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김홍도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는 김홍도만의 작품이 아니다?
- <송하맹호도>의 그림 속 소나무는 다른 사람이 그렸다 ?
정면을 응시하는 호랑이의 위엄이 느껴지는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화면 위쪽 굵은 소나무에서 뻗은 가느다란 가지와 호랑이의 모습은 완벽한 구성 을 이룬다. 이 둘의 절묘한 조화는 한 사람의 작품으로 밖에 볼 수 없는데... 그런데 <송하맹호도>의 그림 속 소나무는 다른 사람이 그렸다? 그림 오른쪽 위에 쓰인 ‘표암화송(豹菴畵松)’ 은‘강세황이 소나무를 그렸다’ 라고 해석이 된다. 단원의 재능을 무척 아끼고 후원했던 표암 강세황. 그는 나이와 신분을 무시하여 단원과 친구가 되었고, 이런 점에서 <송하맹호도>는 강세황과 단원의 합작품 으로 보인다. 그러나 글씨를 자세히 보면‘화송(畵松)’은 젊고 씩씩한 필치인데, ‘표암(豹菴)’은 엉성한 졸필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소나무를 그린 이는 누구인가. 김홍도의 동료였던 고송 이인문의 작품 <벽라송월도>에 단서가 있다! 그림 속 잔가지의 형태가 <송하맹호도>와 완연히 닮아있다. 고송이란 호가 말해주듯 이인문은 당시 소나무 그림의 대가였다. 이인문은 맹호의 위엄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여, 잔가지와 호랑이 다리 주변의 여백의 미를 잘 살렸다. 실제로 ‘표암화송’이란 글씨는 뒷사람이 표구하는 과정에서 단원과 표암의 합작품으로 조작한 것이라는데... 단군 신화 이래 겨레의 상징이 된 호랑이를 김홍도 특유의 묘법으로 사실적으로 그린 <송하맹호도>! 그림 속 숨은 탄생 비화를 밝힌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작품
김홍도는 1745년에 태어나서 1806년 이후 어느 해엔가 죽었다. 최근의 학자들은 1806년 경에 죽은 것으로 추측한다. 김홍도는 지금 그의 그림으로 전하는 그림만 500점에 육박하고 그 중에도 다수의 진작과 걸작이 있다. 김홍도는 한국 회화사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양과 질 높은 그림들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김홍도의 부인이 누구이고 김홍도가 말년을 어떻게 보내다가 언제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다만 정조가 돌아간 이후, 불행하고 쓸쓸하게 말년을 보내다가 운명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게 전부이다. 우리는 김홍도의 얼굴조차 알지 못한다. 무수히 많은 서양화가들이 자신의 초상화를 남기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사대부가 아닌이상 스스로의 초상을 남기는 일이 없었으므로 김홍도는 무수히 많은 그림을 그려내면서도 자신의 초상화는 그리지 않았다.
현재 김홍도에 관한 기록의 시작은 1765년 21살 때이다. 궁중의 의궤병풍인 경현당수작도를 이때 주관하여 그렸는데, 김홍도가 이미 21살 때에 도화서에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지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이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이므로 이미 21세 이전부터 정조와의 인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작품은 망실되었다.
김홍도는 이후 1773년 29살 때 영조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을 그린다. 주관화사는 변상벽, 동참화사는 김홍도, 수종화사는 신한평, 김후신, 김관신, 진응복 등이었다. 변상벽, 신한평 등과의 나이차이를 생각했을 때에 김홍도가 얼마나 이른 시절부터 이름이 났고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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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detail, 견본수묵담채, 90.4 x 43.8cm, 호암미술관 소장. 이 작품의 생명은 바로 ‘극(極) 사실성’이다. 한번 호랑이를 확대해 보라. 바늘처럼 꼿꼿하고 섬세한 수만 개의 털이 일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냥 두터운 붓으로 색칠한 게 아니다. ‘붓의 터치’ , 터럭 한 올 한 올을 일일이 가는 붓으로 직접 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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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의 ‘과로도기도’, 견본담채, 134.6 x 56.6cm, 간송미술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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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의 ‘송하취생도’, 지본담채, 109 x 55cm, 서울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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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호랑이가 귀엽네
동영상을 봐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