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4:8-17
기억상실을 깨우는 성령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매년 5월 셋째주일입니다. 그동안 성령강림절마다 성령에 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설교자들이 같은 절기가 돌아오면 새로운 설교를 준비하는 일로 매우 고민합니다. 사실 저도 그동안 성령강림절 설교를 통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성령강림과 또 저 나름대로 새롭게 해석한 성령강림의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평화목 다음(Daum) 카페 주일설교 항목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를 검색하시면, 모두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성령”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보다는 “성령이 임재하신 것처럼 보이는 어떤 현상”이 한국교회에게 익숙합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인터넷 영상에 보면 기괴한 몸짓을 하면서 그것이 “성령춤”이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성령강림절이 돌아오면, “성령”의 본질적인 의미와 근본적인 역할에 대한 성서 속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4장 내용은 예수의 제자인 도마와 빌립이 주님과 나눈 대화로 시작합니다. 대화가 시작된 이유는 예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간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14장 4절에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이 혼란스러워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가 “내가 어디로 가는지”라고 말씀하실 때 쓴 단어 “간다”는 말은 “그 자리를 떠난다.”거나 또는 “어디를 향해서 간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휘파고(ὑπάγω, hypago)라는 단어는 길게 설명하면 “어떤 권위에 복종하려고 끌고 간다.”(lead away under someone’s authority)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예수의 언어”입니다.
문제는 예수의 “제자들이” 이 말씀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가 묻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휘파고>라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길로 걸어간다는 것인데, 제자들은 그 동안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예수의 생각을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했고, 알아차리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빌립은 재차 요구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예수는 이미 말씀하시기를 “나를 알면 아버지도 알고 있고,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하셨는데도,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예수의 긴 말씀이 압권입니다. 요약하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희가 믿는다면, 너희들도 내가 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이것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14:10-12)
예수와 제자들이 대화하는 이 정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예수가 “떠나 버리면” 영영 제자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슨 일인지 깨닫지 못할 큰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가르치고 몸소 보여준 모든 일들이 무용지물이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약속을 남겼습니다. 당신이 떠나가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를 제자들에게 보내주실 것이고, 그 보혜사는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보혜사라는 말은 “변호자” 또는 “도와주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그 보혜사는 “진리의 영”입니다(14:17) 세상은 진리의 영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해서 그 영을 맞아들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진리의 영을 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진리의 영이 제자들과 “함께” 그리고 제자들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 제자들과 “함께” 거한다는 말은 제자들은 진리의 영에 감싸여 있다는 말이고, 제자들 “안에”있다는 말은 개인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제자들과 제자들 “사이에서” 진리의 영인 성령께서 활동을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보혜사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4:15)라는 말씀이 그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사랑이란 예수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즉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때에 필요한 보혜사를 보내주시도록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 앞에서도 예수를 잘 모르니, 보혜사가 없이는 예수가 남기고 간 가르침을 제대로 기억이나 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저는 제자들의 증상을 <기억상실증>이라고 감히 진단하고 싶습니다. 예수께서는 조만간 당신의 제자들이 이 질병, 기억상실증에 분명히 걸리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상황을 염려하여 “보혜사” 성령, 진리의 영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억상실증이라는 질병은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2000년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질병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의 눈에는 진리의 영이 보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서 진리의 영이 활동하고 있는지 반드시 보여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라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그 공동체의 이름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진리의 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진리의 영이 교회 안에서 하는 역할은 분명합니다. 교회에게 “지혜”를 주는 것입니다. 어떤 지혜를 주는가하면, “예수의 가르침의 참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따르는 삶이 정말로 복된 삶임을 깨닫게 하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이 분명한 가르침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고, 가르쳐 주려고 해도 거부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교회는 어떤 개인이나, 어떤 단체의 사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는 각각의 교회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공적인 유기체”(public and organic body)입니다. 유기체(有機體)라는 말은 서로 연결이 되어있다는 의미이고, “머리”되신 예수의 정신이라는 같은 목표의 지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연합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서로 이름이 다 다르고 지역이 다르다고 해도, 교파와 교단과 개개의 교회를 초월한 “일치” 아래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 머리이신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 “일치”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는 동안 당신의 “유기체”인 교회가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강도의 소굴도 아니고, 이윤을 추구하는 장사하는 곳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당신의 정신을 따라야하는 교회가 권력으로 서열을 정하고 세력다툼을 하거나, 재물의 위세를 내세우며 자랑을 일삼는 욕망의 집단이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고, 자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오늘날 교회는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정신은 사라지고, 자기 교회끼리만 뭉쳐서,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결국 신앙을 힘으로 지배하고 거기에 굴종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최면에 빠져 머리를 흔들며, 기괴한 춤을 추게 하는 영이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보호하고 도와주시기 위해 예수께서 약속하신 진리의 영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의 길을 벗어날 때마다,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입니다.
사람이 오래 살다보면, 나이가 들면 점점 기억이 희미해집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 깊이 심어주신 예수의 가르침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늘 깨어있도록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2000년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그리고 개신교 500년이 지난 오늘 주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리지 말고, 다시 기억해 내야합니다. 기억상실의 기간이 너무 오래되어서, 희미해진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린 교회가 되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의 영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경청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깨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그런 정신을 기억하여 따르는 작은 마음들이 모여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앞장서서 따라 걷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