경우도 나라를 지키는 전략을 선호했다. 무엇보다 손권이라는 군주 자체가 외정보다는 내정과 수성에 강한 인물이었으므로, 오나라의 전략관은 대체로 수비지향적인 편이었다.
그런 손오에서 주유의 대전략은 이색적이다. 주유는 단순히 삼국정립이나 수비를 전략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유비를 아예 흡병하여 스스로 관우, 장비를 이끌려 했었고, 익주를 자신이 제패하여 천하이분을 이루려 했으며, 그다음에 마초 등과 연계하여 천하통일까지 이루려 했었다. 그의 전략은 이미 천하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천하이분지계가 완벽한 전략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가만히 살펴 보면 그의 전략은 상당히 무모하고, 또 난관이 여럿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는 유비를 합병하고 관우, 장비를 거느리겠다고 했지만, 과연 천하의 유비가 그렇게 쉽게 흡수당할지, 그리고 천하의 조조조차 마음을 돌리지 못한, 오로지 유비만이 다룰 수 있었던 관우 같은 인물을 그가 다룰 수 있었는지는 사실 회의적이다.
이외에도 외정과 육전에 약한 동오의 군대로 익주를 제압할 수 있을지마저 사실은 회의적이다. 비교적 육전에 강한 유비조차 안팎에서 호응하여 내리쳤음에도 익주를 제패하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을 소모하여야만 했다.
또한 그는 애초에 마초와 연계하겠다고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초가 조조에게 몰락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결국 그가 장수하여 천하이분을 이루려 했을지라도 전략의 수정은 불가피했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난관이 곧 전략의 실패로 이어질 수는 없다. 그렇게 따지면 삼국시대 최고의 대전략이라 할 수 있는 천하삼분지계 역시 당시에는 몹시 무모한 계책이었고, 또한 난관이 여럿 있었으며, 전략의 수정 또한 불가피했던 탓이다.
애초에 이상적인 전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한 번도 전략의 일부를 수정하지 않고, 단 한 번도 난관에 부딪히지도 않으며 성공하는 전략이란 단지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상 속에만 존재할 뿐, 그것이 현실화 되기는 어려운 탓이다.
그러므로 주유의 전략이 무모했다거나 하는 이유로 주유의 천하이분지계를 폄하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의 전략이 실패한 것은 그 전략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다만 그 전략의 구상자인 주유가 날개를 피기도 전에 수명이 꺾인 탓이다.
2) 뛰어난 군사적 재능
사실 군사적인 부분에서 주유는 단점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적벽에서 천하의 영웅 조조를 격파했고, 형주에서는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고까지 극찬되는 조인을 이겼다.
그런데 이 승리에 대한 사람들의 의구심이 존재한다. 가령 적벽은 조조가 수전에 약하고 조조군에 전염병이 돌았다는 이유로 주유의 공을 폄하하려 하고, 형주에서는 조인이 이끈 군대가 적벽의 패잔병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그럼에도 1년이나 전쟁을 질질 끈 주유의 외정 능력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주유는 승리자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그는 승리를 해낸 인물이다. 그러므로 적벽이나 형주는 그의 단점이 될 수 없다. 특히 더 많이 회자 되는 형주 부분이 그렇다.
물론 형주에서 1년 이상이나 싸움이 길어진 것은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만약 주유가 3개월에서 반년 사이에 형주를 함락시켰다면 주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지금보다 2배쯤 뛰어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출나게 대단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비교적 평범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이 단점으로 회자될 수는 없다.
대단하게 싸우고 지는 것보다는, 조금 평범하게라도 이기는 것이 병가에서는 더 윗선으로 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령관으로서 외정의 총책임자가 된 일이 주유에게는 생애 처음이었다. 그러므로 주유가 외정에도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형주 전투는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따지고 보면 주유 사후로 그나마 주유만큼이라도 외정에 성공한 인물은 여몽뿐이었으니 말이다. 여몽의 형주 점거와 주유의 형주 점거 중에서 어느 쪽의 가치가 더 위에 있는지를 논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주유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3) 천하를 향한 외교 능력
손오와 촉한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런 만큼 양국 사이에서는 많은 외교가 오갔다. 그런데 노숙, 여몽과 주유의 외교는 전혀 그 성질이 달랐다.
노숙, 여몽의 외교도 물론 달랐다. 노숙은 촉한을 이용하려 했고, 여몽은 촉한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통적으로 유비나 관우에게 한 수 접어준 인물들이다. 아니, 굳이 여몽이나 노숙까지 갈 것 없이 손권만 하더라도 관우가 '오소리새끼'라는 발언까지 했음에도 겉으로는 사과의 편지까지 보낼 만큼 관우를 어려워했다.
그런데 이런 인물들 사이에서 주유의 대촉 외교는 이질적이다. 전에 내가 '관우와 손권 사이에서 오간 외교의 격을 보면 마치 관우가 손권을 복속시킨 연합의 사령관이라도 되는 듯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주유와 유비도 마찬가지다. 주유와 유비의 사이를 가만히 살펴 보면 흡사 주유가 유비의 상관이라도 되는 듯했다.
이는 주유가 유비를 공안에 배치시켰다는 기록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유비는 주유에게 공안 남쪽을 할양 받은 덕분에 형남 4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주유는 남군을 공략한 이후 강하 태수라는 관직을 제수 받는데, 강하는 원래 명목상으로는 유기의 땅, 그리고 실제로는 유비의 영토였다.
그러므로 이 당시에는 유비의 강하 역시 주유의 영지가 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혹은 공안 남쪽과 강하가 트레이드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외에도 주유는 '유비를 억류시켜야 한다.'고 손권에게 주장하기도 했고, '관우, 장비를 이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아마 당시 주유에게 있어서 유비는 천하이분지계를 위해 써먹을 도구 정도로 인식된 듯하다.
유비가 형남 4군을 얻을 때 주유는 굳이 방해하지 않았다. 방해하기는커녕 형남 4군을 얻기 좋도록 공안 남쪽 땅을 할양하기까지 했다. 주유에게 있어 유비는 적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용물 정도였던 듯하다. 물론 유비 역시도 주유를 이용하려 했겠지만.
그런데 삼국지 연의에서는 이 부분이 이상하리만큼 주유에게 불리한 견해에서 서술되었다. 삼국지 연의만 보자면 주유는 목숨걸고 싸웠음에도 이득을 보지 못하고 다만 유비와 제갈량에게 이용당한 인물 정도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주유와 유비는 서로 이용하려 한 입장이었음이 명백하다. 그리고 당시 힘의 구도나 영향력으로 보아, 주유가 장수했더라면 유비는 입촉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유비의 세력 자체가 그대로 손오에 복속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유비는 다른 군주에게 빌붙어 살아가던 존재였다. 바로 전까지도 유비는 유표에게 복속되어 있었고, 적벽전투 무렵에도 손오에 반쯤은 복속된 세력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주유 사후 노숙이 남군을 유비에게 대여함으로써, 유비는 본격적으로 도약하게 되고 손권과 유비의 힘의 추도 어느덧 팽팽하게,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유비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4) 뛰어난 인품
사실 주유가 제갈량을 질투했다는 것은 연의의 허구이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주유와 제갈량을 미묘한 라이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러나 당시로 보면 주유의 라이벌은 제갈량이 아니었다. 이런 말하긴 제갈량에게 미안하지만, 주유 생전에는 감히 제갈량과 주유을 동등하게 볼 수조차 없었다. 굳이 주유의 라이벌을 꼽자면 차라리 유비가 더 적합하였다.
그러므로 주유가 제갈량을 질투한다는 스토리보다는, 차라리 주유와 유비가 서로 동맹간의 알력싸움, 혹은 입촉을 노리고 암암리에 경쟁한다는 스토리가 더 적합하리라.
'물론 주유가 제갈량을 질투했다는 것이 연의의 스토리라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주유가 암암리에 그런 생각을 품었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견에 대해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필자가 어떤 추측이나 가설에 대하여 이렇게 확신하여 일축하기는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주유의 성격이나 당시의 배경을 감안하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유는 출세가 상당히 빠른 인물이었다. 주유와 같은 나이에 주유만큼 된 인물은 삼국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제갈량도 그렇고, 조조도 그렇고, 유비도 마찬가지다. 몰년 당시 주유의 나이는 고작 30대 중반이었는데, 30대 중반에 주유만한 업적을 세운 인물은 단언컨데 삼국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한 사람 꼽자면 먼저 간 손책 정도였을까?
또 주유는 아주 잘생겼고, 음악 같은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의 아내, 혹은 첩이었던 소교는 강동에서 첫째 둘째를 다툴 만큼 미인이었다. 그의 집안이 명가였다는 사실도 아울러서.
현대로 치자면, 재벌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잘 사는 집안에 살며, 외모도 출중하고, 당장 가수나 작곡자가 되어도 좋을 만큼 예술적으로 뛰어나며, 입사한 회사에서는 이미 2인자가 된 인물이 있다. 그의 아내는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훨씬 아름답다. 거기다 회사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 같은 외국계 대기업을 꺾음으로써 회사를 구한 적이 있다.
이것이 주유가 가진 배경이었다. 말 그대로 완벽 그 자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차라리 그 당시에는, 아직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제갈량이 성공한 주유를 보며 동경심이나 열등감을 품었다는 견해가 더 어울리리라.
이런 배경을 떠나서 주유의 인품 자체가 질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주유는 겸손하고 온화한 인물이었다.
적벽대전 당시만 보더라도 주유의 이러한 인품을 알 수 있다. 당시 주유와 정보는 좌우도독을 나누어 겸임했다. 그런데 그 당시 손오의 원로였던 정보는 자신이 젊은 주유와 같은 반열에 선다는 사실이 조금 불쾌했나 보다. 이 두 사람의 불화는 적벽대전 당시에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지만, 뒷날 여몽이 이 불화를 지적하며 '사령관은 한 사람으로 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보아 제법 심각했던 듯하다.
그러나 이때 주유의 대처는 완벽 그 자체였다.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뒷날 정보가 주유를 크게 극찬한 것으로 보아, 아마 정보의 질투를 주유가 완벽하게 받아줌으로써 나중에는 정보조차 주유를 찬양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이 질투함에도 감화시키는 주유가 어떤 특정 인물을 질투한다는 전제는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주유는 그 인품에 있어서도 결점을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5) 결론
어떤 의미에서, 주유는 제갈량 이상으로 결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한 인간으로서 보아도 주유에게는 결점이 없었다. 위에서 말했듯,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주유가 주유로서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장점이라 할 수도 있겠다.
다만, 굳이 그의 전략이 실패하고, 그가 뜻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를 그의 단명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사람이 죽고사는 것은 다만 하늘의 뜻이므로, 이 역시 주유의 단점이 될 수는 없다. 굳이 헐뜯자면 몸관리를 잘 못했다던가 하는 식으로 헐뜯을 수도 있지만, 이미 삼국시대에 이름을 날렸으며 그 명성이 1,000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에까지 회자되는 주유라는 인물 앞에 그런 부조리한 비난과 모욕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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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을 꿈꾸었던 날지 못한 "용" 주유 공근]
오나라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주유이다.
서성 출신의 주유는 손책과 오랜 친분이 있었으며, 친구인 그와 그의 동생 손권을 나란히 주군으로 모시면서 남북구도론으로 오나라 단독의 통일을 노린 대책략가이다.
내가 보건대, 오나라 역사상 이처럼 전무후무하고 대담한 웅략을 가졌던 인물도 드물 터, 그렇기에 주유가 오나라 최고의 영웅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결단코 이상하지 않을 터이다. 특히, 손견과 손책이 주로 무략으로 천하를 울린 인물이라면, 주유는 문무겸전의 탁월한 강남재사로 가히 오나라의 여러 인물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갖춘 인물이기에 더욱 그렇다.
1. 친구와 그 동생을 주군으로 천하를 도모하다 - 강남의 용, 비상하다
주유는 일찍이 여러 면에서 '책사'의 전형적인 특징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 정사 >에 따르면, 주유는 8척의 수려한 외모에 음악에 조예가 깊어 '훌륭한 연주를 들으면 주유가 얼굴을 돌아본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고 호탕하며 대담한 기질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소개한다. 일찍이 노숙 등 젊고 유능한 사류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던 주유는 손책이 원술로부터 독립하여 남진, 우저 공략에 나서기 직전에 그의 진영에 합류함으로써 오나라와 인연을 맺는다. 물론 손책과의 교분이 남달랐기에 그의 합류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친구를 자신의 평생을 걸 주인으로 모셨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으로 비춰질만큼 놀랍기까지 하다. 그런 의미에서 주유와 오나라의 인연은 매우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주유가 손책의 독립과 함께 오나라에 동참함으로써 오나라는 6군 81주의 주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천하통일을 다투는 실질적인 군웅으로서 도약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보여진다. 강남은 한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했지만, 후한 말엽의 중원 대혼란과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인구이동이 개시되면서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상태였기에 인재의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한편, 산월의 거듭된 반란과 강대한 중원의 정치세력으로부터 강남을 지켜야 하는 오나라로서는 이러한 당시의 내우외환을 잘 조절하고 웅략을 진언할 수 있는 인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바로 그것은 나라의 기틀을 잡기 위한 과정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유의 동참이야말로 오나라 발전에 가장 중대한 전기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주유만큼 확고부동한 천하관을 지닌 인물이 없다는 점에서도 단연 그는 돋보인다. 당시 주유가 천거한 노숙마저도 일반적인 당대 지식인들의 관점인 '삼분'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주유는 대담하게도 강남의 세력과 반 조조를 아우르는 남북구도론을 내밀었다. 그의 관점에서는 유비, 마초, 유장, 장로를 오나라 천하통일의 장기말로 삼자는 거대한 포석이 깔려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오나라가 주축이 되기위한 토대가 필요했으며, 주유가 특별히 유표 사후의 형주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 - 형주와 남양주를 아우르는 방대한 세력을 구축, 조조에 맞서면서 당시 조조와 궤를 같이 하지 않는 정치세력을 설득, 조조를 서, 남의 양 진로에서 압박한다는 2자 구도의 이 천하관은 당대 오나라의 어떠한 책사보다도 그를 단연 돋보이게 한다.
그래서 나 역시 '형주'라는 땅은 오로지 오나라에 주유가 생존한다는 전제하에서 중요하다는 점에 공감한다. 주유의 남북구도에 있어서 형주는 군사적 요충지로 중원진출의 교두보이자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땅이었다.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노숙의 편을 들어준 것은 이 때문이다. 만일 형주 전토가 조조에게 넘어간다면 허리가 잘린 오나라가 조조를 상대하기란 더욱 벅찬 일 - 이렇게 되면 익주, 양주, 서량의 정치세력과 협력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래서 주유는 집요하게 형주를 노렸고, 그것이 주유 사후에도 여전히 오나라의 대외정책으로 자리잡아 주유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형주쟁탈전은 그런 의미에서 오로지 '주유'라는 캐릭터 하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2. 왜 비상은 좌절되었는가 - 주유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들
그런데 주유는 36세에 돌연 사망하고 만다. < 정사 >에서는, 주유가 서촉 정벌을 하려다가 신병으로 사망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장문의 글로 후계를 '노숙'에게 맡긴 채 전장에서 눈을 감는다. 그가 뇌까린 말처럼, "장수는 전장에서 말가죽에 싸여오는 것을 영광으로 안다"는 말이 실현된 셈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놓고 보는 < 정사 >와 < 연의 >의 관점은 전혀 다른 측면에서 전개된다. 물론 이를 두고 다수는 '제갈량을 돋보이게 하게 하기위한 설정'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건대는 그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다고 본다. 그것은 대개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특히 그렇다.
1) '주유'의 캐릭터와 역사적 배경
오나라는 역사적으로 볼 때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가진 국가이다. 오나라의 실질적 창업자인 손책 이래, 오나라의 국가적 정체성은 한과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 이유는 강남이 바로 중원인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불모지로, 산월의 내침과 최초의 개발지로서 겪어야 했던 많은 시련들로 인해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강남인들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캐릭터를 가진 나라였다. 그렇지만 바로 이러한 점이 성리학자들의 눈에 좋게 비춰질 수는 없는 일 - 특히, 정통성의 측면에서 촉이 부각되면서 오나라는 묻혔고 주유의 장점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역사인식의 관점이 점차 강렬한 민족주의 경향으로 전개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었는데, 원말 ~ 명초에 살아가는 지식인 나관중이 그러한 점에서 촉을 오나라보다 중시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2) < 성리대전> 역사편을 통해 본 강남에 대한 인식
당시 송대의 탁월한 학자들이 남긴 견해와 기록들을 묶어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의 역사편에 보면, '삼국'에 관한 인물론이 실려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에는 단 5인의 이름이 거론되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한소열(유비), 조조, 손권, 제갈량, 순욱이다.
이 구도를 보면, 위나라 2명, 촉한 2명, 오나라 1명이다.
왜 오나라의 인물론에 겨우 손권 한 사람 뿐인가?
이 책은 이에 관한 정확한 분류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다만, 나의 추정으로는 정통론적 관점에서 선악의 범주에 들어가는 중요한 인물을 추려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유비 <-> 조조, 제갈량 <-> 순욱으로 구도를 설정한 것이다. 특히, 제갈량과 순욱은 식인의 관점에서 '성공과 실패'라는 양자구도의 설정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손권은 무엇인가? 오나라 손권에 대한 평가는 조조를 중심으로 유비와 견주어 평가되는데 그치고 있다. 즉, 조조편의 부록인 셈이다. 그나마 기록도 매우 적거니와 유비와의 연합실패와 조조 - 유비 사이의 실리외교를 '약자의 비애' 쯤으로 가볍게 그려나가고 있다. 이것은 조조와 유비가 각 1편의 독립된 장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볼 때, 오나라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즉, 그만큼 오나라는 위-촉의 대립구도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독립된 독자적 노선을 걸은 국가로서 그 위상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정통론적 시각에 의해서 볼 때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는데, 한이라는 공통의 대상에 대해 위-촉이 공유하는 바가 있는 반면, 오나라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불합리한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유'는 역사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주유를 이해하는 한 관점이기도 하다.
물론 < 정사 >에서 그는 대책략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 정사 > 이후의 평가에 있어서, 역사가들은 주유를 오나라 전체의 낮은 인지도로 인해 명확한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그만큼 주유의 장점과 그의 영웅된 면모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나라 역사에 대한 연구는 '강남 개발사'의 미명 하에 매우 제한적으로만 다뤄지고 있다. 또한 < 연의 >가 민간설화 등 전승기록에 의존도가 있기 때문에, 주로 촉한의 인물에 집중된 당시의 설화성격상, 오나라가 많이 다뤄지지 못한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주유마저 묻혔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상하기를 꿈꾸었으나 끝내 날지 못한 주유
그는 하늘을 날 수 있는 기회마저 주어지지 못한 불운의 영웅이었다.
그러므로 주인인 손책보다 먼저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려줄 것을 청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
무릇 영웅이란 반드시 성공하는 자만의 독점적 전유물은 아니기에
희대의 영걸감이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던 주유.
그에게 감히 묻고 싶다.
"아직도 용은 날기를 꿈꾸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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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의 천하이분지계가 실패한 이유 몇가지]
1. 주유의 서천정벌은 곧 조조에게 강동을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2. 손유동맹이 반드시 결렬될 것이며 유비, 제갈량 등이 주유가 없는 틈을 타 호시탐탐 다른 기회를 노렸을 지도 모름.
당시 유비가 비록 형남의 약소세력이기는 하나 하루가 다르게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는 상황이었음.
주유 입장에서 이 부분을 결코 간과할 수는 없는 노릇
3. 유비의 서천정벌이 성공한 이유는 무능한 유장이 스스로 자신의 영토 내부의 형주의 3만 군사를 불러들였기 때문
정면돌파로는 제아무리 무능한 유장도 철저하게 대비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십중팔구 진퇴양난에 빠질 확률이 매우 높음.
4. 강동과 남군(강릉)에서 한번에 서촉까지 원정을 성공하려면 많은 물자와 병력이 필요한데 손권이 주유한테 줄 수 있는 병력 규모는 아무리 많아야 5만 안팎임.
유비도 서천정벌 당시 지원군까지 합쳐 대략 그와 비슷한 규모였는데 안과 밖에서 협공했기에 성공했던 것임.
만약 유비가 별다른 전략전술 없이 단순히 대군에 의한 정면돌파 방식만 고수했다면 서천정벌하는데 무지 애를 먹었을 게 뻔함.
5. 당시 강동(오나라)의 군주가 손책이 아닌 손권임.
손권은 제아무리 주유가 내놓은 계책이라도 그렇게 무리한 도박과도 같은 선택을 채택할 인물이 '절대로' 아님.
만약 손책이 군주였다고 해도 손책은 형주에 대한 집착보다 중원 진출에 뜻을 두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온건파인 노숙의 손을 들어줬을 지도 모름.
6. 주유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 위험해질 수 있음.
실제 중국의 유명 영화 감독 주윤발이 갖고 있는 주(周)씨 가문 족보 속의 기록에서도 주유는 남군전투 중에 맞은 독화살에 의한 상처 때문에 1년여에 걸친 후유증을 앓다 결국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가 도독(장군)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전장터에서 진두지휘를 하는 대담하면서도 성급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함.
그 험준한 서촉으로 가서 주유가 해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음.
소설 삼국지연의식으로 얘기하자면 낙봉파(허구 지명)에서 주유가 무수한 화살에 맞아 고슴도치꼴이 되어 36세의 젊은 나이로 비명에 죽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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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의 형주공략에 대해서]
적벽대전후 주유는 형주로의 진출을 시도했으며 유비는 형주남부를 평정합니다. 이과정에서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과 대결하게
되었고 고전끝에 강릉을 탈취합니다. 이과정에 대하여 관심있게 살펴본 개인적인 소견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1. 주유와 조인의 대결
크게 2가지 전투로 나뉘는대요. 부곡장 우금이 주유의 군세에 밀려 고전하게 되자 조인은 진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을 이끌고 나가 주유군을 격퇴하고 우금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유는 여몽의 계책을 받아들여 감녕으로
하여금 이릉성을 공략시키고 이과정에서 조인은 원군을 이끌고 감녕을 포위하여 궁지로 몰아넣으나 주유는 능통에게
본진수비를 맡기고 감녕구원전에 나서 조인군을 격퇴하고 감녕을 구원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1승 1패군요. 이후에는 특별한
기록이 없는점으로 미루어 서로 대치전의 양상을 띠지 않았나 싶습니다.
2. 당시 조조 유비 손권군의 형세
파성넷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기록을 뒤져본결과 양양에는 악진을 주둔시키고 강릉에는 조인,서황을 주둔시켰습니다.
하지만 주유와 조인의 대결에서 서황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고 또한 유비는 형주남부를 평정한후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계양 영릉 장사를 총괄하게 한점으로 보아 유비는 무릉쪽에 주둔하여 주유와 함께 여차하면 강릉공략을 같이 할 뜻을
암암리에 흘려 조인군을 압박하게 한것 같습니다. 이에 조인은 서황에게 유비군을 경계하게 한것으로 필자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에대한 근거는 위의 제갈량의 3군총괄과 주유의 강릉 공략후 강릉의 일부를 유비군에게 때어준것으로 미루어보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손권인은 합비공략을 위해 동쪽에서 출병하였고 이에 조조는 장희를 시켜 원군을 보냈습니다.후에
조조가 합비에 주둔했다는 기록을 보아 조조는 강릉보다는 합비구원에 우선순위를 둔것 같습니다.
3. 무엇이 주유를 그토록 고전하게 만들었을까?
손권의 합비공략으로 인한 병력의 이분화된점으로 인한 군세의 열악함 조조군 최고에이스 조인과의 대결
그리고 본인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주유휘하의 장수들의 무르익지 않은 기량(능통,감녕,여몽) 정보의 적극적인 지원미비
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 주유휘하 장수들의 무르익지 않은 기량을 추측하는 근거로서 능통 감녕 여몽은 그의 이름이 빛나는 시점이 210년대 후반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아직 연륜으로나 기량으로나 무르익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주유또한 적벽에서 빛나는 승리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30대 중반의 나이인점을 감안 조조거병때부터 여포공략 헌제구원 관도대전 하북토벌 형주토벌등 엄청난 전공과 연륜에 빛나는 조인을 맞아 쉬운싸움을 하기는 힘들었을꺼라는 필자의 생각입니다.
또한 정보의 적극적인 지원미비를 생각한것은 정보가 주유를 도와 조인을 물리쳤다고 나오기는 하나 서황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보아 정보는 주유와 공동전선을 펴 적극적인 공략을 했다기 보다는 주유가 전방에나서고 정보는
후방에서 지원해주며 조인말고 또다른 조조군의 공세를 경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강하군태수인 문빙 양양에주둔한 악진의
공세에 대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4. 주유군과 대치한 조인 왜 강릉을 포기하고 철군 하였을까?
위의 이야기에도 있듯이 조조는 강릉구원보다는 합비방면의 구원을 우선하였고 조인자신의 출중한 능력으로 주유군과 대치전선을 이루는대에는 성공하였으나 조조군의 지원미비와 형주를 평정한지 오래되지 않은것으로 인하여 주위 세력들의 지원이 힘든점(악진 문빙등) 형주남부를 평정한 유비의 주유와 협력하여 협공을 하게 된다면 더이상 버티기가 힘들것으로 판단 더 피해가 누적되기 전에 철군을 결심한것 같습니다.(이후 조인에게 별다른 벌이 내려지지 않는점과 강릉철군에대한 기록이 위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점으로 보아 조조가 명령한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그리하여 형주방위선을 강릉에서 보다 후퇴시킨 한수부근으로 물러
강릉을 포기하는 대신 형주방어선을 더욱 견고히 했던것으로 필자는 생각됩니다.
5. 손권군의 역할
손권은 합비공략을할때 조조가 원군을 보내자 원군이 도착하기전에 합비포위를 철수하고 회군하게 됩니다. 이를 보아 손권군은
1차적인목표는 합비공략으로 인한 중원진출의 교두보를 만드는 전략과 만약 그것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2차적인 목표인 주유군의 강릉공략에 대해 조조군의 원군을 원천봉쇄하여 보다 수월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전략적인 움직임였다고 봅니다.
6. 조조는 왜 합비구원을 우선했을까?
이점에서는 합비가 공략당했을경우 손권군의 중원진출을 노릴만한 요지점령이 되어버림으로 강릉의 상실로 인한 위험성보다는
더욱크다고 판단한것 같습니다. 후에 손권군은 여러번 합비공략을 한점으로 미루어보아 역시 형주를 통한 중원진출보다는
합비를 통한 중원진출이 더욱 수월하고 주요한 루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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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는 정말 금창으로 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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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어찌 주유를 낳고, 또 제갈량을 낳았단 말인가"
주유는 죽기전에 이런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얼마나 한스러웠으면 그랬을까요?
비유하자면 호날두와 메시와의 관계와 상당히 비슷해보이네요.
연의에서는 주유를 제갈량에게 져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비운의 사나이로 묘사하고있는데
사실 적벽대전은 제갈량보다 주유와 황개의 공이 컷습니다.
그것이 정사에서는 주유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이유중에 하나구요.
그리고 주유의 또하나의 매력이 있다면,
음악과 풍류를 즐긴다는 것입니다.
손책과 함께 풍류를 즐기다가 대교와 소교를 만나 동반 결혼하게된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