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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알바트로스
제55차 정기합평회
(2023. 9. 21.)
순서 | 제목 | 작가 | 합평 담당 |
1 | 고갱을 만나다 | 김아가다 | 엄옥례 |
2 | 발들의 전쟁 | 김 경 | 오수미 |
3 | 홈캉스 | 김정실 | 옥경자 |
4 | 백일해 접종을 해야 하나 | 김경애 | 이미경 |
5 | 미끼 | 이시언 | 이미란 |
6 | 새들의 사냥법 | 엄옥례 | 이숙희 |
7 | 유영하다 | 서소희 | 이시언 |
8 | 뻥 | 김영희 | 채정순 |
고갱을 만나다 / 김아가다
1. 천국행 연수원에 들어왔다. 자유의지로 오지는 않았지만, 입소한 순간부터 연수원의 일정에 맞추면서 몸과 마음을 치료 하고 있다. 나의 화두는 복도에서 마주친 고갱의 그림에서부터 시작된다.
2. 우리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 후기 인상파 고갱이 딸을 잃은 슬픔을 고뇌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다. 타이티 섬의 화려한 원색은 순수함으로 다가와 그림 감상에 맛을 더해준다. 그는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삶과 종말까지, 인생여정을 화폭에 담았다. 예술이 철학이며 철학이 곧 예술이라 하지 않았던가.
3. 나는 어디서 왔을까?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전환하는 빅뱅으로 인한 먼지였을까? 시작이나 끝도 없는 우주 어느 공간에 머무르다가 남자와 여자의 종족 번식이라는 카테고리를 통해서 태어난 존재인지 모른다. 원초적 본능이 종족 번식을 위한 근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나의 존재 여부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수억의 정자 중 하나가 난자를 만나 난핵을 이루어 세상에 태어난 억수로 재수 좋은 인간이다. 정과 반이 만나 합을 이룬다는 변증법의 존재설도 부인할 수가 없다. 고집 센 부계 혈통과 여려터진 모계 혈통의 합으로 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4. 나는 누구인가? 두 유전자의 영향으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세상사에 별 충돌 없이 살았지만, 맺고 끊음이 확실치 못한 것은 단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세상을 잘 살아왔는가도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차안此岸을 건너 깨달음의 세계 피안彼岸에 도달하는 것을 도피안到彼岸이라고 한다. 얼마나 도를 닦고 덕을 쌓아야 깨달음의 경지까지 갈 수 있겠는가?
5. 내가 머문 연수원은 정형외과 재활병동이다. 아픈 몸을 고통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피안의 세계에 입문하는 도를 닦기 위해서 내가 붙인 이름이다. 엔데믹은 빛 좋은 개살구다. 면회 사절이라는 안내표시가 아직 유효하니 창살 없는 감옥이다. 룸메이트가 다섯 명이다. 백인백색 살아온 결이 다른 사람끼리 한 방에서 숨을 쉰다. 코를 골면서 숨소리가 거친 사람. 서러움을 잘 타 늘 우는 노인, 뭐가 못마땅한지 말끝마다 불평 가득한 이, 이를 두고 뒷담화에 열을 올리는 이도 있다. 합숙하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늘 두통을 달고 살던 나는 그들 속에서 어떤 사람으로 비칠까. 잘해야 본전이지만, 무리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리라.
6. 나의 달란트가 빛을 발하는 시점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윤할매 따님이 먹거리를 불쑥 들이밀고 면회 사절을 핑계 삼아 배시시 웃으면서 돌아갔다. 자주 찾아오지 않는 딸을 효녀라고 입만 달싹하면 칭찬하더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내가 어떻게 자식을 키웠는데 이런 대접을 받느냐고 노인의 서러움이 폭발했다. 등을 다독이며 안아주었더니 꺼이꺼이 사설을 섞어가며 울음을 쏟아냈다.
“청춘에 혼자되어 저것들 앞날 망칠까 봐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살았는데 어미 알기를 헌신짝같이 여기니 억울하다, 억울해. 내 청춘은 어디갔노~” 동병상련일까. 자식 자랑만 늘어놓던 노인들이 내 할 말 대신 해주는 남의 사설에 여기저기서 훌쩍댄다.
7.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좀 더 있다가는 내 설움, 네 설움에 눈물을 바가지로 쏟을 판이다. 손뼉을 치게 하고 “나는 행복합니다.” 노래를 한가락 불렀더니 나의 익살에 엄지를 추켜세우며 틀니를 들썩이면서 웃는다. 살아있다는 현실에 감사하면서 앞으로 살아갈 날을 잘 준비하자고 했더니 노인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8. 내가 말하는 살아갈 날이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아니겠는가. 갈 곳은 한군데밖에 없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복락의 세계에 들기 위해서는 비움이라고. 내 자식이라는 생각도 버리라고. 오직 나만 있다고. 내 삶은 내가 마무리할 일이라고. 인간의 삶은 두 가지라 했다. 세상의 삶과 죽음의 삶. 세상에서 잘 살아야 죽음의 삶을 잘살게 된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이 다르지 않듯이, 세상의 삶을 잘 살기 위함은 사랑에서 시작되지 않던가.
9. 고갱의 그림을 짚어가며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설명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해서 생명이 탄생하고, 탄생한 아기가 성인이 되어서 또 사랑을 하고. 인생 말년이면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고리가 결국은 죽음이며, 우리의 삶은 하늘을 향해 있다는 내 생각을 말했다. 삶의 끝에서 혼신을 다한 그의 작품을 진정성 없는 겉핥기로 감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의 어설픈 해설이 끝나자 노인들이 손뼉을 친다.
10. 육신의 아픔과 영혼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천국행 연수원에서 고독한 남자 고갱을 만난 날이다.
발들의 전쟁 1 / 김경
1. 44개의 발이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빈다. 현란한 기술이 난무하는 잔디 위의 전쟁, 거침없는 공격과 빈틈없는 방어는 그야말로 한 치의 실수도 불허한다. 유럽 축구는 거칠기로 유명한데 웬만한 반칙으로는 심판이 휘슬을 불지 않는다.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상대의 발을 밟고 몸을 밀어제친다. 자칫 큰 부상으로 이어질 뻔한 장면에서는 저들의 축구는 왜 넘치도록 관대한가 혼자 개탄한다. 실제로 심한 부상으로 경기 중에 선수가 사망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2. 오직 발 하나로 공을 부리는 경기는 축구가 유일하다.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가 손을 쓰는 데 반해 축구만이 유일하게 발을 사용한다. 그래서 더욱 시원하고 통쾌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손보다는 발에 힘을 실을 때 분출되는 에너지는 남다르다. 온몸의 기가 오직 발에 집중되고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정확도를 따라가다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선수들의 허를 찌르는 개인기와 괴물 같은 피지컬, 공보다 빠른 달리기 실력에 빠져드는 것이 축구의 묘미다.
3.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에서 벌어지는 프리미어리그 시즌이 시작되면 새벽 늦게까지 텔레비전 앞에 붙잡히기 일쑤다. 잠시도 제자리에서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그라운드는 몰입감 최고를 유발한다. 가히 전투적이고 격정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릴과 박진감 면에서 축구를 따라갈 스포츠가 없다.
4. 양 팀 감독의 기 싸움, 골을 넣은 선수의 독특한 세리머니 또 열광을 넘어 광기로 치닫는 관중들의 반응은 나 자신 그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간혹 골키퍼의 어이없는 실축이나 골대의 구석진 틈을 파고드는 기묘한 골 장면은 더 할 수 없는 탄식과 환희를 부른다. 그야말로 심장마저 쫄깃할 지경이다. .
5. 내가 이처럼 축구를 사랑하게 된 연유는 그 옛날 우리 오빠를 비롯한 청년들이 월드컵에 빠져들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당에 덕석을 깔아놓고 동네에 딱 한 대밖에 없는 흑백텔레비전 앞에서 젊은 기운을 마구 쏟아붓는 모습도 신기했거니와, 흡사 야생마 같은 선수들의 질주가 내 심장을 마구 흔들어댔다. 깜깜한 밤, 오빠들 등 너머로 훔쳐보던 그때의 장면들은 그 불씨가 꺼지는 법이 없었다. 장소 불문 축구 하는 장면이 목격되면 습관처럼 넋을 놓았다.
6. 큰애가 초등학생일 때, 학모들을 설득해서 방과 후 축구반을 만든 것 또한 내 안에 잠재된 축구에 대한 갈망의 연장선이었을 것이다. 학교 측과 싸워 운동장에 당당히 골대를 세운 일화는 엄마들 사이에서 오래 회자 되었다. 그때의 동아리가 20년 넘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나의 축구부심에 기름을 붓는 일과 다르지 않다.
7. 경기를 보다 보면 나도 막 저 판에 뛰어들고 싶을 때가 왕왕 있다. 발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상상한다. 아무래도 내가 전생에 축구선수였거나 감독이었을 거라고. 그도 아니면 선수의 부모였기라도 했을 거라고 축구와의 운명적 관계를 스스로 정의하는 것이다.
8. 골을 향한 질주,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각축전, 먹이를 차지하기 위한 야수들의 한판 전쟁은 카타르시스의 최고치를 선물한다. 번개처럼 날아오르는 동물적 본능, 일촉즉발의 순간, 양극과 음극을 숨겨놓은 듯 같은 편끼리의 정확한 패스, 공을 따라 쓰나미처럼 움직이는 발, 발, 발들...
9. 전 세계의 실력자들이 벌이는 경기 앞에서 오늘도 나는 제3의 선수가 되어 함께 달린다. 어느 순간 골이 터지고 내 안에서는 야생의 포효가 솟구친다. 하지만 목울대까지 올라온 그것을 참으려 극한의 자제력을 발휘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야심한 시각, 기쁨을 참는 것 또한 익숙한 고통이다.
10. 한 골씩 주고받은 무승부의 초접전이 추가시간에까지 이어지면 긴장감은 최고조가 된다. 죽기 살기로 뛰는 선수들과 일제히 일어서서 응원하는 관중들 사이에 백만 볼트의 기가 넘나든다. 그 와중에 억울한 판정에 불만을 품은 감독이 격렬히 항의하다 경기장 밖으로 퇴장당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위기는 다시 급물살을 탄다.
11. 한 골이 간절한 시간, 마음은 바쁘고 발은 더디다. 정신력만이 살길이다. 패스의 정확도가 떨어지고, 넘어지고 부딪히는 일이 다반사다. 마지막 0.1초까지 소진한 후 심판의 휘슬이 울리면 승자와 패자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갈린다. 90분간의 사투 끝에 팀을 구한 선수가 오늘의 영웅이다. 잔디 위의 제왕이 두 손 번쩍 들어 그라운드를 걸어 나온다. 그 앞을 중계카메라가 마중한다. 땀과 흙과 잔디로 범벅된 승리의 두 발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다.
홈- 강스 / 김정실
1.여름이다. 매주 듣는 수요일 강의가 한 달 휴강에 들어갔다. 아직도 유아적인 마음이 남아 있는가 보다. 방학을 맞이한 기분이 들어 무언지 모르게 마음이 한껏 설렌다.
2.어린 시절, 방학 때면 고종사촌과는 정릉골짜기 바람맞이를 즐겼고, 뚝섬에서는 고무타이어 튜브를 갖고 허우적거렸다. 이종사촌과는 외할아버지의 겨울 인왕산 호랑이 이야기를 즐겨들었다. 개학을 코앞에 두고는 끙끙거리면서 숙제를 하던 생각을 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3.고등학교시절에는 영수학원 다니는 것이 제일 큰 일 이었지만, 학원갈 적에 교복이 아닌 나들이옷을 입고 갈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대학 2학년 때는 울릉도로 여름봉사 활동을 간다는 것에 마음은 한 것 설렜다. 울릉도도 처음 가는 곳이지만 배를 타고 간다는 낭만에 흠뻑 취했다. 하지만 가고 올 적에 배 멀리 한 것은 어떻게 다 말 할 수 있을까.
4.봉사활동 20일 동안 회원들 2명이 짝이 되어 식사 당번이 정해졌다. 정숙 이와 내가 밥하는 날이다. 반찬은 우리들이 갖고 간 것도 있지만 몇 가지는 우리가 해야만 했다. 텃밭에 널려 있는 것이 가지와 오이, 호박과 감자였다. 무치고 전을 붙이고 여러 종류의 해물을 넣은 해물찌개 20인 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 중 가장 힘든 것은 쌀에 썩혀 있는 돌을 걸려내기 위해 조리질을 하는 것이다. 20명분의 쌀을 조리질 하는 것은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손목과 어깨가 아팠다.
5.점심을 준비하면서 둘이서 꾀를 냈다. 조리질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돌은 무거우니까 밑으로 깔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랐다. 몇 숟가락 밥 먹던 회원들은 여기서 와작 저기서 와작 대었다.
6.3학년 女 부회장이 오늘 당번이 누구냐고 물었다. 우리 둘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손만 들었다. 어이가 없는지 말을 하지 않더니 저녁부터 식사 당번에서 제외되고 매일 감자 껍질 벗기는 일이 돌아왔다. 이 모든 일 들이 서툴고 힘들었지만 밤바다에 쏟아지는 별들이 낭만과 꿈을 실어 주었다. 이렇게 방학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했다.
7.교사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방학 때는 언제나 연수가 발목을 잡았다. 이런 저런 연수로 방학은 후딱 지나갔다. 그래도 그 안에서 배움과 열정의 꿈이 일었다. 더욱이 88올림픽이 열릴 때까지 영어교사는 여름방학 120시간 겨울방학 120시간 회화강습을 받아야했다. 이렇게 힘든 연수를 받으면서도 쏘다닐 곳은 모두 쏘다니면서 방학의 낭만을 즐겼다.
8.이제 어디를 간다는 것이 도리어 힘이 들 때가 있다. 아이들과 함께라도 서로의 취향이 다르기에 힘들다. 아이들이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들에게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9.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 취향대로 방학이나 휴가를 즐기고 있다. 올 사람은 오고 갈 사람은 간다. 코로나 이후로는 아주 정확해졌다. 이런 방식이 아이들 말대로 하면 현대를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한다. 여유와 낭만을 느끼는 것도 세대 차이대로 다르다.
10.이번에는 내 나름대로 홈-강스를 즐기고 있다. 그 옛날처럼 대청마루에 대발을 드리우고 부채로 바람을 대신하지는 못하지만, 거실 창에 발을 드리어 바람을 받는다. 거실 바닥에는 처박아 두었던 돗자리를 펴서 시원함을 더한다. 수박에 얼음조각도 동동 띄어 옛 일들을 수繡 놓아본다.
11.스스로 시원함을 더하기 위해 여름노래 동요와 가곡 등을 열심히 흥얼거린다.〈바다로 가자를 소리 내어 불러본다.「물결 춤춘다. 바다위에서, 백구 춤춘다. 바다위에서」대나무 발은 통한 하늘 바다는 그지없이 높고 푸르다. 밀물과 썰 물 대신 구름이 여러 모양으로 그림을 그린다. 어떤 흰 구름은 어린 천사의 날개를 펴서 평화로움을 주고 있는데, 한쪽의 구름은 삼지창을 들어 올린 사탄 모양의 먹구름이 되어 비를 몰고 올 모양새다.
12.지금 나는 먼 시간 속에 빠져들어 누구의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여름 열기를 즐기고 있다. 바캉스가 아니 홈-강스를 즐기면서 더 머리 날기 위한 꿈으로 내일을 위한 나를 하루하루 가다듬고 있다. 드리운 대발이 일렁이며 바람을 던진다.
백일해 예방접종을 해야 하나 / 김경애
1.요즘 손자를 만나려면 백일해 예방 접종을 해야 한다고 한다. 한 달 동안 기침과 전쟁을 하고 나니 나에게도 백일해균이 잠재하고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든다. 지금이라도 백일해 예방접종을 해야 하나?
2.더위가 기성을 부리는 팔월 첫 일요일 밤. 몸살기가 있어 감기약을 먹고 누웠다. 약을 먹어도 차도 없이 힘들게 보냈다.
3.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코로나 검사를 했다. 증상은 코로나였지만 아니었다. 약을 먹었더니 몸살기는 줄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기침이 더 심해졌다.
4.다음날 다른 병원을 갔다. 또 다시 코로나 검사를 했다. 양성반응이 나왔다. 이번에는 기침약으로 파란색 콜대원이 처방되었다. 어제는 빨간, 오늘은 파란 기침약 무엇이 다르냐고 물었더니 파란 약의 성분이 더 좋다고 했다. 그런데 파란 약을 먹었더니 어지러워 움직일 수가 없었다.
5.그 뒷날 담당 의사에게 갔다. 이번 코로나는 금방 표시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또 검사를 했다. 연일 찔러대는 코는 수난을 겪었다. 연속으로 나타나는 부작용을 감안하여 약이 처방되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기침약이 처방되었다. 일주일 넘게 약을 먹었지만 기침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밤이면 더 심해 이웃이 내 기침소리에 잠을 설칠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6.또 한의원에 가서 진찰을 하니 면역이 떨어지고 신장기능이 약해졌다고 했다. 한약을 짓고 침도 맞았다. 한방 기침약을 먹었더니 횟수는 줄었지만 완전히 멎지 않았다. 기침 할 때는 창자가 뒤틀리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으며, 목에서는 쇠 소리가 났다. 기침 날 때마다 가래가 뭉티기로 올라 왔다.
7.답답한 목 상태를 알고 싶어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다. 내시경을 해야 한다면서 종합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토요일이라 다시 병원을 갈 수 없어 양약, 한약을 모두 끊고 수입산 감기약을 좀 강하게 먹었다. 일시적인 효과는 있었다.
8.휴일 동안 기침 횟수는 줄었지만 목에 가래는 그대로 붙어있었다. 따뜻한 물, 도라지청, 유자차, 꼬랑한 냄새가 나는 은행엑기스 까지 먹었지만 기침은 멎지 않았다. 선풍기 바람도, 들이마시는 숨에도 기침은 속을 뒤집었다.
9.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변이 잘 나오지 않고 아랫배가 꼭 찌르는 통증이 왔다. 화장실에 갔더니 혈뇨가 보였다. 남편이 놀랄까봐 아침을 먹고 비뇨기과에 전화를 했다. 내가 아는 의사는 휴가를 가고 없었다. 의사가 올 때까지 하루를 기다려야 했다. 조바심이 났다. 화장실에 갔더니 갑자기 핏덩어리가 쏟아져 나왔지만 통증은 없었다.
10.서둘러 비뇨기과를 갔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소변 검사를 했더니 검붉었다. 엑스레이, 초음파, 피검사를 하고 한 번 더 소변검사를 했더니 소변이 맑았다. 의사는 통증 없이 자동으로 염증이 터졌다며 별 이상 없다고 했다. 지금 나이에는 가끔 발생 할 수 있다고 했다.
11.그 와중에도 기침이 계속 나서 호흡기 내과를 갔다. 이곳에서도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그 병원에는 몇 년 전 급성 천식으로 입원한 기록이 있다. 특별한 이상은 없지만 전에 먹었던 약 닷새 분을 처방 해주었다. 신기하게도 한 번 먹고 기침은 멎었지만 완치를 위해 오일 동안 더 복용을 했다.
12.한 달 동안 기침과 전쟁은 끝났지만 그 간의 일로 나를 돌아본다. 연노하다, 어르신이라서, 등 노인성 질환이라는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건강하고, 젊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나이 앞에 장사 없음을 인지한다. 그래도 백일해 예방접종은 해야 되는지 물어 보아야겠다.
미끼 / 이시언
1. 지렁이를 본떠 만든 미끼다. 꼬릿꼬릿한 냄새까지 첨가하여 진짜처럼 위장한 미끼를 보자 가슴이 철렁한다. 물고기를 낚으려고 머리를 짜내어 만든 미끼에 속지 않을 물고기가 있을까.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를 덥석 물었을 때, 겪게 될 물고기의 심경이 내가 얼마 전 겪었던 참담함과 겹쳐졌다.
2. 낯선 문자가 왔었다. 처음에는 보이스 피싱을 의심하여 삭제했다. 그러나 문자는 멈추지 않았다. 읽지도 않고 바로 삭제했던 문자를 읽기 시작한 것은 다섯 번째 문자에서 였다. 주식 종목 두 개를 추천하면서 내일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했다.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여 다음날 컴퓨터에서 추천 종목을 확인했다. 붉은 날개를 단 주가는 춤을 추었다. 거래까지 활발하여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점점 숨이 가쁘고 흥분 되었다.
3. 그날 저녁, 오늘 보셨지요 하는 문자와 함께 새로운 종목 두 개가 또 날아들었다. 다음날에도 전광판에 붉은 날개 춤이 널을 뛰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술 같은 판은 계속 펼쳐졌다. 계산기를 두드렸다. 만약 천만 원을 투자했다면 얼마를 벌었을까. 복리이자까지 산출 했다. 일주일만 투자해도 원금의 두 배가 되었다.
4. 어설픈 손놀림으로 미끼를 저수지로 던진다. 근심을 잊고자 잡히면 잡히는 대로 안잡히면 안잡히는 대로, 물욕도 경쟁도 내려놓으려 했는데 대어를 낚고픈 욕심이 꿈틀거린다.
5. 문자로 날아든 추천종목은 대부분 하루 이틀 불춤을 추고 가라앉았다. 그게 매력이었다. 오랫동안 돈이 묶이면 필요할 때 사용할 수가 없는데 아침에 매수한 종목을 오후에 되팔아 몇 년 치 은행이자를 챙기는 마술에 자꾸 마음이 갔다.
6. 찌만 바라보고 앉은 지 네 시간이 지나도 입질이 없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 찌가 가볍게 흔들렸지만 물고기가 당기는 것은 아니다. 불과 몇 시간 전, 풍어를 기대하며 매운탕 거리를 준비하던 내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7. 이율이 0.1%만 높아도 헐레벌떡 은행을 갈아타던 내가 미련스럽게 느껴졌다. 만기가 얼마 남지 않은 적금을 남편 몰래 깼다. 노후에 여행도 가고 맛난 것도 먹자며 오랫동안 적립해오던 돈이었다. 제법 묵직한 목돈을 손에 쥐었다.
8. 종아리에 쥐가 난다. 일어나 다리를 뻗어 몸을 푼다. 허리를 좌우로 돌리며 낚시꾼들의 면면을 훔쳐본다. 신선놀음이라는 낚시터에서 침묵도 신선이 되기 위한 수행 과정인지 조용하다. 설마 득도하여 신선이 되었나. 육신은 낚시터에 두고 정신은 물위를 나는 것처럼 평온해 보인다.
9. 현금 다발을 안고 문자를 보낸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리톤에 가까운 젊은 남자의 음성은 차분하고 친절했다. 먼저 입회비와 리딩비를 입금하면 즉시 종목을 추천해 주겠다는 말에 움찔했다. 예상은 했었지만 리딩비가 생각보다 비쌌다. 한발 물러나자 남자가 다잡듯이 말했다.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라며 이삼일이면 충분히 복구 된다고 꼬드겼다.
10. 자꾸 시계를 본다. 그때 헛것이 보이나 싶어 눈을 비빈다. 찌가 흔들린다. 바람의 장난이 아니다. 심장이 뛴다. 물욕에 눈이 먼 어떤 물고기가 가짜 미끼를 덥석 문 거다.
11. 계좌를 개설하고 전도유망한 종목을 추천받았다. 그런데 내가 사자마자 주식은 더 이상 춤추지 않았다. 날개를 접고 지상에 앉은 주식은 지하로 가라앉았다. 혀를 날름거리며 시퍼런 몸을 드러낸 주식이 악마처럼 보였다.
12.젊은 남자에게 전화를 했다. 멀리뛰기 위한 일시적 조정이라며 원금의 열배까지도 갈 수 있는 재료가 있다며 걱정은 붙들어 매라고 했다.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냐고 연거푸 묻는 내가 피곤했는지 남자의 친절했던 음성은 냉랭하게 식었다. 내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선 음성은 ‘백일’이라고 툭 던지고 성의 없이 전화를 끊었다. 불에 덴 듯 한 고통이 명치에서 올라와 정수리를 찔러댔다.
13. 줄을 당기자 미늘에 걸린 붕어가 올라온다. 아가미에서 붉은 피가 흐른다. 통에 들어간 붕어를 물끄러미 본다. 비명을 지르듯 몸부림치는 붕어의 검은 눈동자에 후회, 반성, 아픔, 통곡이 한꺼번에 스며든다. 아가미는 곧 질식할것처럼 헐떡거려 조금 전까지 물속을 유영하며 자유를 누리던 평온은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14. 매일 주가를 살피던 나는 화병으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백일 동안 느긋하게 기다릴 수가 없었다. 잠까지 설쳐 제정신이 아니었다. 주식을 잊으려고 청소기를 돌리고, 화장실 바닥을 솔로 빡빡 문지르고, 구석구석 걸레질을 하고, 열무김치를 담고, 북어를 찢어 무치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원금의 10% 이상 빠지는 날이 여러 날이었다. 악몽 같은 일주일이 지나, 한 달이 되자 차라리 심장이 멎었으면 싶었다. 원금의90%가 증발 되었다.
15. 내 판단을 흐리게 한 것은 물욕이었다. 열배 스무 배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젊은 남자에게 돌린 발신전화에서 받을 수 없다는 멘트를 연거푸 들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가짜 미끼를 문 내가 보였다. 문자로 보내온 종목들은 하나같이 시간외거래에서 상한가를 기록한 종목들이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벌겋게 달구어진 종목을 골라 추천을 한 것이다. 내게 문자를 보낸 시간도 한결같이 오후 6시 이후였다. 가짜 미끼를 덥석 문 내가 바보였다.
16. 헛된 욕망을 쫓다가 생의 끝자락에 내몰린 붕어는 저항할수 없는 끔직한 허무에 갇혔다. 돈 잃고 마음까지 피폐해져 하루 종일 방에서 우울한 시간을 보내던 내 모습이다. 문자 한통에 가짜미끼를 덥석 문 나를 원망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 울린다.
17. 통속의 붕어를 꺼내어 호수에 살며시 풀어 놓는다.
새들의 사냥법 / 엄옥례
1.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강둑을 걷는다. 잠수교를 건너서 물과 풀이 어우러진 습지를 지난다. 호젓해 보이는 습지는 새들의 먹이 사냥으로 첨벙거리고, 은빛 물방울이 튀어 오른다.
2.부리가 뭉툭한 오리, 목이 짧은 물닭, 작은 몸피의 물까마귀는 쉴 새 없이 자맥질을 하며 먹이를 찾는다. 그런가 하면 왜가리는 긴 다리로 서서 이들이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고 섰다. 고만고만한 물새 떼가 물질하는 통에 물고기가 놀라 도망가면 긴 모가지를 작살 발사하듯 뻗어서 뾰족한 부리로 먹이를 낚아챈다. 새들의 먹이질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인간들의 세상살이가 겹쳐진다.
3.내가 살고 있는 집 앞쪽이 재건축 허가가 났다. 헌 집들을 부수고 철거하느라 날마다 시끄럽고 먼지가 날렸다. 조용한 주택가이다 보니 건설 현장의 공해가 더 크게 느껴져 스트레스가 여간 아니었다. 이웃들과 뭉쳐 구청으로, 건설사로 찾아가 항의를 했다. 돌아오는 답은 제한 소음 수치를 넘지 않게, 먼지가 덜 나도록 주의하겠다는 것이었다.
4.삼복더위에도 소음과 먼지로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방에 누워있으면 굴착기가 땅을 파는 소리로 고막이 탕탕탕 울렸다. 아파트를 지으려면 한두 달 걸리는 것도 아니고 삼 년은 족히 걸린다는데, 그동안 땅 파고 건물 올리면서 동반되는 공해를 감당해야 한다니 고통이 몰려들었다.
5.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새벽부터 공사 현장 대문 앞에 자리를 깔았다. 이웃이 모두 모여서, 또는 팀을 짜서 시위를 벌였다. 며칠 대문이 막혀 공사가 어렵게 되자 건설사 담당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다음날 사무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6.참으로 이상한 일이 한 가지가 있었다. 부녀회장이 집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역도선수같은 몸집이지만 활동적이고,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라 앞장 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초기에 구청과 건설사 사무실에 찾아갈 때 몇 번 동행하더니 바쁘다며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장구르마를 끌고 시위 장소를 지나가면서도 흴끗 보고는 그냥 지나쳤다.
7.다음날, 이웃들과 건설사 사무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부녀회장도 보였다. 담당자가 요구사항을 물었다. 몰려간 사람들은 공해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니 공사를 당장 멈추라고 고함을 질렀다. 담당자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며 느물거렸다. 그렇다면 피해를 주는 만큼 보상을 하라고 몇몇이 목소리를 높였다.
8.담당자는 뻔한 수순을 기다렸다는 듯 회사가 정해놓은 보상금을 제시했다. 가당찮은 금액이었다. 승인하는 사람은 합의하러 오라는 말을 던졌다. 고급 아파트가 완공되면 주변의 집값이 올라간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담당자와 주민들 사이에 '밀당'이 오가는 그때도 우리의 부녀회장은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9.주민들의 생각이 엇갈렸다. 법적으로 끌고 가자, 시위를 더 하자, 큰 회사를 상대로 이길 수 없으니 그만하자는 것으로 분분했다. 시간 내기 어려운 사람들은 그만 하자에 표를 던지며 하나, 둘 보상금을 받으러 갔다. 꿋꿋이 뜻을 세운 사람들도 힘이 빠지자 결국 에어컨과 공기청정기를 살 돈을 받으러 갔다.
10.보상금 문제가 해결되고 얼마 후였다. 부녀회장이 건설사 로고가 새겨진 조끼를 입고 건설 현장 주변에서 지휘봉을 들고 차량 통제를 하고 있었다. 아하, 바로 그것이었구나! 건설사가 부녀회장을 움직이지 못하게 처방을 해 두었던 것이다. 그제야 연배가 비슷하여 평소에 부녀회장과 잘 어울리던 아주머니들도 뒷목만 잡고 있지 않았다. 건설사 사무실로 찾아가 자기들도 그 일을 시켜주면 잘할 수 있으니 몇 달씩 돌아가면서 하면 안 되느냐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허사였다.
11.부녀회장은 평소에 나를 동생, 동생하고 불렀다. 하루는 부르길래 가보니 큰 회사 직원 됐다고, 열 달 동안 일하게 됐다면서 월급 통장을 보여주었다. 그러더니 건설사 사무실에 청소하는 아줌마를 구하는데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고맙지만 나는 청소도 잘하지 못하고 하는 일이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권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12.두 해 전, 부동산값이 하늘을 찌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곳도 재개발 추진 중이어서 집 한 채를 팔면 다른 동네에서 두 채를 살 수 있었다. 부녀회장은 살던 집을 팔고 다른 동네에 집을 사서 건설사 일을 마치는 즉시 이사 갔다. 지금, 재개발도 흐지부지되고 집값도 곤두박질치고 있다. 이웃들은 부녀회장의 사냥법에 거듭 무릎을 친다.
13.물비늘이 반짝이는 봄날의 습지. 오리, 물닭, 물까마귀는 자맥질하느라 바쁘고 왜가리는 긴 다리로 주변을 여유롭게 관망하며 서 있다. 새들은 여전히 자신의 방식대로 먹이를 잡느라 첨벙거리고 물방울을 튕긴다.
유영 (游泳)하다 / 서소희
1, 나는 수영을 무척 좋아한다. 아주 좋아하는 것이지만 수영장에 갈 때마다 심적 부담 있다. 왜냐하면 물속에서 숨을 참으며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편하게 한다고 해도 수영을 하는 내내 심장은 답답하다.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보고는 한다. 숨조차 마음껏 쉬지 못하는 것을 왜 좋아하는 것일까.
2, 삶은 갈등의 연속선에 있다. 어쩌면 갈등 때문에 모든 상황이 더 힘들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수영도 마찬가지다. 첫 갈등은 집을 나서기까지다. 매번 오늘 강습은 쉴까 하고 항상 망설이게 된다. 오랜 시간 수영을 했지만 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일단 집을 나서면 입수까지는 무난하다. 천천히 헤엄치다 보면 이백미터는 수월하다. 그것을 넘어서면 심박이 쿵쾅쿵쾅 빨라지고 곧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3, 마음이 묻는다. 잠시 멈출까? 두 번째 갈등이 찾아온 것이다. 멈추지 말고 움직여야 한다. 하기 싫어도 하면 또 할 수 있다.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살다보면 살아지듯이 심장도 그 순간을 넘어서고 나면 또 견딜만해진다. 몸에 어느 정도 열이 나고 심장이 적응하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느낌은 사라진다.
4, 십분 쯤 몸을 덥히고 나면 본격적인 강습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강사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견딜만하면 운동이 되지 않는다며 평영을 해라, 배영을 해라, 영법을 바꾸어가며 몸을 혹사시킨다. 강습을 마칠 때는 근육에 적당한 아픔이 느껴지기고 심장은 큰 풍랑에 방황하는 돛단배처럼 미친 듯이 요동친다.
5, 분명 곧 죽을 듯 힘들었는데 신기하게 살아있다. 몸과 심장이 그렇게 혹사 당했는데도 피로가 싹 증발해버리고 입에서는 ‘아, 개운해’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이런 기분은 나를 강하게 밀어붙인 날은 더 크게 다가온다. 그 기분 때문에 수영에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6, 수영을 하면 할수록 욕심이 생겼다. 남들만큼 빠르게 멋있게, 오래 하고 싶어졌다. 세상사 모든 일에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어도 노력하며 살아가다 보면 원하는 데로는 아닐지라도 분명 더 나은 자리에 서 있기 마련이다.
7, 맘 먹고 수영전용 시계를 샀다. 시계는 그날의 운동 거리와 시간을 기록해 준다. 그때 알았다. 하루 운동량이 천미터를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남들보다 늦게 강습에 들어갔고 마치면 나오기 바빴다. 그러니 운동량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8, 시계를 사고부터 운동량이 바뀌었다. 일단 목표를 천이백미터으로 정했다. 강습을 끝내고도 운동량이 모자라면 남아서 목표를 채웠다. 폐활량이 늘어난 것일까. 아니면 발차기가 빨라진 것일까. 자연스레 목표량을 넘어서는 날이 흔해졌다. 그렇게 두서너 달이 흐르고 나니 강습이 덜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9, 어느 날, 이천미터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장거리로 그만큼 수영해 본 적이 없었다. 살아가면서 ‘한번 해보자’ 하고 마음먹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천에 옮기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시작하면,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끝을 봐야한다는 것이다. 만약 끝을 내지 못하면 다음은 더더욱 마음내기 어려운 법이다.
10, 장거리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첫 도전이라 입수를 했을 때 살짝 긴장도 되었다. 천이백미터는 쉬웠다. 생체시계가 천이백에 맞춰져 있는 것일까. 그것을을 넘어서며 팔다리가 무거웠다. 마치 물밑으로 누군가가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허기가 느껴졌다. 배가 고팠다.
11, 그만 멈추고 싶었다. 긴 질주에서 오는 육체의 고통, 지루함에서 오는 피로, 이 힘든 것을 왜 할까 하는 번뇌, 이만하면 되었다 속삭이는 또 다른 나······. 몸이 힘든 것도 문제였지만 포기하려는 나와 한발 더 나아가려는 나와의 싸움은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12, 사실 포기하는 순간 몸과 마음은 그지없이 편안하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아주 잠깐일 뿐이다. 이삼초가 지나면 바로 ‘끝까지 해 볼걸’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 마련이다. 후회의 감정은 하루를 점령해 버리고 미련으로 머리까지 지끈거리게 만든다. 그 상황을 잘 알기에 여기서 포기 할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끝까지 가 보자. 그렇게 천오백미터를 넘어섰다.
13, 어느 선을 넘어서면 고통도 익숙해지는 모양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와 또 다른 나의 싸움이 멈추어 있었다. 벌떼같이 윙윙거리던 생각이 멈추니 몸도 한결 편해졌다. 심장 또한 고요했다. 아가미라도 생긴 것일까. 물속에서 호흡하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14, 정수리를 통해 발끝으로 물이 흘렀다. 물속이 아늑했다. 나는 마치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아늑한 물속을 자유롭게 날아 다녔다. 갈등이 멈춘 머릿속에는 고요한 풍경들이 들락거렸다. 먼 기억과 가까운 기억이 두서없이 나타났고 풍경 또한 몇 초를 넘지 않았다. 비 오는 날 논도랑에서 미꾸라지를 잡던 유년의 내가 보였고, 햇볕이 쨍한 날 신작로를 걸어가며 함께 노래를 부르던 어린친구가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어제 먹었던 상추쌈이, 혹은 오래전에 먹었던 비빔국수가 떠올랐다. 풍경은 마치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15, 풍경과 풍경사이 심장이 따뜻해지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감 속에서 이천미터를 넘어섰다. 마침내 해냈다. 목표를 이룬 것이다. 그 순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것은 성취감에서 오는 희열이었다. 또한 다른 무엇도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다. 이제는 이천이 아니라 삼천, 사천미터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6, 뒤돌아보면 수영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체력이 약해서 일까. 강습은 항상 긴장되고 힘들었다. 또한 무리에 뒤처지지 않으려 애 쓰는 작은 물고기마냥 정신없이 남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것도 힘에 벅찼다. 장거리의 목표를 이루고 나는 변했다. 수영이 더 좋아져 버렸다.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목표를 이룬 자의 여유를 아는가.
17, 그때부터는 집착이 사라진다. 잘하고자 하는 생각도, 빠르게 하고자 하는 욕심도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자세나 속도도 이만하면 되었다 스스로 만족한다. 오로지 즐기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지 즐기다 보면 실력은 한걸음 나아가 있기 마련이다.
18, 아침밥을 먹듯 아침마다 수영을 한다. 손끝으로, 발끝으로 물을 거스르며 고요한 물속을 유영한다. 세상의 소음이 거세된 곳에서 나는 하나의 물입자일 뿐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는 법이다. 수영을 통해 나는 행복감과 자유로움을 느낀다.
19, 수영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할 때마다 힘이 든다.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은 운동은 없다. 운동을 하는 내내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린다. 매일, 매번, 멈추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좋아하는 수영이 이러한데 하물며 삶은 또 어떠하겠는가.
20, 운동처럼 힘들지 않은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일이 수영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고난과 고통은 누구나 겪기 싫은 것이다.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 고난과 고통이다. 하지만 그것을 스스로 극복했을 때 오히려 큰 자산이 되는 법이다. 당장은 힘들고 아파도 노력하며 살아가다 보면 이겨낼 수 있다. 힘든 과정은 반드시 지나간다. 그리고 어려움을 극복한 자리에는 그것보다 더 큰 행복과 생기와 자신감이 채워져 있을 것이다.
뻥 / 김영희
1 오래전, 마음이 답답하고 묵직해 남쪽으로 차를 몰아 평소 가보고 싶었던 사찰을 찾았다.
2 사찰은 비구니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도량은 정갈했으며 갖가지 관목과 꽃들은 봄의 정취를 한껏 드러냈다. 평일이라 주위는 고즈넉했다. 대웅전 앞 겹벚꽃이 피어 계절은 화사한 봄의 절정을 치닫고 있었다.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고 뒤의 전각으로 향했다. 전각과 전각 사이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장독대에는 행자가 단지를 닦으며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는 모습은 더없이 평화롭고 고즈넉해 보였다.
3 전각에 들어섰다. 주위는 고요해서 아물거리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의 속삭임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변성기를 지난 청년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졸음이 몰려올 정도의 나른함에서 한순간 깨어났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장독대에서 들려오는 소곤거림이 귀에 거슬려 경을 소리 내어 읽으며 기도에 집중했다.
4 기도가 끝나고 앉아있는데 여전히 자분자분 얘기 소리가 들렸다. 청년이 무슨 말을 하면 소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행자승의 해맑은 웃음은 그날의 날씨만큼이나 맑고 청량했다. 웃음소리가 그치는가 싶으면 청년은 또 무슨 말인가를 해 행자를 자지러질 듯 웃게 했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저렇게 웃는지 궁금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그들의 얘기를 엿듣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들릴 듯 말 듯 한 얘기였지만 웃음소리만큼은 선명했다.
5 기도를 마치고 전각을 나오니 청년은 큰 단지를 닦고 있는 행자승을 따라다니며 연신 얘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장독대 옆에는 핑크빛 겹 벚꽃이 팝콘처럼 툭 툭 터져 벙글어져 있었다. 바람에 날린 꽃잎은 행자승이 닦는 항아리 위에 떨어져 봄날의 운치를 한껏 더했다. 그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다가왔다. 두 사람은 내가 지나가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나는 장독대에 깔린 자갈에 발소리를 저벅이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닫았다.
6 봄날 겹벚꽃이 뻥 뻥 터지면 장독대 두 남녀의 모습이 어김없이 되뇌어진다. 스님이 되려고 수행 과정을 거치는 행자에게 청년은 어떤 뻥을 치며 환심을 사려고 하였을까?
7 올해 여인들은 쑥을 캐러 아지트로 향했다. 코로나가 풀렸으니 짬을 내어 밭으로 갔다. 얕은 야산 아래 비스듬한 밭은, 덤불이 웃자랐지만 쑥은 지천이었다.
8 밭 한쪽에 자리를 깔고 준비해 간 점심을 펼쳤다. 김밥, 물, 김치, 커피, 과일까지 그득한 한 상이 차려졌다. 우리가 앉아 있는데 낯선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왔다. 허리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우리는 동네 토박이분인가 여겨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근처 밭고랑을 일구고 있는 동생에게 간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9 과일과 커피를 드렸더니 맛있게 드셨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더니 느닷없이 “나물 좀 해 가소. 나물이 많니 더.”라고 했다. 순간 여인들은 할아버지 밭에 나물이 많아 주시려나보다 생각했다. 한 여인이 “할아버지 밭은 어디 있어요.” 했더니 할아버지는 우리가 앉아 있는 뒤편 야산을 가리키며 “저기 산에 각종 산나물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조심해야 해요. 산에서 잘못해 구르면 다치니까.” 여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10 할아버지는 또 여인들에게 인물이나 차림새가 A급이라고 추켜세웠다. 어딜 가든지 조심해야 한다며 동네 풍경이 좋고 이 마을은 괜찮으니 자주 오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묻지 않는 말을 계속했다. 시내에서 장사했는데 이제는 나이가 많아 집을 지어 이곳에 정착했다. 지금은 아픈 곳이 많아 일은 못 하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운동 삼아 산책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11 자주 오면 건넛집에 블루베리를 하는데 자신이 얘기하면 좀 줄 것이라고 했다. “그분을 잘 아세요.” 물으니 안 지 이틀 되었다는 말에 여인들은 또 한 번 자지러졌다. 땅은 오래전 사두었고 얼마 전 집을 지어 이 동네에 이사한 것이었다. 할아버지 얘기에 여인들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12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장사해서인지 입담이 좋아 주변을 즐겁게 했다. 말에는 뻥이 많았지만 여인들은 즐거워했다. 할아버지의 농담에 여인들은 한참을 웃었더니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이었다.
13 덤불 사이를 헤치니 연하고 보드라운 쑥이 그늘에서 자라고 있었다. 나물을 캐며 여인들은 할아버지 말을 복기하며 웃고 또 웃었다. 젊은 시절엔 누군가 시시껄렁한 말을 하면 못 들은 척 상대도 하지 않았다. 나이 탓인지 마음이 너그러워진 탓인지 이제는 뻥인 줄 알지만 웃음으로 동조하며 받아들인다.
14 비구니 사찰에서 젊은 총각은 순진한 행자승의 마음을 사기 위해 얼마나 뻥을 쳤을까. 알듯 말듯 모호한 감정에 빠진 사춘기 소녀의 웃음소리에 총각도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같이 즐거웠을 것이다.
15 주위를 둘러보니 건넛산은 연초록의 잎이 싱그럽게 올라오고 꽃들은 뻥뻥 터지며 만화방창이다. 우리의 마음도 신록처럼 유순해진다. 자연이 순하니 마음마저 닮아간다. 농담 속에 담긴 뻥은 순하게 물들어 가는 풍경만큼 우리를 즐겁게 했다. 여인들은 할아버지의 말 속에 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뻥뻥 웃어주었다. 사는 것이 때로는 한순간의 뻥처럼 여겨질 때도 있는 것처럼. 봄은 만물을 유순하게 하고 소생하게 하며 달뜨게 한다. 한순간의 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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