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유월)에 관한 시모음 44)
유월 /이원문
반 년의 유월이라
추운 두 달 제하면
넉 달 밖에 더 남았나
그 넉 달도 이럭 저럭
바쁜 일에 놓칠 것이고
빠르고 빠른 시간
지는 꽃의 봄일까
가는 반 년 오는 유월
얻은 것이 무엇인가
오월의 끝 유월이 온다
6월 /정민기
그 여자는
입만 열면 새빨간 장미가 피어난다
계절은 어이없게도
호국보훈의 달, 노릇노릇
오늘 저녁은 잘 구워진 생선을 먹은 듯
들쑥날쑥 가시가 돋아나 있다
푸르게 펄럭거리는 녹음의 궁전에
해가 햇살을 빼놓는다
요가라도 하듯 나비가 반으로 접어진다
갈 길은 멀기만 한데
풀꽃이 들길에 주저앉아 쉬고 있다
굼벵이 같은 나무 그늘은
좀처럼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녹음의 소리를 지저귀는 작은 새 몇 마리
포르르 날아다니고 있다
먹구름 속에서 중심을 잃고 떨어지는
비의 잔소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걸어간다
기억할 역사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구름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기 싫어도
축소할 수 없는 인생의 규모
만사 제쳐두고 먼 산을 보고 있으려니까
저기, 6월이 나풀거린다
6월의 작은 기도 /정연복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또 조금은 더 짙어져 있는
저 초록의 끝은
어디쯤일까요.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
사랑에의 소망과 열정 또한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더
초록 이파리를 닮아가게 하소서.
유월 /허은실
포플러나무를 올려다보면
준,
하고 불러보고 싶다
키가 큰 그는
흰 이를 빛내며 싱긋 웃는다
오디가 익는다
내 열여섯의 젖망울처럼
유월 당신 /김수우
나의 제사는 태양을 향한 것도 영원을 향한 것도 아닙니다
어둠길 함부로 잊혀진 달개비를 찾아 구부린 꿈입니다
문득 깨어 물그릇처럼 앉아있는 밤
산그늘 닮은 당신, 검불 많은 당신의 제사를 봅니다
당신의 기적은 유월 낮달을 기르고 버려진 것들을 불러 앉힙니다
나의 기적은 모퉁이 창가에서 그런 당신과 마주 절하는 것
아프리카의 봄이 불현듯 툰드라에 흰 꽃 피우듯
나의 제사, 당신의 제사 마주 앉으면 지상 가득 개구리밥 피어납니다
푸른 제삿밥, 소붓합니다
유월 /고재종
집집마다 단내 훅 끼치는 마을의 밤
엉머구리떼는 또 그렇게 울어라
욱신욱신, 온몸의 타는 관절들을 쑤셔대며.
밤꽃 향기에조차 씻긴 하늘은
칠흑 속 가득 별밭을 일구는 것이다
서걱서걱, 지상의 땀방울들을 죄 거두어.
이런 날, 저 뒷산 밤밭에
벌러덩 누워버리던
그 가장 천연덕스런 여자의 발정이더라니.
아무렇게나 유월 /나태주
아파트 베란다 창문 열자
건너다 보이는 집
담장 위에 줄지어 피어있는
붉은 줄장미꽃
줄장미꽃 보고
울컥한다
벌써 이렇게 되었나!
줄장미꽃 담장 아래 흩어진
붉은 꽃잎들 보며
다시 울컥한다
아, 저 붉은 것들의 흐느낌
그 위로 이중으로 얹히는
꾀꼬리 뻐꾸기 울음
서늘한 그늘
아무렇게나 세상은 6월
깊어질 대로 깊어진 음영
사람들 일과는 무관하게
흐드러지게 아름답고
질펀하도록 눈부시구나.
고향의 유월 /돌샘 이길옥
고향의 유월은
은밀한 연애로 뭉개진
보리밭 한쪽 귀퉁이에다
까칠한 햇볕을 널면서 시작되었다.
싱싱하고 풋풋한 철부지들의
불장난으로 뭉개진 곳이든지
黑心에 중독된
외간 남녀의 뜨거운 불길에
수난을 당한 곳이든지
고향의 보리밭은
해마다 만신창이 되어
소문의 비밀을 감춘 채
파삭파삭 익어가고 있었다.
보따리를 싸거나
야반도주를 공모한
유월의 보리밭은
고향의 전설이다.
유월이 오면 /심호택
유월이 오면 당신은 먼저
장미꽃이 떠오를 지 모르지만
나의 유월은 반드시
보리 까끄라기 춤추며 흩날리는
옛집 타작마당을 거쳐서 오지
제비 만나기 전 흥부네같이
골고루 어려운 마을에
경유 내 알곡 내 흥건히 깔리고
보리농사도 없는 집 아이는
예쁜 여벌옷도 없는데
빛나는 일요일은 뭐하러 돌아오나
교복 차림으로 예배당 가는 소녀
옆집 타작마당 기웃거리며
땡볕 아래 일하는 소년
땀범벅 얼굴 더욱 달아오르고
그랬지 나의 유월은
발동기 숨넘어가게 자지러지는
옛집 사랑마당을 거쳐서 오지
와서는 목덜미를 찌르지
그곳, 궁금하지 않으냐고
유월 /정운희
당신을 설명하려고 수도 없이 담장을 기어올랐죠. 마른 몸에 이상한 기후가 찾아온 거죠 아버지 눈길조차 피하며 열지 않았던 봉오리, 아버지의 잠자리를 훔쳐본 건 우연이었어요 호흡을 내 뱉어야 했을까요 방전된 가랑이 사이로 번개는 내리치고 확장된 눈동자는 집요하게 행위 속으로 빠져들었죠 아버지의 여자로 담장가득 아이들을 쏟아내고 있어요 오늘도 바람은 나를 발가벗기고 구석구석 닦아주었어요 작고 여린 꽃잎의 속살까지도, 발칙한 꿈을 꾸는 날이면 침을 삼킬 여유조차 없는 불안을 끌어올리며 몸을 열곤 하죠 잎잎이 묻어있는 당신의 정액을 담벼락 가득 묻혀 놓고 날마다 거친 호흡을 토해내며 다산의 축복을 노래하죠 해마다 담장을 기어오르는 부활한 꽃송이들 아버지 오늘 밤에도 당신의 달뜬 번개를 맞을 수 있을까요 달빛을 쬐며 당신의 딸이 건너다보는 빈곳으로 짐승처럼 우직한 그림자가 다시 한 번 짓누를까요 하혈하는 나를 막을 수는 없을까요
유월 /변홍철
마침내 시청 앞 분수는 솟구친다
그림자 하나 없는 정오
은행 벽 담쟁이 잎이 물보라에 젖는다
건물 모퉁이로 급히 몸을 숨기던
그늘은 모두 발각되었고
텅 빈 노면전차가 지나가는 유월
신문을 팔던 새까만 목마름이
분수대에 급히 뛰어든다
“생각만 하다가는 아무것도 못해. 충동심 만세!” *
우체국 뒤에서 젊은 느티나무 몇
참을 수 없는 안전핀을 뽑고
잎사귀 반짝이며 광장으로 달려들 때
시청 앞 분수는 다시 솟구친다
초록의 폭발음이 출렁이는
* 미셸 라공 소설 <패배자의 회고록> 중에서
유월 /허형만
초록이 깊어가는 시간만큼
사람들은 그늘을 그리워한다
그늘과 서늘함이 만나는 자리
안식을 그리워한다
사랑하는 이여
초록이 깊어 가는 시간만큼
나는 당신의 그늘이 되고 싶다
한낮의 그늘과
한낮의 서늘함을 모신
당신의 넉넉한 안식이 되고 싶다
角北 /박기섭
-유월
매미 떼가 유월 한낮을 떠메고 다니다가
개울 바닥에다 메치고 멱 감기고
산발치 깨밭 콩밭에 물도 주고 그런다
물을 주다는 말고 윗뜸으로 올라가서
홀어밋집 마당 가에 물동이를 엎어 놓고
웃자란 호박넝쿨을 울 너머로 보낸다
6월 첫날의 시 /정연복
어제까지만 해도
봄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잠자리에서 눈 뜨니
느낌이 확 다르다.
베란다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
어제 보았던 모습
그대로인데도 그렇다.
단 하룻밤 새 계절이 바뀐 걸
나무들도 알고 있는지
어제는 즐거이 춤추더니
오늘 아침에는 가만히 있다.
꽃 피고 지며
꿈같이 봄이 가고
이제 시작되는 여름을
어찌 살아야 할지 궁리하는 듯.
유월 /이상국
내가 아는 유월은 오월과 칠월 사이에 숨어 지내는데 사람들은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유월에는 보라색 칡꽃이 손톱만 하게 피고 은어들도 강물에 집을 짓는다.
허공은 하늘로 가득해서 더 올라가 구름은 치자꽃보다 희다.
물소리가 종일 심심해서 제 이름을 부르며 산을 내려오고
세상이 새 둥지인 양 오목하고 조용하니까 나는 또 빈집처럼 살고 싶어서……
외로운 유월 /이원문
작년에 찾았던 그곳일까
들길 따라 산길 따라
무엇을 얻으려 어디로 가나
입 하나에 찾는 길 파란 하늘 더 높고
길고 짧은 뻑꾹새 울음 먼 산 멀리 멀어진다
뽕나무 찾아 산딸기 찾아
오늘은 어디에 가 무엇을 입에 넣고
내일은 어느 기슭에 가 무엇을 얻을까
고요히 뻑꾹새 울음 끊어지는 길
돌 뿌리에 차인 발 아프고 시리다
6월이 왔습니다. /장수남
바람아! 바람아!
강물 뜨겁게 적신 유월의 핏빛 바람아.
비극의 사 삼 세기. 시대는 어제를
얼마나 기억하는가.
유월이 오면
잠든 임 깨워 왈칵 끌어안고 난
오래도록 말하리라.
붉은 장밋빛 보다 뜨거웠던
유월의 깊은 가슴 당신은 들꽃 한 송이.
피바람 몰아치는 포화 속에 내 몸
내던져 조국을 지킨 호국 영령들이여!
난 꼭 기억하고 말하리라.
세월의 강둑 열 백번 걸어도
지치지 않는 유월의 당신
피우지 못한 꽃봉오리 백발이 되어
또 백발이 되어도 일편단심 애국의 혼
난 꼭 기억하고 사랑하리라.
유월 /김나영
아들 녀석의 방바닥
여기저기 박혀있는 얼룩들
닦아도 닦아도 잘 지워지질 않는다
몇 번 힘주어 닦아내자 그제서야
얼룩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비릿한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아차! 몇 달 사이 키가 부쩍 큰다 싶었더니
툭하면 문 걸어 잠근다 싶었더니
더러 수습하지 못한 밤꽃들
바닥에 자해공갈단처럼 납작 엎드리고 있다
계절은 이렇게 온다 재촉하지 않아도
내 눈에 아직 고사리순 같은 녀석이
몰래 숨어서 피워올리고 솎아낸
평생 생산해낼 저 밤꽃들,
불발이라고 좋다, 어디 한번 붙어보자고
뿌리부터 박고 보는
저 수컷의 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