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도 모르고 잤는데 방이 동쪽방이었던가 봐, 햇빛에 눈이 부신다.
피곤에 절어 겨우 눈비비고 일어나 뜨거운 물 한 바가지 퍼붓고 나왔다.
오늘도 장마통에 희뿌연 비안개는 스쳐가도 비는 내리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밥은 먹고 가자. 산을 타야 되니까" 하고 유진이 말했다.
이틀동안 갈비만 찾다가 번번이 실패하고 나더니 갈비 말은 쏙 들어갔다.
어젯밤 횡계 사정도 알았기에 아무 식당이나 눈에 뵈는 대로 들어왔다.
참내,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또 두부다. 이번에는 순두부찌개다.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어쩔거냐, 그래도 먹어야지, 말없이 그냥 삼켰다.
그러나 순두부를 좋아하는 나는 찌개가 뜨끈뜨끈해서 좋았다.
그러나 그 싫어하는 두부마저도 밥구경은 그날 아침이 마지막이었다.
그후 계속 시간이 없어서 편의점에서 빵 하나 사먹으면 잘먹는 것이었다.
내가 식복이 있어 항상 먹는 것은 풍성한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운이 없다.
착 가라진다. 기운 나라고 먹은 밥이 먹고 나니 기운이 더 없다.
이틀 연거푸 12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걸었던 것이 나에겐 큰 무리였다.
특히 갑작스런 어제의 두타산 산행이 나를 완전 지치게 만들었다.
원 계획은 양떼목장 갔다가 선자령을 넘어서 삼양목장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걸음이 뒤로 걸린다. 그냥 푹 쓰러져 잤으면 좋겠다.
안타깝지만 양떼목장 선자령 다 생략하고 삼양목장만 갔다가 가기로 했다.
(동해전망대 1,140m)
택시를 타고 삼양목장으로 왔다. (횡계 08:33-삼양목장 08:47. 13,000원)
횡계에서 삼양목장으로 가는 차가 없다. 택시 아니면 길이 없다.
택시쟁이 유진, 택시타기 연극은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겠구나 싶었다.
입장권(9,000원)을 끊어서 삼양목장으로 입장했다.
다문 1분이라도 아끼려고 바쁘게 서둘러 왔더니 우리가 첫손님 이다.
일단 목장내 셔틀버스를 타고 목장 제일 꼭대기 동해전망대로 올라왔다.
아 그런데, 실망감이 팍 몰려온다. 생각했던 것과 너무 많이 다르다.
그만 그대로 두고 보지, 전망대는 왜 만들고, 철조망은 왜 또 쳤을까?
돈이 얼마나 많았으면 맨땅에 데크를 깔아서 전망대를 만들고 그러냐?
(동해전망대에 있는 연애소설 대피소)
아아 어쩌나, 동해전망대 꼭대기에 있었던 카페도 고물로 변해버렸다.
전망대 카페에서 우아하게 커피 한잔 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물건너 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얄궂게 변해버린 동해전망대에 실망이 크다.
그런데, 갔다와서 알았는데, 저것이 카페가 아니고 연애소설 대피소란다.
그때 저기에 음료 메뉴도 있었고, 전화번호도 있었고, 누가 봐도 카페였다.
그때 저기서 차가 눈에 처뱍혀 길 묻는다고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도 했다.
아이구 세상에, 그런데 누가 또 저기를 카페로 만들어서 장사를 했을까?
영화도 안 보고 누구한테 알아보지도 않고 갔으니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겠는가?
그래서 공부도 그렇고 여행도 그렇고 예습을 하여 무엇을 좀 알고 가야 되는데...
그래도 푸른 초원위에 높이 솟은 하얀 풍력발전기는 멋있다.
바람이 적당한지 한대도 멈추지 않고 다 뱅뱅 잘 돌아가고 있다.
이국적인 풍경이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동해전망대에서 매봉방향)
뿌연 안개가 저 산너머에서 산봉우리를 타고 겁나게 훅훅 날아온다.
그래도 싱그런 녹음을 보니 눈이 조금씩 뜨지고 피로도 서서히 풀린다.
하늘이 침침하고 먼뎃것이 잘 안보여 어름어름 해도 나오니 좋다.
동해전망대는 2007년 1월 24일 겨울방학 때 처음 오고 오늘 두 번째다.
10년 6개월 만이다. 변했다고 섭섭해 했는데 세월을 보니 변할 만도 하다.
그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 하고도 6개월이나 더 흘러갔다.
(바람의 언덕 1,150m)
삼양목장 자체가 바람인데 그 중에서도 바람이 더 많은 곳인가 봐,
사람들은 얼른 동해전망대로 가서 사진만 찍고 다시 그차 타고 내려가는데,
나는 끝을 봐야 되는 사람이라 끝까지 걸어보려고 돌아서니 바람의 언덕이다.
야 참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넓은 초원이다.
그늘도 없는 광야에 해가 쨍쨍 났으면 머리 다 벗겨젔을 텐데 해도 없고,
부실한 내 몸이 문제지, 눈 안 찡그려도 되고, 걷기에는 괜찮은 날씨다.
그런데 한가지 섭섭한 것이 있는데, 초원의 풀을 다 베어버렸다.
팔길이 만한 풀이 바람에 나풀거리는 모습을 상상하고 왔는데 풀이 없다.
내 계획대로 6월 중순에 왔으면 됐을 것을, 이래저래 유진이 원망스럽다.
무엇이든 적기가 있는데 적기를 맞춰 와야지 적기 지나고 오면 뭐하나?
꽃을 보려면 꽃철에 와야 되고 눈을 보려면 한겨울에 와야 되는 것처럼,
풀을 보려면 풀 있을 때 와야지, 풀 다 베고 나서 와서 풀 찾으면 있던가?
울 밖에 있어 누구의 손에도 잘리지 않고 자라는 이름모를 잡초다.
꽃도 울 밖에 난 꽃은 활짝 피어서 바람따라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
초원에 소풀 한번 보려고 10년을 넘게 벼르서 왔는데 이모양 이꼴이다.
저 앞에 바람개비 선 자리는 오늘 풀을 베었는지 바닥이 다 보인다.
모르면 몰라도 알면서 그 때를 놓친다는 것은 바보 중에 바보다.
내가 오고 싶을 때 와야 되는데 남이 오고 싶을 때 오니 이런 일이 생겼다.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장소. 1,140m)
여기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촬영한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화를 보지 않아서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다.
그때 아마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했던 것 같은데 나는 뭐했을까?
코너마다 적절하게 길이름을 붙여 놓았다. 그저 가는 길이 없다.
그리고 여기는 또 소녀시대가 삼양라면 광고를 찍은 곳이라고 한다.
역시 소녀시대도 모르고 라면도 좋아하지 않아 별 감동이 없다.
'숲속의 여유'라는 길을 걸어간다.
내가 좋아하는 이름이라 숲속의 여유를 맛보려고 노력해 보았다.
드넓은 초원에 사방이 탁 트여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느꼈다.
유진은 어디든 목적없이 가지 않는다. "아무 목적도 없이 왜 가?" 이다.
좋아서, 그냥, TV에 나와서, 남들이 좋다 하니까 등으로 가는 일은 절대 없다.
두타산 간 죄로 아무 목적도 없이 나를 따라 다니는 것이 유진에겐 고통이다.
물도 한 잔 마실 겸 자리가 있어 앉아 보았다.
먼데 산이 아련아련 하다.
그래도 산이 제일 정이 많이 든다.
또 간다, 나는 가는 것이 좋다.
쉬지 않고 영원히 갔으면 좋겠다.
앞으로 갈 길이 훤히 보이면 기분이 좋다.
삼양목장 안에는 5구간의 길이 있다.
총 4,500m로 80분이 걸린다고 목장측에서 말해주었는데,
보통 걸음으로 사진 찍고 살랑살랑 걸었는데 2시간 걸렸다.
1구간-바람의 언덕 550m 7분
2구간-숲속의 여유 930m 18분
3구간-사랑의 기억 650m 10분
4구간-초원의 산책 1,470m 28분
5구간-마음의 휴식 900m 17분
아까 숲도 없는데 무슨 '숲속의 여유'라고 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길을 따라 계속 걸어오니 진짜 숲속이 있다.
저기 나무숲 사이로 난 숲속의 길에 숲속의 여유가 보인다,
산길에는 산수국이 만발했다.
진짜 숲속의 여유를 찾았다.
상큼한 숲속의 향이 확 날아온다.
(사랑의 기억 1,030m)
숲을 빠져나와 '사랑의 기억' 길이다.
사랑을 기억하면서 걷는 길에는 나무도 없고 숲도 없다.
해가 없어 눈은 안 찡그려도 되는데 습도가 높아 엄청 무덥다.
(멀리 보이는 선자령과 연애소설 나무)
삼양목장은 영화 '연애소설'이 뜰때 한번 오고 오늘이 두 번째다.
연애소설이 2002년에 제작되었으니까 한 2004년 정도쯤에 왔지 싶다.
그때도 역시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동생과 같이 왔는데 무척 좋았었다.
(연애소설 나무)
그때는 저런 벤치도 없었고, 그냥 언덕에 나무 한그루 덜렁 얹혀 있었다.
지나가면서 "저 나무다" 하면서 사람들이 사진 찍고 그랬는데 나는 안 찍었다.
내용을 모르니까 멋도 없이 "저게 뭐 대단하냐, 나무를 처음 봤나" 하면서.
(영화 '연애소설'촬영지)
(연애소설 나무)
13년이 지난 오늘 와서 보니 저 나무가 너무 멋있다.
나무가 굽지 않고 반반한 것이 참 시원하게 잘생겼다.
연애감정이 뿜어져 나올만도 하구나 싶다.
요 젖소모양 수도는 음용수가 아니고 손씻는 물이다.
서로의 위생을 위하여 양이나 소 접촉 전과 후 소독을 하라는 것이다.
물론 13년 전에는 없었던 것이라 나는 광고용 맛배기 우유인줄 알았다.
산꼭데기에서 바람개비(풍력발전기)가 윙윙 무섭게 울면서 돌아간다.
저 바람개비도 그때는 신기하더니 13년을 보고 나니 이젠 예사로워 졌다.
바람개비는 총 53기가 있고 강릉인구 60% 5만가구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바람개비를 바라보고 "저긴 매봉" "저긴 선자령" 하고 위치를 짚어보았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다. 옛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다음에는 꼭 풀 베기전에 선자령을 넘어서 삼양목장으로 다시 헌번 와보리라.
(초원의 산책)
노란 꽃이다.
노무현대통령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꽃도 노란색 꽃이 유행이다.
밝은 노랸색이 좋기는 한데 노무현대통령 생각나서 슬프다.
'초원의 산책' 길은 다른 길보다 두 배로 길다.
해를 바로 받으니 덥고, 목마르고, 걷기 좋아하는 나도 지친다.
목장측에서도 그것을 알았는지 길가에 나무도 심고 꽃밭도 만들었다.
그런데 우사가 몇 채 안된다. 동양최대의 목장이라고 자랑했는데.
겉으로 보기는 작아보여도 소가 많이 들어가는가? 안이 더 너른가?
몇 번 속고 나니 무엇이든 의심을 하게 되었다.
어쨌든 좋다.
시원하게 바람개비도 돌아가고, 사방이 탁 트여 속도 시원하다.
여름보다는 봄 가을에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걸었으면 더 좋겠다.
(마음의 휴식)
아 드디어 나타났다. 양떼!
이 넓은 초원에, 명색이 목장이라고 하면서, 양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양은 어디에 숨겨놓고 안 보여주나 했더니 이제 나타났다.
쌰락쌰락 쌰락쌰락, 양 풀 뜯는 소리가 엄청 크고 강하게 들린다.
부드러운 풀이 아니라 무슨 생고무 잡아 뜯는 것같은 소리가 난다.
양 풀뜯는 소리가 이렇게 크고 강하게 나는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다.
양은 많이 봤지만 겨울에 보거나 멀리서 보아 풀뜯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소 풀뜯는 소리는 많이 들어봤는데 양만큼 그렇게 크거나 강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집에 와서 알았는데 풀이 짧아서 뿌리까지 흔들렸던 것이었다.
정말 한가하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저런 평화로운 모습들만 보고 살아서 목동들이 다 그렇게 순한가?
'마음의 휴식'이라고 길이름을 붙였는데 진짜 마음에 휴식이 된다.
울타리에 팔 걸치고 기대서서 한참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눈앞에 먹을 것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사람이고 짐승이고 간에 먹는 것이 제일 즐거운 것 같다.
그런데 넓은 초원에 비하여 양의 수는 너무 적은 것 같다.
관심많은 이사람, 또 한 마리 두 마리 점을 찍어가면서 세어 보았다.
약 35 마리다. 35마리 가지고 먹고 살 수 있는가, 인건비가 나오는가?
13년 전 9월에 00양떼목장에 갔는데 초원에 양이 몇 마리 없었다.
양떼라고 해놓고 양이 왜 몇 마리 안 되냐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양 교미 시기라 교미 못하게 수컷은 우리에 가둬놨습니다"
아니, 양 목장에서는 양이 많아야 되는데 그것을 막아버리다니?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양이 아니고 입장료로 수입을 올리는구나!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때부터 의심을 하는 마음이 생겼다.
순한 양이라고 하더니 진짜, 발을 탁탁 굴려도 달려들지도 않고,
"양아" 야아 양아" 먹는데 잠차져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은 털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고, 그저 죽기 살기로 풀만 뜯는다.
삼양목장에서는 하루 3회(11시.13시, 15시) 양몰이 공연을 한다.
무척 보고 싶었는데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못 봤다.
사람들은 나처럼 목장을 다 걷지 않고 양몰이 공연 보고 사진만 찍고 가더라.
목장을 다 내려와서 마지막 타조 먹이주기 체험장이다.
손만 들면 먹이 주는 줄 알고 목을 빼고 성큼성큼 다가온다.
다리도 길고 목도 길고, 타조가 목을 빼고 주둥이를 갖다대면 무섭다.
13년 전에 타조 먹이를 손에 쥐고 있다가 타조가 달려들어 식겁했다.
다리가 얼마나 길던지 타조 걸음이 내가 달리는 것보다 더 빨랐다.
그때 놀란 기억이 있어서 타조는 구경만 할뿐 좋지도 신기하지도 않다.
(바람우체통)
삼양목장에도 우체통은 어김없이 챙겨 놓았다.
삼양목장에서 느낀 감동과 추억을 적어서 우체통에 넣어 놓으면 배달 된단다.
얼룩이 젖소가 빨간 배달가방을 메고 바람을 타고 다니면서 배달하는가 봐.
목장을 완전히 한 바퀴 다 돌았다. 그런데 젖소는 어디에 있는가?
길가 잘 보이는 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없다. 세상에, 젖소를 놓쳤다.
다시 젖소를 찾아서 셔틀버스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목장 입구에서 꼭대기까지는 4.5km, 도보 1시간 20분, 차로 20분 걸린다.
올라갈 때는 정차하지 않고, 내려올 때만 4군데 정류소에서 정차한다.
그렇게 번거롭게 다시 오르고 내려서 왔는데 젖소 달랑 5마리 있다.
섭섭하지만 어쩌겠는가, 할수없지 뭐, 보여 주는 대로 보고 가야지.
그 더운데 젖소를 보고 멍청하게 섰다가 왔다.
사람들이 왜 양떼몰이 공연만 보고 그냥 내려가는지 이해가 가더라.
그런데 또 한 가지 놓친 것이 있다. 드라마 '가을동화'의 은서와 준서의 집.
13년 그때 등생이 "집이 어쩌면 이렇게 예쁘냐"며 사진을 엄청 찍었던 곳이다.
젖소 때문에 시간을 다 써버려 다시 찾아 나설 시간도 없고, 끝내 그냥 왔다.
추억이 있는 은서와 준서의 집을 못 보고 와서 섭섭했지만 삼양목장은 좋았다.
두타산 탄다고 선자령을 타지 못한 것이 걸렸지만 걸으면서 많이 해소되었다.
그리고 그때 빨리 나오지 않고 은서집 찾는다고 나섰으면 막차 놓칠 뻔했다.
가는 길도 번거로웠지만 오는 길도 보통 번거로운 길이 아니다.
삼양목장에서 다시 택시 타고 횡계로 나와서, (삼양목장14:03-횡계14:17.13,000원)
횡계에서 다시 강릉(30분소요. 2,500원)으로 와가, 강릉에서 다시 부산(노포동)으로 왔다.
(강릉 15:20-부산 20:45. 5시간 25분 소요. 33,500원)
집에 와서 저녁부터 먹고, 빨래하고, 샤워하고, 잠자리에 드니 창문이 밝아온다.
걷기도 질리도록 걷고 차도 질리도록 탔다. 힘은 들었지만 가는 곳마다 감동이었다.
걷고 또 걸으면서 심신이 많이 단련되어 올 여름은 편하게 잘 지나가리라 믿는다. 끝.
2017. 6. 26-28. 흐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