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암(급성 백혈병) 투병 구백열일곱(917) 번째 날 편지, 4(이슈-issue, 정치)-2023년 6월 20일 화요일
사랑하는 큰아들에게
2023년 6월 20일 화요일이란다.
깃털처럼 가볍고, 무책임한 '벌거숭이 대통령'
수학능력시험과 관련한 윤석열 대통령의 말이 일파만파를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 중에서 주택 문제와 교육 문제는 가장 다루기 어려운 양대 현안인데, 대통령 선거 때마다 "다른 건 몰라도 주택과 교육 문제만 잘 풀 수 있다면 그가 누구라도 대통령으로 뽑아주겠다."라는 말이 나오곤 하는 것도, 두 문제가 그만큼 풀기 어렵다는 방증일 것이라네.
작년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집값 폭등을 잡지 못한 주택 정책의 실패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로, 주택과 교육 문제가 풀기 어려운 이유는, 두 문제 모두 인간의 욕망과 직결해 있기 때문이라네.
주택이 현재의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라면, 교육은 미래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데 비해 이를 채워줄 수단은 유한하다는 점이고, 여기에 우리나라 특유의 물욕과 학벌주의가 더해지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주택과 교육 난제가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네.
교육 문제 중에서도 핵심은 대학 입시로, 어디에 있는 어느 대학을 나오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이 달라지는 현실에서, 대학 입시는 사회의 가장 뜨겁고 예민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데, 서열주의와 학벌주의를 타파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겠지만, 그러하지 못한 현실에서는 예측 가능성으로 문제를 완화할 수밖에 없다네.
대학이 입시 정책을 바꿀 때는 고등교육법과 그 시행령에 따라 3년 전에 예고해야 한다는 '대입 3년 예고제'가 실시되고 있는 이유인데, 윤 대통령이 이런 걸 싹 무시하고, 수능의 큰 변화를 초래할 말을 쏟아냈고, 그것도 수능을 불과 150일 남긴 시점이라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들 더 나아가 사회 전체가 폭탄을 맞은 것처럼, 일대 혼란에 빠졌다네.
대통령이 한 말은 '학교 교육'이 아니라 '공교육'을 말한 것이라거나 '물 수능, 불 수능'을 말한 것이 아니라 '공정 수능'을 말한 것이라고, 대통령실이 해명하고 나섰으나, 이미 대통령이 쏟아낸 말 폭탄은 교육 현장을 초토화하고 있다네.
'남아일언 중천금(重千金)'이라는 말이 있는데, 직역하면, 남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이 중하다는 뜻인데, 양성평등을 강조하는 요즘에 이런 말을 그대로 옮기면 시대착오라는 비난을 듣기 십상이지만, 의역하면, 말 한마디가 매우 중요하므로 함부로 말을 하지 말라는 얘기라네.
일반 사람의 말조차 이렇듯 조심하고, 조심해서 해야 마땅한데, 하물며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말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너무도 자명하고, 일반 회사에서도 사장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듯 흘린 말도 부하 직원들이 지시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말을 신중하게 하는 게 보통이라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나라의 주요 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 회사 사장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닌데, 대통령의 수능 발언 이후 여권이 당정 협의를 열어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없애겠다거나 수능 출제를 담당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전격 사임하는 등 난리를 피우는 것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초래한 비극이라네..
반면, 한 여당 의원이 윤 대통령을 '입시 비리 수사를 많이 한 입시 전문가'라고 변호한 것은 웃지 못할 희극인데, 그 의원이 정말 윤 대통령이 입시 전문가라고 생각해서 그럴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곤경에 처한 대통령의 권위도 지켜주면서 아부로 점수도 따겠다는 계산된 발언이라고 본다네.
나라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수능 발언의 파장에서 볼 수 있듯이, 대통령의 발언은 극도의 절제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는데, 문제는 대통령의 신중하지 못한 발언이 수능 발언 한 번뿐이 아니라 습관성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네.
윤 대통령은 작년 7월 말에도, 이와 관련된 교육부의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초중고 12학년제를 유지하되 취학 연령을 1년 앞당기는 방향을 신속히 강구하라."라고 지시해 학부모와 교육계의 맹반발을 산 바 있는데, 중고등학교와 대학의 교육까지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정책을 아무런 대안도 없이 내놓은 것은, 이번 수능 발언의 예고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네.
지난 3월엔 노동자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주 69시간 노동제'를 추진한다고 하다가 20·30세대가 반발하자 슬그머니 거둬들였고, 작년 9월의 '바이든-날리면' 사태는 습관성 실언의 절정이었구나..
대통령이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실수도 할 수 있고, 실언도 할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실수와 실언 뒤 대응으로, 소통과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정보통신 시대에는 실언과 실수 뒤 그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이, 오히려 미덕이 될 수 있다네.
하지만, 윤 대통령은 마치 자신이 무오류의 신인 것처럼 실수를 절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데, 5살 입학 파동 때는 애먼 교육부 장관이 사퇴했고, 이번에는 담당 국장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제물이 됐다네.
대통령 주변에 직언하는 충신들은 찾아볼 수 없고, 아부하고, 변명하는 간신들만 수두룩한데, 깃털처럼 가벼운 말과 행동은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돌보지 않는 뻐꾸기처럼 무책임한 자세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가장 피해야 할 행동 원칙인데, 윤 대통령은 아주 태연하게 그런 일을 되풀이하고 있어 마치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을 실화로 보는 느낌이라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아무튼, 오늘 오후 편지 여기서 마치니, 오늘 하루도 안전하고, 건강하고, 늘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며, 주님 안에서 안녕히…….
2023년 6월 20일 화요일 오후에 혈액암 투병 중인 아빠가
핸드폰에서 들리는 배경음악-[외국곡] I`ll Feel a Whole Lot Better-The By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