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의 제16집 [ 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실천문학사) 저자 산문 (詩論)
1.안개 속에서
안개 속을 걷는다 모래톱을 걷는다 발이 늪 속으로 빠진다. 늪은 내 시의 공간이다. 여기는 지금 초겨울 입새 오후 세 시, 안개가 짙다. 춘천은 안개 공장이 있다고 어느 시인은 말한다. 안개 공장, 다소는 우울하고 다소는 낭만적이다. 낭만 속에서 우울 속에서 내 시는 부화한다. 어둠과 슬픔의 싹이 트기도 한다. 장폴 싸르트르는 “문학은 존재에 대한 물음”이라고 했던가! 50여 평생 그 물음의 길 위에서 나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다. 그래서 아프다. 늘 마음이 아프고 뼈가 아프다. 그 아픔은 내 ‘슬픔의 정체성’이다. 종이학처럼 허공에서 떠도는 수인囚人,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행자行者, 이것이 내 시의 변곡점이다.
2. 4살 때
천지를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천둥벼락 치는 소리에 잠에서 깼던가 보다. 그런데 옆에는 엄마, 아빠, 할머니, 아무도 없었다.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모른다. 내가 철이 든 후, 아니 어른이 된 후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4살인지 5살인지 그때, 봉평 원길리에 살 때, 밤중에 엄마, 아빠, 할머니랑 다 어디에 갔었느냐고? 한밤중에 비가 너무 많이 쏟아져서 논두렁이 다 무너져 물길을 내려고 갔었다고. 두어 시간 후 들어와 보니 네가 기진해 있더라고. 엄마도 내가 그렇게 무서워 울고 있었던 사건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어둠은 나의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저 깊은 심장 속에서 살아나 늘 나를 휘감고 있다. 내 시에 어두운 이미지가 많은 이유일까? 나에게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고 있다. 80년대에 발표한 <강촌연가.1>에서 “서른일곱에 이 세상 하직하겠다던/ 젊은 날의 고뇌도 갈등도/깊은 물속에 침잠 되어/물이 되고” 이런 구절이 있다. 사춘기 시절부터 허무의식에 빠져 허둥거렸다. 삶과 죽음은 이분법이 아닌 동일성이다. 내 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변辯이다. 이런 심상이 소위 릴케가 말하는 “시는 체험이다”라는 근원이자 내 어둠의 정서이다. 3.강 이미지
롤랑 바르트는 “언어는 살갗이다. 나는 그 사람을 언어로 문지른다.”라고 역설한다. 내 시도 강을 언어로 문질러 보려고 손짓해 본다. 환경이 부여한 공간적 수확이다. 사방으로 강물이 흐르는 ‘춘천’이란 공간이 그것이다. 나는 거의 매일 이 강가를 걷는다. 그러나 이 도시가 낭만과 아름다움만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 수록된 「운파동 사거리」처럼 폐허 같은 골목이 있고, 가계 문을 닫은 골목도 많다. 지난 해 여름 장마에는 인공 수초 섬을 지키기 위하여 급물살에 뛰어들었던 분들의 목숨이 산산이 산화되었다. 한 구의 시신은 영영 찾지 못한 채, 시민 장(葬)을 치뤘다. 그 참상을 승화한 시가 「침묵의 강, 침묵의 도시」이다. 이렇게 나의 정서는 저 깊은 강물에서 늘 기쁨과 슬픔, 허무가 상징과 은유로 닿아 있다.
이런저런 연유로 나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좋아한다. 바라문을 나온 싯다르타는 뱃사공 바스데바에게서 강을 배운다. 바스데바는 말한다. “나에게서 배우는 게 아니라 저 강물로부터 배우게 될 것이요.” 싯다르타는 강에서 듣는 법을 배우고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강의 눈眼 속을 들여다보며 강은 참으로 배울 것이 많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배움이 곧 싯다르타의 지혜가 되고 구도의 자리가 되었단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저 위대한 수도승 같은 강물에게 나는 늘 엎드려 기도한다. 당신의 한쪽을 내 가슴에 품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당신의 마음을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메말라 가는 가슴 한켠에 정서의 축축한 눈물을 달라고.
4. 빈 그릇
붓다는 말한다. “이 모든 존재들은 슈냐(sunya:空)로 가득 차 있다. 이 슈냐는 모든 것의 한가운데 존재하고 있다. 슈냐, 텅 빈 이 순수 공간은 바퀴 속에도 존재한다. 별 속에도, 꽃 속에도, 나무속에도, 심지어는 이 공기 속에도 존재한다.”라고. 반야심경에서 말하듯이 슈냐 즉 공(空)은 곧 루빠(rupa)즉 색(色)이다. 나는 이 설법 같은 공(空)을 좋아한다. 2부에 수록된 시 「쿠키 쿠키」도 그런 의식의 산물이다. 공과 색, 삶과 죽음 의식의 등식이다. 나의 그런 의식은 색보다 공의 의식이 지배한다. “쿠키 쿠키는 분명 과자다/그런데 우리말 음상으로 키 큰 키 큰/남자 이름으로 들린다/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다/허공, 허공, 허공---/이 세상에 허공만큼 큰 것, 또 무엇이 있을까?”(「쿠키 쿠키」)의 일부다. 물론 이 공은 색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공, 그 의식은 늘 나를 더 괴롭힌다. 내 존재가 없음에 대하여, 빈손에 대하여, 빈 영혼에 대하여, 빈 강물에 대하여, 빈산에 대하여, 내 열차는 늘 멈춰 선다. 또한 「바람과 외투」에서도 나는 이렇게 공의 의식을 노래한다. “고골리의 도둑맞은 외투 같은 우울을 안고 돌밭 길을 간다/차창을 두드리며 달려오는 빗소리,/죽은 외투의 그림자/박제된 맨살의 그림자가 창에 어린다/긴 강을 건너가는 바퀴의 울음소리/하늘 가득 산화된 외투가 펄럭인다”. 「바람과 외투」는 내 잃어버린 영혼에 대하여, 허무 의식에 대하여 공으로 흐르는 내 피의 근원으로 작용한 산물이다.
5. 길, 혹은 열네 번째 아해
*길
「길, 혹은 열네 번째 아해」는 2014년에 나온 나의 열두 번째 시집「노자의 무덤을 가다」에 수록된 시의 제목이다. 내상(內傷)의 표출이다. 미우라 아야꼬는 말하지 않았던가! “문학은 상처의 나무에서 피는 꽃”이라고. 이상의 “열세 아이가 도로로 질주한 길” 위에 열네 번째로 내가 끼어 있는 느낌이다. 그 아이는 죽은 아이이며 뼈가 아픈 아이다. 뼈가 아픈 아이는 마음이 아프고 살이 아프다. 그림자 없는 영상, 습기 낀 늪 속의 아이가 바로 ‘나’라는 생각이다. “길은 막다른 골목”이 내 길인 것 같다. 거기엔 항상 “무서워하는 아해”만 남아 떨고 있다.
*건축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생각한다. 관계는 시의 제재에서 ‘다리’가 되고 ‘혀’가 되고 ‘눈물’이 되고 ‘두 개의 기둥’이 되고 ‘사이’가 되고 ‘간극’이 될 수 있다. 이 명사로 된 낱말들은 시 쓰기 설계에서 주제를 뒷받침하는 제재를 유추해 올 수 있는 제목의 탄생이다. 제재가 결정되면 소재를 동원하여 주제를 밀고 나간다. 이때 형식과 내용의 등가(等價)를 중시한다. 등가는 저울이다. 저울추의 양쪽 무게는 평행을 이뤄야 좋은 시가 될 수 있음을 경험한다. 나는 항상 시를 쓸 때마다 이 설계를 우선시 한다. T.S. Elot의 “시는 형식과 내용의 등가물이다.” “시는 수학과 같아야 한다.”는 장 콕토의 논리를 염두에 두면서.
*보철
치과에 가면 썩은 이를 뽑아내고 보철을 심는다. 한 대를 빼고 다시 심는데 보통 열 번 이상을 간다. 때로는 몇 달이 걸릴 때도 있다. 어떤 시인은 삼십 번, 오십 번, 백 번도 간단다. 당나라 가도(賈島)는 밀추(推) 자와 두드릴 고(敲)자 중 어느 글자를 선택해야 할지를 두고 여러 날을 고심했다. 길을 가면서도 손동작으로 두드려 보는 시늉도 하고 밀어보는 시늉도 하다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때마침 당대의 문장가 한유(韓愈)가 탄 마차에 부딪혔다. 사연을 이야기하자 한유는 두드릴 고(敲)자가 좋겠다고 했다. 조숙지변수(鳥宿地邊樹)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의 ‘고(敲)’가 그것이다. 나도 가도처럼 시의 지고한 정신에 닿고 싶다.
*직관(intuition)
“시의 첫 줄은 신이 주신 것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존중한다. 직관은 내 시의 감각이고 자산이다. 또한 “사물에서 생명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그는 더 이상 시인이 아니다.”라고 한 쇼펜하우어의 입을 빌리려고 노력한다. 대부분 직관으로 오는 시는 ‘주지시’보다 ‘서정시’에서 잘 찾아온다. 졸시 「도피안사.1.2」도 그렇고 「매미 허물 같은」 등 대부분의 작품이 직관에 의해 쓰여 질 때가 많다. 보르헤스는 그의 소설 「브로디의 보고서」에서 “시인은 영혼이 그에게 내려왔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와 말하지 않으며 그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시인의 어머니조차도 그를 쳐다보지 못합니다. 이제 그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며 어떤 것이라도 그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람들처럼 시가 신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육체는 죽지만 영혼은 살아남는다는 개념이다.”라고 보르헤스는 시의 위대성을 말한다.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가 시인이란 뜻이다. 나도 신적인 영감과 직관에 좀 더 깊숙이 도달하길 원한다. 그러나 그 신은 나로부터 도망갈 때가 많다.
*노트
나는 주지주의(intellectualism)의 시도 좋아하지만 정서가 촉촉히 베인 서정시(lyric)도 좋아한다. 「잎 속의 입」, 「본성, 두루마리 휴지」, 「2021광장, 그리고 광야」,「반나절의 생」,「매미 허물 같은」,「성 밖에서」같은 시는 현 시대상을 풍자한 시로 전자에 속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순과 갈등, 정치인들의 말, 말, ---, 광장에 구름처럼 몰려나와 구호를 외치는 무리들의 양극화 현상을 그린 작품들이다. 더구나「성 밖에서」는 힘 있는 어떤 그룹에도 끼이지 못하고 항상 그늘에서 빗물처럼 젖어 떨고 있는 풀잎 같은 존재들을 그렸다. 이 존재는 결국 나의 ‘자화상’이 아닐까? 변명한다. 더구나 세계적 팬데믹(pandemic)까지 겹쳐 우리는 정말 짜증나는 사회에 처해 있는 풀잎들 같은 존재란 생각이 많이 들었다. 비 존재적 내면 의식의 갈등과 자아분열 등, 이런 작품이 주로 1부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제재와 소재에 따라 주로 내 시는 형식과 내용이 결정된다.
“서정시인들의 형상들은 바로 그 자신이며 자신의 다양한 객관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비극의 탄생」)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수주의자의 하루」,「시간에 기대어」, 「달에게 묻다」, 「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 등 대부분의 작품이 후자에 속한다고 자평한다. 후자는 주로 정서적 충동에서 출발한다. 아무튼 나는 두 갈래(주지시와 서정시)의 길에서 내 시의 온도는 몇 도나 될까를 수시로 체크하고 반성한다. 도달점은 에토스(ethos)가 강한 시를 쓰고 싶다. 오늘도 24시의 시간이 23시의 해처럼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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