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상사화
김윤재
몇 해 전부터 선운사에 다녀오고 싶었다. 봄이면 동백꽃을 찾아 길 떠나는 이
들을 바라 볼 때마다 조바심이 일었지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계절이 몇 번 바뀌고 그것도 봄이 아닌 가을 길을 나섰다. 정주 나들목을 지나
고창으로 달리는 마음은 가을바람 만큼이나 설레인다. 오늘 선운사에 가는 것은
검붉은 동백꽃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가슴이 두근거린다.
가을은 산사에 더 호젓하게 내리는 걸까. 늘 푸르기만 한 것 같은 나뭇가지 위
에 가을의 우체부가 다녀간 흔적으로 오색이 선연하다. 경내에 나 뒹구는 낙엽이
오늘 따라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스님들 못지 않게 속진(俗塵)의 번뇌를 떨쳐
버리고자 무수히 많은 밤을 지새웠을 것 같아서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산방 앞에 이르니 어느 새 코스모스는 가을 것이를 마치려
한다. 하얗고 분홍색 꽃잎은 씨를 맺어 종족의 번식을 준비하였지만 아직 씨앗을
맺지 못한채 하늘거리는 꽃잎은 어느 선승의 그리움의 화신처럼 가녀려 보인다.
이 세상에 무엇하나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인생 또한 피었다 지는 꽃처
럼 모든 것이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꽃이 지고 가랑잎이 떨어진 경내는 잔치
끝난 마당처럼 허허롭기 그지없다. 코스모스마저 절을 떠나고 나면 봄이 올 때까
지 외로움에 젖어 있어야 할 선운사. 아무리 절에는 주인이 없다고 하지만 내마
음 마저 쓸쓸해 옴은 왜인가.
망연히 꽃을 바라보고 있는데 산방문이 열리며 몇 분의 스님이 길을 떠나기
위해 걸망을 메고 나온다 절에 머물면서도 늘 떠날 것을 염두에 둔다는 스님들
은 세상 무엇과도 깊은 인연을 맺지 않는다고 한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은 곳에서 살지만 이곳을 극락이라 여기면서 사는 사람들. 언제 또 다시 어디
로 가야 할 지도 모르는 바람과도 같은 인생. 가진 것도 머무르는 곳도 없어야
한다는 그들에게 세상의 욕심이란 바람에 날리는 한점 낙엽과 같은 것이리라.
삶의 무게를 떨구어 놓고 떠나시는 스님들의 뒷모습에서 진정한 나그네의 모습
을 본다.
그들의 삶을 본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경내를 돌아보는데 오늘 선운사 나
들이에 자청을 하고 나선 스님은 아직도 말문을 여시지 않는다. 두 손을 장삼 자
락에 낀 채 허공을 주시하며 깊은 회상에 젖어 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 온다.
벌써 몇 시간째다. 어떤 여인을 소개하기에 이리도 남의 애를 태우시는지 모르겠
다.
그저 스님의 눈치만 살피는데 대웅전 뒤란으로 나를 안내하신다. 그곳에는 춘
백이 피었다 진자리에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 고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
를 보는 순간 혹시나 동백꽃의 영혼이 나타난 것은 아닌가 의심을 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자태를 어찌 글로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글을 써야 한다는 일이 야
속하기만 하다. 쭉뻗은 키와 길고 하얀 목선, 짙은 눈썹과 오똑한 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동자. 살포시 미소지으며 고개숙인 모습은 어떤 애잔한
그리움까지 배어 난다.
스님은 그녀를 바라보시며 말문을 여신다.
오래 전 걸망 하나 메고 고행의 시주 길에 나섰다. 어느 날 평화로운 마을에
당도를 하였고 몸은 몹시 지쳐 있었다. 한끼의 식사를 공양 받기 위하여 초가집
사립문을 밀었다. 목탁소리를 듣고 쌀을 공양하러 나온 사람은 댕기 머리의 여인
이었다. 절망 속에 조심스레 공양하는 여인.
스님은 날이 갈수록 그녀의 환영에 사로 잡혔다. 불심을 키워야 한다는 일념으
로 구십일 간의 안거(선원에 모여 내면의 수행을 하는 것) 생활에 들어갔지만 솟
아나는 정을 누를 길이 없었다.
단 한번 스치고 지나간 스님을 그리워 하기는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외간 남자
를 흠모하는 자신을 자책하지만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 빙그레 웃음 짖는 스님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단 한번만 여인의 얼굴을 보겠노라 결심을 한 스님은 다시 걸망을 맨
다. 그녀의 대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사람은 꿈에도 그리던 사람. 여인은 두
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려 하지만 공양을 하는 손이 가늘게 떤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손을 잡고.
세상에 사랑의 여신을 보낸 이는 누구인가. 날이 갈수록 짙어만 가는 두 사람
의 정. 스님은 경전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참선(參禪)을 하여도 떠오르는 것은
여인의 얼굴뿐이다. 왜 아니 그럴까. 나도 사랑에 빠졌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았었다. 부모 형제와의 또 다른 정이 있음을 그 시절 느끼지 않았던가. 그러나
스님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처님의 가르침과 여인 사이에서 방황을 한다.
여기까지 말씀을 하시던 스님은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쉬신다. 그때의 절박하
던 마음이 되살아나시는지 눈을 감으신다.
얼마나 지났을까. 말씀을 이어 가시는 눈동자에 빛이 나고 말소리에도 이 베
어 난다. 번뇌하던 스님은 대웅전 뒤란 길게 늘어선 동백나무 숲에 움막을 지어
놓고 어두운 밤 그녀를 보쌈 하여 온다. 하지만 사랑의 여신을 보낼 땐 질투의
신도 보내는 법. 스님은 다른 곳으로 수행 길을 떠나게 된다. 누구의 눈에도 뜨
여서는 안되는 여인은 동백 숲에 숨어 그리운 님을 기다린다. 일년, 이년…. 날이
갈수록 여위어 가던 어느 날 깊은 늪 속으로 사위어 갔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수행으로 참회하고 돌아온 스님 앞에 그녀는 한 떨기 꽃
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상사화
꽃이 피었다 지고 난 후에야 잎을 피워 꽃과 잎이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고 하
여 이별초 라고도 부르는 꽃. 족두리 한번 써 보지 못한 한이 서린 까닭이던가.
새색시가 족두리를 쓴 것처럼 붉디붉은 꽃을 피운다. 아직도 님의 품이 그리운지
활엽수나 신갈나무 등과 같이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서 잘 자라는 꽃. 수십 갈
래의 꽃잎이 진홍색으로 피어나도 애잔한 그리움이 서려 있다.
말씀을 마치신 스님은 아름다운 여인을 감싸 안 듯 상사화 한 뿌리는 캐어 내
게 건네준다.
“이제는 속세에 내려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해주구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시며 시 한 소절을 뇌이신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도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속에 피어 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순간이면 좋겠
네”
시 속에 담긴 스님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지금까지 꽃의 전설을 통하여 자신
의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닐까. 멀리 시선을 두고 계신 스님의 뒷모습에 초로의 외
로움이 보인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열정을 가득 담은 상사화가 다음 세계에서 사람으로 환생
할 수는 없을까.
상사화를 끌어안고 돌아서는 등뒤로 막걸릿집 여인의 육자배기 소리라도 구성
지게 들려 왔으면 좋으련만 산사 처마 끝에 매달린 가을은 애잔함만 덧입혀 준
다.
1998
첫댓글 지금까지 꽃의 전설을 통하여 자신
의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닐까. 멀리 시선을 두고 계신 스님의 뒷모습에 초로의 외
로움이 보인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열정을 가득 담은 상사화가 다음 세계에서 사람으로 환생
할 수는 없을까.
상사화를 끌어안고 돌아서는 등뒤로 막걸릿집 여인의 육자배기 소리라도 구성
지게 들려 왔으면 좋으련만 산사 처마 끝에 매달린 가을은 애잔함만 덧입혀 준
다.
시 속에 담긴 스님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지금까지 꽃의 전설을 통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닐까. 멀리 시선을 두고 계신 스님의 뒷모습에 초로의 외로움이 보인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열정을 가득 담은 상사화가 다음 세계에서 사람으로 환생할 수는 없을까.
상사화를 끌어안고 돌아서는 등뒤로 막걸릿집 여인의 육자배기 소리라도 구성지게 들려 왔으면 좋으련만 산사 처마 끝에 매달린 가을은 애잔함만 덧입혀 준다.