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클라이막스는
역시 골고다의 처형장이다.
거기엔 로마 군대로 상징되는 정치 권력이 있었고,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종교 세력이 입회했으며 ,
강도라는 이름으로 예수와 함께 처형된 독립 투사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의 고난을 구경하며 희롱하는 무지한 민중도 있었고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 묵묵히
그 현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지성인들.
그리고 이제는 오직 우는 일밖에는 할수 없는 무력한 여인들이 거기 있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던 인류사상최대
사건의 무대는 그토록 빈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계시던 6시간 동안 혹독한 고통 속에서
남겨놓은 소위 가상칠언 (架上七言은 그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자신을 처형한 자들을 위해 용서를 비는 사랑의 기도 (눅 23 : 34) ,
함께 매달린 강도를 위로하는 약속의 말씀 (눅 23; 43) ,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 (요 19 : 27) ,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는가 하고 울부짖는 비통한 절규 (막 15 : 34) ,
처절한 신음과 함께 새어나온 목마름의 호소 (요 19: 28) ,
끝까지 그 영혼을 아 버지께 부탁드린 순종과신뢰 (눅 23 : 46) ,
운명하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옴을 선언하신 그 완결성 (요 19: 30) …
그것은 참으로 인간의 모든 애환과 갈등을 농축해 놓은 최대의 드라마였고
인류의 간절한 꿈과 소망을 핏빛으로 아로새겨 놓은 영원한 금자탑이었다.
그러나 그 주옥같은 일곱 마디의 말씀중에서 나는 어째서 그가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 그 분은 자신을 못박은 자들의 용서에 대해서도 아버지께 부탁하셨고
자신의 영혼까지도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그런데 어째서 어머니에 대해서만은
아버지께 부탁하지 않고 요한에게 부탁했던 것일까
그러고 보면 장엄한 인류 최대의 드라마가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있는 대목에서
어머니에 관한 사사로운 부탁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도 드는 것이었다.
역사상 어느 위인이나 성자가 그 최후를 맞으면서 자기 어머니를누구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던가?
"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꺼l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 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l 하신데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 ; 25∼27) .
이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또 한가지의 의문에 부딪치게 되었다.
골고다의 무대에 대한 하나님의 시나리오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것이다.
그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체포되고 있을 때 모두 다 도망쳤고
베드로마저도 가야바의 집에서 예수틀 모른다고
세번씩이나 부인한후 울면서 그곳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골고다의 현장에 갑자기 요한이 나타났던 것일까?
다시 요한복음 19장을 곰곰히 들여보다가 또 하나의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끌고 가라고 내어주는 16절과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도착하는 17절 사이에 구레네 시몬 의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어째서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던
구레네 시몬의 이 야기를기록하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이미 예수와 베드로가 만났던 갈릴리 호숫가에서 요한의 태도가
수상했던 것을 간파하고그의 행적을조사한 바가 있었다
그 결과 나는 가장 나이가 어리고 온유한 성품의 사도인 줄 알았던 요한이
사실은 섬격이 격렬한 사람이었고 (막 3 : 17)
거칠고 시기심이 강했으며 (눅 9 : 24 ; 막9 ; 38)
출세욕이 강한 야심가요 (막 10 : 35)
현실주의자였다는 것 (요 1 : 37) 을 알게 되었다.
몹시도 현실적이며 기회주의적이었던 요한의 성격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그 밤의 행적에서 더욱 잘 나타나 있다.
그날 밤 요한은 베 드로와함께 사태의 진전을 탐색하려고 가야바의 집까지 따라갔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 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이 사람의 제자중하나가 아니냐”(요 18 : 15∼17) .
여기 나오는 ‘다른 제자’ 는 물론 요한복음에서 늘 익명으로 등장하 는 요한 자신이다.
그는 이미 가야바뿐만이 아니라 그집 여종들까지도 잘알고 있을정도로
가야바의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것이다,
요한은 무엇 때문에 가야바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것일까?
먼저도 밝혔듯이 요한은 현실주의자요, 출세지향적인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예수가 정치적인 집권을 하면 그의 내각에서
한 자리를 잡으려고 그을 따라다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한이 보기에 예수의 언행은 점접 정권과는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는 결국 예루살램 종교 지도자 쪽과
예수 쪽에 양다리를 걸치기로 했던 것이다
가야바의 집까지 예수를 따라갔던 요한은 그 후 어찌 되었을까?
이미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 부인하고 나서 울면서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요한은 끈질기게 현장을 지키면서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가 결정적인 순간에 메시야의 출현을선포하고새 정부의 수립을 발표하면
요한은 당연히 도망간 다른 제자들과 경쟁 하지 않고 요직에 발탁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요한복음을 보면 안나스 가야바에서부터 빌라도에 이르는예수의 심문과 재판광경이
다른 복음서들보다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요한이
그 모든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았기 때문인것으로 생각 된다.
그러면 도대체 요한은 언제까지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빌라도가 예수의 구명을 단념하고 민중의 요청 대로 바라바를
석방함과 동시에 예수의 처형을 선고할때까지였을것 이다.
왜냐하면 요한의 복음서에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올라가는
그 슬픔의 행진과 구레네 시몬의 이야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예수의 처형을 선고하자 군병들은 예수를 채찍질하였고
그에게 가시 면류관을씌운 다음 침을 뱉으며 조롱하기 시작했다.
요한이 보기에 예수는 더이상 메시야가 아니었다.
예수를 따라다녔던 요한의 야망도 이제는 끝장난 것이었다.
현실주의자인 요한은 미련 없이 그 자리틀 떠났다.
십자가를 지고가는 예수와는 반대 방향으로걸어가고 있던 요한의
영리한 머리 속에 갑자기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예수는골고다 언덕에서 마지막 순간에 메시야 강림을 선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내 모든 수고는 허사가 되지 않는가 ? '
요한은다시 발걸음을돌이켜서 골고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한이 헐떡거리며 골고다의 처형장에 도착했을때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 달려서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이미 십자가 위에서 요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요한이 예수를 이해하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 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본래 성격이 격렬해서 오래 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예수는 요한을 보호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한 가지 조치를 해 놓았다.
예수는 요한에게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 했던 것이다.
요한은 혹시나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새 정권의 수립을 선언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가 엉뚱하게
그의 모친 마리아만 떠맡게된 셈이었다.
아무리 약삭바른 요한이라도 그 선생의 마지막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여인들과 함께 예수의 시신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한후
마리아를모시고 예루살렘 성내로 돌아왔다.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추가 체포령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불안속에 보낸
안식일 다음날 새벽 ,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무덤에 다녀온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그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베드로와 요한은 용수철처럼 발떡 일어나서 뛰기 시작했다.
요한이 더 빨라서 앞서서 달렸다. 베드로보다 더 젊기 도 했지만 이미 골고다에 갔었던
그는 예수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보다 앞서서 무덤에 도착한 요한은 빈 무덤 앞에서 온 몸이 굳어져 버렸다.
그는 감히 무덤 안으로 뛰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요 20 ; 4,5) .
예수가 부활했다면 그는 이미 십자가에 달려서 신음하던 예수가 아니요,
전지 전능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났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지금까지
선생의 눈을 속여 가며 양다리 걸치기를 해온
요한의 비밀을 모조리 간파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활한 예수와 요한과의 관계는 지난날 ‘품에 의지하여 누웠던 ' (요 13 : 23)
다정한 관계에서 씁씁한 관계로 바뀌고 있다.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 다시 나타난
예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고 부탁하면서 그가 당할 수난을 예고해 준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므로 민망해진 베드로가 대신 묻는다.
“주여 이 사람은어찌 되겠삽나이까? "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극히 쌀쌀한 것이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 21 : 20, 22) .
이 때부터 요한의 죽을수도 없는 고독은 시작되었다.
그는 스데반의 순교때에도 마리아를 모시고 피신해야했고,
그의 형제 야고보마저 순교하고 베드로가 체포 당하는 난리통에도
마리아와 함께 숨어 다녀야했다. 요한은 다시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해서 마리아를
안디옥으로 모셨고 , 그 안디옥이 또 위험해 지자 이번에는 에베소로 옮겨 갔다.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당하고
다른 제자들도 하나 하나 순교의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결국은 예수의 직계 제자들이 모두 다 순교하고 요한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가 에베소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요한은 이미 중늙은이가 되어 있었던 것 이다.
마리아 때문에 순교도 못하고 결혼할 나이도 놓쳐 버린 요한은 비로소
자기의 야심만만했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예수란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던가를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아득한 젊은 시절에 만났던 예수의 추억을 되씹으면서
그는 비로소 예수의 사랑을 깨닫고 울기 시작한다.
예수가 만났던 간음한 여인 ,
간통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그 여인은 바로 요한 자신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고 있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 : 11) .
마침내 요한은 예수를 발견하였다.
그가 발견한 예수는 바로 ‘태초로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요 1 : 1) 이었고.
그는 마침내 백발의 성성한 노구로 예수의 추억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4복음서중 백미요 크라이막스인 요한복음은 바로 요한의 참회록인 것이다.
그는 이 불멸의 복음서에 자신을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썼다.
이렇게 요한 구원을 계획한 예수의 웅대한 구상은 마침내 완성되었다
출처 -김성일 -성경과의 만남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