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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을 전하는 바울 26:1~8
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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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유대인의 풍속을 잘 아는 아그립바왕 앞에서 바울이 변론을 시작합니다. 자신은 유대인 중에서 가장 엄한 바리새파 사람인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에 고소당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이름을 대적해 성도를 박해하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회고하며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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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을 전하는 바울 26:1~8
바울의 전도 열정은 변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한결같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회심 간증과 신학적 논증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먼저 자신은 골수 바리새파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규례를 잘 알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부활)을 자신이 소망하기 때문에 심문받는다고 말합니다(6절). 이 약속은 유대인들이 얻기를 바라는 것인데, 바울은 이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한다고 변론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왜 믿지 못할 일로 여깁니까?”라고 반문합니다(8절). 바울은 아그립바를 비롯해 높은 권세자들에게 부활 신앙을 갖도록 적극적으로 권면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은 자신이 심문받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나요?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에게 부활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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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과거 회상 26:9~12
바울은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회상합니다. 그도 한때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유대인의 열렬한 종교적 신념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대적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박해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그 일의 배후에 대제사장들이 있었음을 진술합니다. 바울이 어두운 과거사를 밝히는 목적은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알고 있음을 내비치는 것입니다. 또한 박해자였던 자신의 과거를 밝힘으로써 기독교를 박해하는 자들의 변화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은 잘못된 지식이 가져온 잘못된 행위들을 회상하며, 부활의 주님을 믿는 바른 지식을 전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이 자신의 어두운 과거사를 언급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내 삶에서 잘못된 지식이 가져온 잘못된 행위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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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을 넘어서는 전도
저는 전도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른 교회에서 하지 않는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그 한 예로 조조할인 시간에 극장을 통째로 빌린 것을 들 수 있습니다. 300개 가까이 되는 좌석을 구입해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자리가 하나도 남지 않고 꽉 찼습니다. 그 뒤로 나이트클럽도 빌렸습니다. 술 냄새가 진동하고 사방이 온통 새까만 그 지하실 공간을 빌려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예수에는 관심도 없던 청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드럼을 치며 열정적으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청년들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당으로 오라 하면 오지 않던 청년들이 극장으로, 나이트클럽으로 모여 들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카페를 빌려서 새벽기도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자 카페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새벽부터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도 한두 명씩 따라왔습니다.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외면하니, 외형을 바꿔서 접근한 것입니다. 근본은 그대로 지키되, 오래 교회 다닌 사람 입장이 아닌 그들 입장에서 그들에게 맞는 설교를 하고 전도를 했습니다.
우리는 비신자들을 품어야 합니다. 그들 안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화와 언어로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목숨을 건 일본사랑 러브 소나타 / 하용조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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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사도행전26장 2절
유대인의 고발로 재판정에 선 바울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할지'를 생각합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의 관점으로 자신의 상황을 바라봅니다. 그에게 재판정은 두려운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게 하는 현장입니다. 고난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성도의 삶을 반전시키는 열쇠는 복음 시선'으로 자기 삶을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만이 주님 사랑의 위대함과 놀라움을 제대로 전할 수 있다 - 존 맥아더
오늘의 기도
부활의 주님! 머리로는 주님을 안다고 생각했고 입술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정작 부활 신앙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던 저를 용서하소서. 세상이 영원할 듯 여기며 세상 것에 집착하는 제 욕심을 버리게 하시고, 장차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영원한 소망을 갖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88 이 몸의 소망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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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는 바울처럼 복음만을 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복음이 아닌 세상의 잣대로 우리가 이룬 일들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장 8-12절에서 고백한 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소원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관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세상의 자랑을 버리고 오직 예수께 잡힌 바 된 자가 되길 소원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복음전파--죽음도 막을 수 없는 발걸음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예루살렘에서는 스데반 --유대에서는 야고보-이방인 선교에는 바울 모두 죽음을 두려워 않고 복음전파
담대한 전도인 바울
행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8월22일 인천지하상가
1.사는 것이 정확한 사람
바울은 아그립바왕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믿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유일한 관심은 오직 예수님을 어떻게 전파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그립바왕 앞에서도 자신이 만난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는 이유는 이유는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고백하며 어떤 자리에서라도 자기가 믿는 예수님을 전하기에 온 힘을 쏟은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백하기를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처럼 우리도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자리에 그리스도를 올려 놓는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묵상하기
나는 내 삶에 가장 우선순위에 그리스도가 존재하는가?
2.가장 강력한 힘은 복음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자 할 때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은 복음 그 자체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강력하게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 있는 말씀는 결국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었고 아그립바왕까지 관심을 갖게 하기에 이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에도 정확한 복음을 전하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움직임을 일으켰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고 전도하는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가장 강력한 복음의 무기를 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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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면서 자신의 회심 이야기를 하는 부분입니다. 그의 회심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1.가시채 뒷발질 인생
바울은 자신을 변론할 기회를 얻어 한 편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일반 유대인들처럼 빌반적이고도 열정적인 유대인이었음을 말합니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Ac 26:4) 그런데 사실 유대인들에게 한 가지 약속된 것이 있습니다.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Ac 26:7)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메시야를 소망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상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야가 오셨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야가 오셨지만 그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일이 자신의 시대에 성취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진리를 거부하였습니다. 바울도 그것을 거부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그러한 삶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Ac 26:14)
여기에서 '가시채'는 동물을 조정할 때 사용하는 끝이 뾰족한 막대기입니다.
코끼리를 조종할 때는 코끼리의 귀가 약하기 때문에 막대기로 귀를 찌르면서 조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당시에는 황소나 당나귀 같은 동물을 조종할 때 끝이 뾰족한 막대기로 찌르면서 조종하였습니다
. '가시채를 뒷발질하기'라는 것은 자신을 사람이 뒤에서 가시채로 찌를 때 동물이 그것이 아프고 싫어서 뒷발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뒷발질을 하면 주인은 더욱더 쎄게 찌를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의 뒷발질은 자신을 더욱더 고달프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운명이나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상징하는 문구로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시며 사랑하신 놀라운 역사의 현장에서 가시채를 뒷발질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많이 그러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믿음이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 일어나는 일련의 놀라운 일들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대신에 그들은 '가시채 뒷발질'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헛되고 고생만 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 가시채 뒷발질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가시채 뒷발질 인생을 살면서 헛되고 힘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2.어둠에서 빛으로의 인생(가시채 순종 인생)
바울도 오신 메시야를 믿지 않았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변하였습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Ac 26:15)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가 가고 있던 인생이 어둠의 인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제는 빛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Ac 26:18) 바울은 이제 진리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둠에서 빛으로'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둠과 작별을 고하고 빛으로 나아갔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의 회개가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어둠의 때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을 때 어둠의 죄는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나 그것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망이 안 되는 이유는 우리를 빛으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의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제 거룩하게 하셔서 하늘에 '기업'을 얻게 하십니다. 거룩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게 되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전의 참으로 편하고 명예스러운 길을 버리고 힘들고 누추한 삶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지금 이런 삶을 선택한 것은 누추함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는다 하였으나 그것은 실상은 여전히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삶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믿음 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둠과 빛은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 차이를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어둠은 죄이며 빛이 거룩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그것을 분명히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에서 빛으로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자신의 삶에서 어둠과 빛이라는 엄청나고 분명한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어둠속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기에 그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빛으로 나와야 어둠과 빛의 차이를 알게 됩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회심을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이 '가시채 뒷발질'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인생이 아파 어찌하지 못하고 가시채 뒷발질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가는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지 않고 찌르는 가시채가 싫어 역반응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가시채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늘의 가시채에 순종하여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다양한 가시채가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많은 가시채가 있습니다. 겸손히 가시채에 순종해야 합니다. 가시채에 순종함으로 어둠과 빛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둠은 아무리 편하여도 죽음의 길이요 빛은 아무리 힘들어도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부활의 복음으로 인해 다시 심문의 자리에 서야 했습니다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행26:6)
그러나 그 자리에는 왕과 왕비와 총독과 천부장들과 귀족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누가 이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바울을 심문하여 정죄할 목적으로 앉아 있었던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를 바울을 해하는 사망의 자리가 아니라 바울의 설교를 듣는 생명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참으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노여움을 찬송으로 바꾸시는 줄 믿습니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76:10)
그래서 바울은 사망의 자리를 생명의 자리가 되게 하신 곳,
분노의 자리를 찬송의 자리가 되게 하신 곳에 서서 담대히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26:8)
그러므로 우리가 흑암도 아침으로 낮도 흑암으로 바꾸시는 하나님만 찾아 구하기 원합니다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암5:8)
그리하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슬픔의 자리를 춤추는 자리로 바꾸실 것입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30:11)
우리의 사막이 변하여 시내가 되게 하시고 광야가 변하여 원천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사3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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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심지어 스데반을 죽이는 일까지 찬성하며 가담했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처벌하고 모독하며 핍박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머릿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고 그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
그는 변화되었고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숨기지 않고
모든 사람 앞에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현재로 이끄시고
미래로 향하게 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사용하십니다.
때론 연약하고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오직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을 깨달으면
담대하게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복된 사명을 품고 거룩과 순결로 나아가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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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
뱌울이 왕과 고관들에게 한 질문으로, ‘여러분은 어째서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믿지 못할 일로 생각합니까?’라는 말입니다.
이는 특별히 아그립바 왕을 겨냥하여 한 말이라고 할 수 있으니,
유대 모든 풍속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기는커녕
도무지 긍정하려는 기미조차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은 왕은 물론 거기 모여 있는 총독을 비롯한 모든 인간에게 던진 바울의 책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것 믿고 이해되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상식 밖의 일,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일에 관하여 어쩐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합니다.
대신 바라고 원하고 자신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잘 수용합니다.
이는 그 마음에 불신앙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가장 거부되고 있는 것이 유일신 신앙이고,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배타적인 구원관 일 것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처럼 서로 구원이 있다고 인정하며 받아 준다면 어떨까요?
아마 전 세계인들이 대 환영할 것이고, 적어도 지금보단 더 교세가 확대되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기독교 안에는 그런 운동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라고 봅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소망하는 것이 즉, 자신들이 손안에서 놀아 주어야 하고, 입맛에 맞게 조리된 것이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속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적어도 인간을 뛰어넘는 분으로, 사람의 합리적인 사고, 과학, 이성을 초월하시는 존재이십니다.
그분은 바다의 한계를 정했지만 때로는 그것을 뛰어넘게도 하시고,
땅속 질서도 세우셨지만 때로는 그것을 벗어 넘게도 하십니다. 하늘도 그렇습니다.
밤하늘에 파란 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별똥별을 어느 날은 하룻밤에도 몇 개씩 보는 날도 있습니다.
어쩌다 한 개를 보면 신기하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몇 개를 보면 슬그머니 겁이 납니다.
그것들이 대기권으로 들어 왔는데도 불타지 않고 그냥 땅이나 바다로 떨어지면 상상만 해도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주에는 지구보다 큰 별이 무수히 많습니다. 만약 그 중의 하나라도 여과 없이 떨어진다면 지구는 끝날 것입니다. 적어도 지구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은 생명을 연명하지 못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통치하고 계셔서 그렇지, 만약 외면한다면 이 우주도 질서를 잃어버려 스스로 궤멸될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의 시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생각 셀 수 없고 그분의 자비 실로 무궁합니다. 그분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분의 사랑 정말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은혜의 길입니다. 그 길 외에는 구원받을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영생은 죽음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산 헤드린 공회 앞에서 외친 베드로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외친 바울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울이 초라한 죄인의 신분으로 화려한 왕족과 대신들앞에서 그토록 외친 것은 바로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도 장차 예수님처럼 죽음을 이기고 살아날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의 삶은 오르지 부활하기에 합당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뻐할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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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유대인들의 고소가 정당하지 않음을 주장하는 한편, 자신의 회심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3~15절 밝은 빛으로 어두운 마음을 밝혀주십니다. 저주를 받아 흑암의 땅에 묻혀 있어야 할 예수가 해보다 밝은 빛으로 오셔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바울은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열심을 낸 그의 행동이, ‘말씀의 빛’에 비춰보니 엄청난 죄로 드러난 것입니다. 고집 센 황소처럼 자기 길을 걸어가던 내게 주님은 어떤 은혜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까?
16~18절 구원받은 자를 증인으로 보내십니다. 바울의 구원은 그의 사명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에게 빛을 비추신 주님은 다시 바울을 증인으로 보내어 사람들을 빛으로 나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거룩한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은 나도 증인으로 보내십니다. 나는 누구에게 복음의 증인이 되어 빛으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7절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고소를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주장처럼 율법과 그들의 풍속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소망, 즉 메시아가 왔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메시아의 도래를 소망했지만, 그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소식에는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도 구원을 소망하고 천국을 기대하지만, 복음이 선언하는 구원과 천국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비난받고 무시당하고 조롱을 받을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소망을 전하는 증인이 됩시다.
8~12절 바울은 부활의 주를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지난 과오를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감추고 싶은 어두운 과거지만, 자신의 회심 과정을 낱낱이 고백합니다. 예수 이름을 대적했던 핍박의 앞잡이에서, 예수 이름을 전하는 증인으로 변하게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려줄 수 있는 내 삶의 생생한 간증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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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공회에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 앞에서 심문받고
가이사랴로 옮겨서 총독 벨릭스 앞에서 심문받고
새로운 총독 베스도 앞에서 심문 받고
다시 아그립바왕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의 재판장이 눈에 선하다.
높은 자리의 재판장의 자리에는 남매간에 근친상간으로 불륜죄를 저지른
아그립바왕과 누이이자 아내인 버니게가 자주색 옷을 입고
번쩍이는 왕관을 쓰고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그 주변에는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고관대작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가득하게 모여 있는 상황이였다.
내면에는 죄로 가득차 있지만 겉은 화려하고 품위있고 권력있는 자의 모습과
비록 수의를 입고 있고 손에는 수갑을 차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세상이 감당 할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그 들 앞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위에 앉은 아그립바 왕이 아래에 초라하게 서 있는 바울에게 말한다.(1)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1)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호를 시작한다.(1)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잘 알고 계심으로(3)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말문을 연다.(2)
개인적인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바리새인으로 양육 받은 것을 이야기 한다.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쫓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5)
자신이 엄격한 교육을 받은 유대인임을 먼저 말했다.
내가 지금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다.(6)
하나님이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가?
이 약속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구속하시기 위해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데
우리 열두 지파가 아직도 밤낮으로 그 약속이 이루어 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7)
그러나 이 약속은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으며
그 분의 부활은 메시야 라는 것의 증거이며 우리 역시 부활하리라는 보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니이까?(8)
라고 반문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본질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것은 복음의 본질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의 부활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십니까?
묻지 않고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이라고 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바울의 과거에 어리석음을 고백한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에 행해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9)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10)
많은 서도들을 옥에 가두고(10)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에도 가편 투표를 했고(10)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고(11)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고(11)
대제사장들의 위임을 받아 다메섹에 갔다(12)
왜 바울이 자신의 과거의 어리석음을 재판중에 이야기 할까?
자신의 과거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함으로 현재도 어리석음 가운데 있는 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대제사장을 권세를 얻어(10), 대제사장의 위임을 받아(12)
대제사장을 언급하는 이유도 예수를 대적하는 일에 주동자가 종교지도자임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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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인생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세히 변명한 것은 22장과 오늘 26장입니다. 24장에서 사도 바울은 15-16절에서 부활의 산 소망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 그리고 베스도 앞에서 다시 이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7-8절에서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심에 대한 소망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인생에서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인생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묵상의 핵심은 우리 인생이, 우리 믿음 생활이 부활의 산 소망으로 사로잡혀 살고 있느냐는 질문과 예수를 믿고 거듭났어도 여전히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느냐는 진지한 질문에 있습니다.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에 쓰임받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간증에서 다메섹 사건 이전의 자신의 삶을 한 마디로 핍박 자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4절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들이 다 안다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가 배운 많은 학문과 넘치는 열정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자신 스스로가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했었다고 사도 바울은 회고했습니다(9절). 그래서 대 제사장들에게 권세를 받아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죽일 때에 가편 투표하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심히 격분해서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투옥시키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노중에 사건은 일어났습니다. 때가 정오였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말입니다. 팔레스틴의 정오는 매우 무덥기 때문에 대개 이때쯤이면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기 위해서 강행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열정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마치 그 일에 인생을 건 사람처럼 확신에 차서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언제 그랬습니까? 젊은 날에 그랬습니다. 잘 못된 확신과 열정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확신에 차서 행동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젊디젊은 바울이 그 넘치는 에너지를 사람을 죽이는 일에 사용하면서 그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도 바울의 모습을 주님이 이렇게 표현하셨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자신은 확신에 차 있습니다. 넘치는 에너지도 있습니다. 꼭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확신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울의 인생을 평가하기를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런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나 말을 처음 길들일 때면 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과거 우리 농가들이 소로 밭을 갈 때는 이런 진풍경이 종종 있었습니다. 소가 뒷발질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처음 멍에를 씌우면 이것이 아주 심합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소나 말이 뒷발질을 하는 자리에 가시 채를 만들어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시나무로 만든 둥그런 테를 만들어서 달아놓습니다. 혹은 뾰족한 송곳 같은 것을 달아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소나 말이 뒷발질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가시에 찔리고 송곳에 찔리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짓이지요. 자기를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확신에 차서 그렇게 많은 에너지와 권세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사울의 인생! 그 인생을 주님의 관점에서 보니까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상처를 주는 인생입니다. 뒷발질을 하지만 자신이 더 아픈 인생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공격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생은 그 자신이 가시에 찔리는 상처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늘 의심하고, 늘 전투적인 삶을 삽니다. 불행한 인생입니다. 곤고한 인생입니다. 자기를 상하게 하는 인생입니다. 마음이 강퍅한 인생입니다.
브루스라고 하는 학자는 주님의 이런 평가가 바울 스스로 양심과 싸우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바울은 유대교적 열정으로써 기독교 핍박에 앞장섰지만 날이 갈수록, 특히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하고서 스스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느끼며 점차 혼란과 번민에 빠져들었다는 것입니다. 뭘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이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니고 죽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기는 하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양심의 송사를 받습니다. 그럴수록 더 강퍅하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허무는 더욱 짙게 몰려오는 것이지요. 아마 바울이 이렇게 번민 속에서 행동했을 가능성은 아주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바울의 행동이 아름답지 못한 것이며 그로 인해서 번민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네 인생이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잘못된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양심의 송사를 받으면서도 그것이 내가 살길이라고 이를 악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뒷발에는 가시에 찔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이를 악물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것 놓치면 죽는다고 생각하면서 벼랑 끝의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인스턴트(instant) 행복과 이미테이션(imitation) 확신을 가지고 잘못된 길을 향해서 맹렬히 달려가는 사람들……. 돈과 명예를 향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정작 자신의 내면세계는 화인 맞은 양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주님은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인생이라고 할 것입니다. 나름대로 확신도 있고 열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인생이 아닙니다. 잘못된 신념입니다.
돈은 우리를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모조품 행복입니다. 이미테이션 행복입니다. 인스턴트 행복입니다. 찰나적인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안락하고 편안한 집! 승차감이 좋은 자동차! 자녀들이 잘 되는 것! 모두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가 되어서 이를 악물고 그것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삶을 살아왔다면 그 인생은 가시 채를 뒷발질해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바울의 다음 이야기에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주님은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17-18절입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어 저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하리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일에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로 하여금 어두움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일에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인생, 핍박하는 인생에서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인생, 돕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가시 채를 뒷발질 하는 인생에서 사람을 살리고 이미테이션 행복과, 인스턴트적인 즐거움을 탐닉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과 진실한 기쁨을 나누어주는 인생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누가 사울 같은 사람이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 사람은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도저히 구원받을 길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유대교에 지나치게 열심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회심했어도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의 회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볼 때는 이렇게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인생 사울을 하나님이 쓰시기로 하셨습니다. 그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인생의 여정을 삶의 방향을 바꿔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거스르지 않았을 때 그의 인생은 더 이상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14년 어간의 긴 훈련의 시간들이 있었지만 그는 사람을 살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자신의 역사를 간증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 의해서 바뀐 것입니다. 가시 채를 뒷발질하느라 고통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인생에 주님 찾아오셔서 빛나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그런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변화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사실 우리네 인생 주님이 찾아오셔서 만나주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가시 채를 뒷발질하느라 상처 난 몸과 마음으로 살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해 주셔서 은혜를 아는 인생, 진정한 행복을 아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은혜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방향을 돌려놓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은혜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께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하는 인생에서 사람을 살리고 평강을 나누어주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배후에는 부활의 산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 우리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고 믿은 주님은 우리 인생을 은혜로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비록 내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았지만 내 인생이 가시채를 뒷발질하던 곤고한 인생에서 사람을 살리는 인생으로 변화되었다고 간증하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방인들에게 나아가 그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
아오게 하는 값진 인생이 되었다고 간증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 어떻게 변화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여전히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곤고한 인생을 살고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말씀 앞에서 우리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사람을 살리는 인생으로 평강을 주는 인생으로 부활의 산 소망 가지고 진정한 평강을 누리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저의 구원이 되시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삶의 반석이 되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도 일어서고 쓰임 받을 수 있음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과 생각을 돌아보며 말씀의 거울 앞에 부끄럼 없는 발걸음으로
나아가도록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새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강건하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인하여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찾아가 만나주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덮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의 기쁨이 되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워지도록 선하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