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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신앙의 여정 스크랩 성주간 묵상 2011.04.17~24
이안희.세실리아 추천 0 조회 6 11.04.20 15: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주간 묵상
  

     

    성주간 월요일 / 향 싼 종이에서 향기나고...(요한 12,1-11) 당신은 봄의 향기를 느낍니까? “향 싼 종이에서는 향기 나고, 생선 묶은 지푸라기에서는 비린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가슴에 무엇이 들어있나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당신에게서 사랑의 향기가 풍겨 나옵니다. 만일 당신의 가슴 속에 탐욕(貪慾)이 가득하고 미움과 증오, 시기 질투와 원망으로 부글거린다면 당신에게서는 죽음의 악취가 풍겨 나옵니다. 겉모습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에게서 탐욕과 질투의 악취가 나고 대사제(大司祭)에게서 예수와 라자로를 죽이려는 살기(殺氣)가 풍겨 나옵니다. 그러나 값진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리는 마리아에게서 사랑의 향기가 납니다. 온 집안을 가득 채운 향기는 나르드 향유 냄새가 아니라 사랑의 향기입니다. 당신이 사랑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라면 당신을 만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당신에게서 시기질투와 미움과 증오, 탐욕의 악취가 난다면 당신을 만나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매향(梅香) 풍기는 이른 봄입니다. 당신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성주간(聖週間)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미사 "위장병을 앓고 있나요?" "예" "여기 위장약입니다" 그때 느겼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거행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제대였고 주교좌 성당이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만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손을 펼치고 십자가에 저를 못 박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분과 함께 가장 쓴 잔을 마셨습니다. 날마다 축성 말씀을 암송하며, 제 피에 섞인 그분의 피를 통해 온 마음과 영혼으로 예수님과 저 사이에 새롭게 맺어진 영원한 계약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 반투안「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성주간 화요일 / 주님, 그게 누굽니까? (요한 13,21ㄴ- 33. 36-38) 부활(復活) 대축일을 파스카(Pascha 過越) 축제일이라고 합니다. 파스카(過越.Pascha)란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어둠에서 광명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감을 말합니다. 건너가는 길목에는 고통과 시련, 유혹의 골짜기가 가로놓여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건너는 사람만 파스카(過越.復活)의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누군가로부터 배반이나 배신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멀리 있는 도끼가 발등을 찍을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손에 든 도끼가 발등을 찍습니다. 배신과 배반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당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자식이 부모를, 제자가 스승을, 형제가 형제를, 친구가 친구를 배반하고 배신합니다. 평소에 믿고 사랑하던 사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주는 상처가 더 아프고 치명적입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유다는 스승 예수를 유대 지도자들에게 팔아넘깁니다. 제자의 배반은 한없이 아프지만, 예수께서는 그것마저도 파스카(Pascha 過越)를 향한 고통이며 시련으로 받아들입니다. 당신이 가는 길에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치더라도 걸려 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하늘의 뜻(天命)을 헤아리며 그것을 넘어서는 지혜를 발휘하십시오. 부활(過越 Pascha)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눈길 신앙인의 잣대는 자신의 판단력이나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눈이 되어드리고, 내가 하느님의 귀가 되어드리고, 내가 하느님의 손발이 되어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안에도 있을 그 옛날 유대인들의 간사하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극복해야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온갖 상황에서 늘 이렇게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 송현「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성주간 수요일 / 이별 준비...(마태 26,14-25) +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습니다. 만난 사람은 헤어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이 보편적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는 모습이나 헤어지는 방법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탐욕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지만 필멸(必滅)하고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이별(永離別)의 길을 갑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면서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의 길을 가지만 죽음을 뛰어넘어 생명으로 부활하고 헤어지지만 다시 만납니다. 유다는 스승 예수를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길 계책(計策)을 꾸미면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탐욕과 어리석음이 그로 하여금 필멸(必滅)과 영이별(永離別)의 길로 내몹니다. 이런 유다를 향해 예수께서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마태26,24)고 한탄합니다. 예수님도 헤어짐과 죽음을 준비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나누는 마지막 만찬(晩餐)은 이별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의 시작입니다. 예수께서 준비하시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건너감(過越 Pascha)입니다. 유다와 달리 예수는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성주간聖週間이 건너감(過越)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포기와 희망 옛 소련 철도청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 직원이 화물을 옮기다 냉동 시설이 되어 있는 칸에 들어갔는데, 실수로 문이 밖에서 잠겨 버렸다.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누가 와서 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결코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직원은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온 몸을 덜덜떨며 쓰러지고 말았다. 시간이 흐른 뒤 다른 직원이 그 냉동칸을 열어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벽에는 '몸이 차가워지고 있다. 나의 몸이 얼어가고 있다. 나는 죽음에 임박해 있다.란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냉동칸은 오래 전부터 고장이 나 있었던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그 냉동고 안에는 숨 쉴 만한 충분한 공기도 있었고, 싸늘한 정도의 온도였을 뿐 결코 사람이 얼어 죽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씨앗을 파는 가게

     

    성 목요일 / 사랑하기 때문에(요한 13,1-15) 오늘부터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사랑의 날입니다. 사랑은 낮춤입니다. 낮추면 대지를 만날 수 있고, 대지에 뿌리 내릴 수 있습니다. 대지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가 하늘 향해 큰 나무가 되듯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늘 높은 곳으로 오르게 됩니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땅에서 하늘로, 이것이 건너감입니다. 사랑은 비움입니다. 이기와 오만으로 꽉 찬 사랑은 없습니다. 자신을 비우면 상대방으로 차게 되고, 빈자리가 사랑의 나무로 자라고 꽃이 피는 땅이 됩니다. 비움을 통해서 사랑의 충만으로, 이것이 건너감입니다. 사랑은 내어줌입니다. 내어주는 받는 사람은 새 생명으로 거듭니다. 내어줌은 상실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어주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입니다. 꼿꼿하게 살아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죽는 사람은 죽음을 뛰어넘어 새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힙입니다. 사랑하는 스승은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예처럼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빵조각이 성체가 되고 한 잔의 포도주가 성혈이 되는 것은 신비가 아니라, 사랑의 힘입니다. 당신의 성주간이 사랑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당근, 계란, 커피 이 당근과 계란, 커피는 모두 똑같이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 역경을 겪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 다르게 나타났지. 넌 어느 쪽인지 생각해 봐라." 아버지는 묵묵히 생각에 잠긴 딸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본래 강했지만 고통이 닥치자 스스로 몸을 움츠리고 아주 약해져 버리는 당근이냐? 아니면 본래는 연약하고 불안했지만 시련을 겪고 난 뒤 더욱 강인해지는 계란이냐? 그도 아니면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뜨거운 물을 변화시키고 좋은 향기를 내는 커피냐? 네가 커피가 될 수 있다면 힘든 상황에서도 현명해지고 희망을 가지게 될 것이며, 주변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루화난「인생의 레몬차」

     



    성 금요일 / 십자가, 하늘을 만나고 형제를 만나는 길...(요한 18,1-19,42) + “이제 다 이루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 오늘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신 날입니다. 똑바로 십자가를 바라보시겠습니까? 거기, 처참한 모습으로 매달린 한 사나이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뻗는 십자가의 종선(縱線)을 통해서 하늘과 땅이 만납니다. 인류는 그 종선(縱線)을 타고 하늘로 오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기 이전에 인류는 오를 수 없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절망을 세월을 보냈습니다. 좌(左)에서 우(右)로 가로지르는 십자가의 횡선(橫線)은 너와 내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너와 내가 만나서 사랑하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 치유합니다. 그리고 한 형제가 됩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인류는 미움과 증오, 원망과 원한의 골짜기, 단절의 장벽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하고 고통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의 종선(縱線)으로 하늘을 만나게 해주는 예수,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십자가의 횡선(橫線)으로 너와 나를 만나게 해주는 예수,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그분에게 십자가는 고통이요 죽음이지만, 인류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새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당신도 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과 형제들을 만나시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텔런트 정애리. 그녀를 보면 봉사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 앞에 서면 그녀는 항상 그 사람들만큼 자신을 낮추는 것이었다. 그녀는 고물 수거하는 사람들, 노숙인, 쪽방 생활자, 알코올 중독자 등 대책 없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분들을 보게 되어서 영광"이라고 했다. 그녀의 모습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쌀을 담아서 나눠주는 행사에도 직접 나섰다. 1천 2백 명이 한 줄로 서면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절대 건성으로 하지 않았으며, 어떤 할아버지가 쑥스러워 하자 정다운 표정으로 "어때서요? 저도 이담에 할아버지처럼 쌀 받으러 나올 건데요."하는 것이었다. 술에 취해 하소연을 늘어놓는 사람을 위로하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의 손을 잡아주기도 하며, 허리가 아프다면서도 악수하자는 공세에 일일이 응했다. 허기북「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상」

     

    성 토요일 / 무덤과 부활... 루카 24,1-12 성주간 토요일은 침묵의 날입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묻혀계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날 해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 전례도 거행하지 않습니다. 침묵은 무덤입니다. 침묵은 모든 소리를 삼키는 무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삼키지는 못합니다. 침묵은 말씀이 더 큰 소리로 되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침묵이 없으면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가 말씀을 삼키고 말 것입니다. 침묵이 있기에 소리는 잦아들고 말씀이 의미로 되살아 납니다. 무덤은 부활의 자리이며 조건입니다. 죽어서 묻히지 않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무덤은 모든 것을 삼키는 블랙홀입니다. 무덤은 부와 권력, 지위와 명예, 젊음과 건강, 업적과 시간까지도 삼킵니다. 그러나 무덤이 삼키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와 생명을 삼키지 못합니다. 무덤은 사랑과 진리와 생명의 씨앗이 되살아나는 자리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모든 것을 삼키는 무덤도 사랑과 진리와 생명을 간직한 씨앗을 삼키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죽어서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침묵속에 잠긴 말씀처럼,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당신의 삶이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은 삶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신앙 없는 삶 신앙이 없는 자들은 보이는 세상이 전부이기 때문에 지금 모든 것을 결판내야 합니다. 여기서 쾌락을 누리지 못하면 불행한 삶이요 돈이 없으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경쟁에서 밀리면 패배한 것이고 먼저 용서를 청하면 남에게 굴종하는 것입니다. 희생과 봉사는 손해 보는 일이며 자선은 돈 낭비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죽음 뒤에 이어질 부활의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그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까? 천상의 것을 찾으면서 먼저 낮추고 먼저 용서합니까? 자비와 자선을 베풀고 희생과 봉사를 실천합니까? 아니면 내 것을 조금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둥바둥 노심초사합니까? 오로지 제 한 몸과 제 가족만 챙기며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송현「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 대축일 /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 새 천년의 문을 열어 놓고 이제 나는 주님께 나를 바칩니다. 이제 새 천년의 시작은 여러분들이 해야 합니다. 나는 너무 많은 일을 했습니다. 많은 고통도 겪었습니다. 쉴 시간이 없었습니다. 늘 기도했습니다. 손에서는 묵주를 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고독 속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묵묵히 실천하느라 고통스러웠습니다. 이제 그 십자가를 여러분들에게 넘기고 나는 쉬러 갑니다. 나는 이제 그대들 곁을 떠나지만 내가 하던 일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해 계속될 것입니다. 이제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편히 주님께 갈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마지막 말씀 중에서



 




♥해주었다」가 아닙니다
저 사람을 위하여 그 일을「해주었다」.
이렇게 「해주었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봅시다.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어 기뻤다」라고. ... ... ... ..
 

지학남 스테파노 북여주 도전3리 공소지기~~ 

V.A. -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중 '노예..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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