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이런 이유에서 나는 그 테이프에 대해 몹시 은밀한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는 플라스틱 케이스를 열어야만 담배 피우는 주디의 사진이 보이게 커버를 안쪽으로 돌려
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게 그 테이프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은 담배 때문도, 주디 브리지워터가(그 무렵에 유행한 칵테일 바 스타일의 가수로 헤일에서 인기 있는 부류는 아니었다.) 노래를 잘 불러서도 아니었다.
내가 그 테이프를 그렇게 특별하게 여긴 것은 거기에 수록된 노래 때문이었다.
셋째 트랙에 담긴 그 노래의 제목은 「네버 렛 미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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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군가가 너희한테 얘기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말해 주마.
전에 말한 것처럼 문제는 너희가 들었으되 듣지 못했다는 거야.
너희는 사태가 어떻게 될 건지 듣긴 했지만, 아무도 진짜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감히 말하건대 사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데 무척 만족하는 이들도 있지.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너희가 앞으로 삶 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해.
너희 중 아무도 미국에 갈 수 없고, 너희 중 아무도 영화배우가 될 수 없다.
또 일전에 누군가가 슈퍼마켓에서 일하겠다고 얘기 하는 걸 들었는데, 너희 중 아무도 그럴 수 없어.
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 이유지.
너희는 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랑도 다른 존재들이다.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미래가 정해져 있지.
그러니까 더 이상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얼마 안 있어 헤일셤을 떠나야 하고, 머지않아 첫 기증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해.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각자 앞에 어떤 삶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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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시는 말을 이었다.
"헤일 출신자 중 그런 커플이 있다는 얘기를 웨일스의 화이트 맨션에 있는 학생들이 들었대.
남자 는 간병사 과정을 겨우 몇 주 남겨 두고 있었대.
그들은 누군가 를 찾아가서 필요한 모든 걸 보여 주고 3년의 유예 기간을 얻어 냈대.
그래서 훈련 같은 건 잊고 그곳 화이트 맨션에서 3년을 함 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거야.
진정으로 사랑에 빠졌다는 걸 증 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3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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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알고 있어요.
우리는 부랑자나 인간쓰레기, 창녀, 알코올 중독자, 매춘부, 정신병자나 죄수들로부터 복제된 거예요.
그게 우리 근원이에요.
우리 모두 그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 말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거죠?
아까 본 그런 여자요?
이런, 그래 맞아, 토미. 그저 재미 삼아 해본 것뿐이야. 소일 삼아 해 본 거라고.
거기에 있던 또 다른 여자, 그 여자의 친구인 화랑의 노부인은 우리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부인이 우리 정체를 알았다면 그런 얘기를 들려주었을 것 같아요?
우리가 그 부인에게 실례합니다.
‘혹시 당신 친구분이 클론의 근원자일 가능성이 있을까요?'라고 물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부인은 우리를 쫓아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누구든 자신의 근원자를 찾고 싶다면, 진짜 그 일을 해내고 싶다면 빈민가로, 쓰레기장으로, 화장실로 가야 한다고 말이에요.
그런 곳들이 우리가 시작된 곳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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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그때 로이에게 한 말, 그런 말을 할 생 각이 아니었겠지만, 그러니까 무심코 흘린 말이 무엇이었는지 혹시 기억나, 캐시?
선생님은 로이한테 ‘그림이나 시 같은 건 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라고 했어.
'영혼을 드러낸다.'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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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네 관점에서 보자면 말이다, 캐시, 네가 어리둥절해 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태를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해야 해.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 초에 접어들자 과학의 약진이 얼마나 빠르게 이루어졌던지, 합리적인 질문이 제기되거나 환기될 여유가 없었단다.
그러다 갑자기 온갖 새로운 가능성이 우리 앞에 펼쳐졌지.
전에는 불치병으로 간주되던 많은 병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 말이다.
온 세상이 주목하고 바라던 일이었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인간의 이식용 장기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생기는 거라고, 진공실 같은 곳에서 배양되는 거라고 믿고 싶어 했단다.
그래, 그 전에도 '논쟁'이 있었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그러니까….
‘학생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그즈음부터였어.
그 무렵이 되자 그들은 너희가 어떻게 사육되는지, 너희 같은 존재가 꼭 있었어야 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무렵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어.
그 과정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단다.
장기 교체로 암을 치유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 치료를 포기하고 희망 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니?
후퇴라는 건 있을 수 없었지.
사람들은 너희 존재를 거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더 큰 관심은 자기 자녀나 배우자, 부모 또는 친구를 암이나 심장병이나 운동 신경질환에서 구하는 거였단다.
그래서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
그것이 우리의 작은 운동이 시작되기 전의 실상이었단다.
우리가 무엇에 맞서야 했는지 알겠지?
실제로 우리가 시도한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어.
학생들을 장기 공급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이런 세상에서 말이야.
사태가 그런 만큼 너희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파악하지 않으려는 장벽이 늘 있어 왔단다.
그래, 우리는 오랫동안 거기에 맞서 싸웠고, 너희를 위해 적어도 많은 것들을 개선했단다.
물론 선택된 몇몇을 위한 거였지만 말이야.
하지만 모닝데일 사건에 이어 또 다른 일들이 일어나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대의 흐름이 크게 바뀌고 말았단다.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로 주목받기를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 헤일, 글렌모건, 손더스 트러스트 같은 작은 운동들이 모두 스러지고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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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고? 그녀의 의도가 좋았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
너희는 그녀를 좋아했나 보구나.
그녀에겐 훌륭한 선생님이 될 자질이 있었지.
하지만 그녀가 하려던 건 너무 '이론적'이었어.
여러 해에 걸쳐 헤일셤을 운영해 온 우리는 무엇이 효과적인지, 장기적 관점에서 헤일셤을 떠난 이후까지 학생들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있었단다.
루시 웨인라이트는 이상주의자였고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겐 실질적으로 일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단다.
현재의 너희에게서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어떤 걸 우리가 줄 수 있었던 건 원칙적으로 너희를
'보호'했기 때문이야.
우리가 그러지 않았다면 헤일셤은 존재 가치가 없었을 거다.
좋아, 그러기 위해서는 때때로 너희에게 사태를 숨기고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 여러가지 면에서 우린 너희를 '바보'로 만들었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구나.
하지만 우리는 그 세월 동안 너희를 보호했고 너희에게 유년을 주었어.
루시의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입장을 고수했다면 헤일에서 너희 행복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을 거야.
이제 너희를 좀 보렴!
나는 너희 둘이 무척 자랑스럽다.
너희는 우리가 준 것에 기초해서 스스로 삶을 세웠어.
우리가 너희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지 못했을 거다.
너희는 수업에 몰두하지 못했을 거고, 그림과 글쓰기에도 몰입할 수 없었겠지.
각자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니?
그랬다면 너희는 그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박했을 테고, 우리가 어떻게 너희를 설득할 수 있었겠니?
그래서 그녀는 떠나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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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당신은 상대의 생각을 읽지 못한다고 하시지만 그날 당신은 제 생각을 읽으셨어요.
저를 보고 눈물을 흘리신 건 아마 그래서였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노래의 가사가 실제로 어떻든 간에 춤을 추면서 저는 제 식대로 해석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그게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어떤 여자 이야기라고 상상했어요.
그런데 그 여자에게 아이가 생겼고 그래서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그 여자는 혹시 뭔가가 자신들을 떼어 놓을까 봐 두려워서 아기를 가슴에 꼭 껴안고는, ‘베이비, 베이비, 네버 렛 미 고’ 하고 노래했던 거예요.
진짜 가사의 내용과는 달랐지만 당시에 저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제 마음을 읽으셨기 때문에 그 장면이 그렇게 슬프게 여겨지셨을 거예요.
당시에는 그렇게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 돌이켜 보니 좀 슬프네요.”
마담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옆에서 토미가 몸을 움직이는 것, 그의 옷의 감촉, 그의 행동 같은 것들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윽고 마담이 말했다.
"정말 흥미로운 관찰이구나.
하지만 나는 지금만큼이나 그때도 남의 마음을 읽는 데는 소질이 없었어.
내가 흐느꼈던 건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어.
그날 춤을 추는 너에게서 내가 본 건 좀 다른 거였다.
나는 빠르게 다가오는 신세계를 보았지.
과거의 질병에 대한 더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그래, 더 많은 치료법을 말이야.
맞아. 거칠고 잔인한 세상이지.
나는 어린 소녀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과거의 세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자기도 잘 알고
있는 과거의 세계를 가슴에 안고 있는 걸 보았어.
그걸 가슴에 안고 그 애는 결코 자기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지.
나는 그 장면을 바로 그렇게 본 거란다.
그건 실제 네 생각이나 행동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그렇게 해석했고 그것에 감동했다.
그리고 그걸 결코 잊을 수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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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 속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서로 헤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안타까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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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토미와 나 사이에 대단한 작별 의식 같은 것은 없었다.
시간이 되자 그는 나와 함께 층계를 내려왔는데 그것은 평소에는 없던 일이었다.
우리는 함께 광장을 가로질러 차까지 걸었다.
겨울이었으므로 그즈음 해가 이미 건물 뒤로 지고 있었다.
앞으로 튀어나온 지붕 아래에 언제나처럼 모여 있는 이들의 윤곽이 어슴푸레 보였지만 광장은 비어 있었다.
차까지 걷는 동안 토미는 줄곧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는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캐시, 헤일에서 축구를 할 때 나는 남몰래 이런 걸 했었어.
골을 넣으면 이런 식으로 몸을 빙 돌리고……”
토미는 환호하듯 양팔을 들어 올렸다.
"친구들에게 달려가는 거야.
미친 듯이 흥분하는 일 없이 그저 이렇게 양팔을 들어 올리고 달려가는 거지."
그는 잠시 두 팔을 들고 있다가는 이윽고 팔을 내리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달려갈 때 말이야, 캐시.
나는 물속을 첨벙거리며 걷고 있다고 상상했어.
깊은 물이 아니라 발목 정도까지 오는 물 말이야.
매번 나는 그렇게 걷는다고 상상했어. 첨벙, 첨벙, 첨벙."
그는 다시 두 팔을 들 어 올렸다.
"정말이지 기분 좋은 일이었어. 골을 한 점 올리고 돌아서서 첨벙, 첨벙, 첨벙."
그는 나를 바라보며 또다시 조그맣게 웃었다.
"이 얘기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어."
나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넌 정말이지 못 말려, 토미.”
그런 다음 우리는 짧고 가벼운 입맞춤을 했고, 나는 차에 올랐다.
내가 시동을 거는 동안 토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후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뒷거울로 그런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한 손을 애매하게 들어 올리고 나서 돌출된 지붕 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의 뒷거울에서 광장의 모습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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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멋대로 규칙을 어긴 때가 있다면, 토미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지 두어 주 후 실제로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차를 몰고 노퍽에 갔을 때이다.
특별히 찾는 것도 없었고, 해안 끝까지 간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나는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들판과 거대한 잿빛 하늘을 바라보고 싶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나는 한 번도 간 적 없는 길을 달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30분 동안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따금 내 차의 엔진 소리에 놀란 새 떼가 밭고랑에서 날아오르는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평평하고 평범한 들판이 이어졌다.
이윽고 나는 도로에서 멀지 않은, 한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어떤 지점을 발견하고 그곳에 가서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 왔다.
방대한 경작지가 펼쳐진 곳이었다.
두 겹의 철망 울타리 때문에 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수킬로미터에 걸쳐 바람을 막아주는 것이라고는 그 울타리와 내 앞에 있는 서너 그루의 나무들 뿐이었다.
그 철망 울타리에, 특히 낮은 쪽 철망에 각종 쓰레기들이 걸려 있었다.
마치 해변에 잡동사니가 밀려와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바람에 실려 수십 미터를 날아와 그 나무들에, 두 겹의 철망에 이른 것이 분명했다.
나뭇가지에도 깨진 플라스틱 판과 낡은 가방 조각들이 걸려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거기에 서서 그 기묘한 잡동사니들을 바라보며, 텅 빈 들판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환상에 가까운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요컨대 그곳은 노퍽이었고 토미를 잃은 지 겨우 두어 주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서는 그 잡동사니들, 나뭇가지에 걸린 플라스틱 조각, 해안선 같은 철망을 따라 걸려 있는 기묘한 물건들이 떠돌고 있었다.
나는 반쯤 눈을 감고 상상했다.
어린 시절 이후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고, 이 앞에 이렇게 서서 가만히 기다리면 들판을 지나 저 멀리 지평선에서 하나의 얼굴이 조그맣게 떠올라 점점 커져서 이윽고 그것이 토미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리라고, 이윽고 토미가 손을 흔들고, 어쩌면 나를 소리쳐 부를지도 모른다고.
이 환상은 그 이상으로 진전되지는 않았다.
그 이상진전시킬 수가 없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나는 흐느끼지도, 자제력을 잃지도 않았다.
다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차로 돌아가 가야 할 곳을 향해 출발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