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밥~이나 찹~쌀 떠~억!’
지금 이삼십대 젊은이들 중 한 겨울밤 늦게 이렇게 외치고 다니는 행상들의 소리를 직접 들어본 사람 있을까?
물론 가장 흔한 밤참을 팔러 다니는 외침이었지만, 밤참을 파는 것은 이것만은 아니었다.
도시에서는 개피떡 모양에 멍개 잎을 감싼 멍개떡(경상도 지역에선 ‘망개떡’ 또는 ‘맹감떡’이라고도 불리는 듯), 메밀묵, 두부 등이 서민들의 밤참으로 많이 사랑 받았던 듯 싶다.
하루 세끼 밥 제때 지어먹기도 힘들던 그 시절, 텔레비전이나 특별한 오락거리도 간식거리도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겨울 짧은 해 넘어가기가 무섭게 저녁을 지어먹었다.
집안 식구들이 외풍 드센 방에 이불을 깔아놓고 그 속에 모두 발을 허벅지 깊숙히 덮고서 기나긴 밤을 라디오를 틀어놓고 연속극을 듣거나, 할머니의 옛날 얘기, 가장(家長)의 허풍 섞인 젊은 시절의 무용담 같은 것을 듣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때로는 열번도 더 들어본 이야기도 자주 나오지만 그때마다 가족들은 ‘아!’ ‘그랬어요?’ ‘어머나!’ ‘정말?’ 하는 감탄사를 추임새로 넣어가며 재미있게 들어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때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가장의 목을 조여오는 공포심이 있다.
은은하게 저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이로 크게 울려오는 저 무시무시한 사운드!
‘약밥~이나 찹~쌀 떠~억!‘
오늘도 무사히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가장의 애로사항을 아는지 모르는지 분위기를 바꾸는 건, 대부분 천방지축 용기있는 집안의 막내들이다.
“아부지, 나 찰싹떡 하나만!”
지금 돈으로 치면 불과 이삼천원이면 전 가족에게 충분했을 것이다.
산업화 이전, 적은 수입을 면도칼로 쪼개듯 세밀하게 쪼개어 외줄타기하는 서커스 단원처럼 재주부리지 않고서는 살 수 없던 그때로서 결코 만만한 도전이 아니다.
“오늘은 안 되고, 내일 사주마.”
“에이, 어제도 그렇게 말씀 하셨잖아요.”
사실 어제도 그렇게 말을 한 게 아니라 며칠 전부터 똑같은 말의 재방송인 것이다.
잘못하다간 언성이 높아지다가 막내녀석은 찹쌀떡 대신 꿀밤을 얻어먹고, 엄마는 막내 편을 들다가 가족 전체의 대전으로 번지고.......!
밤이 깊어 채 마르지도 않은 눈물자국을 한 막내놈이 ‘쌕쌕’ 잠이 들어 이따금씩 잠결에도 훌쩍거리는 걸 보고, 우리의 힘없는 가장은 밖에 나가 담배한대 빼어 물고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 바라보며 소리 없이 장작개비같이 마른 가슴을 쥐어뜯는다.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똑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이땅에 이와 비슷한 환경에 처한 가장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르다면 그때는 보통의 서민들이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고, 지금은 그 숫자가 현저히 적을 것이지만!
위의 이야기는 도시에서의 이야기이고 시골에서의 경우는 또 다르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촌에서 살아가기는 더 힘들고 수입은 적다.
한적하고 평화스러워 보이는 농촌 풍경은 어디까지나 그렇게 보이는 풍경뿐이며, 하는 일이 무척 힘이 들고 지루한 일의 반복이다.
흔히 들 할 일 없으면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지!’하는 말을 하는데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도시의 노동자 보다 훨씬 노동 시간도 길고 따로 휴일도 없으며 강도는 높고, 여러 종류의 일에 숙련되지 않고서는 배겨내기 힘들다.
논농사, 밭농사, 각종 곡식마다 가꾸는 방법도 다르고 비료 주는 법, 씨 뿌리는 법, 농작물의 종류에 따른 병충해의 구별과 방제법, 농기구 다루기, 경운기, 트랙터 등 기계의 운전에서 수리까지, 날씨에 따른 대처, 간단한 집수리에서부터 초상 났을 때 산소일 거드는 것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많고 하는 일이 모두 다 다르다.
물과 농약을 섞는 비율, 흙과 거름을 섞는 비율이라던가 모든 일의 적당한 시기 등 기억해야 할 일도 많다.
심지어 올해에는 무슨 채소를 심어야 수입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도 주식투자 못지않게 잘해야지 애써 농사지어서 밭에다 그대로 썩히든지 갈아엎어야 되는 경우도 생긴다.
머리도 좋지 않고서는 매번 농사에 실패다.
정말로 체질에 맞지 않고서는 어지간한 인내심이 없이 살아가기 힘들다.
어쩌다가 대학 졸업하여 잘 나가는 회사에 취직하여 돈 잘 벌고 있다가 느닷없이 집어치우고 시골에 내려와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극히 드문 일이고 그런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던 잘 할 수 있는 천재적인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다만 농사를 짓는 다는 것이 먹을 것을 생산하는 산업이므로 궁핍한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도시의 서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먹을 것에 대한 곤란의 정도는 가볍다.
나의 아버지는 마음 여린 우리 어머니를 부인으로 두어서 절대적인 권위가 있어 우리 집안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가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일제 시대 두 살의 어린 나이에 당신의 아버지를 잃어 얼굴조차 기억 못하신다.
홀어머니 밑에서 위로 형님 두분과 함께 무진 고생을 하시다가 빈손으로 만주에 건너가 때로는 생명에 위협도 받으시며 열심히 일한 덕분에 넉넉한 살림을 꾸릴 수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위의 형님들 덕으로 아버지는 갓 스물을 넘겼다.
해방이 되어 또 모든 걸 포기하고 만주 땅을 찾을 때처럼 모든 가족이 맨손으로 귀향을 하였다.
맨몸으로 결혼을 하시고 우리 칠남매를 키우셨으니 대단하신 분이다.
우리가 겪었다면 영화로 찍어도 될 만한 일들을 우리들의 아버지들은 누구나 겪는 보통일로 알고 겪었다.
나는 정말 우리 아버지와 친하지도 않고 하시는 일이 모두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존경심 하나만은 누구 못지않다.
밖으로는 부드럽고 안으로는 엄격하신 것이 그 첫째이고, 국민학교 일년의 학력으로도 간단한 일본어, 중국어 회화능력에 늘 독서에 힘쓰시고, 별 내용 없이 두세줄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일기를 꾸준히 쓰시는 것하며, 동네사람들로부터 받는 두터운 신망, 놀라운 손재주 등등
난 어렸을 때 제일 하기 싫은 일 중 하나가 집 짓는 일을 돕는 일이었다. 건축 일을 따로 배우신 적도 없지만 집을 여러 차례 짓고 고치고 하셨다.
병객으로 체중 50kg 이하의 허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아버지는 몇 년 전에는 76의 연세로 집의 담장과 축대 쌓는 일을 시멘트와 블록을 사다가 남의 도움 전혀 없이 혼자서 손수 하셨다.
황해 명기 황진이는 지루하게 길기만 한 동짓달의 밤을 싹둑 잘라 두었다가 사랑하는 님이 돌아오는 봄날 짧은 밤에 길게 이어 함께 오래도록 같이 지내고 싶다고 멋진 글을 남겼는데 우리 아버지는 기나긴 동짓달의 밤에 밤참을 찾으셨다.
의례히 초저녁에는 동네 사랑방으로 마실을(*마실=어원은 ‘마을’이고 우리지역에서 이웃집에 놀러가는 것을 말함) 가셨다가 밤 늦게 돌아오셔서는 밤참을 내놓으라고 하신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어머니는 싫다소리 한번이 없으셨다.
(우리 마누라도 본받아야 할텐데!)
그냥 밥을 차려 먹는 경우는 없고, 찬밥을 비벼 오던지 남은 밥이 없으면 국수를 삶아서 김치를 가늘게 썬 것에 양념을 하여 비빔국수를 해서 내오신다.
초겨울에는 농사일 끝난 후 집집마다 돌려가면서 초가지붕을 해 일고 나면 ‘갈떡’이라해서 시루떡을 해 먹는데 근처 이웃집에 모두 돌린다.
돌리는 심부름은 거의 아이들의 몫으로 조명이라고는 방안에 켜둔 석유 등잔불밖에 없었으므로 새카만 밤이 무서워서 꼭 2-3명이 함께 간다.
이렇게 해서 들어온 떡이 있으면 어머니는 그날 하루는 따로 밤참 준비가 필요없다.
물론 얼른 먹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달래야 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때로는 날 고구마를 깎은 것이 밤참이 되기도 하고, 팔뚝만한 동치미를 얼어붙은 항아리에서 꺼내다가 부엌칼로 길게 쪼개어 놓기도 한다.
총각김치 재료로 이용되는 알타리무를 오래 저장해두면 약간 시들시들해 진다.
이것을 밖에 마루에 잠깐 내놓았다가 살짝 얼려서 먹기도 하는데 한 겨울일수록 단맛이 강하다.
이밖에도 드물기는 하지만 살짝 언 홍시, 돼지감자, 항아리에 마구 따다 재워두었던 고욤, 조선배추밑동, 식혜, 수정과 등등이 있다.
중학교 때 이후부터는 라면이 생산되어서 우리 아버지의 밤참은 라면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때쯤은 여권이 신장되어선지 아버지가 직접 연탄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라면을 끓여 잡수시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지금은 기름진 음식에 충분한 먹거리, 간식으로 인하여 밤참이라고 따로 챙겨 먹어야할 필요성이 없고, 집에 늘상 충분히 확보되어있는 과일이나 과자 등을 각자 가져다 먹던지 가까운 구멍가게(이말도 사라진 말이다. 그런 말을 잘못 사용하다간 가게주인에게 얻어맞는다. ‘미니슈퍼’나 ‘미니마트’라고 해야지!)에 가서 사먹으면 될 일이다.
초등학생이라도 제가 먹을 간식 값 정도는 항상 가지고 있다.
거기다가 살에 대한 공포심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살 찔까봐 먹을 것을 가급적 기피하는 세상이니 어머니들이 밤참 때문에 고생하는 일은 적을 것이다.
과거 우리의 어머니들은 한겨울 영하의 밤에도 난방도 안 되는 밖에 나가서 떨면서 밤참을 마련하는 것도 여간한 큰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밤참을 먹는 가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피자나 족발 통닭 같은 것으로.......!
그러나 맛이 든 김장김치를 총총 썰어 양념을 한 비빔국수, 살짝 얼린 알타리무, 돼지감자!
하늘과 땅 차이다. 전혀 비교가 안된다.
어느 쪽으로든지.......!
동지섯달 긴긴밤에 대가족 모두가 해지기전에 보리밥 저녁식사를 하고 노닥거리다 잠들때쯤이면 모두가 배가 출출하고 때를 놓칠새라 찹살떡 장사는 더욱더 목청을 높였지요. 요즘엔 저녁식사를 온가족이 다함께 할 기회가 많지않고 모두 바빠서 학원갔다 오는 녀석이 11시고 거래처와 식사하면 새벽에 귀가하는터라 ...
저도 어릴적 ‘약밥~이나 찹~쌀 떠~억!’ 은 아니지만 "메밀묵~찹~쌀 떠~억!"은 참 많이 들어 보았어요.한번도 사먹으러 나가보지는 않았지만 밤사이 그 소리는 아직도 정겹게만 느껴집니다.낙산사가 불타기 바로전에 다녀 왔는데 그 근처에서 감잎인가요?그 잎에 올려진 찹쌀덕을 맛 보았어요.그 외침을 생각하며...
첫댓글 아~~~ 대나무 통 덜그락 덜그락 돌리며 막대지개 앞뒤로 걸려있는 사각통 속에 들어있던 못찌떡 먹고잡다... 꿀꺽!!! 요즈음 사람들 알까 그맛과 구수한 소리를 ...
동지섯달 긴긴밤에 대가족 모두가 해지기전에 보리밥 저녁식사를 하고 노닥거리다 잠들때쯤이면 모두가 배가 출출하고 때를 놓칠새라 찹살떡 장사는 더욱더 목청을 높였지요. 요즘엔 저녁식사를 온가족이 다함께 할 기회가 많지않고 모두 바빠서 학원갔다 오는 녀석이 11시고 거래처와 식사하면 새벽에 귀가하는터라 ...
오늘한끼먹고..이거 읽다가 배고파 죽는줄알았습니다.^^;;
저도 어릴적 ‘약밥~이나 찹~쌀 떠~억!’ 은 아니지만 "메밀묵~찹~쌀 떠~억!"은 참 많이 들어 보았어요.한번도 사먹으러 나가보지는 않았지만 밤사이 그 소리는 아직도 정겹게만 느껴집니다.낙산사가 불타기 바로전에 다녀 왔는데 그 근처에서 감잎인가요?그 잎에 올려진 찹쌀덕을 맛 보았어요.그 외침을 생각하며...
언제, 산행 후 보리밥 한 술 뜹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