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사랑한 시인” 백석의 ‘고독(孤獨)’과 연인 자야(子夜):
“나는 고독과 나라니 걸어간다.”
by 고독서원
2020. 7. 1.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백석
“그날 밤, 쭈글쭈글한 주름의 늙은 어머니가 아들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아들이 오마니한테 어찌 이케 늦게 완?”
손등 위로 어머니의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안도현 <백석평전>
I. 백석의 ‘고독(孤獨)’ 읽기
고독(孤獨) -백석-
나는 고독과 나라니 걸어간다.
희파람 호이 호이 불며
교외로 풀밧 길의 이슬을 찬다.
문득 옛일이 생각키움은
그 시절이 조앗젓슴이라
뒷산 솔밧 속에 늙은 무덤하나
밤마다 우리를 맛어 주엇지만 엇더냐!
그때 우리는 단 한번도
무덤 속에 무엇이 무첫는가를 알라고
해본 적도 늣겨 본적도 업섯다.
떡갈나무 숩에서 부헝이가 울어도
겁나지 안엇다.
그 무렵 나는 인생의 제 일과를
질겁고 행복한 것으로 배웠섯다.
나는 고독과 나라니 걸어간다.
하늘 놉히 단장 홰홰 내두르며
교외 풀밧 길의 이슬을 찬다
그날 밤
성좌도 곱거니와
개고리 소리 유난유난 하였다.
우리는 아모런 경계도 필요업시
금모래 구르는 청류수에 몸을 담것다.
별안간 뇌성벽력이 울부짓고
번개불이 어둠을 채질했다.
다음 순간 나는 내가 몸에 피를 흘리며
발악햇던 것을 깨달엇고
내 주위에서 모든 것이
떠나려 갓슴을 알앗다.
그때 나는 인생의 제 이과를
슬픔과 고적과 애수를 배웟나니
나는 고독과 나라니 걸어간다.
기폭인양 옷자락 펄펄 날리며
교외 풀밧 길의 이슬을 찬다.
낙사랑의 잣는 실 가늘게 가늘게 풀린다.
무엇이 나를 적막의 바다
한 가운데로 떠박지른다.
나는 속절업시 부서진 배 쪼각인가?
나는 대고 밀린다.
적막의 바다 그 끄트로
나는 바닷가 사장으로
밀려 밀려 나가는 조개 껍질인가?
오! 하늘가에 홀로 팔장 끼고
우-뚝 선 저-거무리는 그림자여......
(만선일보 1940.7.14)
*호이호이: 호기롭게 부는 휘파람
*단장: 짧은 지팡이
*낙사랑: 실을 두른 여인
*거무리는: 거물거리는
한 시대의 슬픔을 가난과 고독 속에서 발음하고 기록한(송준), 시인 백석의 시세계는
“상실되어가는 고향의식의 회복, 이를 통한 제국주의 문화의 극복, 그리고 전통 문화유산에 대한
따뜻한 긍정과 북방 방언주의의 고수” (백원기)로 설명할 수 있다.
한마디로 백석은 민족 주체의 정서를 견결하게 지켜낸 서정적 민족시인이다
. 백석의 시는 근대적 개념어에 저항하면서 토속적 자연어 그 자체에서 언어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백석은 위로는 동향 선배 김소월의 토속적 서정언어의 전통에 영향을 받아 그 맥을 잇고 있지만,
소월이 다소 자신의 슬픔의 감정에만 머무르려 했다면(김우창), 그는 자신의 슬픔을 넘어서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도 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한 독특한 관점이 있다(김영진)는 차이점은 주목할 만 하다.
그리고 백석은 아래로는 윤동주, 노천명, 신경림 등의 시적 상상력에 불을 짚혀
서정적 민족시사의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정지용과 함께
우리 문학에 별빛처럼 빛나는 모국어의 금자탑을 쌓았다.
우리 시대의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백석의 “방언이야말로 모어 중의 모어요
상투어가 아닌 시원의 언어이고 사회적 순응주의나 교육에 의해서 소독되지 않는 유년기의 언어이다.
출생지의 방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고향 사투리를 얼마쯤 멋쩍게 생각하는 주류 귀화 변방인과
사투리를 하대하는 주류인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소설가 김연수가 8년만에 펴낸 신작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
월북작가 시인 백석(백기행)의 북한에서 7년간의 불행하고 고독한 삶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가 김연수는 최근 백석의 삶을 다룬 그의 신작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백석을 “불행을 사랑한 시인”이라고 말했다. 불행을 사랑했기에 외로울 수 밖에 없었던 백석은
시가 그에게는 위안이 되었으리라.
그래서 시인 백석은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증명할 수 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김연수는 “백석의 후기 시를 보면 중간에 ‘그런데’ 하며 바뀌는. 부분이 있어요.
좁고 괴로운 불행에서 기적처럼 일어나는 그 구절에서 용기와 위로를 받아요.” 라고 말한다.
그것은 나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 백석이 북한에서 시적 언어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어두운 현실과 비통한 삶 속에서 고난을 뚫고 솟아오르는 그만의 “소독되지 않은”
모국어로 빚어낸 별빛같은 시로 인해서 그는 이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된 것이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그의 “소독되지 않은” 시는 ‘고독’이다.
이 시는 2007년 국내에 처음으로 공식 출판된 <정본 백석 시집>(문학동네, 고형준 편)에도 등재되지 않은
백석의 시 가운데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다.
이동순은 2004년 <실천문학>에서 일제 만주 관동군 기관지인 <만선일보>에
백석이 ‘한얼생’이라는 가명으로 발표된 이 시는 백석의 시가 아니라는 주장한 바 있다.
안도현도 최근 펴낸 <백석평전>(2014)에서 이동순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가 쓰여진 시기로 추정되는 1939-1940년은 백석이 친구들에게
만주벌판에서 시 100편을 써오겠다고 장담하면서 만주로 떠난 해였다.
신경에 살던 백석은 창시개명에 저항하며 북만주 산간오지를 방랑하던 시절이었기에
이 시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을뿐 아니라, 송준이 엮은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1997)에는
이 시가 게재되어 있고, 이미 백석을 좋아하는 일반인들은 이 시를 백석의 시로 애송하고 있어
그 진위는 후에 전문가에 맡기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백석을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의 입장에서 백석의 시로 간주함을 밝혀둔다.
앞서 읽은 시는 서북방언을 그대로 살린 원본 시이며, 아래에 현대 표준어로 다시 쓴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백석의 ‘고독’은 1994년 송준(문학사 연구가)에 의해 발굴된 시로서,
1940년 7월 만선일보에 발표된 그의 중기 작품 중 하나이다.
비록 29살 젊은 나이에 만주 신경에서 쓰여졌지만
이 시에는 그의 젊음이 믿겨지지 않을정도로 인생의 깊은 연륜이 베어 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이 시에는 시인으로서의 백석의 운명적 삶을 마치 예언적으로 암시라도 하고 있는 듯,
민족 시인 화자의 파란만장한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백석은 그 약관의 나이에 19세기 영국 비극문학의 정수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번역하였다는 것 만으로도 그가 나이보다 인생을 더 살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어쩌면 메이 사튼이 말했듯이 시인은 정녕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우리가 될 것을 향해서’ 시를 쓰고 있었단 말인가
이 시가 태어난 시점을 일단 유보한 채, 텍스트로서 이 시를 화자의 삶이 둘로 나뉘어 지는
해방후 분단까지를 기점으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엄혹한 일제하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시적 언어와 서정적 자유를 누리던
시인으로서 비교적 행복한 시기였다면, 후반부는 시적 화자가 해방을 맞이해
빼앗긴 조국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공산 이데올로기 체제하에서
서정적 언어와 정서를 빼앗긴 시인의 불행한 삶을 묘사하고 있다.
시 중반부 다섯째 연에서 시인은 “별안간 뇌성벽력 울부짖고, 번갯불이 어둠을 채질”하면서
“몸에 피를 흘리며 발악햇던” 자신의 모습을 매우 구체적인 비유를 통해 너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한 몸이었던 조국과 민족이 전쟁으로 피를 흘리며 두 동강나는
참혹한 민족상잔의 “어둠”의 역사를 예언적으로 말하는 것이리라.
시인은 이 지점을 기준으로 시 앞부분에서는 젊은 날 고향의 “풀밧 길” “이슬을” 차며 거닐다
밤이 오면 뒷산 무덤가에 앉아 아무 두려움없이 행복하게 지내던 시절을
시인의 자유로운 삶을 “인생의 제 일과”로 부르며, “고독과 나라니” 걸었던
“그 시절이 조아젓슴”을 특유의 서정적 토속어로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시 후반부의 분위기는 그가 살아온 과거와는 대조적으로 우울하고
사뭇 비장미까지 느껴지는 미래의 삶을 노래한다. 시인은 여전히 “고독과 나라니” 걷고는 있기는 하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행복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이제는 어느새 세월의 파도에 떠밀려
“적막의 바다 그 끄트로” 점점 내몰리고 있는 자신의 초라한 미래의 모습을
바닷가의 “속절업시 부서진 작은 배 쪼각”과 “조개 껍질,” 그리고 “그림자”에 비유하고 있다.
슬픔과 애수 속에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하늘가에 홀로 팔짱”낀
외로운 중년의 고적한 삶을 “인생 제 이과”라며 쓸쓸히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백석은 “나는 고독과 나라니 걸어간다”라고 반복해서 노래하고 있지만,
그는 사실 나란히 서로 다른 고독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고독과 외로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백석은 자신이 살아온 시인으로서는 삶의 역사를 소재로
일제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던 과거의 자발적 고독의 삶과
사회주의 북한체제하에서 창작의 자유가 억압된 미래의 강압적 외로움의 삶을
‘고독’이라는 하나의 압축적 시어로 회상하고 있다.
‘나이보다 인생을 더 살았다’는 말처럼 과연 서른즈음의 백석은
이 시에서 진정 나이보다 시인으로서 격동의 삶을 미리 살았던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시읽기는 백석의 시에 대한 해석의 폭력일 수 있다.
언제나 텍스트 해석이란 끝내 표적을 빗나간 화살에 불과하기 때문이리라.
시대적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나 백석의 고독을 들여다 보면 어쩌면 이 시가 노래하듯이
백석은 평생 고독과 나란히 걸어왔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의 삶에 자야(子夜)라는 한 여인이 곁에 있었을 때의 행복한 고독과
그녀가 없었을 때의 불행한 외로움의 차이가 있을 뿐일 지도 모른다.
앞에 소개한 이 시의 원본은 백석 특유의 평안 방언을 구어체로 그대로 옮긴 시인 반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같은 시 ‘고독’은 원작시에 웅숭깊게 베어있는
백석의 향토적 토속어의 맛과 멋이 사라진 현대 맞춤법에 맞게 다시 정리한 시이다.
비교해서 읽으며 두 시의 읽힘새와 들음새의 차이를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번 더 소개한다.
고독(孤獨) - 백석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휘파람 호이호이 불며
교외(郊外)로 풀밭길의
이슬을 찬다
문득 옛일이 생각키움은 ―
그 시절이 조아졌음이라
뒷산 솔밭 속의 늙은 무덤 하나
밤마다 우리를 맞아 주었지만
어떠냐!
그때 우리는 단 한 번도
무덤 속에 무엇이 묻혔는 가를
알려고 해 본 적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떡갈나무 숲에서 부엉이가
울어도 겁나지 않었다
그 무렵 나는 인생의 제1과(第一課)를
즐겁고 행복한 것으로 배웠다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하늘 높이 단장(短杖)
홰홰 내두르며
교외(郊外) 풀밭길의 이슬을 찬다
그 날 밤
성좌(星座)도 곱거니와
개고리 소리 유난유난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경계도 필요없이 금(金)모래 구르는
청류수(淸流水)에 몸을 담갔다
별안간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울부짖고
번개불이 어둠을 채질했다
다음 순간 나는 내가 몸에 피를 흘리며
발악했던 것을 깨달었도
내 주위에서 모든 것이 떠나 갔음을 알았다.
그때 나는 인생의 제2과(第二課)를
슬픔과 고적(孤寂)과 애수(哀愁)를 배웠나니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깃폭인양 옷자락 펄펄 날리며
교외 풀밭길의 이슬을 찬다
낙사랑(絡絲娘)의 잣는 실
가늘게 가늘게 풀린다
무엇이 나를 적막(寂寞)의 바다
한가운데로 떠박지른다
나는 속절없이 부서진 배(船) 쪼각인가?
나는 대고 밀린다
적막(寂寞)의 바다 그 끝으로
나는 바닷가 사장(沙場)으로
밀려 밀려 나가는 조개 껍질인가?
오! 하늘가에 홀로 팔장끼고
우―뚝 선 저―거무리는 그림자여......
“백석의 시 한 줄과 1000억과도 바꾸지 않겠다” 자야 김진향(김영한)
II. 백석의 삶과 문학과 사랑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주옥같은 시어를 토해낸 ‘모던 보이’이자, 영문학을 사랑했던
고독한 천재시인 백석은 1912년 김소월의 문학적 고향이자 그의 시심을 키운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백기행이다.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
일본 청산학원 사범대 영어과 유학시절 당대 일본의 요절한 문학평론가이자 서정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그의 이름 이시카와(石),
우리말로 ‘석’을 빼와서 썼다고 한다.
그가 흠모했다는 소월(素月)의 이름이 ‘흰 달’이란 의미이고,
백석(白石)은 하얀 돌이란 의미라는 점에서 백석이란 이름은
그가 시적 영향을 입은 소월과 이시카와 두 사람에게서 나왔음은 나름 의미가 있다.
결국 백석이라는 이름은 흰 옷을 입은 한민족이
돌과 같이 굳건한 반석 위에 서 있을 것이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고,
실제로 그는 한국문학의 굳건한 반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시카와 다쿠보쿠와 민음사에서 번역 출간된 그의 시집
이시카와는 당대 일본 지식인으로는 드물게 조선 합병을 비판하고
안중근 의사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 등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을 줄곧 비판해온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사후에 대박난 2권의 단카 시선집으로 오늘날까지 일본의 국민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 26세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그의 짧은 생애 동안에 이시카와는 고향을 향한 그리움,
근현대 도시인이 겪는 생활인으로서의 슬픔과 서정,
국가주의에 대한 저항과 민중적 자각,
삶의 회한과 냉소 등이 담긴 복잡다단하고 총체적인 성향의 문학 세계를 남겨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메이지의 대표적인 문학가로 평가받는다.
이시카와는 공교롭게 백석이 태어난 1912년에 죽어 그 영혼이 시로 이어지는 듯해서 흥미롭다.
백석에게 영향을 준 그의 단카 한 편을 소개한다.
지도 위 놓인 조선국 강토 위로
地図の上朝鮮国に
새카매지게 먹을 칠하며
黒々と墨を塗りつつ
갈바람 소리 듣네
秋風をきく
누군가 나를
誰そ我に
피스톨 가지고서 쏴 주지 않으려나
ピストルにても撃てよかし
얼마 전 이토처럼 죽어 보여주련다
伊藤のごとく死にて見せなむ[8]
-이시카와 다쿠보쿠
사실, 백석의 문학적 출발은 그가 일본 유학 시절 깊은 영향을 받은 이시카와 다쿠보쿠와 같이 소설가로서였다.
백석은 19세(1930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그 모(母)와 아들‘이란 소설 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러나 이시카와가 끝내 소설가로는 성공 못하고 죽고 난 뒤에 고향을 소재로한 그의 서정적 단카가
일본 국민의 사랑을 받은 것 처럼, 백석은 미르스키의 논문을 번역한 것을 계기로
소설가에서 시인으로 변신한 뒤, 민족 시인으로 길을 걸어갔다.
귀국 후 조선일보에 입사한 백석은 1936년 시집 《사슴》을 발표하고
단숨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혜성처럼 문단에 등장한다.
서북 지역 사투리에 담은 향토적 감수성과 정갈한 시어는 독자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사슴》은 발간되자마자 이내 동났다.
당시 학생이었던 윤동주는 《사슴》을 구할 수 없어 시집을 빌려다 손수 베껴 간직했다고 한다.
김기림은 《사슴》을 가리켜 “문단에 던진 폭탄”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이밖에 노천명, 신경림, 안도현 등이 백석의 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화가들도 그의 시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것을 화폭으로 옮겼다는 말이 전해진다.
심지어 이중섭은 백석의 시에 매료되어 시인이 되려했으며 실제로 시도 썼다.
대중문화로는 배호를 초기에 키우고 그가 부른 수많은 노래를 작사, 작곡한 김정대씨 역시
백석의 영향을 글을 쓸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안도현은 <백석평전>을 펴냈으며, 소설가 김연수는 <일곱 해의 마지막>이란 이름으로
백기행(백석의 본명)이란 시인의 불행한 삶을 소설로 빚어내고야 말았다.
백석의 유일한 시집인 ’사슴‘에는 33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이는 3.1 독립운동에 서명한 민족 대표의 수와 같다. 의도적으로 33편의 시를 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백석의 제자 강소천도 스승의 정신을 이어받아 ’호박꽃 초롱‘을 33편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백석은 세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아동문학가 강소천에게 그 나라 말을 오래 보존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그 나라 문학을 높은 수준에 올리는 것이고 우리나라의 말을 후세에 이어가게 하는 방법은
좋은 아동문학 작품을 남기는 길이라 말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로 시작되는 ’스승의 은혜’가 바로 강소천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의 젊은 스승 백석을 염두에 두고 지은 작품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시인 백석은 고독과 외로움, 슬픔과 서글픔을 겪었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푸른 갈매나무와 같이 굳고 정한정결하고 순결한 존재로
시적 언어룰 통해 자신과 민족의 미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집 <사슴>을 비롯해서 백석 시인이 주로 자신의 작품에서 완강하게 추구해간 방언효과는
평안북도 지역의 방언이다. 방언에는 그 민족 특유의 관습과 정서, 역사성, 기질 따위가 무르녹아 있는데,
이러한 특성들이 시작품 속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날 수 있었다.
백석은 평북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역 방언을 주로 작품 창작에서 활용하되,
나아가서는 자신이 한때 교사 생활을 하던 함흥을 비롯한 관북지역의 방언효과까지도
창작공간 속으로 수용함으로써 방언의 특수성이 지나치게 한 쪽 지역으로만 편중되는 것을 차단하였다.
이런 사실은 통영, 고성 등의 영남 남부지역 방언, 나아가서는 만주지역의 풍물까지 수렴하였다.
시 창작에서의 방언효과가 폐쇄성으로 차단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어디에서 살아도
언어가 살아있는한 조선인들은 한겨레임을 보여주려는 그의 민족문학성을 엿볼 수 있다(이동순).
백석이 당대의 모던 보이로 헤어스타일을 날리며 광화문에 나타나면 광화문 거리가 환해졌다고 한다.
그때 그가 한눈에 반한 통영 출신의 이화여고 학생 ‘란’(박경련)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백석은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하고 심히 좌절한다.
백석은 그녀가 동료기자이자 절친 신현중과 결혼하기로 하자 상심하여
조선일보를 그만 두고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그는 함흥에서 눈내리는 어느 저녁 회식자리에서 만난
그의 제자(김진세)의 누이인 김진향(김영한)과 사랑에 빠진다.
가난 때문에 첫사랑과 헤어진 백석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야,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는 그 빛나는 서정언어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를 진향에게 헌사한다.
그리고 그날 밤 백석은 그녀에게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呉歌)’에서 따온 '자야' 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 이름이 뜻하듯이 평생 홀로 기다려온 ‘자야’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하였던 유일한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그에 대한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하였다.
그들의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하는 시가 앞서 인용한 국민 애송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나타샤’는 백석이 미르스키의 《죠이스와 애란문학》을 번역하면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여주인공이자 러시아 문호 푸시킨의 아름다운 아내의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그의 내면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상의 여인상을 표현한 것이다.
어쩌면 백석이 사랑한 그의 첫사랑 란과 자야의 합성체일 지도 모른다.
백석은 8.15 광복 후 고향 정주 오산학교 스승 조만식의 부름을 받고,
평양에 머무르면서 비서 겸 러시아어 통역으로 조만식을 도왔다.
한 때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영어, 러시아어, 그리고 국문학을 강의하기도 했으나 ,
조만식이 연금당한 이후로는 시를 쓰는 대신 정주에 머물며 아동문학을 연구하다가 6.25를 맞이한다.
국군이 평안도를 수복했을 때 주민들이 그를 정주 군수로 추대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후 1951년 중국 연변으로 잠시 피난간 뒤 전쟁이 끝나자 북한으로 돌아와 작가로 활동하다
1959년 6월 '부르주아적 잔재'로 비판받게 되고,
급기야 당성이 부족한 인민들에게 주어지는 ‘붉은 편지’를 받고 양강도 협동농장에서 삶을 이어나갔다.
1961년 12월까지 북한의 대표적인 문예지인 <조선문학>에 작품을 발표한 뒤 완전 절필로 접어들게 되고,
숙청 당한 후 남과 북의 문학사에서 아주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한 때1963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80년대 노년의 가족사진이 공개되면서 1996년까지 살다가 쓸쓸히 그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을 선택한 백석에 대해 유종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북에 간 백석의 시는 인민성과 당성의 고려 그리고 노출된 의도가 너무나 명백히 드러난
자기 검열의 소산이요 수줍음을 모르는 체제 충성가이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 시의 번역과 어린이 문학으로 자기 동일성을 지키려고 했다.”
백석의 영원한 연인으로, 백석 시혼의 원동력이 되었던 김자야 여사는 권번 출신의 기녀로 궁녀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발음오행, 수리오행에 능통했고 운명학과 한학 등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후에 ‘김숙’이라는 이름으로 1939년 《삼천리》에 수필 두 편을 발표한 당대 지적인 신여성이었음이
뒤늦게나마 밝혀졌다.
1988년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창작과비평>지에 발표하기도 한 그녀는
평소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은 인연으로 1995년 길상화 보살로 법명을 받고,
법정스님에게 시가 1,000억 원에 달하는 대원각을 무상보시한다.
또한 김자야 여사가 법정 스님을 존경해 길상사를 시주한 것은
백정의 ㅂ ㅈ과 법정의 ㅂ ㅈ의 일치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백석은 백석(白石), 백석(白奭), 백정(白汀) 등의 필명을 썼는데 여기서 정(汀)은 물가 ‘정’자이며,
‘백정’이란 하얀 달이 물가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백정(白汀)’을 흰 강물에 우뚝 쌓이는 모래로,
‘법정(法頂)’을 물을 건너는 것을 해태가 지키며 우뚝 서 있는 것으로 풀이한다.
백정과 법정의 공통 글자는 고무래 정(丁)이다.
이러저러한 불연으로 대원각은 맑고 향기로운 청청도량 길상사로 태어난 것이다.
길상사란 이름은 백석이 동경 유학시절 거주한 길상사란 곳과 동명이란 점은 흥미롭다.
당시 요정 자리에 부처님을 모신 것에 대해 말이 있자,
법정 스님은 “진흙 연못에서 연꽃이 피는 법”이라며 우려를 일축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백석의 시 한 줄과 1000억과도 바꾸지 않겠다”라고 말한 김자야 여사는 영원한 백석의 나타샤로,
길상사 한 켠의 기념비처럼 영원히 길(吉)하고 상서로운 빛으로 길상사를 찾는 우리들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시인 백석을 향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때늦은 나이에도
백석이 사랑한 영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을 다니며 문학공부를 하던중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어디 있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를 못내 그리워하며 1999년 눈을 감았다.
과연 이 시대에 한 시인을 사랑하여 천금을 주고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할 여인이 또 어디 있겠는가!
백석보다 자야가 그리운 시대이다.
(고독서원 글; 이 글의 후반부 백석에 대한 글은 유종호, 김연수, 이동순, 백원기, 송준, 고형준,
김영진, 안도현 등의 글을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첫댓글
시인의 내면의 글은
짐작과 상상으로
조금 느낄 수 있으나
고독과 외로움은
No! No!
며칠전 교보문고에
들렸더니 많은 분들이
책을 사고 앉아서
읽는 모습을 보고 참
보기 좋더군요.
저도 유명한 시인의
시를 잠시 읽어 보았지요.
한때는 마음의 시도
쓰곤 했지만
그것 또한 세월속에
시간 여행이였어요.
이제는 간단하고 간결한 것이
더 편안해 지네요.
현실과 현재를 설고
사랑하고픈 연꽃의 향기
잠시 머물다 갑니다.
댕큐^^
그러시군요
그래도 누구나 고독을 느낄 때가 있지요
우리집 바로 옆에 교보문고가 있습니다
거기 가지는 않습니다
예전엔 DVD를 사러 들었었지요
한동안 국립중앙도서관엘 다녔습니다
지천으로 깔린 책을 마음껏 읽었지요
5층에 있는 북한자료실, 지도자료실
거기엘 자주 갔었습니다
시도 쓰셨군요
저는 산문은 더러 쓰는 편인데
시는 써 본 일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솔.
청솔님^^
때론 고독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느낄 수 있답니다.
국립도서관에 다니면서 책을 찾아다녔던 경험이
생각나네요.
제 고향이 서울 신촌이거든요
이 또한 지나가더군요.
건강해야 뜻하는바를
할 수 있으니
즐겁게 살자구요 ^^
이제는 조용히
명상도 하고
마음의 여유로~
@연꽃의향기 아 신촌이 고향이시로군요
제가 어려서 굴레방다리에서 컸구요
대학시절엔 서강에서 살았습니다
창전동, 와우산아래...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