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
사무엘상: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15)
사울의 실패에서 이것을 배우라
삼상 13:1-23 (봉독: 1-2, 8-14)
지난주 화성의 아리셀 공장 화재로 23명의 소중한 목숨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공장에서 일했던 작업자는 회사에서 안전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비상구도 몰랐답니다.
게다가 지난 3월에 공장 화재 위험을 경고한 문건이 나왔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재(人災)입니다.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이 이런 말을 했지요.
"역사는 똑같이 반복(repeat)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운율(rhyme)을 맞춘다.”
그래서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번 사무엘상 1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은 쉽게 잊어버리고 망각합니다.
이것을 통찰한 독일의 한 철학자(헤겔)는 말하기를,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배웠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 역사 이야기를 반복하는 이유는,
사울의 삶을 통해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가 고스란히 되풀이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것은 사울의 실패가 그대로 우리에게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안타깝고 무거운 주제이지만, 반드시 새겨야 할 경고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불평하다가 멸망한 이들의 역사를 상기시켜줍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역사가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진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10:11]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본보기(examples)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고(warnings)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사무엘상 13장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본보기와 사례들을 들려주시며 경고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사울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 이야기는 왜 사울의 왕권이 지속되지 못하고 다윗에게로 넘어갔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두 번의 에피소드 중 첫 번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사울의 실패의 본질은 무엇이었는지,
또한 사울의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 사울이 직접 번제를 드리다
오늘 13장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고 암몬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요.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이스라엘에서 3천 명의 군사를 뽑아서 2천 명은 자신과 함께 베델 산지에 있게 하고,
1천 명은 아들 요나단과 함께 있게 기브아 지역으로 가게 합니다.
그때 요나단이 먼저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선제공격합니다.
바로 이 담대한 요나단의 선제공격으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됩니다.
공격을 당했으니 그렇지 않아도 이스라엘을 손보려 했던 블레셋도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입니다.
문제는 블레셋의 군대 규모가 엄청났다는 점입니다.
5절에 보니, 병거가 3만 대, 기마가 6천에, 보병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서 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블레셋 군대가 사울이 있던 ‘믹마스’로 올라와서 진을 치게 되지요.
위기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사방에서 밀려온 군대에 의해 포위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습니다. 그러더니 저마다 굴이나 숲이나 바위틈이나 구덩이에 숨기 시작합니다. 전쟁에 있어서 병사들의 ‘사기’의 중요성이 얼마나 큽니까?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사기가 3/4의 힘을 발휘한다”고 하면서 사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사기는 시작하기도 전에 바닥을 쳤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용감하게도 사울은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길갈’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울과 함께 있던 군인들은 괜찮았을까요? 아니요 7절에 의하면 그를 따르던 군인들도 모두 떨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불리한 상황과 압도당하는 처지에 있으면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칭찬받을 만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그는 말씀대로 사무엘을 기다렸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상 10장에 보면 사무엘은 사울에게 길갈로 먼저 가서 7일을 기다리라고 말씀했었습니다.
[삼상 10:8] 그대는 나보다 먼저 길갈로 내려가십시오. 그러면 나도 뒤따라 그대에게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릴 것이니,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려 주십시오. 그 때에 가서 하셔야 할 일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10장과 13장이 연결되는 본문 같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위기 상황 속에서도 기다립니다.
사울이 말씀대로 지키고자 힘썼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7일이 되었는데 길갈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려야 합니까?
아마도 가만히 있을 분들은 별로 없으실 겁니다.
군사들이 탈영하고 있으니 무엇이라도 해서 사기를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배라도 드려서 하나님의 호의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울이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리기로 결정합니다. 선택을 내렸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울의 인생을 바꾸는 어리석은 결정이었습니다.
[삼상 13:9] 사울은 사람들을 시켜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한 다음에, 자신이 직접 번제를 올렸다.
사울은 자신이 직접 제사장이 되어 제물을 바쳐서 번제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막 번제를 올리고 나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한 겁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입니다.
사울이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한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데 참지를 못한 겁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맞이하고 인사를 하는데 사무엘의 안색이 좋지 않아요. 사무엘이 사울을 꾸짖습니다.
“임금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사울은 자신이 왜 번제를 직접 드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3가지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백성들이 나에게서 떠나 흩어졌다는 겁니다.
기업으로 말하면 고객들이 떠나가고, 계약이 안 되며, 매출이 줄어드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대통령으로 말하면 대통령 신뢰도와 지지율이 떨어지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무능한 지도자라는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번제를 직접 드렸다는 겁니다.
둘째는, 제사장 사무엘께서 약속한 날짜에 오시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셋째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블레셋 사람이 길갈로 내려와서 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이 길갈로 내려와서 치게 되면 사실상 몰살당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상황을 보면 사울의 편을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억울한 면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저를 포함해서 여기 계신 대부분의 성도님들도 사울과 같은 형편이 있었다면
사울처럼 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울의 논리는 상당히 합리적이었습니다. 사회적, 세상적 관점으로 볼 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었다면,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왜요? 다른 나라의 왕들도 이런 형편에서는 사울처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의 왕이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과 달라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울이 책망받게 되는 지점입니다. 사울의 잘못된 정체성입니다.
사울은 정말 자기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해도 되는 다른 나라와 같은 ‘왕’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사무엘이 왜 사울을 책망하고, 무엇이 사울의 실패요 문제였는지를 보십시다.
사무엘은 13절에서 사실 굉장히 강한 말로 책망하는데요, 이 부분을 개정판과 우리말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삼상 13:13, 개정]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우리말: 어리석은) 행하였도다...
‘망령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나이가 들거나 정신이 흐려져서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난 데가 있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나아가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가져오는 어리석은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은 행동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 놓을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지금 사울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삼상 13:13] ... 주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주님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사울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었습니다. 왕이라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 위에 왕이신 하나님이 계셨으므로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불순종했던 것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그가 불순종하게 한 원인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보기에 믹마스에 몰려든 블레셋의 군대가 왕이신 하나님보다 훨씬 더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주하고, 당한 현실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울의 불순종의 원인은 결국 믿음의 실패이지요. 그 결과가 불순종입니다.
바로 사울의 믿음의 실패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첫 번째가 등장합니다.
사울의 실패에서 이것을 배우라(1)
첫째, 불순종은 믿음의 결핍의 결과이다.
신앙생활의 불순종의 원인은 악화된 상황이나 환경이 근본적인 원인이 아닙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보기에, 사울이 초조하여 불순종한 이유는 “흩어지고, 줄어드는 군대”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영적 믹마스”의 포위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데 고객이 줄고, 매출이 줄고, 직원들이 퇴사하고, 사기가 떨어지면 마음이 어떨까요?
조급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 것입니다. “이러다가 망하는 거 아닌가?”
사울은 줄어드는 군대를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우려는 그의 믿음의 결핍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번제도 드리지 않았겠지요.
그가 7일을 기다렸다는 것은 적어도 사울의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사울은 적어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듯 보입니다.
다만 믿음의 대상이 온전하게 주님이 아니었던 것뿐입니다.
사실상 그의 믿음의 대상은 주님보다는 강력하고 수많은 인재들, 군대에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믿음의 결핍이 결국 불순종을 낳습니다. 믿음이 완벽한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겪습니다.
하지만 왜 이러한 믿음의 결핍이 발생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왜일까요? 지난번 말씀 기억하시나요?
바로 영적 기억상실증입니다. 사사기의 네 가지 사이클이 다시 사울에게서 반복되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전쟁, 즉 암몬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흐르자, 어느덧 그 전쟁의 승리의 원인과 이유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울이 그 전쟁에서 이긴 것은 군사의 수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부어졌고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번 전쟁에서는 마치 군대의 숫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에게 벌어진 위기 상황은 사울에게 마치 ‘선악과’의 시험과 같았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불안하게 전개되어도 오직 주님만 믿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내 방식과 내 방법대로 문제 해결을 위해 움직일 것인가? 이게 길갈의 선악과 시험입니다.
시험의 쟁점은 과연 사울이 하나님 아래서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이 될지의 시험이었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이 시험을 치르지 않나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이 되고픈 유혹과 시험 말입니다.
결국 사울은 직접 번제를 드림으로써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그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원수들과 전쟁을 치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망령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그 원인은 믿음의 결핍이요, 그 결핍의 원인은 망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사울과 같은 형편에 계십니까? 믹마스의 포위 상황에 처해 있나요?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매출은 줄고, 함께 하는 인재들이 떠나갑니까?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잘 안됩니까? 지지부진하고 멈춰있나요?
바로 그것이 길갈의 선악과 시험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아래서 주의 자녀로 주의 종으로 살지,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이 될지의 시험입니다.
여러분, 믹마스에서의 포위 상황은 시련trial이자 동시에 선악과 시험test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미국에서 목회할 때, 코로나19가 터졌습니다. 목회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성도님들은 교회에 나오실 수 없게 되었고, 교회 재정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사역으로 전환하고 위기에 차차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잘 극복하던 터에, 동역하시던 분이 갑자기 담임자로 나가시게 되었습니다.
담임자로 가시게 되었으니 얼마나 축복할 일인가요? 문제는 그때가 코로나19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내부적으로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청년과 찬양 인도자가 사라진 겁니다.
그때 제가 한동안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사역자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게는 마치 믹사스의 포위 상황, 위기 상황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가 어느 날 기도하는데,
“네 삶과 목회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니?” “주님께 있지요.”
“그런데 무엇을 염려하느냐?”
제가 하나님도 믿지만, 어느덧 좋은 목회자, 인재를 찾고 의지하고 있더라고요.
어려운 상황일수록 좋은 팀을 이루는 것,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시잖아요. “주님께 다 맡기겠습니다.”
코로나19 기간 종교비자가 거의 다 막혔습니다.
전 교인이 7월 1일부터 14일까지 역대하 7장 14절 말씀을 바탕으로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불신의 죄를 회개하고, 참된 예배를 회복하게 하시고, 예비하신 사역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7월 15일에 종교비자가 잠깐 열렸고, 그리고 9월에 한국에서 한 목사님이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자는 다시 닫혔습니다. 그 목사님이 저의 후임 목사님이 되신 거예요.
하나님만을 신뢰할 때,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그 4개월의 기간 동안 분명히 보여주셨어요.
여러분, 우리에게 영적 믹마스가 일어났을 때, 위기 상황과 압박은 믿음의 시험의 기간임을 기억하십시오.
불순종은 믿음의 결핍의 결과입니다. 내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시험받을 때,
오직 주를 향한 믿음과 순종으로 이 시험을 이기고 통과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사울의 실패에서 이것을 배우라(2)
2. 믿음의 결핍은 예배의 변질에서 온다.
믿음의 결핍은 망각에서 오는데, 망각은 곧 ‘예배의 변질’에서 옵니다.
여기서의 예배는 단지 주일날 모여 드리는 예배나 수요, 금요예배를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가장 존귀한 분이라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라는 영어 단어 worship은 ~가치가 있는 이라는 뜻의 worth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존귀한 분이시고 삶의 이유라는 고백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배가 왜곡되거나 변질될 때, 믿음의 결핍으로 이어집니다.
즉, 사울의 예배에는 큰 왜곡과 변질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예배의 대상과 목적은 하나님 그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예배는 사실상 사울 자신을 위한 예배였습니다. 왜일까요?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자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차적인 유익이지,
예배의 본질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무엘이 그토록 사울을 책망한 이유입니다.
사울은 제사장이 아닌데, 직접 번제를 드렸습니다. 율법적으로 그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신명기서 17장에 보면 왕권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왕의 역할이 다르고 제사장의 역할이 다릅니다.
아무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는 안 되었고 아무렇게나 드려도 안 되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 제도에서도 삼권 분립, 입법, 사법, 행정이 분리되어 있지요.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사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탄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1972년 워터게이트로 알려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왜 물러났습니까?
권력 남용과 사법 방해 혐의로 탄핵되었습니다. 물론 탄핵 절차가 시작되기 이전에 사임하여 공식적인 탄핵 절차가 완료되지 않았지만, 대통령도 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는 겁니다.
1998년 빌 클린턴은 상원에서는 무죄 판결로 나서 탄핵이 되지 않았지만, 왜 하원에서 탄핵되었나요? 단지 성추문이 아니었습니다. 성추문과 관련된 거짓 증언과 사법 방해 혐의로 하원에서 탄핵된 것입니다.
사울은 제사장의 권한을 넘어서려 했습니다. 신명기서에 의하면 왕권은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에 의해서 권한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왕은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말씀에 복종해야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율법과 제사를 완성하신 이후로, 이제는 구약의 제사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보혈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문제는 단지 사울이 사무엘의 권한을 넘어 직접 번제를 드렸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왜 사울은 그렇게 무리수를 두어가며 사무엘 대신 직접 번제를 드려야 했을까요?
병사들은 도망가고 블레셋이 쳐들어올 것 같자, 그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하나님이 필요했던 겁니다.
즉, 사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을 ‘사용’하고, ‘이용’하여 전쟁에서 이기려고 했던 겁니다.
예배의 목적이 왕 되신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에게 예배는 그저 하나님을 이용하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변질이고 왜곡입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지요?
사무엘상 2장에서,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에서 이기고자 ‘언약궤’를 메고 나갔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언약궤를 가지고 갔나요? 아닙니다.
전쟁에서 이기고자 마치 부적처럼 언약궤를 사용한 것입니다. 결과는 대패였습니다.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배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울의 실패에서 반드시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기에 참되게 예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울의 실패를 반복하지 마십시다. 믿음의 결핍이 예배를 변질시키고, 예배의 변질이 다시 믿음의 결핍을 가져오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우리는 사울의 실패로부터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사울의 실패에서 이것을 배우라(3)
3. 하나님은 마음에 맞는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은 승리보다 순종을,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하나님과 사울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다릅니다. 하나님과 사울의 마음이 맞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지면 안 되고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치열한 경쟁사회입니다. 대학입학 경쟁, 졸업하면 취업 경쟁,
취업이 되면 승진 경쟁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창업을 하면 동종업과의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러니 사울이 승리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을 사는 우리는 다 사울과 비슷한 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울에게 바라시는 것은 단지 ‘승리’나 대단한 성과가 아닙니다.
그 승리는 누가 주시나요? 주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뭐가 부족하신가요? 하나님이 무엇이 필요하신가요?
오히려 우리가 부족하고, 우리가 필요하고, 우리에게 결핍이 있지, 그분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하나님을 ‘위해서’ 대단한 일을 합니까?
창세기 말씀에 보세요. 하나님께서 완벽하고 부족함 없는 에덴동산을 아담과 하와를 위해 주셨어요.
하나님이 진정 왕이 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준 것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일이 없어요.
단 하나가 있다면, 그분과 친밀한 교제요 사귐fellowship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아담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어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아담이 최종적인 권위자가 아니라,
그 아담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상기시키는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그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 왕의 자리를 찬탈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었어요. 실낙원. 이것이 세상이 고통 받는 원인이요 결핍과 고난의 원인입니다.
나무가 뿌리가 뽑힌 것이고,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왔으며, 노트북의 전원 배터리는 뽑힌 상황입니다.
이것이 인류가 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셨어요.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반역죄를 사하셨어요. 우리 안에 새로운 영을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시켜주셨어요. 요한일서 1장 3절입니다.
[요일 1:3] ... 우리는 여러분도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이 사귐은 이 땅에서 시작되어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사귐입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회복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의 사귐이 회복된 상태가 완전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관계와 사귐이 하나님이 사울에게 원하셨고,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귐이 바로 예배이지요. 공적인 예배만이 아니라 삶의 예배, 일상의 예배입니다.
바로 그 예배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14절입니다.
[삼상13:14]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께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결국 훗날, 사울의 왕조는 다른 이에 의해서 교체됩니다. 그는 주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대단한 결과나 성취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좇는 사람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예배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한 구절이 바로 다윗의 시편 27편 4절입니다.
[시 27:4]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오직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 주를 바라보는 것, 이 한 가지만 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정한 왕이 아니었기에 늘 주님과 의논하며 물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사울에서부터 다윗으로 촛대가 바뀌는 이유입니다.
그 성전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성전입니다. 그분은 광야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어요.
오직 주 하나님만을 섬기라! 예수님은 온전한 순종으로 온전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통해 그분이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즉, 그분과 동행하고 그분을 따라 살아간다면,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과 친밀한 사귐을 원하십니다.
대단한 업적이나 승리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의 실패에서 세 가지 교훈을 배우십시오.
1) 불순종은 믿음의 결핍의 결과이고, 2) 믿음의 결핍은 예배의 변질에서 온다는 것,
3) 하나님은 마음에 맞는 자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찬양: 예배합니다 + 부르신 곳에서 (후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